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카론과 루즈를 직접 확인하신 게 아니란 겁니까?”
“아직 보지는 못했소.”
“그렇다면 이제껏 말씀하신 모든 게 의미 없는 얘기가 아닙니까?”
실물을 본 적 없다는 빅터의 말에 스벤은 불신을 드러냈다.
하기야 봤다고 해도 못 믿을 판에 증거가 추측뿐이라면 누군들 믿겠나.
“그렇지만 브라함과 사라센 양쪽에서 소환자들이 나타나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상황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누군가 이세계인을 불러들이고 있다는 것이니까.
그 말인 즉, 생존한 카론과 루즈가 어딘가에 숨어 있을 가능성을 뜻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곳을 양국의 흑마탑이라 생각했고, 사라센에서 나타난 강화 인간 역시 두 사람이 관련돼있을 거라 추측했다.
“증거는요?”
“직접 싸워 봤지요. 이미 몇 차례나.”
빅터는 내 얼굴을 바라보며 스벤의 질문에 대답했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이미 폐하의 정보원이 슈탈렌에서 다 보고 갔으니까요. 지금 우리가 황궁으로 가는 이유도 다 그 때문입니다.”
“흠, 빅터 공의 말이 사실이라면…….”
“황제께서도 가만히 있을 순 없지요. 목표가 무엇이 됐건, 그 안에 브라함과 폐하는 꼭 포함되어 있을 테니까요.”
“복수라는 건가요?”
“글쎄요. 숨어서 소환자들을 계속 모으고, 강화 인간을 만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빅터의 답을 들은 스벤은 한층 복잡해진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뿌린 대로 걷는다 하지 않았던가.
신탁의 기사를 축출할 때, 가장 앞에 섰던 사람이 스벤과 루드겐이었다.
그러니 복수라는 단어를 가장 먼저 떠올릴 수밖에.
“그렇지만 사라센을 선제공격하는 건 확실히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스벤은 자신 없는 말투와 표정으로 푸념하듯 말했다.
“솔직히 국지전이 벌어진 것도 맞고, 모두 패한 것도 사실이거든요. 예전의 사라센이 아닙니다.”
이어서 감춰 둔 실패담까지.
“그래서 선제공격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강화 인간이 한곳에 모이기 전에 말이지요.”
그에 빅터는 차분하게 스벤의 말을 받아 넘겼다.
그러고는 거절할 수 없는 회심의 한마디를 건넸다.
“출정이 결정되면 총사령관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이참에 스벤 공께서 총사령관에 오르시지요.”
“허허… 하지만 황제 폐하께서 윤허하시겠습니까?”
“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출정이 결정되면 누군간 올라가야 할 자리니까요.”
달콤한 빅터의 말에 스벤 자우어의 목젖이 크게 움직였다.
“사라센 출정은 아케른이 주공으로 올라가겠습니다. 스벤 공께서는 천천히 따라오시면서 도와주시면 됩니다.”
“크흠,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계속 거절할 수도 없겠군요. 이 모든 게 국익을 위함이니 저도 힘을 보태겠습니다.”
결국 스벤은 빅터의 회유책에 넘어갔다.
그 어떤 피해자도 없는 백색의 거짓말들.
본심이야 어쨌든 대화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시지요. 채비를 마치는 대로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회의를 끝낸 스벤 백작은 처소로 돌아갔고, 나는 펜리르가 있는 연병장으로 이동했다.
띵동―
울려 퍼지는 맑은 종소리에 나는 품안에 넣어 둔 메신저 양피지를 펼쳐 들었다.
떠오르는 내용을 확인하며 피식 미소를 짓던 찰나.
“자네 이름이 이반이라고 하더군.”
루드겐 마이어가 다가와 퉁명스럽게 나의 이름을 확인했다.
“다들 그렇게 부르고 있죠.”
나 역시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의 말에 대답했다.
우리가 생글생글 웃으며 대화할 사이는 아니니까.
“이름이 낯익어서 한참 고민했거든… 우리 인연이 있지 아마?”
“그런 것 같더군요.”
슬그머니 본론을 꺼내는 루드겐을 보며 나는 냉소를 머금었다.
“철광산 운영권 소유자를 이렇게 만나다니. 안 그래도 찾아볼 생각이었는데 마침 잘됐군.”
“수고를 덜어 들이려 겸사겸사 왔네요. 잘 부탁합니다.”
영혼 없는 인사를 나누며 루드겐과 나는 미묘한 신경전을 벌였다.
사실 한주먹거리도 안 되지만, 무작정 사람을 쥐어팰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운영권이 있으면 철광산을 운영할 수 있는 건 맞는데… 그걸 또 마음대로 용병 조합에 넘겼더군.”
“어차피 건달패들끼리 돌려먹던 운영권 아닙니까. 제대로 된 사람이 관리해 주면 좋은 거죠.”
그저 각자의 입장에 맞춰 의미 없는 대화를 주고받았다.
놈이 뭐라고 지껄이든 나는 넘겨 줄 생각은 없으니까.
“그래도 운영권이 가벼운 게 아닌데 말이지. 주인인 나에게 인사도 없이 그러면 되나.”
“누가 주인인데요? 당신이? 외국인은 리베에서 재산 취득을 할 수 없는데요? 무슨 불법이라도 저지르신 건가… 당신은 그저 투자자일 뿐이잖아요.”
그에 루드겐은 미간을 찌푸렸다.
아차 싶은 표정과 짜증이 뒤섞인 그의 얼굴을 보며 나는 하찮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러게 계약서를 왜 그따위로 만들어서 위험을 자초합니까. 살펴보니 짜고 치는 사람들끼리 서로 믿지 못해서 안달이던데, 아무튼 운영권은 용병 조합에 넘어갔으니 신경 끄시고 배당금이나 잘 받아가세요.”
“…….”
입을 다문 루드겐은 사나운 눈초리로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렇게 눈깔에 힘주다간 정말 한순간에 뒈질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이거 아주 맹랑한 친구였군.”
루드겐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자네 말이 틀린 건 아니지만, 그 법률도 조만간 바뀔지 모른다 이 말이지. 그러니 험한 꼴 당하기 전에 스스로 반환하는 게 어떨까 싶은데.”
“왜요? 연금 조합장이 단체장이라도 될까 봐 그런 소릴 하는 겁니까?”
그에 루드겐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피식 웃음을 지어 보였다.
물론 몇 달 전만 해도 충분히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왜 그런 위험한 투자를 하셨는지 모르겠네요. 이렇게 불확실한데… 안타깝게도 당신 뜻대론 안 될 것 같습니다.”
나는 읽다만 메신저 양피지를 꺼내 놈의 눈앞에 펼쳐 들었다.
[리베 단체장, 게브네 확정.]
“당신이 원하는 일은 생기지 않을 테니까요.”
메신저를 마주한 루드겐의 눈가가 파르르 떨려 왔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
“그냥 얌전히 계시면 배당금은 챙겨 드릴게.”
이어진 나의 말에 루드겐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아까부터 자꾸 반말 찍찍거리는 데 말이야. 당신 남작이잖아?”
“…….”
“난 아리안의 자작이라고. 그러니 서로 예의는 지켜 주셨으면 좋겠는데.”
벙어리가 된 루드겐.
멍해진 놈을 뒤로하고 나는 연병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30분 정도를 기다린 끝에 스벤 백작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곁에는 열두 명의 호위가 함께했고, 루드겐은 남아 있기로 한 듯 했다.
잘 생각했지 싶다.
따라와서 무슨 좋은 꼴을 보겠나.
차라리 남아서 주어진 시간에 감사하는 게 나을 것이다.
다음에 마주치면 그때는 전장이 될 테니까.
‘으슥한 곳에서 보자고.’
썩어 들어가는 놈의 얼굴을 향해 나는 경멸을 담은 시선을 보냈다.
“선두 출발!”
성문이 열리며 스벤의 무리가 앞서 달려 나갔다.
뒤를 이어 빅터와 일행들이 말을 몰았고.
“허어… 엄청나구먼.”
차례를 기다리던 펜리르는 이번에도 역시 사람들의 관심을 독차지했다.
내심 신기했던 건.
녀석도 이런 분위기를 싫어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즐기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높게 들어 올린 턱 끝도 그렇거니와 한껏 뽐내며 걷는 모양새가 영락없는 자아도취였다.
아우우우우우―
대미를 장식하는 하울링까지.
멋지게 한 곡조 뽑아낸 녀석은 성문을 나서자마자 바람처럼 달려 나갔다.
* * *
“이제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지내는 곳이 달라졌을 뿐, 계획은 전과 똑같다.”
향후 계획을 묻는 사내의 말에 로이드는 덤덤한 얼굴로 대답했다.
어차피 허울만 남은 지 오래된 흑마탑이 아니던가.
필요한 인원들은 이미 바깥에 있었으니, 사실상 타격이랄 건 딱히 없는 상황이었다.
“사마르 님께는 따로 연락하지 않으실 생각이십니까?”
“한창 바쁜 사람이 아니더냐. 찾지 않는 게 우리 일을 돕는 것이다.”
느긋한 로이드를 바라보며 감색 로브의 사내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모든 게 그의 계획대로 되어 가고 있다지만, 실상은 늘 쫓기고 허덕이는 까닭이었다.
‘정말 이렇게 흘러가도 되는 걸까.’
쓰레기장으로 피신한 순간부터 사내는 이런 고민을 떨칠 수 없었다.
이곳이 모든 계획의 중추라는 것도 알고 있고, 핵심 인력들도 모두 이곳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땅치 않은 것은 고마워할 줄 모르는 사마르의 이기심 때문이었다.
누구 덕에 승승장구하고 있는데.
로이드의 말에 따르려고 해도 이쯤 되니 사라센의 모든 것이 눈엣가시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그런 사내의 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걸까.
“굳이 상실감을 만들며 비교할 가치가 없는 일이다. 목줄에 묶인 개가 아무리 날뛴들 개라는 본질이 바뀌진 않는 법. 이참에 여기에 있는 녀석들의 능력이나 다시 한번 살펴봐야겠구나.”
로이드는 감색 로브의 사내를 보며 새로운 관심사에 대해 말했다.
사마르에게 신경 쓸 바엔 에비오 같은 숨은 인재를 발견하는 게 훨씬 가치 있다고 생각한 탓이었다.
“한데 살로메에겐 아직 연락이 없나 보구나.”
“네. 사라센에서 한겨울을 놓친 이후로 다른 연락은 오지 않았습니다.”
감색 로브의 사내는 지난달 연락이 끊긴 살로메를 떠올리며 로이드의 질문에 대답했다.
“어찌 돼 가고 있는지 연락 넣으라고 전해라.”
“네, 알겠습니다.”
작은 방을 나서는 사내를 보며 로이드는 소환자들의 신상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 * *
레반도르.
브라함 제국의 수도이자 정치 문화의 중심지인 이 고대 도시를 가리켜 사람들은 레반도르라고 일컬었다.
기나긴 영욕의 세월을 견뎌 낸 황궁 카일룸이 있는 곳.
고대의 숨결과 현대의 문명이 함께 살아 숨 쉬는 이 땅은 3구역으로 나눠진 거대한 도시였다.
그 처음은 거주 지역.
성벽과 이어진 외성 지역으로 들어서면 일반 시민들이 기거하는 거주 지역이 나타난다.
그러나 눈앞을 가득 매운 건 철저하게 정리된 대로와 낮은 성벽들 뿐.
아름다운 수목으로 장식된 대로변은 평민들의 삶을 이면으로 감춰 놨다.
“저 성벽 너머가 시민들의 거주 구역입니다.”
베르는 쓴웃음을 지으며 기이한 구조를 설명했다.
“성내의 거주 구역인데 왜 성벽을 만들었데요?”
“황제가 지나는 길이니까요. 평민들의 삶을 지나치는 게 꽤나 싫었던 모양입니다.”
목적이 그것이었다면 결과는 완벽했다.
보이는 모든 게 너무 정갈하고 아름다워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허름한 옷을 입은 아이가 황제의 행렬을 방해한 적이 있었는데, 그 아이를 데리러 나온 어미의 모습 또한 비루했던 모양입니다. 그 뒤로 이곳에 성벽이 생겨났죠.”
이어진 베르의 설명에 벌써부터 눈살이 찌푸려지기 시작했다.
얘기만 들어도 이 정도인데 실물을 마주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황제는 서자라는 태생적 열등감을 비뚤어진 선민사상으로 바꾸려 했죠. 예전의 브라함은 신분제도에 있어 훨씬 너그러운 분위기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미운 짓만 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말이다.
여러모로 득될 것 없는 황제의 얘기는 듣는 내내 기분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성벽 위로 객석이 있는 것 같네요?”
“박수 칠 사람이 필요한 큰 행사도 있는 법이니까요. 그런 날에는 저 성벽 위로 시민들이 올라갑니다.”
없애 버리고 싶은 이유만 수백 가지였는데, 거기에 또 하나가 추가됐다.
그러나 저러나 티도 안 나겠지만.
아름다움과 불쾌함이 공존하는 거주 지역을 지나, 우리는 중간 구역인 내성 지역에 들어섰다.
한눈에 봐도 거주자들의 신분이 느껴지는 곳.
성벽은 사라졌으나, 거주지는 대로변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취향 하나는 확실하네.”
정나미 떨어지는 황제의 작품에 나는 얼굴을 구기며 앞으로 나가갔다.
덕분에 펜리르는 소란 없이 입성에 성공할 수 있었고.
“와… 무슨 판타지 영화를 보는 것 같네요.”
황궁 카일룸을 마주한 겨울은 작은 입을 틀어막으며 탄성을 내뱉었다.
내 목숨 99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