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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숨 99개-140화 (140/203)

140화

“그럼 스벤 공께 맡기고 저희는 먼저 출발하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빅터 공. 일정에 맞춰 정확하게 진격하겠습니다.”

총사령관에 임명된 스벤은 황궁에 남아 세부 일정을 조율하기로 했다.

갑작스레 진행된 전쟁 준비에 일분일초가 아쉬운 상황.

“언제든 출정할 수 있게 준비해 두겠소. 그러니 최대한 시간을 앞당겨 주시길 바랍니다.”

굳은 표정을 한 빅터는 다시 한번 부탁하듯 당부의 말을 전했다.

시간이 늦어질수록 전황은 불리해질 테니까.

뒤늦은 브라함에게 허락된 시간이란 이토록 짧고 다급한 것이었다.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무거운 빅터의 말에 스벤은 각오를 다지듯 대답했다.

황궁에서 카렌까지 소요되는 시간은 대략 3일 정도.

스벤이 이끄는 제국군이 레반도르를 떠나면 빅터의 부대가 시간을 맞춰 사라센 흑마탑을 공격한다.

그사이 스벤이 국경에 도착하고.

아케른의 병력이 작전에 성공하는 순간, 스벤의 군대는 멈추지 않고 국경을 넘는다.

작전의 실패는 곧바로 전면전으로 이어질 터.

빅터의 패전 소식이 들리면 스벤은 국경을 사수하는 것으로 계획을 변경하게 된다.

그래봐야 결국 멸망이겠지만.

따라서 이 작전은 실패를 가정하지 않는 극단적인 선택이었다.

“완전 노빠꾸 직진이네요.”

펜리르에 올라탄 겨울은 근심 어린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노빠꾸가 뭐야?”

“물러서지 않고 돌진하는 걸 말하죠. 이번 작전처럼.”

“노빠꾸라…….”

어쩐지 입에 착 붙는 말을 들으며 펜리르의 갈기를 움켜잡았다.

제대로 된 안장이 없으니 별수 없는 것이다.

“다 좋은데 조금 미끄러워요.”

꼼지락거리던 겨울은 조잡한 등자를 밟으며 자세를 고쳤다.

말에게 사용하던 걸 대충 손봐서 사용했으니 오죽했겠나.

힘으로 버티고 있지만, 나 역시 불안정한 건 마찬가지였다.

“아케른에 가면 안장부터 새로 만들어야겠네.”

“2인용으로요.”

농담 같은 진담을 주고받으며 나는 출발 신호를 기다렸다.

그사이 대화를 마친 빅터는.

“무운을 빌겠소.”

마지막 인사를 스벤에게 전하곤 말머리를 돌려 성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펜리르 역시 후열을 따르며 느긋하게 걸어 나갔다.

“이젠 익숙해진 건가. 엄청 차분해졌네요?”

그에 겨울은 감탄을 섞어 펜리르의 모습을 입에 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케른을 출발할 때완 분위기가 크게 달라진 탓이었다.

자각했다고 해야 하나.

요 며칠 동안 녀석은 체면이란 걸 터득한 것 같았다.

특별한 존재가 취해야 할 우아함 같은 걸 말이다.

“그러게 이 정도 텐션만 유지해 주면 도시에 나가도 되겠어.”

나의 말을 알아들은 건지 펜리르는 더욱 기품 있는 자세로 대로를 거닐었다.

* * *

“여기서 뭐 해. 뭘 그렇게 보고 있는 거야.”

“구인 광고.”

“구인? 갑자기 일자리는 왜?”

“쓸 만한 곳에 일자리가 생겼거든.”

눈을 빛내는 레이를 보며 에비오는 벽에 붙은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뭐야, 하수처리 시설 인부 구하는 거네?”

“그렇지.”

“이걸 왜… 설마 이 일을 하려고?”

“당연하지. 근무 장소를 봐.”

레이가 가리키는 손끝을 따라 에비오는 벽보 아래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러고는 마주한 특별한 지명을 보며 눈동자를 키웠다.

“어라, 아케른 성이잖아?”

잠입이란 단어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빙고.”

그런 에비오를 바라보며 레이는 검지를 들어 올렸다.

순박한 청년의 얼굴에 떠오르는 비릿한 미소.

어울리지 않는 표정을 지은 레이는 입꼬리를 당기며 자랑스레 얘기했다.

“내가 원래 암살 전문이었다고. 조용히 따라가서 슥삭. 알아?”

감춰진 자신의 본모습을 말이다.

“본래 암살이란 게 대상이 머무는 주변이 가장 처리하기 쉬운 법이거든. 돌아오는 쾌감도 크고.”

더군다나 아케른 성이라니.

새로 얻은 기술을 사용하기엔 완벽하게 좋은 환경이었다.

일단 들어가면 오가는 누구도 자신을 의심치 않는 곳.

특히 마음에 드는 건, 이반의 침실을 언제든 노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칼로 썰어 버리지 못하는 건 좀 아쉽지만, 새로운 방법도 나름 재밌겠더라고.”

“…….”

에비오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부글거리며 녹아내리던 검은 갈기의 모습이 떠오른 탓이다.

“공기로 뿌릴 수 있으면 더 좋았을 텐데 말이야. 왜 죽는지도 모르고 뒈지는… 아, 그러면 너무 싱겁나? 무색무취의 독가스 이런 건 너무 치트 같다. 그치?”

어쨌거나 레이가 떠올린 방법은 꽤나 효과 있어 보였다.

뒤를 쫓는 것보단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게 훨씬 많은 기회를 얻을 테니까.

굳이 싸우지 않고 처리할 수만 있다면 이보다 좋을 순 없는 일이었다.

다만, 한 가지.

“웬만하면 살려서 오라고 하셨는데…….”

로이드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에비오는 말끝을 흐렸다.

한데 그게 어디 쉽겠나.

상대는 말도 안 되는 괴력에 드높은 무위를 가진 강적이었다.

그런 놈을 생포하라니.

“그게 가능하겠어?”

“쩝.”

되묻는 레이의 말에 에비오는 쓰게 입맛을 다실뿐이었다.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보는 게 맞는 일.

“로이드한테 너무 목맬 필요 없다니까? 수틀리면 그냥 우리끼리 돌아다녀도 돼.”

레이는 생각지도 못한 말을 꺼내며 다른 해법을 꺼내기 시작했다.

“난 예전부터 그 영감 마음에 안 들었거든. 이래라저래라 간섭도 심하고, 무슨 꿍꿍인지 알 수도 없고 말이야.”

투덜거리는 레이의 말에 에비오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임무와 명령을 떠나, 이상한 남자인 것만은 분명한 까닭이었다.

“지구? 사실 난 돌아가지 않아도 상관없어. 이렇게 좋은 재주가 있는데 뭐 하러 돌아가서 힘들게 살 거야. 아휴… 난 싫어. 로우 저 녀석도 돌아갈 맘 없고.”

그에 로우는 말없이 고갤 주억거렸다.

“로이드를 따른 건 그 영감이 재미있는 일을 소개시켜 줬기 때문이야. 지구 귀환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는 거지. 그리고 솔직히 그 말을 어떻게 믿겠어. 난 그거 100% 거짓말이라고 생각하거든.”

“지구로 보내 준다는 게 거짓말이라고?”

“당연한 거 아냐? 그게 됐으면 벌써 누군간 돌아갔겠지. 하지만 귀환한 사람이 있다는 얘긴 들어본 적도 없어.”

레이는 덤덤한 얼굴로 대답했다.

추측을 넘어선 확신.

지켜보던 에비오의 얼굴에 복잡한 감정이 떠올랐다.

이렇게 되면 모든 게 다 부질없어지기 때문이다.

‘거짓말이라니.’

레이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의 미래는 불투명해진다.

“내가 알기론 우리보다 20년 넘게 일찍 소환된 사람도 있었어. 그 사람들 다 어떻게 된 줄 알아?”

이렇게 말이다.

레이는 미처 몰랐던 새로운 사실을 아무렇지도 않게 까발리기 시작했다.

“쓰레기장에서 심부름하고 있잖아. 네놈들 뒤치다꺼리 하던 사람들이 다 그런 인간들이라고.”

“그 사람들이 전부?”

“그래, 관리자들 빼고 돌아다니는 놈들은 모조리 폐급 소환자라고 보면 돼.”

대답을 듣던 에비오는 떠오르는 의문에 갸웃거렸다.

오래전에 소환된 자들의 태도가 이해되지 않는 탓이었다.

제약 없이 움직일 수 있는 자유로운 사람들이었는데.

“왜 그렇게 살고 있는 거지?”

폐급 소환자라는 그들은 쓰레기장을 오가며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마치 때 되면 돌아오는 똥개처럼.

간섭하는 사람이 없음에도 그들은 스스로 그곳에 속박되어 살아가고 있었다.

“나가 봐야 살길이 막막하잖아. 소환자라고 해서 다 뛰어난 능력만 있는 게 아니니까. 폭식 같은 능력을 어따 쓰겠냐고.”

조롱 섞인 레이의 말이 비수가 되어 에비오의 가슴을 찔렀다.

불과 얼마 전 자신의 모습이 그랬으니까.

써먹을 데 없는 잉여인간.

폭식이란 능력을 받은 그 남자는 그저 남들보다 엄청나게 많이 먹을 뿐이었다.

굳이 특별함을 보태자면 살이 찌지 않는다는 건데, 지구였다면 먹방계의 스타가 되어 엄청난 구독자를 보유했겠지만, 이곳에서는 아니었다.

“그러니 로이드 옆에 딱 붙어서 살아가는 거지. 그런 인간들을 로이드는 받아 주고 있고 말이야. 어때, 이래도 그 인간을 믿고 싶어?”

생각해 보면 늘 그것이 의문이긴 했다.

그렇게 가둬 두고 가만히 놔둘 바엔 차라리 죽이던가, 아니면 내다 버릴 텐데 말이다.

“쓸모 있는 사람들은 나름 살만하지, 특별한 대우도 받고. 하지만 결론은 갈 곳이 없어 그러고 있는 거야. 나가서 홀로 부딪치는 게 두려우니까.”

사이코패스 같던 레이의 말은 반박하기 힘들만큼 설득력 있었다.

정체를 드러낼 수 없는 이방인.

그들은 불안한 미래에 대한 해법으로 누군가에게 종속되길 바란 것이었다.

지금의 에비오처럼.

“그러니까 너무 로이드한테 매달리지 말자고. 일단 우리부터 즐겁게 살아야지. 안 그래?”

에비오의 어깨를 두드린 레이는 벽보를 뜯어 품 안에 챙겨 넣었다.

* * *

[시스템 재설정 40%…….]

마나와 투기가 통합된 지도 벌써 열흘이 다 되어 간다.

얼마나 대단한 게 나오려고 이렇게 오래 걸리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처음보단 조금씩 시간이 단축되고 있었다.

앞으로 2주 후?

대충 그때쯤이면 이것의 정체도 드러나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고 마냥 기대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정체 모를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도 좋지만, 이미 검증된 투기가 활성화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 느낀 탓이다.

뭐가 됐건 오러보다 좋기를 바랄 수밖에.

그게 아니라면 비슷하기라도.

그조차 안 된다면…….

“아저씨.”

끝없이 이어지던 나의 걱정은 겨울의 부름에 흩어져 버렸다.

“갑자기 떠오른 생각인데요.”

“응”

“아저씬 그 능력 사용한 적 있어요?”

“무슨 능력?”

“회귀요. 리에게 이어받은 거.”

그리고 녀석은 뜬금없이 나의 능력에 대해 질문했다.

바꿔 말해, 죽었다 살아난 기억이 있느냔 얘기였는데.

“있지.”

“아… 아저씨도 있었구나.”

그렇다는 나의 대답에 겨울은 의외라는 듯 반응했다.

하기야 이렇게 강해 보이는데 죽는 모습이 쉽게 연상되겠나.

나도 가끔은 남은 숫자 94를 보며 의문을 갖곤 했다.

과연 저 횟수를 다 사용할 수 있을지, 그만큼 죽을 일이 생길지 말이다.

“죽는다는 건 어떤 기분이에요?”

그런 나를 향해 겨울은 보다 심오한 감정을 물어 왔다.

“글쎄? 표현하기 어렵지만, 좋은 기분이 아닌 건 확실해.”

사실 이 이상 설명해 줄 말도 없었다.

죽는 순간에 느끼는 감정은 대부분 아차 싶은 것뿐이니까.

예외를 들자면 화조의 둥지가 있으려나.

화염에 휩싸이는 고통과 충격은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칼이 있다면 차라리 자결하는 게 나을 정도.

화염 내성을 뛰어넘는 불꽃을 만나게 된다면 그렇게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는 건 감사한 일이지.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것도 고마운 일이고.”

겨울의 질문에 대한 답은 여기까지가 한 묶음이었다.

죽음에 이르는 과정만이 아닌 되돌아온 삶까지.

지금의 나를 만든 건 그런 시간이 쌓인 결과였다.

“역시 그럴 일 없도록 사는 게 가장 좋겠네요.”

“그렇겠지.”

착 가라앉은 대화를 끝으로 나의 시선은 눈앞에 다가온 아케른 성으로 향했다.

서서히 내려오는 거대한 도개교.

그 아래로 이어진 하수구 주위엔 밧줄에 매달린 인부들이 위태롭게 오가고 있었다.

내 목숨 99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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