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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숨 99개-138화 (138/203)

138화

“아니, 갑자기 대수림은 왜 간다는 거야? 우린 그 이반이라는 놈을 쫓아야 하는 게 임무라고.”

“당연히 알고 있지. 그런데 지금 빅터와 함께 카렌 방향으로 갔잖아. 게다가 다른 정예들과 같이.”

“그래서?”

“그래서는 뭐가 그래서야. 따라가도 당장 어쩌기 힘들다고.”

의아해하는 에비오의 말에 레이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에비오와 카이 형제가 서 있는 이곳은 대수림 접경 도시인 함브룩.

가던 걸음을 멈춘 세 남자는 새로운 목적지에 대해 의견을 대립하고 있었다.

이반을 쫓던 카이 형제가 별안간 방향을 바꿔 함브룩으로 향한 것이다.

뭐지?

왜 이쪽으로 가는 거지?

뒤를 따르던 에비오는 의구심을 억누르며 이해하려 했다.

무언가 이유가 있을 거라고.

하나 함브룩에 도착한 카이 형제는 뜬금없이 대수림으로 목적지를 변경했다.

안 그래도 시간만 때우는 것 같다 답답한데.

이제 곧 로이드에게 보고서를 올려야 하는데.

녀석들은 세월아 내월아 하며 한가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뭐? 머리 가죽을 벗겨 죽일 거라고?’

큰소리치는 카이 형제의 말에 에비오는 로이드의 지원마저 거절했었다.

하나 결과는 며칠째 주위를 맴도는 것뿐.

다시 보내야 할 보고서를 어떻게 써야 할지 감조차 오지 않는 상황이었다.

“아케른 경비가 뭐래?”

“황궁에 다녀올 거라고 했지.”

“그래, 그러면 됐잖아. 놈들이 황궁에 다녀오는 동안 준비해서 치겠다는데 뭐가 문제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형제는 너무나도 당당했다.

조급한 자신의 입장 따위 안중에도 없다는 듯 말이다.

“하지만…….”

“하지만 뭐? 당장 죽여야 속이 풀리겠어? 그럼 네가 가서 죽이고 오든가. 8성이 뉘 집 개 이름 줄 아냐? 이반 그 새끼가 그냥 근육 바보처럼 보이냐고?”

에비오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걸 하라고 되살린 놈들은 눈앞에 있는 두 형제였으니까.

“로이드 영감 때문에 신경 쓰는 건 알겠는데 말이야, 그 사람이 막 조바심 내고 쪼아 대는 스타일이 아니거든. 그러니 입 다물고 조용히 따라다녀. 때 되면 다 저승으로 보낼 테니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칼자루를 쥐고 있는 건 에비오가 아닌 카이 형제인 탓이었다.

나중에 도망치는 한이 있더라도 지금은 이 녀석들에게 기댈 수밖에.

에비오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 순간.

“시스템 안정화가 끝났다는군.”

말없이 걷고 있던 로우가 남 얘기하듯 중얼거렸다.

“호오, 그래? 어떻게 바뀌었는데?”

“종족이 변했어.”

“그게 무슨 말이야?”

“아예 마인으로 변하는 건가 봐.”

레이의 말에 답하는 로우는 스스로도 의문스러워했다.

이전의 능력에서 더욱 강해진 건지 망해 버린 건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인이라…….”

마기에 물든 미친 인간이라는 것이니 뭐라 반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붉어진 시야도 이 때문인 듯한데.

“이건 확인해 봐야 알겠네.”

무심하게 내뱉은 로우는 대수림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레이는 싱글벙글 웃으며 로우의 어깨를 두들겼다.

이미 자신도 겪었던 일.

죽은 타인의 육체로 되살아나면서 시스템은 새로운 능력을 선물했었다.

“분명 좋아졌을 거야. 나도 그랬거든.”

그것이 섣부른 일반화라는 걸 알지만 기대를 저버릴 순 없었다.

신체의 일부와 전체라면 누가 봐도 후자가 강할 테니까.

상반신만 변하던 과거에 비한다면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대수림에 들어선 로우는 외진 곳으로 향했다.

이후 한 무리의 몬스터와 마주했고, 그는 지체 없이 마인으로 변신했다.

뚜두두둑― 뚜둑.

모습을 바꾼 로우는 그들이 알고 있던 평범한 마인이 아니었다.

특유의 검붉은 핏줄도 없었고, 좀비처럼 끄악거리는 저급한 형태도 아니었다.

단지 조금 더 선명하고 커진 근육이 눈에 띄었을 뿐.

평소 모습 그대로인 로우는 새빨갛게 변한 눈을 돌려 몬스터를 응시했다.

트롤의 아종인 검은 갈기였다.

각 개체의 능력은 트롤보다 떨어지나, 오크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강력한 놈들이었다.

과거의 로우라면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을 터.

단검을 뽑아 든 로우는 느릿하게 걸어가 달려드는 놈들과 마주했다.

크르륵!

검은 갈기의 몽둥이가 허공을 그었다.

그걸 나른하게 바라보던 로우의 손이 앞으로 내밀어졌고, 휘둘러진 몽둥이는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주르륵 흘러내리는 붉은 핏줄기.

“이 몸 좋은데?”

자신의 두 팔을 바라보던 로우는 검은 갈기 무리를 향해 터벅터벅 걸어갔다.

그러고는 쏘아지듯 몸을 날려 한가운데로 들어갔다.

차마 눈으로 쫓을 수 없는 속도.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로우를 보며 레이의 입꼬리가 찢어질 듯 올라갔다.

이 말도 안 되는 움직임이라니.

동생에겐 미안하지만, 죽길 잘했다는 생각마저 들 지경이었다.

저 재미있는 놀이판을 구경만 할 수는 없지.

레이는 떠오른 글자를 보며 히죽거렸다.

[시독 : 시체에서 형성된 독을 외부로 분출.]

변화된 시스템이 준 새로운 능력 때문이었다.

“이렇게 살아 있는데.”

시스템은 자신의 몸을 시체 취급하고 있었다.

하지만 상관없다.

효과는 확실했으니까.

츠츠츠츠츠…….

시독에 접촉된 검은 갈기는 통나무처럼 쓰러졌고, 변색이 시작된 환부는 부글부글 끓어 거품처럼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 * *

거대하고 엄숙하며, 동시에 아름다운 무언가를 볼 때 우리는 장엄하다고 표현한다.

평소엔 사용할 일이 거의 없는 말이지만, 이곳을 표현하기엔 그만한 말도 없을 것 같다.

매우 잘 어울린다고 해야 하나.

25년의 개보수를 걸쳐 오늘에 이르게 된 황궁 카일룸은 황제의 목표를 의심해 볼 만큼, 차원이 다른 규모를 과시하고 있었다.

마치 모든 권력을 황궁 건축에만 쏟아부은 느낌이랄까.

‘아리안 왕궁은 후궁 수준이네.’

그곳 또한 화려하고 웅장했건 만, 여기와는 비교할 수준이 못 됐다.

베르의 얘기처럼 서자라는 출생의 열등감을 다른 곳에서 채우려는 흔적이 역력했다.

지금 이 순간도 마찬가지.

알현실에 도착한 지가 한 시간이 넘었건만, 황제는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기분 나쁘다 이거죠. 길들이기 같은 겁니다.”

그러고 보니 빅터나 스벤은 대수롭지 않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증거일 터.

“이제 알현할 준비를 해라.”

느긋하게 앉아 있던 빅터는 자세를 바로잡으며 시간이 되었음을 알렸다.

잠시 후.

“황제 폐하께서 드십니다.”

미리 내다보기라도 한 듯 무표정한 황제의 모습이 알현실 문을 넘어왔다.

‘진짜로 왔네.’

이래서 경험을 무시 못 하나 보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나타나는 걸 보니 말이다.

하여간 누가 이겼는지 알 수 없는 이 미묘한 신경전은 지루함에 지쳐 가던 나의 패배로 끝이 났다.

나만 혼자 지겨워했고.

나 빼고 다들 멀쩡했다.

“아케른의 변경백 빅터 크로제, 폐하를 뵙습니다.”

빅터의 인사를 시작으로 황제와의 첫 대면은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소감은 단순했다.

깊게 패인 미간의 주름이 거슬렸고, 세상 걱정을 다 떠안은 표정도 보기 싫었다.

저런 얼굴로 밥을 먹으면 넘어가기나 할까.

제놈이야 먹기 싫으면 그만이라지만, 마주앉은 사람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저 면상을 보며 음식을 삼켜야 하는 걸까.

“격조한 와중에 좋지 못한 소식을 전하게 되어 송구할 따름입니다.”

길게 이어진 빅터의 인사말에도 황제는 썩어 가는 표정으로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진짜 황제만 아니면 처맞고 다니기 딱 좋은 얼굴인데.

바라보는 것만으로 주먹을 부르는 신묘한 재주를 가진 인간이었다.

“슈탈렌에서 이상한 짓을 했더이다. 그 해괴한 짓을 짐이 어떻게 해석하면 좋겠소?”

그런 인간이 처음으로 꺼낸 말은 슈탈렌에 있는 흑마탑이었다.

말투와 분위기로 봤을 땐 악감정이 가득한 상황.

“충심으로 보시면 될 듯합니다.”

“그대는 지금 짐을 능멸하는 것이오?”

흐트러짐 없는 빅터의 말에 황제는 시비를 걸 듯 대답했다.

“송구하오나 능멸이란 말이 끼어들기엔 사건의 원인과 내용이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노여움을 가라앉히시지요.”

“그게 능멸이 아니면 뭐란 말이요?”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는 것이지요. 무엇이 마음에 걸려 그러시는지 모르겠으나, 노구는 그저 신하된 자로서 참을 수 없었을 뿐입니다.”

계속되는 황제의 꼬투리를 빅터는 유연하게 빠져나갔다.

“이미 전해드린 대로 흑마탑의 탑주는 정체가 위장돼 있었습니다.”

“그 얘길 믿으라는 것이오.”

“믿지 못하는 것과 부정하는 것을 혼동하지 마시지요. 폐하께서 하시는 말씀은 현실을 부정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빅터는 서서히 대화의 수위를 높여 갔다.

비위를 맞추는 입장에서 청취를 강요하는 입장으로.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28년 전의 계획은 실패하셨습니다.”

“더 이상 그 얘기를 거론하면 짐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오.”

“듣고 싶은 것만 골라 듣기엔 시국이 좋지 않습니다. 폐하를 향한 비수는 지금도 이곳을 향하고 있으니까요.”

황제를 바라보는 빅터의 안광이 서늘하게 변해 갔다.

절대로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자, 강력한 압박.

빅터는 오랜 시간 감춰왔던 이빨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카론과 루즈가 살아 있습니다.”

“허튼소리.”

“그랬으면 좋겠습니다만, 브라함과 사라센에서 모종의 활동을 이어 가는 듯합니다.”

“증거는.”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소환 의식이지요. 이세계인들은 지금도 소환되고 있습니다.”

마주한 황제와 빅터의 눈이 사납게 부딪쳤다.

차라리 싸우고 있다고 해야 할까.

서로를 통찰하는 매서운 두 남자의 눈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었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빅터.

“그 두 놈 중에 하나가 사라센에서 강화 인간을 만들고 있지요. 이제 곧 전쟁이 시작될 것 같습니다.”

예상치 못한 빅터의 말에 황제는 애써 침착한 얼굴로 반문했다.

“깊은 설명이 필요할 것 같구려. 짐을 이해시키지 못한다면 뒷감당은 제대로 해야 할 것이오.”

약간의 협박을 포함해서.

그에 빅터는 강화 인간의 시작부터 진행 과정을 빠짐없이 전달했다.

“그 말을 믿으라는 말이오?”

그러나 황제는 또다시 반문했다.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믿지 못하는 것과 부정하는 것을 혼동하시면 안 될 것입니다.”

그에 빅터는 차갑게 황제의 태도를 지적했다.

누가 감히 저런 말을 할 수 있을까. 빅터가 아니었다면 당장에 목이 잘릴 만큼 고압적인 말투였다.

“빅터 공의 말이 맞습니다, 폐하. 사라센의 강화 인간은 이미 몇 차례 카렌의 국경을 넘어온바 있습니다.”

짜증날 만큼 반복되는 황제의 부정에, 결국 곁에 있던 스벤이 선을 그으며 나섰다.

“진즉에 보고 드렸어야 했으나, 정확한 정보가 필요했기에 지체되고 말았습니다.”

이제 그만 현실을 직시하라고.

“사라센의 준비는 꽤 오래전부터 진행된 것으로 보입니다. 병력의 숫자도 상당한 터라, 놈들의 공격이 먼저 시작되면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입을 열기 시작한 스벤은 탐욕스런 눈을 빛내며 선공의 중요성을 말했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빅터에게 마무리를 부탁했다.

자신의 입으로 차마 할 수 없는 이야기.

“스벤 공을 총사령관에 임명하시어 사라센 정벌을 명하시지요. 소신도 목숨을 다해 놈들의 야욕을 저지하도록 하겠습니다.”

고개를 숙이는 빅터를 보며 황제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내 목숨 99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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