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마법 학회의 공치사를 위해 폐하께서 희생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흑마탑에 대한 감시 수준을 통제로 격상시키시고, 각 지방의 영주에게 수상한 무리를 찾으라고 명하십시오.”
“그리하시지요, 폐하. 그사이 저와 빅터공은 사라센의 흑마탑을 점령하겠습니다.”
군부의 핵심인 빅터와 스벤의 간언에 황제 데드릭은 굳은 얼굴로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건의 전말이야 들었으나 결단은 다른 문제일 터.
어쩌면 황제란 자리는 의심과 거절로 연명되는 피곤한 위치일지도 모르겠다.
말로만 듣고 판단해야 하니, 우유부단한 것 같은 황제의 태도가 한편으론 이해가 되었다.
소식을 전하는 사람의 신뢰도에 따라 결과는 달라질 테니까.
그러니 지금 황제의 고민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빅터 크로제와 스벤 자우어.
마주한 두 남자의 이름이 너무 무거운 탓이다.
“좋소. 마법 협회와 각 영주들에게 협조를 요청하도록 하지. 하지만 사라센은…….”
막다른 길에 선 황제는 결국 말끝을 흐렸다.
외면하기엔 거대했고, 간청을 따르자니 사안이 심각했기 때문이다.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시오.”
그러고는 반쪽뿐인 선택을 하며 상황을 일단락 시켰다.
“성심을 어지럽혀 송구합니다. 하나 시간이 저희 편이 아니라는 것을 헤아리셔야 할 것입니다.”
빅터의 답을 끝으로 황제는 알현실을 되돌아 나갔다.
이제 남은 건 언제일지 모르는 기다림뿐.
귀빈실로 안내받은 우리는 삼삼오오 모여 나름의 방법으로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키우기 힘들다던 말은 핑계였을까.
술은 펜리르를 살피러 빈 마구간으로 향했고, 별과 부족장은 황실 근위대의 훈련장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나는.
“인공으로 파도를 치게 하는 거예요!”
“마법도 없이?”
“네, 기술의 힘이죠.”
거대한 분수대를 바라보며 겨울과 함께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워터 파크라고 했었나?
맨땅에 강과 바다를 만들어 물놀이를 즐긴다던 그곳은, 허황되면서도 왠지 그럴듯하게 들렸다.
“네가 살던 세계는 기술이 마법인가 보네.”
“그런 셈이죠. 실제로 과학은 마법이라는 말도 있으니까요.”
대답을 마친 겨울은 손가락을 들어 물줄기를 만들어 냈다.
“하지만 그쪽 세상 사람들은 이런 걸 더욱 놀라워할 걸요.”
내가 보기엔 기술이라는 게 더욱 대단해 보이는데 말이다.
쪼르르 떨어지는 물방울을 보며 겨울은 배시시 웃음을 지었다.
“여기들 계셨네요.”
그 모습을 보던 나는 고개를 돌려 소리의 주인을 찾았다.
베르였다.
반갑게 다가오던 베르는 겨울의 손끝을 보며 동그랗게 눈을 키웠다.
“엄청 맛있다고 소문난 그 청정 빙하수군요.”
“아니요. 알레스카 청정 빙하수도 울고 갈 겨울표 생수죠. 미네랄 함량이 높아 건강에 좋으니 지금 예약하시면 매월 9,900원 초특가에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네?”
“후후…….”
알아듣지 못하는 베르를 보며 겨울은 승자의 미소를 지었다.
베르가 모르는 말이 다 있다니.
눈을 껌뻑거리던 베르는 고개를 흔들며 본론을 꺼냈다.
“뭐 하실 예정인가요?”
“글쎄요? 딱히 할 일은 없죠.”
“그럼 함께 도서관이나 갈까요?”
“아… 저는 책하곤 사이가 영 나빠서…….”
갑작스런 도서관 얘기에 나는 정색하며 손을 저었다.
책장 사이에서 시간을 보내기엔 황궁은 구경할 게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카일룸의 도서관은 대륙에서도 유명하죠. 일전에 물어보셨던 성물에 대한 정보도 있을지 모릅니다.”
“진짜요?”
“물론이죠. 성물에 적힐 정도의 인물이라면 분명히 어딘가에 기록이 남아 있을 겁니다.”
“좋아요. 당장 가요!”
하지만 겨울은 베르의 말에 덜커덕 낚여 버렸다.
가방을 열어 성물을 꺼내더니.
“슐타나 나크시딜… 이름부터가 벌써 예사롭지 않잖아요. 이거 분명이 뭔가 있을 거예요.”
나를 바라보며 동행을 요구했다.
졸지에 황궁까지 와서 공부를 하게 될 판.
“함께 가시죠. 저도 찾는 걸 도와드리겠습니다.”
어차피 찾아봐야 할 자료라면 베르가 있을 때 찾는 게 이득이었다.
사고 가속이었나.
촤르르 넘기기만 해도 책 읽기가 끝나니, 필요한 서적을 골라 베르 앞에 쌓아 두면 모든 게 해결되는 까닭이었다.
“그럼 가 봅시다.”
하여 우린 황실 도서관으로 이동했다.
* * *
“대륙의 선지자들, 이건 종교와 이념이고, 이건… 사라센 유적의 비밀이라는 책이네요.”
들고 온 서적을 책상 위에 올린 나는 또 다른 책을 찾아 서고를 향해 걸음을 옮기려 했다.
한데 그 순간.
“찾았다.”
맑게 울리는 겨울의 목소리에 가던 길을 멈추고 뒤돌아보았다.
“슐타나 나크시딜… 100년 전쯤에 활동한 현자인데, 마지막에 머문 지역이 ‘파사테’라는 도시래요.”
“어디 봐요.”
그에 베르는 곁으로 다가가 펼쳐진 책을 살피기 시작했다.
역시나 방법은 촤르르르…….
구경하는 사람이 무안할 지경인 베르의 독서는 10초도 채 지나지 않아 책 한 권을 뚝딱 해치워 버렸다.
“부럽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겨울은 턱을 괴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허탈한 표정은 덤이랄까.
“50만 수험생이 이 모습을 보면 현타 오겠네요.”
뜻 모를 말을 남기며 베르의 마법에 감탄을 보냈다.
어쨌거나.
“활동 마지막 시기만 있고, 시작은 없군요. 그리고 파사테라는 도시는 들어 본 적이 없는데… 이건 어디에 있는 도시일까요?”
책을 내려놓은 베르는 코끝을 훔치며 서고를 바라보았다.
덩달아 나의 시선도 책장으로 향했으니.
“지역과 관련 된 책으로 모아 봅시다. 특히 고대 도시에 관한 책으로요.”
그렇게 우리는 드넓은 도서관 사이를 누비며 필요한 서적을 끌어모았다.
“여기요!”
촤르르륵…….
“또 가져왔어요!”
촤르르르…….
책 찾는 속도보다 읽는 게 더 빠른 기현상을 경험하며 우리는 책상 가득 서적들을 쌓아 갔다.
“이쯤 되면 느낌이 오지 않나요?”
“어떤 느낌이요?”
“잘못 적힌 내용이거나 근거 없는 추측 같은 느낌이요.”
나는 겹겹이 올라간 책 더미를 향해 의뭉스레 말을 건넸다.
이만큼이나 찾았는데 안 나왔다는 건, 정보에 문제가 있다는 얘기일 테니까.
“그런 건 아닌 것 같아요.”
하지만 베르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러고는 자세한 설명 대신 읽고 있던 페이지를 나에게 내밀었다.
그에 나는 받아든 책을 소리 내어 읽어 내려갔다.
“메드바 유적지에 속한 산샤크의 고대 지명으로, 은둔자의 협곡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아호멧 왕조의 수도였다…….”
지금은 사라진 고대 왕국의 도시란 말이었다.
“와, 세계관의 확장이군요!”
왜 그렇게 신이 났는지 모르겠지만, 겨울은 또랑또랑한 눈으로 다음 얘기를 기다렸다.
“이 다음은 없네.”
“그게 끝이라고요?”
“어. 더 이상 다른 내용은 없는 것 같아.”
하지만 겨울에게 해 줄 설명은 여기까지였다.
결론은 또 다른 책을 살펴야 한다는 것.
이번에는 사라진 고대 왕조에 대한 책을 찾아 도서관을 헤매고 다녔다.
그렇게 들고 온 몇 권의 서적.
“이건 사라센 왕조에 대한 책이고요, 저거는 그놈들이 정벌한 왕국에 대한 책, 그리고 이거는 대륙의 소국이라는 책이네요.”
힘들게 찾아온 몇 권의 책은 수고한 보람도 없이 읽혀졌다.
촤르륵… 소리를 남기며.
어느새 베르의 손엔 마지막 책이 들려 있었다.
또다시 책장이 넘어가기 시작했고.
“금역의 수호자…….”
책 넘김을 멈춘 베르는 낮게 중얼거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 * *
다음 날.
해가 중천에 뜨도록 대답을 기다렸지만, 황제는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것도 기싸움 같은 건가요?”
“그보단 사실 여부를 판단하는 중일 겁니다. 무려 전쟁이 걸린 일이니까요.”
소식 없는 황제의 태도에 슬슬 짜증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베르의 말도 일리는 있다만, 제국의 무력 그 자체인 빅터의 말이 아닌가.
그의 말을 안 믿는다면 도대체 누구의 얘기를 듣겠다는 건지 모르겠다.
“사실을 말해 줬는데 뭘 더 알고 싶어서 저러나 모르겠네요. 지금 하루하루가 얼마나 중요한 시점인데…….”
“그러게 말입니다. 사안이 중한만큼 신중하려는 건 알겠지만, 지켜보기엔 많이 답답하군요.”
툴툴거리는 나의 말에 베르는 맞장구를 치며 대답했다.
한데 바로잡아야 할 부분이 하나 있었다.
“신중해서 그랬겠어요? 남의 뒤통수나 후리고 살았으니 사람 말을 못 믿는 거지. 저게 다 지은 죄가 많아서 그런 거예요.”
황제의 태도를 너무 정상적으로 포장하는 듯해서다.
신중함과 의심은 다른 문제니까.
“전쟁을 걱정했다면 밤을 새워서라도 결론을 냈어야죠.”
그러나 황제는 빅터의 손에 쥔 패가 궁금해 전전긍긍했을 뿐이었다.
저런 한심한 인간이 황제라니.
“혹시나 싶어서 말하지만, 저는 세비앙 마을과 스승님 때문에 싸우는 겁니다.”
“이해합니다. 저도 비슷하니까요.”
황제의 끔찍한 최후를 바라지만 지켜야 하는 모순된 상황.
더럽게 얽힌 연결 고리를 부정하며 둘째 날의 밤도 허무하게 지나갔다.
그렇게 또 하루가 지나 3일째 아침.
펜리르를 살피러 간 나는 몰려든 사람들로 인해 때아닌 질문 세례를 받아야 했다.
워 울프가 무엇인지.
어디에 서식하는지.
이름이 펜리르라던데 설마 진짜 펜리르인 건지.
그에 나는 서리고원에 살았지만 지금은 멸종했고, 이름만 펜리르일뿐, 앞으로 어떻게 자랄지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때마침 다가오는 술.
녀석의 손엔 신선한 야채가 한가득 들려 있었다.
저런 걸 도대체 어디서 구해 왔는지 모르겠지만.
“왜 다른 사람이 주는 밥은 안 처먹는 것이냐!”
여물통에 야채를 내던진 술은 울분을 토하며 소리를 질렀다.
그제야 펜리르는 몸을 움직였고, 이미 차려져 있던 고기는 외면한 채 술이 가져온 야채를 맛있게 씹어 먹기 시작했다.
펜리르의 까다로움은 식성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전속 요리사가 된 건가…….”
저렇게 씩씩거리면서도 챙기는 걸 보면 둘의 관계는 이미 정해진 것 같다.
미워할 수 없는 그런 것 있잖은가.
이윽고 식사를 마친 펜리르는 술의 등짝에 얼굴을 비비곤 바닥에 엎드렸다.
이러쿵저러쿵 해도 이미 정든 사이란 얘기다.
하여간 오전의 작은 소란은 훈훈하게 마무리되었고.
“폐하의 집무실로 모이시랍니다!”
소식을 전하는 근위병의 말에 나의 시선은 궁으로 향했다.
서둘러 도착한 황제의 집무실 앞.
먼저 와 있던 빅터는 옷매무새를 점검하며 알현을 준비했다.
본래 당연히 갖춰야 할 신하된 자로서의 예의겠지만, 내 입장에서야 씨알도 안 먹힐 불필요한 행동이었다.
오히려 살려 두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를 받아야 할 터.
“안으로 드시지요.”
시종장의 안내에 따라 우리는 집무실에 들어섰다.
“아케른의 변경백 빅터 크로제, 폐하를 뵙습니다.”
빅터의 인사를 시작으로 황제와의 두 번째 면담이 시작됐다.
그리고 대화는 빠르게 본론으로 향했다.
“선공을 한다면 속전속결이 전제일 텐데… 빅터 공의 무위야 의심치 않지만, 홀로 모든 걸 감당할 수 있겠소?”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케른엔 노구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력의 불균형을 염려하는 황제의 말에 빅터는 느긋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물론 그대의 혈육인 클레어 경의 실력이야 짐도 잘 알고 있소. 하지만 다른 이들은? 그들도 각자 흑마탑을 격퇴시킬 수 있다고 보시오?”
“물론입니다.”
“호오… 짐이 모르는 인재가 있단 말이오?”
“새로운 인물이란 늘 소리 없이 등장하는 법이니까요.”
황제의 의문을 일축하며 빅터는 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잠시 그대로 나의 눈을 바라보고는.
“제가 아끼고 믿는 제자 놈입니다.”
그답지 않은 말로 나를 소개했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바뀐다고 하던데…….
“그랬구려. 어쩐지 체격이 장대한 것이 범상치 않다 생각하고 있었소. 하나 아직 젊은 것 같은데 귀공을 대신할 수 있겠소?”
“충분하리라 생각합니다. 저 녀석을 꺾으려면 노구와 상대할 수준은 돼야 할 테니까요.”
빅터는 황제에게 오만할 만큼 당당히 승리를 자신했다.
“좋소. 일주일 후 개전하는 걸로 합시다. 그사이 준비할 수 있겠소?”
“물론입니다. 돌아가는 즉시 출정 가능합니다. 아니, 바로 출정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흠… 제국군도 채비를 갖춰야 하니 일주일 후로 합시다.”
결론을 낸 황제는 자리에서 일어나 집무실을 나섰다.
그러나 황제의 걸음은 출입구 앞에 멈춰 섰고.
“이번 전쟁… 패배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거요.”
얼음장 같은 목소리를 남긴 채 모습을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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