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켜켜이 쌓인 건물 잔해 사이에 드러난 낮은 모래언덕.
성대하게 파헤쳐진 구덩이 사이로 모래투성이의 사내가 멍하게 앉아 있었다.
“어때, 이제 상황 파악이 되는 것 같아?”
“…….”
“느껴져? 새로운 몸이잖아. 최소 6성급은 된다고. 엄청 좋은… 아, 어차피 우리한텐 상관없나? 그래도 시답지 않은 몸보단 이게 낫겠지. 안 그래 동생아?”
쪼그리고 앉은 레이는 히죽거리는 얼굴로 되살아난 동생을 바라보았다.
하나 아직까진 무반응.
새로운 육신을 찾은 로우는 흐리멍텅한 눈으로 곳곳을 둘러보았다.
무거운 침묵과 어색한 몸놀림이 지나가고.
“퉷―”
입안 가득한 모래를 뱉어 낸 로우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향했다.
“계속 그렇게 쳐다보면 죽인다.”
그러고는 무표정한 얼굴로 시큰둥하게 말했다.
“허…….”
에비오였다.
뜬금없는 협박을 받은 에비오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뭐 이런 개 같은 놈들이 다 있는 건지.
형제의 악명이야 쓰레기장에 있을 때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반신반의했다.
보통 소문이라는 건 과장되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카이 형제는 그렇지 않았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특별한 악행이 없어도 레이의 인성은 바닥을 드러냈다.
소위 말하는 사이코패스.
상식적인 삶을 살아왔다 자부하는 에비오의 기준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성격파탄자였다.
한데 그의 동생 놈.
로우라고 불리는 이 녀석도 미친놈의 향기가 폴폴 풍겼다.
“아니야, 동생아… 은인한테 함부로 말하면 안 되지. 너 사람 새끼 아닌 건 알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구분하면서 살자. 알겠지?”
“닥쳐라…….”
“하, 새끼. 사람이 죽었다 살아났는데 변한 게 없냐. 넌 다 나쁜데 그 말버릇이 제일 나쁘다니까?”
심드렁한 로우를 보면서 레이는 쓰게 혀를 찼다.
저런 모습이 일상이었던 걸까.
그러면서도 히죽거리는 걸 보면 지들 나름의 통하는 구석이 있는 모양이다.
그래서 끼리끼리 어울린다는 말이 있는 거겠지.
묘하게 어울리는 형제라는 생각에 에비오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지금 몸 상태는 어때? 뭐가 정신없이 지나가고 있을 텐데.”
그런 두 사람의 대화는 레이의 질문으로 사람답게 변해 갔다.
“안정화 작업한다고 난리네.”
“그렇지? 그거 한 2∼3일 갈 거야. 그러고 나니까 시스템도 변하더라고.”
“시스템이 변해?”
흥미로운 레이의 대답에 로우는 눈을 빛내며 반문했다.
들어 본 적 없었으니까.
한번 정해지면 그걸로 끝이라고 생각했던 터였다.
“그러니까 저 친구한테 잘해 줘. 에비오 아니었으면 우리 둘 다 잡귀가 될 뻔한 거라고. ‘이세계에서 지박령이 되었습니다.’ 뭐 이런 거지.”
혼자 말하고 웃는 레이를 보며 로우는 천천히 머리를 쓸어 올렸다.
바삐 올라가는 시스템 창.
‘업그레이드가 된다는 건가.’
로우는 이리저리 바뀌는 시스템 문자를 보며 갈라진 입술을 물어뜯었다.
뭐가 어떻게 변할지는 모르겠지만 나빠지지는 않을 터.
기왕 변할 거면 더욱 위험하게.
빅터 그 인간의 얼굴 가죽을 뜯어낼 수 있을 만큼.
로우는 새로 얻은 몸을 움직여 낯선 감각에 적응했다.
“음…….”
신체적 차이에서 오는 간극일까.
팔다리로 느껴지는 미묘한 이질감에 로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그보다 더 거슬리는 것이 있었으니.
“그런데 세상이 왜 이렇게 붉어?”
로우는 두 눈을 비비며 달라진 풍경을 바라보았다.
* * *
채 밝지 않은 이른 아침.
긴 행군에 혹사당한 나의 두발은 간밤의 휴식으로 쾌적하게 회복됐다.
조금 더 누워 빈둥거려?
하나 가뿐해진 나의 몸은 게으른 주인을 용납하지 않았다.
거기에 새벽 공기를 가르는 병사들의 힘찬 외침까지.
결국 침대를 벗어난 나는 헝클어진 머리를 털며 창가로 다가갔다.
“부지런하네, 다들.”
구시렁대듯 혼잣말을 던진 나는 손을 뻗어 커튼을 열어젖혔다.
어슴푸레 들어오는 이른 시간의 연병장 모습.
“헐…….”
훈련 중인 남자들을 보며 나는 멍청한 소릴 내뱉어야 했다.
“저걸 진짜 하고 있었어?”
더불어 의문 섞인 이런 말까지.
연병장에 모인 남자들은 팔굽혀펴기와 턱걸이, 사람을 업은 채 앉았다 일어나길 반복하며 체력 단련에 여념이 없었다.
몰려든 사람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적당히 둘러댄 말이었는데.
이후로도 그들은 꾸준하게 훈련을 반복한 모양이었다.
게다가 저 익숙한 등판이라니.
기사와 병사들에게 둘러싸인 별은 열띤 환호성을 받으며 팔굽혀펴기를 이어 가고 있었다.
“신났네.”
웃을 주워 입은 나는 연병장을 향해 터덜터덜 걸어갔다.
이윽고 도착한 연병장은 웃통을 벗은 남정네들의 열기로 후끈 달아올라 있었다.
“39!”
“40!”
누군가는 철봉에 매달려 있었고.
“99! 하나만 더!”
“끄아아아압!”
“좋아! 100개 완료!”
또 다른 이는 동료를 등에 업고 앉았다 일어서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이게 왜 이렇게까지 화끈해진 건지.
하여간에 사람들은 저마다의 목표를 향해 열심히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고작 2∼3일 사이에 뭐가 그리 달라졌겠냐마는.
“보아하니 많이 늘은 것 같더군.”
“맞네. 오늘 아침엔 쉬지 않고 200개를 성공했지.”
“오! 대단하군. 난 이제 겨우 150개라네.”
“그게 뭐 어때서 그런가. 우리 첫날엔 100개도 못하고 포기하지 않았나.”
“하기야 처음엔 다들 그랬지. 하하하.”
성취를 나누는 사람들의 모습은 자신감과 의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사실 이들에게 있어 육체의 훈련은 큰 의미가 없을지도 몰랐다.
그들은 이미 오러라는 훌륭한 힘을 가지고 있었으며, 인간이 낼 수 있는 순수한 힘 따윈 뛰어넘은지 오래인 까닭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왜 이런 기초 수련에 열광하는 것일까.
“기사 수련을 시작했을 때가 생각나더군.”
“나도 그랬네. 오러를 익히고 난 뒤로는 육체의 수련에 게을러졌지. 이렇게 수련을 시작하니 초심을 되찾는 것 같아서 좋군.”
사람들은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며 약해진 자신을 다그쳤다.
하나 정신 수양의 관점만 있는 게 아니었다.
검을 다룬다는 건 기본적으로 육체를 사용한다는 것.
똑같은 오러를 사용해도 신체 능력이 주는 영향을 무시할 순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 능력이 일정 수준을 넘으면.
“우와아! 1,000개 돌파!”
“1,001개!”
“1,002개!”
“1,003개!”
“이거 2,000개도 문제없겠는데?!”
오러를 능가할 만큼 강력한 힘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바로 저 녀석처럼 말이다.
“훅훅!”
팔굽혀펴기를 하는 별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같은 동작을 반복하고 있었다.
반투족이야 말로 진정한 수련의 상징일 터.
시스템의 도움을 받는 나와는 달리, 현실적이고 순수한 힘의 집합체였다.
오러 없는 인간이란 얼마나 나약한가.
빈약한 인간의 한계를 깬 것이 반투족이고, 그중에도 별은 오러 없는 세상의 최강자가 되어 가고 있었다.
‘부족장과 붙으면 누가 이길까.’
지금으로 봤을 땐 별의 승리가 유력해 보였다.
“일찍부터 나와 계셨네요.”
별을 향한 여러 생각들은 다가온 베르에 의해 일단락되었다.
“네, 하도 소란스러워서요.”
“그렇죠. 왔다 가신 이후로 다들 의욕이 넘쳐서 난리가 아닙니다.”
“분위기는 좋네요.”
“훨씬요. 이런 활기참이야말로 전선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죠. 후배님 도움이 컸습니다.”
“저야 뭐…….”
뒷얘기는 생략했다.
귀찮아서라는 말을 할 순 없으니까.
“아참, 마법사들 훈련하는 거 본적 있으세요?”
“아니요.”
“잘됐네요. 저 지금 그쪽으로 가는 길이니 함께 가서 보시죠. 후배님이 꼭 알아 둬야 할 중요한 마법사가 있습니다.”
“그래요?”
하여 우리는 마법 수련장이 있는 내성 뒤편으로 이동했다.
마법사들의 수련장은 확연히 다른 분위기였다.
한쪽에선 명상이 이어지고 있었고, 다른 한쪽에선 차분하게 술식을 펼치며 마력을 조절했다.
“마법사들의 싸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글쎄요. 깊게 생각해 보진 않았는데… 후방 지원 같은 느낌이려나.”
“그렇긴 하죠.”
“강력한 한 방이 있고…….”
“그것도 맞고요.”
“하지만 근거리를 허락하면 무용지물인?”
“네. 애석하게도 마법사는 그렇습니다. 충분한 거리와 시간이 없다면 활약하기가 힘들어지죠.”
대답하는 나의 말에 베르는 크게 끄덕이며 공감을 표했다.
마법에 대해 지식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건 평범한 상식 같은 얘기였다.
술식을 펼쳐 마력을 운용하고, 그것을 구동시켜 외부로 분출한다.
그렇게 시전된 마법은 전쟁의 향방을 뒤집을 만큼 강력하지만, 여기까지 진행되는 캐스팅 과정이 마법사들의 최대 약점이었다.
하여 안전과 시간이 보장된 후방에 위치하게 되고, 따라서 대인전을 염두하는 상황이 왔다는 건 패배한 전장이라는 뜻이 된다.
대인전이 불가능한 클래스.
평범한 육체인 그들이 훈련된 기사와 맞서 이길 확률은 사실상 0%에 가까웠다.
술식이 펼쳐지기도 전에 기사의 칼날에 목이 달아날 테니까.
“그런 마법사를 공성 마법사라고 하죠. 그리고 대부분의 마법사가 그런 방식으로 활용됩니다.”
설명을 멈춘 베르는 수련장 내부를 훑어보았다.
이리저리 고개를 뽑아내더니.
“아, 저기 계시네요.”
장년의 여인을 가리키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런 마법사 중에도 천재라는 부류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겠지요.”
“천재 소리를 듣는 마법사의 특징이 엄청나게 빠른 캐스팅 속도입니다.”
기사의 빠른 몸놀림과 같인 맥락일 터.
나는 별다른 반응 없이 이어질 베르의 말을 기다렸다.
“그중에도 더 특별한 재능이 있다면 이동 마법을 배우게 되는 데, 그렇게 되면…….”
“그렇게 되면요?”
“저분과 같은 배틀 메이지가 되는 거죠.”
말을 마친 베르는 선망을 담아 장년의 마법사를 바라보았다.
대략 30대 중반쯤 되었을까.
마법을 지도하던 여인은 고개를 돌려 우리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에 베르의 머리가 공손히 숙여졌고.
“어…….”
모습을 감춘 여인이 나타난 곳은 나의 눈앞이었다.
말 그대로 점멸.
이 모든 과정에 걸린 시간은 고작해야 눈 한 번 감았다 뜬 정도였다.
이 속도를 내가 따라잡을 수 있을까?
아니, 빅터 영감이라고 한들 가능할까?
“이 녀석이구나. 빅터의 제자라는 놈이.”
눈앞에 나타난 중년의 여인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나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일단 반반하게 생긴 것이 빅터와 달라서 마음에 드는구나.”
그러고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나.
첫 등장부터 충격적이었던 이 여인은 내뱉는 말조차 이해되지 않았다.
“그래, 빅터 그놈이 네 녀석 후원자라고 했더냐?”
빅터 그놈이라니…….
여인의 말이 이해되지 않는 건 바로 이 대목 때문이었다.
기껏해야 30대 중반인데.
빅터도 아니고, 무려 그놈이라고 부르고 있잖은가?
물론 나 역시 속으로 빌어먹을 영감탱이라고 욕하지만, 그것과 이것은 엄연히 다른 것.
마법적으로 천재인 건 모르겠지만, 글러먹은 여인의 인성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질 따름이었다.
“허허, 고얀 놈이구나. 어른이 말을 하는데 대답조차 없다니. 쯧쯧, 빅터 이놈은 제자를 어찌 가르친 겐지.”
게다가 나에게까지.
이 여자는 선을 넘어도 한참 넘은 것 같다.
“저기요. 제 스승님과 어떤 관계인지 모르겠지만, 듣기 안 좋네요. 백발노인을 무슨 친구 대하듯이… 스승님이 그쪽 친구라도 됩니까? 무슨 동생이라도 되요?”
결국 참지 못한 나는 뾰족해진 말투로 차갑게 쏘아붙였다.
여차하면 한판 붙을 각오로.
“동생뿐이겠냐. 그놈 똥 기저귀 갈아주며 키워 준 사람이 난데.”
하지만 여인은 당당히 대답했고.
“스승님의 고모님 되십니다.”
베르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얌전히 미소를 지었다.
내 목숨 99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