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오, 마침 돌아오시는군요. 안 그래도 찾아뵈려고 했던 참입니다.”
“무슨 일인가.”
“우리가 꼭 무슨 일이 있어야만 마주하는 사이는 아니지 않습니까. 카리프 님은 저의 빛이자 희망이시고, 저는 그런 카리프 님을 보좌하는 기쁨으로 하루를 살아가는…….”
“시끄럽다.”
시작되는 자하르의 수다를 잘라 내며 카리프는 소파에 앉아 등을 기댔다.
카잔과 아리안의 접경 지역인 마주앙 영지.
마론 후작의 도움으로 새롭게 자리한 이곳은 과거 벌목장으로 유명했던 ‘바통’이라는 지역이었다.
이젠 휑하니 비어 버린 숲과 빈 건물만이 남아 과거의 번영을 추억하는 을씨년스런 마을.
노쇠한 영주를 닮은 바통은 오가는 인적이 사라진 전형적인 유령 마을이었다.
“제재소 건물이 이토록 유용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넓고 큰데다가 외지기까지 하니 일하기가 더할 나위 없이 좋군요. 노이의 땅이 발각된 것이 오히려 득이 돼 버렸습니다.”
자하르는 찻물이 끓는 동안 쉴 새 없이 입을 놀려 댔다.
여기서 멈추면 자하르가 아닐 터.
“얼마 전 기사 수련소에 교관으로 들어간 녀석들 있잖습니까. 아까 낮에 보고서가 왔는데, 세 군데 모두 지원자들이 제법 되는 것 같더군요. 다 합치면 스물일곱 명이나 됩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코딱지만 한 훈련소들인데 그렇게 출세에 눈먼 놈이 많다니요. 뭐, 그 덕에 우리는 앉아서 사람을 모으게 됐으니 축하해야 할 일이군요. 게다가 카잔으로 파견 나간 놈들도 조만간 연락이 올 테니, 거기까지 포함하면 이젠 그럴듯한 모양이 잡힐 것 같습니다.”
저 긴 얘기를 풀어내자면 간단하다.
아리안에 있는 사설 기사 훈련소에 카리프의 수하들이 교관으로 있다는 것.
그곳에서 그들은 훈련생들을 꼬드겨 이곳으로 보내고 있었다.
거기에 잠입해 들어간 카잔의 사정도 꽤나 긍정적이었으니, 이들의 계획은 톱니바퀴처럼 착착 맞물려 성공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아리안에 유달리 둔재가 많은 탓일까요? 쉽게 승급할 수 있다고 하니까 지원자들이 계속 몰려드는군요. 이참에 마법 학교에도 손을 쓸 예정입니다.”
“너무 요란 떨어 망치지 마라.”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다. 적당히 먹고 빠져야지요, 적당히. 의심받을 때쯤이면 이미 목표량은 모두 채워지고 난 이후일 겁니다.”
카리프의 주의를 흘려들으며 자하르는 조심스레 차를 따랐다.
그대로 좁은 쟁반 위에 찻잔을 올리곤 카리프가 앉은 자리로 천천히 걸어갔다.
“오∼ 오늘은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습니다. 역시 집중력이 늘어난 모양이군요. 붉은 로즈마리의 효과는 확실히 탁월한 것 같습니다. 카리프 님도 꾸준하게 복용해 보시지요.”
대답 없는 카리프였으나 자하르는 괘념치 않았다.
누가 듣건 말건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으니까.
그저 떠들고 있다는 게 재미있고 즐거울 뿐이었다.
“사마르는 네자르 황제에게 인가를 얻은 것 같더군요. 사라센 군대에서 지원자를 받아 강화 인간으로 개조하고 있다고 합니다.”
“어리석은 놈들.”
찻잔을 건네받은 카리프는 자하르가 전한 소식에 냉소를 보냈다.
그들의 연구 방식은 잘못되었으니까.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놈들이죠. 그 부작용을 어찌 감당하려는지 쯧쯧…….”
강화 인간 실험의 창시자인 자하르는 최근 가속 실험을 통해 부작용을 예견했다.
자아를 잃은 강화 인간의 폭주와 자멸.
그것도 운이 좋을 때 상황이고, 최악의 경우 통제 불가능한 마인이 돼 버릴 가능성도 있었다.
“사마르는 아직 모르고 있을 겁니다. 아니, 알고 있지만 무시했을 수도 있겠군요. 애초에 사람의 자아를 지워 버리겠다는 발상을 굉장히 좋아했으니까요. 물론 시작은 제가 했습니다만… 어쨌건 실수와 잘못된 판단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중요한 건 이후에 어떻게 대처하는 가. 이것이 중요한 문제인 겁니… 콜록! 콜록! 아, 어제부터 갑자기 건조해진 느낌이군요.”
뜬금없이 공기의 질을 탓한 자하르는 붉은 로즈마리 차를 홀짝이며 목을 축였다.
저게 과연 건조한 공기 탓일까.
누구라도 저 따위로 말을 해 대면 목이 성하질 않을 텐데 말이다.
“흠흠!”
찻잔을 내려놓은 자하르는 헛기침을 하곤 다시 말을 이어 갔다.
“하여간 당시에 저는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사마르 그 인간은 제 얘길 듣지 않았어요. 오히려 저를 강화 인간 연구에서 제외시키려 했지요. 빌어먹을 늙은이가! 죽을 라고! 나중에 흑마탑을 점령하면 그 인간의 최후는 제 손에 맡겨 주시면 감사하겠군요. 그냥 갈기갈기… 크흠흠. 아무튼 그 인간은 머지않아 후회할 겁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늦었다고 봐야죠. 사라센은 카리프 님 손에 떨어지게 될 것이고, 흑마탑의 주인은 제가 될 겁니다. 그것만은 양보할 수 없으니 넘볼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군요.”
숨도 안 쉬고 이어지는 말을 들으며 카리프는 이런 생각을 떠올렸다.
사마르가 자하르를 밀어낸 건 실험 실패 때문이 아닐 거라고.
저런 수다를 끝도 없이 듣는다는 건, 생각보다 엄청난 고역인 까닭이었다.
“그에 비해 우리의 전사들은 완벽하잖습니까? 카리프 님을 필두로 한 저희의 강화 인간은 정상적인 사고와 행동이 가능한 완전한 지성체임과 동시에 훌륭한 무술 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새로운 종의 탄생이라고 봐도 무관하겠지요. 하여 저는 앞으로 이들을 강화 인간이 아닌 신인류라고 부를 생각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좋은 생각이군.”
“그렇죠? 깡통 같은 사마르의 강화 인간 따위와 동급으로 불려선 안 될 테니까요.
“좋을 대로 하게. 또 할 말이 있는가?”
“음…….”
“수고했다.”
카리프는 서둘러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더 앉아 있다간 귀에서 피가 나올지도 모르니까.
* * *
“나중에 오라니까 뭐가 그리 급해서 벌써 찾아왔누?”
“다시 갈까요?”
“됐다. 거기 앉아서 잠시 기다리고 있거라.”
클레어는 바쁘게 서재 안을 오갔다.
몇 가지 서적을 꺼내 들춰 보고는, 노트에 필사를 한 후 나에게 돌아왔다.
“그래, 마나 수련을 정식으로 받은 적이 없다 이 말이더냐.”
“네. 스승님과 함께 하던 첫날 코어가 망가진 걸 알았죠. 그 이후로 신체 단련에만 집중했어요.”
그에 클레어는 알겠다는 듯 잘게 끄덕였다.
그러고는 손을 휘적거리며 뒤돌아 앉기를 지시했다.
“한번 보자꾸나.”
등 뒤로 다가온 클레어는 날개 뼈에 손을 대고 마나를 흘려보냈다.
빅터와는 사뭇 다른 움직임.
빅터의 마나가 무겁게 흐른다면, 클레어의 마나는 부드럽고 가벼운 느낌으로 빠르게 흘러갔다.
“흐음, 마나로드가 깨끗하구나. 통로도 크고, 단단하고, 사지 곳곳으로 잘 뚫려 있다. 코어만 멀쩡했다면 8성을 노려볼 만한 자질을 갖췄는데 아깝게 됐구나.”
클레어는 말끝에 아쉬움을 남기며 마나 운용을 계속했다.
‘8성이라…….’
신경 쓰지 않는다.
나는 더 큰 걸 바라보고 있으니까.
나의 아버지가 그러했듯, 목표는 오러를 뛰어넘는 그 무언가다.
“이 흐름을 기억해라.”
클레어는 몸 중앙에 모인 마나를 움직여 심장을 지나 왼쪽 팔과 다리, 그리고 오른쪽 다리와 팔을 역순으로 돌아 올라와 다시 중앙으로 모았다.
보통이라면 그 자리에 코어나 서클이 있었겠지만.
“너는 이곳이 텅 비었으니 흩어진 마나를 모아서 다시 끌고 나가야 한다. 이해하겠느냐?”
“네.”
“모인 마나를 붙잡아 봐라.”
…라고 해도 그게 쉽게 될 리가 없다.
클레어의 간섭을 벗어나자마자 마나는 응집력을 잃고 흩어지기 시작했다.
“서두르지 말고 흩어지는 마나에 집중해라.”
클레어의 지도에 따라 수련은 계속되었다.
기본 중에 기본이라 할 수 있는 마나의 흐름을 잡기 위한 훈련.
대기의 마나를 자력으로 느끼고 몸으로 흡수하는 모든 과정이 선행되어야 했으나, 이미 강제로 주입당했으니 이 과정은 생략됐다.
이후 흡수한 마나로 코어로 만드는 것과 마나를 정제해 오러로 치환하는 긴 수련이 필요했지만, 이 또한 나와 상관없으니 모조리 무시.
모든 과정이 생략된 채 오로지 몸 안에 들어온 마나에만 집중했다.
본래라면 어림도 없는 얘기였겠지만.
“그렇지. 내가 붙잡아 놓은 마나에 살짝 얹혀 가면 된다. 그러면서 감각을 찾아라.”
천재 중에 천재라는 클레어의 도움을 받으며 나는 시간을 뛰어넘는 수련을 계속하고 있었다.
덕분에 조금은 쓸 만한 수준에 도달했다.
“이제 혼자 해 봐라.”
클레어가 모아 둔 마나를 이어받아 조심스레 마나로드를 따라 이동시켰다.
“그렇지. 잘하고 있다.”
하지만 얼마 못 가서 다시 흩어지길 반복.
“실망할 것 없다. 수련 첫날에 마나를 붙잡은 것만 해도 기적과 같은 일이니까.”
클레어의 격려를 받으며 밤늦도록 수련은 계속되었다.
고작 몇 초를 붙잡던 게 어느덧 10초를 넘기기 시작했고, 그렇게 늘어난 시간은 다시 20초.
더 길게 이어지면서 30초 이상 이어졌다.
“이제 감은 잡았나 보구나. 처음이 힘들어서 그렇지, 일단 한 바퀴를 돌릴 수 있으면 그때는 완전히 달라질 게다.”
“후…….”
수련을 멈춘 나는 긴 호흡을 내뱉으며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시간은 벌써 자정을 넘어 새벽 1시.
“아, 벌써 시간이… 눈치 없이 죄송합니다.”
깜짝 놀란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됐다. 나도 오래간만에 재미있었다. 오늘은 이만 가 보도록 하고, 내일은 확실히 회전시켜 보자꾸나.”
“네, 감사합니다.”
수련의 첫날은 그렇게 지나갔다.
다음날 아침.
“이게 어찌 된 게냐?”
일찍부터 시작된 마나 수련은 클레어의 호들갑으로 다시 멈춰 버렸다.
첫 수련부터 무사히 한 바퀴를 완주시켰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저의 천재성이…….”
“헛소리하지 마라. 보아하니 밤새 잠 한숨 안 잔 모양이구나.”
클레어는 귀신같이 속사정을 간파했다.
맞다.
나는 밤새도록 마나와 씨름했고, 새벽이 밝아 올 때쯤엔 완주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래, 그 정도 열정은 있어야 뭘 해도 해 먹겠지. 빈둥거리는 저 녀석과는 자세가 다르구나. 마음에 든다.”
클레어에게 빈축을 산 녀석은 다름 아닌 테오였다.
스승 못지않은 천재성을 타고났다는 젊은 마법사.
“제놈이 특별한 걸 너무 일찍 알아 버려서 글렀지. 8서클은커녕 저래서야 7서클이나 올라갈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쯧…….”
클레어는 자신의 수제자를 바라보며 쓰게 혀를 찼다.
뭐, 그런 것 있잖은가.
재능이 너무 많아서 노력할 이유가 없는 천재 같은 것.
아마도 테오는 그런 부류인 것 같았다. 그리고 스승인 클레어는 그것이 못마땅한 것이고.
‘한눈 팔 때 알아봤지.’
어쨌거나 지금은 남 신경 쓸 때가 아니니까.
“마나의 흐름을 잡았으니 이젠 한 점에 밀어 넣는 걸 해 보자. 이것만 할 수 있어도 어제처럼 멍청하게 당하진 않을 게다.”
“그러면 완전히 걷어 낼 수 있게 되는 건가요?”
“되겠냐?”
“아…….”
클레어는 기대에 찬 나의 말에 찬물을 들이부었다.
그것도 얼음까지 동동 띄워서.
하기야 마나로 마법을 막을 것 같으면 누가 힘들게 마력과 오러를 수련하겠나.
“응축시키는 밀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최소한 눈앞에서 펑펑 터지는 일만은 피해야 할 것 아니냐. 조금만 빗겨 낼 수 있어도 상황은 크게 바뀔 수 있을 게다.”
이어진 클레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련을 재개했다.
나의 목적은 단순히 마나를 다루기 위함이 아니었으니까.
반응하지 않은 시스템을 자극하기 위한 기폭제.
반복되는 행동으로 인해 침묵하는 시스템이 움직여 주길 바라는 것이었다.
‘그것만 된다면.’
다 씹어 먹을 텐데 말이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수련을 계속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한낮이 지나갔고, 또다시 시간이 흘러 태양 빛이 오렌지색으로 물들어 갔다.
훈련을 시작한 지 대략 10시간이 지나갈 때쯤.
“오늘은 이만하자꾸나.”
다가온 클레어는 손바닥을 털며 수련의 끝을 알려 왔다.
하지만 나는 반응할 수 없는 상황.
“뭐하는 게냐. 이제 그만하고 들어가자.”
“먼저 들어가세요!”
채근하는 클레어의 말을 흘리며 나는 뚫어져라 눈앞을 응시했다.
드디어 놈이 움직이기 시작했으니까.
[시스템이 체내의 활성 에너지를 감지했습니다.]
침묵하던 녀석이 반응하며 수많은 문자들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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