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콰지직―
얼어붙는 몸을 움직여 얼음벽을 깨부쉈다.
이마저도 예측한 듯, 테오는 내딛는 발 아래로 바인딩을 시전했다.
완벽하게 걸려든 나의 오른발.
연이어 날아오는 얼음 공격을 해머를 들어 막아 냈다.
그러나 접촉 순간 폭발하는 힘은 피할 수 없었으니.
파아앙!
날아오는 파편을 몸으로 받아내며 어금니를 빠득 깨물었다.
고통 때문이 아니다.
이 순간 나를 열받게 하는 건 통증 따위가 아닌 무너진 자존심이었다.
한눈을 팔아?
테오는 바인딩에 걸린 나를 두고 별을 쳐다보는 여유를 부렸다.
“이 새끼가 사람을 뭐로 보고.”
발목에 휘감긴 마법을 힘으로 뜯어 녀석에게 달려들었다.
이 또한 예상했다는 듯 테오는 미동조차 하지 않고 내 앞에 화염구를 터뜨렸다.
이 타이밍에 화염이라니.
나야 고맙지.
[화염 내성으로 인해…….]
폭발하는 화염을 뚫고 들어간 나는 녀석의 멱살을 움켜잡아 그대로 바닥에 내리쳤다.
“커헉!”
상황은 거기서 종료.
테오는 굼벵이처럼 몸을 비틀며 고통에 몸부림쳤다.
“쯧, 실전이었으면 보기 좋게 죽었겠구나.”
지켜보던 클레어가 혀를 차며 걸어 나왔다.
제자의 패배가 마뜩잖은 듯, 그녀의 얼굴에선 노골적인 실망의 기색이 가득했다.
이길 수 있는 대결을 방심으로 날렸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자면.
나는 이겼지만 이긴 게 아니었다.
나는 그저 녀석의 뒤를 쫓아 정신없이 달리기만 했을 뿐.
전날 상승했던 대미지 20% 증가도 이 대결에선 아무 소용없었다.
‘제길…….’
걸어 나온 클레어는 테오를 지나 내 앞에 멈춰 섰다.
“왜 그렇게 미련을 떤 게냐?”
앞으로 다가온 클레어는 의뭉스런 표정으로 나에게 질책했다.
제대로 이긴 게 아니니 할 말은 없다만.
“무슨 말씀이신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당최 알아들을 수 없었다.
설마하니 약 올리려는 건 아닐 테고.
“마법을 정면으로 받아 낸 이유가 뭐냐는 말이다.”
먹이사슬 최상단의 포식자가 저리 질문하니 무시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피할 수 없으니 받아 낼 수밖에 없잖아요.”
“그래서 그냥 막았다는 게냐?”
“네.”
“저 늙은이가 그런 기초도 안 가르쳐 주든?”
“상대의 예상보다 빠르게 움직이라고 하셨죠.”
“쯧, 저 돌팔이 놈이 멀쩡한 애 하나를 잡을 뻔했구나.”
당연한 대답이었건만, 비난의 화살은 빅터에게 향했다.
나는 졸지에 피해자가 돼 버렸고.
“그건 녀석의 특별한 사정 때문입니다.”
바라보던 빅터는 앞으로 나서며 내 대신 대답했다.
“이미 아시다시피, 이반은 오러를 다루지 못합니다. 당연히 마법을 걷어 낼 수도 없지요. 막아서 버티는 게 녀석이 할 수 있는 최선입니다.”
나조차 생각해 본 적 없던 사실을 말이다.
그에 클레어의 표정이 의뭉스럽게 변해 갔다.
마치 하찮은 핑계라는 듯.
“그래도 체내에 마나를 운용하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아니냐. 쌓아 두지 못한다 뿐이지 일시적으로 두르는 것은 가능할 터인데?”
클레어는 생각조차 해 본 적 없던 방향으로 대화를 이끌었다.
“굳이 오러까지 갈 필요가 있더냐? 마나의 성질이라도 띄운다면 저리 무식하게 얻어맞진 않을 터인데.”
무심히 내뱉는 클레어의 말에 빅터와 베르는 얻어맞은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껏 빅터는 나에게 마나 수련을 가르치지 않았었다.
“표정이 왜 그래. 설마 생각조차 못했더냐.”
“…그러게 말입니다. 제가 지레 포기하고 말았군요.”
애초에 코어가 망가져 있으니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쯧쯧, 미련한 노인네를 스승으로 둬 네가 고생하는구나.”
자책하는 빅터를 두고 클레어는 나를 바라보며 측은한 표정을 지었다.
“나중에 찾아오거라, 내 친히 알려 줄 테니까.”
말을 건넨 클레어는 자빠져 있는 테오를 향해 돌아섰다.
그러고는 쓰게 혀를 차며 말없이 지나쳤다.
멋쩍게 일어서는 테오.
등짝을 문지르던 녀석은 슬며시 고개를 숙이며 클레어를 따라 연병장을 벗어났다.
멀어지는 테오를 보며 베르가 입을 열었다.
“일시적으로 마나를 운용한다라……. 오러로 변환은 못시키겠지만 마법전에서는 유용할지도 모르겠네요.”
내용은 클레어가 말한 마나의 제한적인 운용법.
하지만 의문스러운 건 여전했다.
마나는 그저 원료일 뿐이니까.
그것이 마력과 오러로 바뀔 때야 비로소 특별한 힘이 생기는 까닭이었다.
“마나를 운용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게 있나요?”
“극적으로 변하진 않더라도, 효과는 있을 겁니다. 마력이나 오러라는 게 결국 마나를 응축하면서 성질을 바꾸는 거니까요.”
“흐음.”
“클레어 님께서 하신 말씀은, 마나 자체를 응축해서 마력에 대항할 벽을 만들라는 것인데…….”
이후로 베르의 설명은 길게 이어졌다.
예를 들자면 섞이지 않은 물과 기름과 비슷하다고 할까.
나처럼 맨몸으로 마법을 막아 낸다고 하면, 마법 자체의 위력이 그대로 나에게 전달된다.
물이 있는 곳에 물을 부으면 하나로 합쳐지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마력이나 오러를 운용 할 경우,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고 걷어 낼 방법이 생긴다는 얘기였다.
“단순히 막는 걸로는 이어지는 마력의 후폭풍을 감당할 수 없거든요.”
실제로 나는 막으면서도 잔여 충격을 계속 받아야 했다.
막았지만 막지 못한 것.
즉, 마법이 적중되는 부위가 내 몸이냐, 해머였냐의 차이일 뿐이었다.
후폭풍은 당연히 존재할 수밖에.
“동급 이상의 마력이나 오러를 보유할 경우 해당 마법을 빗겨 낼 수 있는 거죠.”
“다른 곳에 가서 터진다는 건가요?”
“그렇죠. 걷어 냈으니, 최후 충돌 지점에서 폭발하는 겁니다. 행여 직접 가격당하더라도, 마력의 잔재를 지워 낼 수 있는 것이죠. 마법 방어란 이것을 말하는 겁니다.”
그러니 나는 마법을 막은 것이 아니라 다른 부위로 맞은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보통 마나 자체를 사용하는 경우는 없잖아요? 그런 예가 있었나요?”
하지만 뭔가 뜬구름 잡는 느낌인 건 어쩔 수 없었다.
보통 남들이 사용하지 않을 땐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테니까.
“글쎄요. 저도 클레어 님께 처음 들은 얘기라 여러모로 의문이 들긴 하는데… 그래도 클레어 님이니까요. 저희가 모르는 부분이 있을 겁니다.”
“흐음…….”
결국 해 보면 알 거라는 얘기였다.
그러나 다른 경우도 있잖은가.
“아버지는 어떻게 했어요?”
나와 같은 조건을 가지고 있던 사람의 선례가 남아 있었다.
“진은 더 빠르고 더 강한 힘으로 해결했다.”
대답을 마친 빅터는 시선을 돌려 남아 있는 다른 마법사를 바라보았다.
가볍게 고갤 끄덕여 신호를 보냈고.
촤와아아악!
앞으로 나선 마법사는 날카로운 얼음 창을 화살처럼 쏟아부었다.
그에 검을 들어 올리는 빅터.
무표정하게 서 있던 빅터는 느긋하게 검을 내리꽂았다.
분명히 느긋했는데…….
콰가가가각!
지면이 뒤집히며 거대한 암반이 솟아올랐다.
후드득 부서져 내리는 얼음 창.
튀어나온 암반에 막힌 마법은 그렇게 사라져 버렸다.
“…….”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침을 꿀떡 삼키며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물론 이것보다 더 크게 뒤집을 수도 있다. 실제로 진은 이 연무장보다 훨씬 넓은 땅도 뒤집어 세웠지.”
그런데 그게 힘만으로 되는 건가?
나의 아버지가 그런 사람이었다니 내 일처럼 기분 좋긴 하지만, 애초에 이것은 여러 가지로 많은 모순을 가지고 있는 말이었다.
“아버지도 오러가 없었다면서요.”
“그랬지.”
“한데 그게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힘이 문제가 아니라, 무기가 견뎌 내질 못했을 것 같은데요.”
맞잖은가.
이 정도로 엄청난 힘이었다면 사용하는 장비가 먼저 박살 나는 게 이치에 맞을 터였다.
“그건 네 말이 맞다.”
그에 빅터는 순순히 나의 의문에 수긍했다.
하나 계속된 다음 얘기에서 차이점을 설명했다.
“오러가 없을 뿐이지, 그에 상응하는 다른 기운이 있었다.”
특별한 무언가가 있었다는 것.
빅터는 손짓을 하며 주위의 사람들을 물렸다.
그렇게 연무장엔 우리만 남았고.
“일전에 말했던 얘길 기억하는지 모르겠다만, 나는 너와 같은 몸을 본 적 있다고 말했었다.”
텅 빈 주위를 확인한 그레이시는 한 걸음 나서며 빅터의 말을 도왔다.
리베의 쥐구멍에서 있었던 얘길 말하는 것이다.
치료를 받으러 갔다 나눴던 짧은 대화들.
“진의 몸 안에는 마나가 아닌 다른 것이 있었다. 너와 비슷하다던 기운은 이것을 말하는 것이지.”
덤덤한 그레이시의 말에 나는 끄덕이며 대답을 대신했다.
치료를 받고 돌아서던 나에게 그레이시는 특별한 기운이 있음을 지적한 바 있었다.
“진은 그것을 투기라고 말했었다.”
“투기요?”
“그래. 싸우고자 하는 강렬한 염원이 담긴 에너지였지. 한데 너는 더 짙고, 거칠다. 그리고 복잡해.”
그래서 좋다는 걸까, 나쁘다는 걸까.
“그게 무슨 말인가요.”
애매모호한 그레이시의 얘기에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반문했다.
“진의 경우는 순수한 하나의 기운이 몸 안을 채웠지. 하지만 너는 투기와 마나의 흔적들이 남아 뒤섞여 있다.”
“아…….”
되돌아온 그레이시의 말에 그제야 나는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빅터와 여정에 나섰던 첫날 밤.
“스승님께서 마나 운용을 해 주셨어요. 코어가 망가졌다는 것도 그때 알았죠.”
지친 몸을 추스르기 위해 빅터는 나에게 마나를 주입했었다.
그 이후로도 수차례 반복됐었고, 덕분에 나는 빠르게 몸을 회복하며 수련을 이어 나갈 수 있었다.
“그게 잘못됐다는 건가요?”
“아니다. 요점은 너의 시스템이다.”
“시스템이요?”
“그래, 아직 너의 시스템이 투기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구나.”
그레이시의 말은 아직 반응하지 않고 있는 나의 시스템을 말하는 것이었다.
“흠…….”
생각해 보면 늘 어떤 계기가 있었다.
죽도록 얻어맞았을 때 충격 내성이 생겼었고, 불에 타 죽었을 때 화염 내성이 생겨났다.
‘의지력 스텟도 그렇게 생겨났지.’
데스 아이의 상태 이상에 저항하다 새로운 스텟이 발현되었다.
아직 시도하지 않아서 반응이 없는 것일까.
“진은 시스템을 통해 투기를 완벽하게 통제했었다. 시스템 사용자들의 장점이란 것이 그런 부분이지. 나 또한 마찬가지다.”
말을 마친 그레이시는 손을 들어 가볍게 휘적거렸다.
술식을 진행하기 위한 그 어떤 동작도 없는 완벽한 즉발 마법.
나의 몸에 남은 자잘한 상처들은 그의 가벼운 손짓 한 번에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래서 이런 게 가능했지. 반면에 너는 아직 완벽하게 통제되지 않은 것 같구나.”
같은 시스템 사용자로서의 경험인 걸까.
“이런 부분은 빅터 아저씨라고 한들 설명해 줄 수 없는 내용이지. 오로지 시스템 사용자만이 이해 가능한 특별한 영역이다.”
그레이시는 확신에 찬 말투로 내게 말했다.
“게다가 너는 진의 특성을 고스란히 물려받았으니까… 분명히 네 몸에 있는 투기도 발현될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한다.”
의욕 가득해지는 이런 격려까지.
테오와의 대결로 심란했던 마음에 또다시 희망의 빛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문제는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
“스승님께 마나 운용을 받았다는 건 체내에 마나로드는 정상적으로 있다는 얘기가 되겠네요.”
그에 대한 해법은 조용히 듣고 있던 베르를 통해 작은 실마리를 드러냈다.
“흘러들어 온 마나를 홀에 가두지만 않는다 뿐이지, 사용하려 마음만 먹는다면 후배님 스스로 운용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뒤섞인 마나를 정리해 흐름을 만들어 보자는 것.
“그렇게 되면 투기라는 걸 갈무리하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베르의 설명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나의 발걸음은 이미 그곳을 벗어나기 시작했으니까.
“어디가요?”
“고모 님에게요!”
나중에 오라던 클레어를 찾아 나는 내성 안으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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