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타인의 고통이 이렇게 재밌을 줄이야.
고양이 앞의 쥐가 된 빅터를 보고 있자니 시간이 어떻게 가는 줄도 모를 지경이었다.
이 놀라운 광경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대박…….”
“적절한 표현이네요.”
달리 무슨 말이 필요하겠나.
수긍하는 겨울의 말처럼, 내 입을 벗어난 두 글자는 완벽하게 현 상황을 정리했다.
이리도 일찍 사용하게 될 줄 몰랐는데 말이다.
새로 배운 이세계의 단어는 마법 같은 설득력을 보여 주며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했다.
하여 무적의 단어 리스트에 등록된 바.
“대박이란 말 자체가 대박이네.”
말버릇이 될 것 같단 예감을 뒤로 하고 빅터의 상황을 주시했다.
“금제를 해제하고 싶다 이 말 아니냐?”
“네. 맞습니다, 고모님.”
“그럼 그렇다 말하면 되지. 사내놈이 뭘 그리 갖다 붙이는 말이 많은 게야?”
“크흠…….”
“기분 나빠 보인다?”
“아, 아닙니다, 고모님.”
마음속으로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내며 거침없는 클레어를 응원했다.
“아무튼 금제는 우리 애들과 상의해 보도록 하마. 방법이 있을 테니 기다려 보거라.”
“감사합니다, 고모님.”
“그래, 말로만 나불대지 말고 물질과 정성을 채워 감사를 표현해라. 그래야 제자 놈도 배울 거 아니냐.”
“허엄…….”
겸연쩍어 하는 빅터를 보며 곁에 있는 베르에게 슬쩍 물어보았다.
“그런데 정말 의외네요?”
“어떤 게… 아, 스승님이요?”
“네.”
집안 어른에게 깍듯한 모습이야 특별한 건 아니지만, 조금은 별나서 하는 말이다.
그 누구도 아닌 빅터니까.
“스승님 가문이 절멸할 뻔했는데 그걸 살려 내신 게 고모님이셨대요.”
“아…….”
나름의 사연이 있던 것이다.
“그 일로 고모님은 사랑하는 남자와 원수가 되었고, 그 뒤로 지금껏 혼자 지내셨다더군요.”
그것도 아주 특별한 사연이.
더 깊은 얘기야 당장은 알 수 없지만, 빅터가 안고 있을 마음의 짐은 충분히 느껴졌다.
빅터의 성공은 고모의 희생 위에 만들어진 것이니까.
“어쩐지… 다 이유가 있던 거네요.”
“그렇죠.”
베르와 나는 작게 주억거리며 빅터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사연을 듣고 보니 마냥 고소해할 상황은 아닌 것 같고.
받은 은혜에 보답하려는 빅터의 모습에서 묵직한 울림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감동도 잠시.
“네 녀석 제자 말이다.”
두 사람의 대화는 갑자기 나의 얘기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놈이 무슨 실수라도 했습니까?”
“아니다. 꽤 기대치가 높다고 들어서 말이다. 내가 키우는 아이와 한번 붙여 봤으면 싶구나.”
그에 두 사람의 시선이 이쪽을 향해 돌아섰다.
“저요?”
나는 손가락을 들어 내 얼굴을 지목했고.
“그래, 너.”
클레어는 입꼬리를 당기며 짧게 대답했다.
“어디 생긴 것만큼 실력도 뛰어난지 보자꾸나.”
“그것도 재미있겠군요.”
내 의견은 상관없이 그렇게 제자 간의 대결은 성사돼 버렸다.
시간은 내일 오전.
“클레어 님이 말씀하시는 사람이 수제자라면 고생 좀 하실 것 같은데요.”
베르는 불길한 소릴 내뱉으며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늘 그랬듯, 그런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으니.
“내 수제자 놈 건방이 하늘을 찔러서 안 되겠더구나. 이참에 따끔한 맛을 보여 줬으면 좋겠거늘.”
나의 대전 상대는 클레어의 수제자였었다.
이름도 성별도 모를 그 누군가 말이다.
“잘됐습니다, 고모님. 저 녀석 건방도 하늘을 찌르는 참이니 이번 기회에 겸손을 가르치면 좋겠군요.”
나 완전 겸손한데?
졸지에 싸가지 없는 놈이 돼 버린 나는 툴툴거리며 혀를 찼다.
그러고는 목소리를 낮춰 상대의 정보를 물어보았다.
“어떤 놈인데요?”
“테오라는 사람인데, 대단한 천재성을 가지고 있죠. 이제 겨우 20대 중반에 접어들었는데 벌써 7서클을 바라보고 있다더군요.”
돌아온 베르의 말은 일단 대단하다는 얘기였다.
거기에 또 다른 설명까지.
“타고난 재능이 워낙 뛰어나서 배틀 메이지 수련을 받고 있지요… 이 대결은 후배님이 질지도 모르겠습니다.”
불길한 베르의 말은 나의 패배를 입에 담으며 정점으로 향했다.
“흐음…….”
도대체 어떤 놈이길래 베르가 저런 말을 꺼내는 걸까.
평소 빈말을 꺼내지 않는 그였기에 은근히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복잡한 문제들은 알아서들 하시고… 내일 보도록 하지.”
대결을 확정한 클레어는 느긋하게 걸어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 * *
짙은 녹음이 우거진 대수림 중앙.
풀숲을 가르며 나타난 거대한 몬스터는 압도적인 덩치를 뽐내며 눈앞을 가로막았다.
어깨까지의 체고가 대략 2M.
뾰족한 어금니는 통나무처럼 뻗어 있고, 두꺼운 목과 커다란 대가리는 보는 것만으로 사람을 질리게 만들었다.
“고릴라가 너무 크다고 생각하지 않나?”
“당연하지. 이건 고릴라가 아니라 팡고라는 놈이다.”
그 앞에 선 술과 부족장은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누며 무기를 거머쥐었다.
고릴라건, 팡고건 무슨 상관인가.
술의 도끼 한 짝은 놈의 뒤로 날아가 버렸고, 분투 중인 부족장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공격이 통하지 않는 탓이다.
두꺼운 가죽과 단단한 근육을 뚫기엔 부족장의 공격이 미묘하게 부족했다.
조금만 더 강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텐데.
그 애매한 차이로 인해 부족장과 술은 위험한 지경에 놓이게 됐다.
“하여간 네놈이 늘 문제다! 내가 그냥 가자고 말하지 않았나. 먹을 것도 아닌데 그 멧돼지 새끼들은 뭐 하러 챙기느냔 말이다!”
창대를 거머쥔 부족장은 얼굴을 구기며 신경질적으로 소릴 질렀다.
“그냥 멧돼지가 아니다! 이 녀석들은 붉은 멧돼지다!”
알게 뭔가.
저 새끼 멧돼지를 챙기려다가 이 엄청난 괴물을 만나게 됐는데.
뜬금없는 술의 행동이 야속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펜리른지 뭔지, 망할 워 울프는 또 어디로 간 거고…….
쉽지 않은 여정이 될 거라 생각했지만 이건 좀 너무했다.
밥 먹을 때 외엔 제 하고 싶은 대로만 하니 여정 자체가 운에 맡기는 기묘한 상황이 돼 버린 탓이었다.
“하필 사라져도 이럴 때…….”
아마 제 입맛에 맞는 고기를 찾아 어딘가에서 사냥 중인 것이 분명했다.
눈앞에 저리 튼실한 놈이 있는 데 말이다.
이곳에 있었으면 배불리 먹고 기분 좋아졌을 텐데.
그러면 두 사람을 태우고 바람처럼 달려 순식간에 대수림을 지나쳤을 것이다.
그러다 다시 내동댕이쳤을 테고…….
지금 이곳에 있는 부족장과 술은 그런 반복된 행동 끝에 결국 팡고를 만나게 되었다.
위험한 상황은 그저 덤.
피하긴 글렀으니 어떻게든 버텨야 하는 상황이었다.
“술, 정신 똑바로 차리고 들어라. 내가 오른쪽으로 파고들어 가 놈의 시선을 돌려놓겠다. 오래 버티지 못할 테니 그 순간을 노려 놈의 뒤를 공격해라.”
“알겠다. 척추를 갈라서 두 번 다신 일어설 수 없게 만들어 주지.”
“좋아, 간다!”
신호를 던진 부족장은 오른편으로 크게 돌아 달려갔다.
이미 약속한 대로, 따라오는 놈의 시선을 모아 술에게 공격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타이밍 좋게 뒤를 잡는 데 성공한 술.
손도끼를 움켜진 술은 팡고의 뒤통수를 향해 높게 뛰어올랐다.
튀어나오는 고성을 참으며, 은밀함과 신속함을 더해 치명적인 일격을 준비했다.
하지만 그 순간.
“어억?”
뻗어 나온 커다란 손이 술의 머리를 움켜잡았다.
그대로 터트릴 것 같은 흉흉한 기세.
당황한 부족장의 핼버드가 팡고를 향해 날아들었고, 붙잡힌 술의 도끼는 놈의 손가락을 내리쳤다.
하나 팡고의 움직임은 변화가 없었으니.
“여기다, 이 자식아!”
부족장은 고함을 지르며 핼버드를 거둬들였다.
이대로 가다간 술의 머리가 날아갈 터.
회수한 창대를 휘둘러 놈의 팔을 크게 내리찍었다.
크워어어억!
그러나 돌아오는 건 짧은 괴성 뿐, 술을 움켜진 팡고의 손은 머리 위로 높게 추켜 올라갔다.
그대로 내리칠 것 같은 절체절명의 상황.
“안 돼에에에에에에……엥?”
기함을 지르던 부족장의 표정이 멍하게 바뀌기 시작했다.
까드드득!
엄청난 소리가 놈의 등 뒤로 들려온 탓이었다.
부드럽게 출렁이는 은빛 털에 새파란 눈동자.
“이 자식… 나타날 거면 일찍 나타나 주지.”
그림자처럼 등장한 펜리르를 보며 부족장은 밀려오는 안도감에 주저앉고 말았다.
크워워워워워워!
뒷목을 물린 팡고가 몸부림을 치며 날뛰기 시작했다.
상황이야 어떻게 돌아가든.
지켜보는 부족장의 눈에선 그 어떤 불안함도 찾을 수 없었다.
펜리르의 승리를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아이고 머리야.”
덕분에 풀려난 술은 옆머리를 문지르며 부족장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그 곁에 털썩 주저앉아 구경꾼이 돼 버렸다.
“괜찮은가?”
“괜찮다. 다만 냄새가 지독하군.”
“무슨 말인가 그게.”
“놈의 손바닥 말이네. 왜 손가락에서 발가락 냄새가 나는지 모르겠더군. 붙잡혀 있는 동안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멍청하긴. 앞발이니 그렇지.”
“어억? 그게 발이라는 건가?!”
“그렇다. 게다가 놈은 자기가 싼 똥을 앞발로 뒤적거리는 습관이 있다더군.”
“커어억?! 설마 오른 발인가! 아니라고 말해라!”
사색이 된 술은 온몸을 킁킁대며 부산스레 움직였다.
“그만하고 싸움에 집중해라. 이제 끝날 것 같으니까.”
부족장의 기대에 부응하듯, 펜리르는 팡고의 등판을 움켜잡은 채 두꺼운 목을 거칠게 뜯어냈다.
하나 생고기는 역시 싫은 걸까.
퉷―
살덩이를 내뱉은 펜리르는 드러난 팡고의 목뼈를 향해 칼날 같은 이빨을 쑤셔 넣었다.
뿌드드득!
소름 끼치는 소리와 짧게 이어지는 경련.
팡고의 머릴 물어뜯은 펜리르는 하늘을 향해 사납게 고개를 휘둘렀다.
휘익―
그렇게 팡고의 머리는 허공으로 사라졌고.
아우우우우우우우―
펜리르는 은빛의 풍성한 갈기를 흩날리며 승리의 포효를 길게 뽑아냈다.
* * *
회의장을 나오자마자 수련을 시작했다.
뭐든 준비를 해야 할 것 아니겠나.
“좋아, 하나 완성!”
[휘두르기 숙련도 5,000/10,000]
오래간만에 집중한 훈련 끝에 기본기 하나가 5단계를 돌파했다.
남은 두 개의 숙련도 역시 완성을 코앞에 둔 상황.
“흠. 천 단위로 계속 능력이 추가된다는 말이구나. 그래, 이제 얼마나 남은 것이냐.”
훈련을 지켜보던 빅터는 나의 상태에 대해 이것저것 질문을 던졌다.
“내려치기와 올려치기 둘 다 4,900대에요.”
“얼마 안 남았구나. 하면 이번엔 어떤 능력이 오르는 것이냐?”
“지금까지 패턴으로 볼 때 대미지가 증가될 확률이 크죠. 한번은 신체 능력 증가, 그 다음은 대미지가 오르더라고요.”
“흠, 그사이 강해진 이유가 그 탓이었구나.”
설명을 들은 빅터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놈도 이젠 힘을 이끌어 줄 기술에 더욱 집중하는 게 좋겠지.”
그렇게 시작된 빅터와의 수련은 지금까지완 달리 세밀한 동작 제어에 초점을 맞추었다.
“좋다. 동작 자체는 나쁘지 않아. 네놈에게 필요한 건 다양한 경험이다.”
같은 무기를 사용하더라도 모두가 다른 스타일을 추구할 테니까.
빅터는 절대적으로 부족한 나의 전투 경험을 지적했다.
“내려치기 이후로도 다음 과정은 수많은 갈래로 나뉜다. 그대로 파고들어 어깨로 밀칠 수도 있고, 바로 올려 밸 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라면 내려친 상태에서 하단으로 이어질 수도 있겠지.”
“흠…….”
“어떻게 전개하든 중요한 건 상황을 읽는 눈이고, 이어지는 행동은 계산이 아닌 본능이다.”
최적의 루트를 찾아가는 움직임.
빅터는 반복된 훈련과 수많은 경험이 토대가 되어야 자연스럽게 나온다는 걸 말하고 있었다.
“우리가 숨 쉴 때 의식하지 않듯이 말이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래서 준비했다.”
“뭘요?”
“경험 쌓기 말이다. 마법사와의 대련도 결국 같은 맥락일 터.”
고개를 돌린 빅터의 뒤로 검방 기사와 창 기사. 그리고 쌍칼과 도끼, 단검 등등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난번에 가볍게 인사했다더구나. 그때는 저 녀석들이 없어서 재미없었을 테니 이번엔 정예들과 함께 다시 해 보거라. 모두 싸우지 못해 안달이 난 놈들이라 좋은 훈련 상대가 되어 줄 게다.”
“허…….”
“한데 어차피 네놈이 유리하지 않겠냐. 이 정도는 해 줘야 네놈 훈련이 되겠지.”
빅터는 곁에 있던 겨울에게 손짓을 했다.
그리고 겨울은.
“야 이 배신자!”
줄 서 있는 정예 기사에게 사기 마법 3종 세트를 시전했다.
“시작하자.”
“그런데 왜 세 명씩인가요?”
“그 정도는 해야 밸런스가 맞지 않겠느냐.”
결국 나는 3:1의 상황으로 훈련을 이어 갔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불리했건만.
어느새 나타난 그레이시는 기사들의 회복을 도우며 나를 궁지에 몰아세웠다.
“마법사와의 대전 핵심은 임기응변이다. 예측과 빠른 행동이 전부지. 여기서 기본을 잡지 않으면, 주의 사항을 알려 준들 네놈은 실전에 옮기지 못할 게다.”
빅터의 훈계를 들으며 쉬지 않고 해머를 움직였다.
그렇게 체력은 서서히 줄어들었고, 그에 따라 나의 몸은 느려지기 시작했다.
“후후, 이제 슬슬 힘이 빠지는 게 느껴지는 구려.”
“귀공의 엄청난 무위 잘 감상했소.”
“이제 그만 끝을…….”
“웃기시네. 누구 맘대로 끝내.”
승리를 예감하는 기사들을 보며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기본 수련 3종이 5단계를 돌파하며 둔기 마스터리 레벨이 6로 상승합니다.]
[둔기의 대미지가 20% 증가합니다.]
[누적 대미지 합계 60%.]
나의 삼신기는 이제야 진화를 마쳤으니까.
감히 나에게서 승리를 예단한 죄.
“다 뒈졌어.”
추가된 대미지 20%를 포함해 악랄하게 돌려줄 예정이다.
콰아아아아앙!
“허억!”
“뭐야 갑자기?!”
뭐긴 뭐야. 이제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지.
종이 짝이 된 방패를 향해 잿빛 해머는 유려한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내 목숨 99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