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길이어도 좋고.
아니라도 상관없다.
그저 발 닿는 대로.
“와우…….”
성벽을 벗어난 펜리르는 꼬리에 불붙은 강아지마냥 여기저기로 내달렸다.
앞으로 갔다 돌아오고, 옆길로 빠졌다가 다시 합류했다.
달릴 수 있는 길이 어디 그뿐이었겠나.
때로는 뒤로 갔다 되돌아오길 반복하며 정신없이 초원을 휘저었다.
곁에서 바라보기엔 영락없는 미친개였을 터.
“꺄아아아아아아!
사색이 된 겨울은 백색과 은빛이 섞인 갈기를 움켜잡은 채 비명을 질러 댔다.
통제 불능?
아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멍하니 서서 따라오는 일행들을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너무 빨라서 생긴 일인데…….
“롤러코스터 같아요!”
납작 엎드린 겨울은 뜻 모를 말을 외치며 꺅꺅거렸다.
무서워하는 것 같은데 즐거워하는 기묘한 상황.
“꺄핫핫핫!”
시간이 지나 익숙해지자 겨울은 대놓고 상황을 즐기기 시작했다.
겨울이의 반응이야 어떻든 거침없는 펜리르의 질주는 계속 됐다.
뒤따르는 일행들을 채근하며, 녀석은 드넓은 벌판을 달려 카렌 영지에 도착했다.
“끝내준다!”
겨울은 멈춰 선 펜리르를 쓰다듬으며 상기된 얼굴로 외쳤다.
왜 아니겠나.
함께 타고 있던 나 역시 속이다 후련해지는 기분이었다.
이제 말 같은 건 두 번 다신 못 탈 것 같았다.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 버린 것이다.
물론 이런 생각은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
“못 써먹겠군.”
말에서 내린 술은 툴툴거리며 나에게 다가왔다.
그 뒤를 따라오는 부족장의 반응도 마찬가지.
“답답해서 못 타겠다.”
펜리르를 경험한 두 사람 역시 그 짜릿함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아케른으로 돌아가면 붉은 멧돼지에게 모든 걸 걸어야겠다.”
“좋아. 나도 최선을 다해 돕도록 하지.”
좀처럼 보기 힘든 두 남자의 의기투합.
펜리르의 환상적인 승차감은 술과 부족장의 의지를 하나로 단결시켰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녀석의 거취는 문제가 됐다.
마구간이야 당연히 불가능했고.
“허어억?!”
기겁하는 병사들을 지나 연병장 구석에 조용히 자릴 잡았다.
본의 아니게 민폐가 돼 버렸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펜리르를 놔두기엔 이곳보다 적절한 공간이 없던 탓이었다.
사방이 넓고 확실히 통제된 곳.
쓸데없는 호기심과 불필요한 사건을 예방하기엔 연병장이 최적의 장소였다.
“얌전히 쉬고 있어.”
나의 말을 알아듣는 듯, 펜리르는 턱을 괴고 엎드렸다.
녀석의 표정은 느긋해 보였고, 돌아선 나는 연병장을 가로질러 입구에 도착했다.
“좀 이따 보자!”
손을 흔드는 겨울의 인사를 끝으로 연병장의 입구는 잠시 봉인되었다.
얼쩡거리며 사고 치는 놈들이 없길 바라며, 나는 일행들이 기다리는 내성 입구로 향했다.
“다 좋은데 이게 문제네.”
“그러게요. 도시 같은 곳으로 나가면 머물 곳이 마땅치 않겠어요.”
겨울의 말마따나 펜리르를 데리고 어딜 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닐 것 같다.
훈련받은 병사들마저 저 모양인데 시민들은 어떻겠나.
보나마다 ‘끄어어억!’거리며 난장판이 될게 눈에 선했다.
“하지만 멋있을 것 같아요.”
겨울은 기대에 가득 찬 눈으로 솔직한 심정을 드러냈다.
나도 그럴 거라고 생각한다.
두려움으로 시작된 사람들의 관심은 호기심으로 바뀌게 될 것이고, 안전이 담보된 사람들의 호기심은 감탄으로 이어질 것이다.
녀석은 그럴만하니까.
백색과 은색의 털이 섞인 펜리르의 모습은 멋있다 못해 아름답기까지 했다.
그 사이 도착한 내성 입구.
잡담을 나누며 걷던 나는 빅터와 대화 중인 낯선 남자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나이는 대략 50대 중후반일까.
냉랭한 그의 첫인상에서 막연하게 한 남자를 떠올렸다.
‘루드겐 마이어.’
뚜렷한 증거는 없지만, 예민해진 나의 오감은 눈앞에 있는 저 남자에게 까닭 모를 적대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틀림없다.
이런 나의 예감은 이제껏 한 번도 어긋난 적이 없었다.
“안으로 드시지요. 기다리고 계십니다.”
남자는 무감정한 음성으로 동행을 권유했다.
그에 빅터의 걸음이 움직였고.
“어서 오십시오. 빅터 공.”
모습을 드러낸 스벤 자우어 백작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우리를 맞이했다.
* * *
스벤 자우어 백작.
빅터와 함께 브라함의 군권을 양분한 권력의 실세이자 정적.
그러나 호사가들은 아직 빅터의 아성을 넘기엔 무리라고 평가하고 있었다.
표면적인 이유는 개인의 무력 차이였지만, 그보단 작은 그릇의 크기가 결정적이었다.
소심함 때문이다.
극히 조심스러운 그의 성격은 황제의 신중함을 만나 안전과 실적 제일주의로 굳어졌다고 한다.
“사라센을 공격하자는 겁니까?”
그러니 얼마나 놀랐겠는가.
그런 스벤에게 있어 빅터의 제안은 기름통을 지고 불속을 걷자는 말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필요 이상으로 놀라는 저 표정이 그의 심경을 대변하고 있을 터.
마치 사형선고라도 받은 것처럼, 스벤은 넋이 나간 얼굴로 빅터를 바라보았다.
그의 당황스러움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최근 카렌 영지에서 국지전이 있었다지요? 그것도 수차례나.”
“그, 그야 늘 있어 왔던 일 아닙니까. 몇 놈이 와서 행패 좀 부린 걸 국지전이라고 하면 제국은 벌써 전란에 휩싸였을 겁니다.”
비밀을 들춰내는 빅터의 말에 스벤은 애써 태연함을 유지하며 대답했다.
하나 얼굴에 드리워진 어색함을 감추기엔 부족했으니.
“허물을 들추자고 온 게 아닙니다.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이었으니 하는 말이지요. 놈들이 아케른으로 왔다면 저희도 당했을 겁니다.”
빅터는 공감을 가장한 유도 심문을 했다.
저 빤히 보이는 수법에 설마 걸려들까 싶었지만.
“흠… 빅터 공께선 뭔가 아시는 바가 있나 봅니다?”
궁금함을 못이긴 스벤은 결국 빅터의 미끼를 덥석 물고 말았다.
“그놈들은 강화 인간이라는 녀석들입니다.”
“강화… 인간이요? 무얼 강화했다는 겁니까.”
“강제로 승급을 시킨 것이지요. 침입한 적들이 모두 6성급이었던 건 이 때문이었습니다.”
“대관절 그게 무슨…….”
설명을 듣던 스벤은 말끝을 흐리며 곁에 있던 남자를 바라보았다.
“루드겐, 자네는 이런 내용을 알고 있었는가?”
그리고 그는 내가 찾고 있던 남자의 이름을 자연스레 입에 담았다.
“아니요. 저도 처음 접하는 소식입니다.”
루드겐의 대답은 예상대로였다.
그에 빅터는 전후 사정을 설명했고, 나는 말없이 루드겐 마이어를 바라보았다.
어머니의 원수로 예상되는 남자.
특별할 것 없는 모습이었건만, 날카로운 안광만큼은 눈에 띄었다.
욕심.
야망.
그리고 비열함까지.
남다른 재주가 없더라도 알아볼 만큼, 저 남자의 분위기는 탐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저러니 다른 살림을 차리고 있었지.’
리베에 있는 철광산에 비밀 투자를 한 것은 흔한 귀족의 돈지랄이 아니었던 것이다.
“바빌리안에 있는 흑마탑에서만 이미 50명에 달하는 강화 인간이 확인되었습니다. 남은 흑마탑 세 곳을 합치면 어떻게 될 거라 생각하십니까.”
“허어…….”
“놈들이 먼저 움직이면 이곳은 버틸 수 없을 겁니다.”
스벤의 얼굴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현시점에 그만한 적을 감당할 수 있는 곳은 빅터가 상주하고 있는 아케른이 유일한 탓이었다.
아니, 실제로 그 병력이 집중해서 내려온다면 아케른도 어찌 될지 모른다.
빅터가 있다 한들 홀몸이요, 클레어 고모님과 내가 뒤를 받친다다고 해도 방어할 수 있는 전선은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7성급 이상이 스벤 자우어 본인뿐인 카렌의 입장이야 말해 뭐 하겠는가.
상대와 최상위 전력이 비슷한 카렌은 6성급 기사들이 승부를 가르는 열쇠가 된다.
전쟁은 치열한 소모전으로 발전될 것이고, 결국은 병력 생산에 유리한 사라센의 승리로 이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황제 폐하께서 쉽게 움직일 리 없지 않겠습니까.”
“황제 폐하께서는 움직이실 겁니다.”
“흠… 빅터 공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이유가 있다는 건데, 한번 들어 볼 수 있겠습니까.”
스벤은 붙잡은 미끼를 들고 한걸음 물러섰다.
뒤늦은 신중함으로 버텨 보려는 듯했지만.
“죽지 않은 망령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신탁의 기사 8인 중에 생존자가 있습니다.”
이어진 빅터의 말에 스벤은 완전히 허물어지고 말았다.
“그, 그럴 리가 없잖습니까?! 그때 다 처리됐을 텐데…….”
“카론과 루즈가 여전히 생존해 있는 것 같더군요.”
거듭된 빅터의 증언에 스벤의 얼굴은 아예 흙빛으로 변해 갔다.
확연하게 다른 온도 차이.
빅터와 스벤은 같은 사실을 두고 전혀 다른 모습으로 상황을 받아들였다.
이후의 세상을 걱정하는 빅터와 자신의 앞날을 걱정하는 스벤.
저러한 스벤의 모습은 본인들이 한 짓이 있는 까닭이었다.
“분명히 다 처형됐을 텐데요? 심지어 진의 아내마저도 루드겐이 따라가서 해치웠단 말입니다!”
이렇게 말이다.
당황한 스벤의 입에선 묻지도 않았던 말이 거침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덕분에 어머님의 원수가 어떤 놈인지 명백하게 밝혀진 상황.
“이상한 일이군요. 신탁의 기사들을 흑마탑으로 수송한 건 스벤 공이잖습니까?”
“그랬었지요.”
생각지도 못한 스벤의 자백으로 나는 부모님의 원수를 한자리에서 마주하게 되었다.
황제의 명을 받아 작전을 지휘한 건 스벤이었으니까.
“한데 카론과 루즈는 어째서 독살을 피할 수 있었을까요?”
“그, 그걸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나의 존재를 모르는 스벤은 쩔쩔매며 빅터의 말에 대답했다.
“누군가 내통한 게 아닌 이상, 그 두 사람이 살아날 가능성이 없지 않겠습니까.”
“크허험! 설마 지금 그 내통자가 저라고 말씀하시려는 겁니까?!”
“정황이 그러니까요. 진의 아내도 처리했다고 하셨는데, 시신을 확인하신 게 맞는지도 의심스럽군요.”
정색하는 스벤을 보며 빅터는 계속해서 여죄를 추궁했다.
어머니의 죽음에 얽인 감춰진 내막과 당시의 상황들을.
“납치한 진의 아내를 놓치긴 했지만 분명히 쫓아가서 죽였습니다.”
지켜보던 루드겐 마이어가 드디어 스스로 사실을 인정했다.
자신이 나의 어머니를 죽였노라고.
“죽은 걸 봤다고요? 아닐 텐데… 쫓다가 놓친 게 아닙니까?”
때를 기다리던 나는 루드겐의 말꼬리를 붙잡았다.
“…실례지만 누구신지.”
“특별할 것 없는 사람입니다. 다만, 깨끗하지 못한 귀공의 일처리 덕에 고생 중인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면 되겠네요.”
기묘한 설명과 책임 전가에 루드겐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나는 그저 무표정하게 마주할 뿐.
어차피 박살 낼 얼굴이니 사용할 수 있을 때 마음 놓고 쓰라는 마지막 배려였다.
“죽였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 루드겐과 나의 긴장감은 스벤의 질문으로 일단락됐다.
대답을 기다리는 스벤의 얼굴에 의심이 서리기 시작했고, 루드겐은 불편한 기색을 감추며 차분하게 설명을 이어 갔다.
“죽은 것과 마찬가지였으니까요. 치명상을 입고 계곡에 떨어졌으니 무사했을 리가 없습니다.”
“흐음, 한데 왜 죽었다고 내게 보고한 건가?”
“나중에 함께 현장에 가서 보셨잖습니까. 거기서 만삭의 몸으로 살아난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살아났다.
뱃속에 있던 나를 살리려고…….
그때 죽이지 못한 복중의 아이가 이곳으로 되돌아왔으니 이 또한 운명일 터.
‘열심히 버둥거려 봐.’
나락으로 떨어뜨려 줄 테니까.
뒤늦게 잘잘못을 가리는 스벤과 루드겐의 모습을 나는 서늘한 눈동자에 새겨 넣었다.
나의 아비를 해하려 했던 놈과 나의 어미를 죽음으로 몰아간 놈.
약속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마지막을 선물하겠다고.
내 목숨 99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