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우리가 아는 그 고모?”
“맞아요.”
“아버지의 여자 형제를 말하는?”
“그렇죠.”
“그런데 왜 저래요?”
“뭐가요?”
“완전 숨겨 둔 딸 같잖아요!”
40살 터울은 충분해 보이는데 무슨 고모?
저 얘기가 사실이라면 빅터가 마흔쯤 고모가 태어났다는 건데… 그렇다면 빅터의 조모께서는 도대체 몇 살에 늦둥이를 낳으셨다는 걸까?
“고놈 참 말도 예쁘게 하는구나. 내가 어려 보이긴 하지.”
그러나 이어진 여인의 말은 나를 더욱 의아하게 만들었다.
어려 보인다?
말 그대로 이해하자면 보기보다 나이가 많다는 것일 터.
“클레어 님은 올해 99살이십니다.”
“돌았… 아니, 너무 막 던지는 거 아니에요?”
평온한 얼굴의 베르는 너무도 당당하게 헛소릴 내뱉었다.
그래서 무서웠다.
베르가 저렇게 말하니 진짜처럼 들려 더 무서운 거다.
“보기엔 젊어 보이시지만 99세가 맞으십니다.”
“허…….”
어째 점점 상황이.
솔직히 소환자 얘기 들었을 때보다 지금이 더 놀랍다.
몇 살만 어려 보여도 동안이라고 난리인데, 이건 아예 차원이 다르잖나.
30대 같은 99세라니.
저 옆에 빅터의 얼굴을 가져다 대면 이 괴리감이 무엇인지 단박에 알 수 있을 것이다.
“네가 오러 없이 그토록 강하다지? 나중에 실력 좀 보자꾸나.”
세월을 빗겨 간 여인은 점멸하듯 사라져 본래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이게 무슨 꿈꾸는 것도 아니고.
“정말로 99살이에요?”
“네, 맞아요. 마력으로 노화를 막으신 거죠.”
“그런 게 가능해요?”
“그러니 천재 마법사라고 했겠죠.”
되묻는 나의 말에 베르는 진심으로 대답했다.
이쯤 되면 믿을 수밖에.
반면 그래서 의아한 부분도 있었다.
“한데 왜 아직…….”
“7서클이냐 이건가요?”
내 말이 그 말이다.
천재 중에 천재들이나 가능하다는 이동 마법에 세월까지 거스를 실력임에도 그녀의 경지는 여전히 7서클이다.
물론 7서클이 낮다는 말이 아니다.
그조차도 대륙에 다섯 명밖에 없을뿐더러 그 이상의 경지인 8서클은 이전 세대에 한 명.
현 세대엔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그러니 결코 낮은 경지가 아니라 할 수 있지만, 천재 중에 천재로 살아온 시간이 긴 만큼 나의 의구심도 커지는 것이다.
“그렇잖아요. 그 정도로 대단하신 분이라면 이전 세대에 8서클이 됐어야 할 것 같은데.”
나름 합리적인 나의 의심에 베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맞는 말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만해요. 하지만 그래서 클레어 님이 천재인 겁니다.”
“이유는요?”
“태생적 한계를 재능과 노력으로 뛰어넘으신 분이니까요.”
베르는 마법사들의 수련을 돕는 클레어를 보며 존경스런 눈빛을 보냈다.
빅터를 대하는 것과 조금은 다른 분위기.
“태생적으로 작은 클레어 님의 홀은 본래 6서클 이상을 담을 수 없었어요.”
역시나 그녀에게선 남다른 사연이 숨어 있었다.
“한데 그걸 극복했다?”
“네. 재능과 노력으로 불가능을 가능케 하신 분이세요. 홀의 크기가 보통만 됐어도 8서클이 되고도 남으셨을 분이죠.”
어찌 보면 비운이고, 달리 보면 위대한 업적을 이룬 사람.
빅터의 고모인 클레어는 한계를 극복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그런 사람이라면 호기심이 동할 수밖에.
“집안 내력이 좋은가 보네요.”
“그럴지도 모르죠.”
뒷짐을 진 베르는 나의 말에 답하며 뒤돌아섰다.
“나중에 시간 되시면 클레어 님께 꼭 배움을 청하세요.”
“마법을 배우라고요?”
“아니요. 배틀 메이지와의 전투요. 드물긴 하지만, 대인전이 가능한 마법사는 정말 무섭답니다.”
아직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영역.
이어진 베르의 말에 나의 시선은 멀어지는 클레어의 뒤를 좇았다.
* * *
카잔에서 수입된 고급 소파.
그리고 풍요의 땅 아리안의 고급 와인.
두 가지 호사를 동시에 누리던 거체의 남자는 빼곡한 명단을 내려놓고 사마르에게 질문했다.
“이놈들이 다 내 장난감이다?”
“장난감이라기엔 고급 인력이지. 그와 비교할 대상이 공식적으론 다섯 명뿐이니까.”
그에 사마르는 난감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지금 말하는 것은 강화 인간.
그중에서도 7성에 오른 특별한 녀석들을 칭하는 말이었다.
“거기에 말 안 듣는 카리프를 추가하면 여섯 명이군. 대륙에 7성이 고작 그 정도라네. 그러니 이 녀석들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알겠지?”
길게 이어진 사마르의 설명에 거체의 남자는 입술을 삐쭉거렸다.
그의 명칭은 38호.
38번째 의식에서 소환되었기에 편의상 그렇게 불러왔다.
하지만 그게 진짜 이름은 아니었을 터.
“아, 리베의 용병왕이 바뀌었으니까 일곱 명이겠군.”
가운데 손가락질을 좋아하는 이 남자는 바스코란 이름의 사내였다.
오우거 같은 근육에 짙은 구릿빛 피부, 통제되지 않는 진득한 살기가 숨 쉴 때마다 뿜어져 나왔다.
“그러니 막 다뤄선 안 된다네. 이 중에 몇 명은 그 이상 오를 준비가 되어 있거든.”
“어차피 또 만들어 낼 것 아닌가.”
“시간이라는 게 필요하지. 소모품이긴 하지만, 아껴 써야 한다네.”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바스코에게 사마르는 타이르듯 얘기했다.
다르게 말한다고 들을 놈도 아니니까.
“빨리 써먹었으면 좋겠군. 그 백발 노인네를 다시 만나고 싶은데.”
바스코는 빅터와의 재회만을 기다리며 조바심 속에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자신에게 죽음을 선사했던 남자.
지난 패배에 대한 복수와 다시 칼을 맞대는 것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다.
“조금만 기다리게. 앞으로 한 단계만 더 마치면 원 없이 싸울 테니까.”
“뭐, 그렇게만 된다면야.”
소파에 기댄 바스코는 눈썹을 찡그리며 다음 말을 이어 갔다.
“그런데 소환 의식은 또 언제 하는 거지?”
“두어 달은 더 있어야 가능할 걸세. 에르텔에 마력이 모이려면 시간이 꽤 걸리거든.”
“하는 것마다 죄다 기다려야 하는군.”
툴툴거리는 바스코의 손에서 피 안개가 피어올랐다.
짙은 혈향을 풍기는 그것은, 모았다 흩어지길 반복하며 다양한 형태의 무기로 모습을 바꿔 갔다.
“날 소환한 대가는 크다. 충분한 재미를 제공하지 못한다면 네놈도 무사하진 못할 거야.”
“글쎄, 지루할 틈은 없지 싶네만.”
“기대하지.”
바스코는 핏빛 검을 바라보며 서늘하게 대답했다.
* * *
머리 위로 떠오른 해가 기울기 시작할 무렵.
“영주님 돌아오십니다!”
망루를 지키던 병사의 외침에 성문 앞이 부산스러워졌다.
드드드드득―
내려진 도개교 위로 빅터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고, 흑마탑에서 포박된 28명의 마법사는 무거운 걸음으로 뒤를 따랐다.
“모두 감옥에 넣어 두고 회의를 소집시켜라.”
말에서 내린 빅터는 내성으로 향하며 간단한 지시를 내렸다.
분주히 움직이는 내성의 병사들과 기사들.
“고생하셨습니다.”
“어서 오세요.”
“오냐. 바로 회의실로 가자꾸나.”
마중 나온 나와 베르를 보며 빅터는 걸음을 서둘렀다.
“로이드라는 놈은 도망친 건가요?”
“다른 근거지에 있었던 것 같더구나. 저놈들을 심문해서 알아내 봐야지.”
착잡한 빅터의 대답에 나는 시선을 돌려 다른 무리를 바라보았다.
손을 뒤로 묶인 채 끌려가는 남자들.
잡혀 온 흑마법사들의 얼굴엔 두려운 기색이 역력했다.
“금제에 대해 아는 것이 있느냐.”
“암시 마법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저놈들 모두 금제에 걸린 것 같다.”
질문을 받은 베르는 코끝을 문지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대로 몇 걸음을 내딛더니, 답을 기다리는 빅터에게 반문했다.
“금제도 종류가 많아서요. 어떤 종류로 제재를 가하던가요?”
“머리를 날려 버리더구나.”
“아, 머리를…….”
이어진 빅터의 말에 베르는 말끝을 흐렸다.
베르가 저렇게 반응하는 건 뭔가 어려운 문제가 생겼다는 건데.
“죽음을 대가로 하는 금제라면 상당한 고위 술법인데요… 암시를 거는 것도 쉽지 않고, 받아들이는 사람 자체가 술자에게 충성심이 있어야 가능한 마법입니다.”
이를테면 목숨을 담보로 한 충성 서약이었다.
“그러면 금제에 안 걸린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네요?”
“있을 수 있죠. 대신 그 자리에서 죽거나 쫓겨나지 않았을까요?”
하기야 믿을 수 없어서 금제를 거는 건데 대놓고 반감을 드러내면…….
“너는 괜찮아?”
금제에 대한 나의 관심과 걱정은 곁에 있던 겨울에게 향했다.
녀석도 로이드에게 잡혀 있었으니까.
“소환자들에겐 그런 거 안 시켰어요. 능력에 따라 지내는 곳이 달라지긴 했지만… 아무튼 충성을 강요하거나 그러진 않았어요.”
그러나 불필요한 걱정이었나 보다.
“그 대신 자기를 도우면 반드시 지구로 돌아갈 수 있게 해 주겠다고 말했죠. 이곳에 남고 싶다면 자리 잡을 수 있게 돕겠다고 했고요.”
기껏 소환해 놓고 금제를 걸어 죽일 순 없었을 테니까.
보아하니 자발적인 충성을 유도했던 모양이다.
“그치만 쓰레기장에 있던 사람들은 무한정 감금이었어요.”
이렇게 차별을 두어 특별한 대우를 해 주는 것.
의지할 곳 없는 소환자들 입장에선 로이드에게 잘 보이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물론 겨울 같은 예외도 있었을 터.
“이탈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카이 형제가 나서서 잡아 왔죠. 못 도망가요. 형인 레이는 도망친 사람의 흔적을 흐릿한 형상으로 보면서 쫓을 수 있거든요.”
이 얘길 듣고 나니 그날의 의문이 한 번에 풀려 버렸다.
‘어쩐지 갑자기 나타나더라니.’
뜬금없이 절벽에 등장해 빅터의 행방을 물어봤던 녀석.
어떻게 뒤를 잡힌 건지 내내 궁금했는데 비밀은 레이의 특별한 능력 탓이었다.
“사실 저도 금방 잡힐 줄 알았는데 소식이 없어서 의아했었죠. 그런데 죽었을 줄은…….”
그것도 아주 잔인하게.
레이의 주검은 흔적조차 없이 짓뭉겨졌고, 로우의 사체는 팔다리가 잘려 얼굴이 벗겨졌다.
뿌린 대로 거둔다고.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며 유흥거리 취급하던 카이 형제는 그에 걸맞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나쁜 놈들.”
후련한 듯 내뱉은 겨울은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며 걸음을 이어 갔다.
그렇게 도착한 회의실.
“일단 마법 학회에서 들고 일어나겠죠. 비주류라고 해도 마법 학회 소속인 건 맞으니까요.”
상황을 파악한 베르는 가장 먼저 마법 학회를 거론했다.
명목뿐인 흑마탑이 유지되는 것도 모두 그때문이니까.
수평을 달리던 권력 관계를 빅터가 나서 엎어 버린 것이었다.
이대로 놔두면 분명히 문제는 크게 확장될 터.
“맞습니다. 황제의 정보원을 현장에 동행시킨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빅터는 황제의 측근을 동참시켜, 새로운 대립 구도를 세워 버렸다.
방벽이라 해야 하나.
황권이 참여했으니 마법 학회 역시 마음 놓고 날뛸 순 없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 극히 수상한 장면을 목격하게 만들지 않았나.
의심 많은 황제가 가만히 넘어갈 리 없을 터였다.
“분명히 끼어들 겁니다. 백작님이 궁금해서라도 그렇게 되겠죠.”
부관 켄드릭은 확신하는 표정으로 베르의 말에 대답했다.
그에 보태 빅터까지.
“그렇게 될 게다. 감춰야 할 게 많은 인간이니 좀이 쑤실 테지.”
빅터는 켄드릭의 말을 도와 황제의 행동을 예측했다.
모두가 숨죽이며 빅터의 말에 공감하던 순간.
“이놈아 돌아왔으면 인사부터 해야지. 늙어 간다고 유세 떠는 게냐?”
회의실 문이 열리며 클레어가 모습을 드러냈다.
자동으로 돌아가는 나의 시선.
“고, 고모님! 급하게 논의할 일이 있어서 그만… 죄송합니다.”
빅터를 향한 나의 눈은 쏟아질 듯 크게 확장되고 있었다.
“죄송하면 사라질 일이더냐?”
“송구합니다.”
“송구하면 인사 안 해도 된 다더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한데 왜 그런 게냐.”
“급하게 논의할 일이 생겨서 그만…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그래도 된단 말이더냐. 네 어미가 그리 가리켰느냐.”
언젠가 보았던 개미지옥이 빅터의 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저리도 쩔쩔매는 모습이라니.
“고모님이랑 친해져야겠는데…….”
새로운 먹이사슬을 바라보며 나는 씰룩거리는 입을 틀어막았다.
내 목숨 99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