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어째 기운이 없어 보이는구나.”
반투족의 족장 울부짖는 창은 착 가라앉은 아들에게 다가갔다.
차분함을 넘어선 무거움.
“답답한 것이더냐.”
벌써 며칠째 이어지는 아들의 낯선 분위기에 족장은 넌지시 말을 건넸다.
“아닙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짧은 한마디뿐.
아들인 부족장은 덤덤한 얼굴로 자신의 무탈함을 대답했다.
“미련 가득한 눈을 하고 있거늘 무엇이 아니라는 것이냐.”
족장은 헤아리듯 부족장을 바라보았다.
할 말을 찾지 못하는 입술.
“…….”
결국 부족장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남자를 따라가고 싶더냐.”
이어진 또 다른 질문에도.
부족장이 할 수 있는 말이라곤 그저 조용히 어금니를 깨무는 것 뿐이었다.
그것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이기에.
부족을 이어야 할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자리가 있기에.
“네가 다시 돌아온 직후, 달라진 너의 모습에 나와 원로들은 꽤 많이 놀랐었다. 이제야 제대로 된 후계자가 나왔다며 다들 기뻐했지.”
아버지와 어른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 부족장인 자신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참았다.
함께 대수림을 누비고 서리 고원을 달리던 그날들을.
짧지만 강렬했던 기억을 묻고,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지키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노력했지만…….
“그런 너의 눈이 이제는 빛을 잃어 가고 있구나.”
여전히 그날을 잊지 못했고, 아직도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토록 되찾고 싶었던 자리였는데…….
“사람을 담을 수 없는 자리라면 연연할 이유도 없을 터.”
측은한 눈으로 바라보던 족장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더 큰 물에서 놀다 오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구나.”
축 처진 아들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잔잔하게 말하며 곁을 떠나갔다.
원하는 게 그것이었을까.
모습을 감추는 아버지를 보며 부족장은 자기 자신에게 질문했다.
무언 갈 책임질 준비가 돼 있는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를 가두고 싶지 않을 것이지.
좁은 세상이 싫다던 별은 모든 걸 내려놓고 자신의 감정에 충실했다.
그 모습이 부러운 건 어제오늘 얘기가 아닐 터.
부족장은 긴 한숨을 내쉬며 무거운 걸음을 내딛었다.
그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사람.
오늘 같은 날 가장 필요한 건 아무렇게나 던지는 녀석의 말이었다.
“그 얼굴은 여전히 썩어 가고 있군.”
가끔은 이렇게 정답을 말하기도 하지만.
“방해할 생각이라면 물러가고, 그게 아니라도 당장 물러가라. 지금 엄청 바쁘다.”
보통은 이렇게 자기 할 말만 하는 속편한 녀석이었다.
그날 밤 술만 안마셨어도.
줄여서 술이라고 부르던 녀석.
“육식동물 주제에 야채샐러드를 좋아하다니!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심지어 하루가 지난 야채는 쳐다보지도 않고, 고기는 익힌 것만 먹는다!”
최근 들어 술의 고민은 이것이었다.
이반이 맡기고 간 워 울프.
이유야 스스로 말했다시피, 워 울프의 까다로운 식성을 맞추기가 힘든 탓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순전히 술이 자초한 부분이었으니.
“야채를 먹인 건 너였잖은가.”
개 풀 뜯어먹는 걸 보고 싶다고 양상추를 먹인 녀석은, 어느 날부턴가 손수레로 퍼 나를 지경이 되어 버렸다.
익힌 고기도 마찬가지.
불 맛을 보여 준다며 술주정을 부리더니 이후로 하루에 한 번씩 고기를 구워 바쳐야 했다.
지금 바쁜 이유도 그 때문이다.
워 울프의 식사를 위해 녀석은 산양 한 마리를 잡아 통구이를 만드는 중이었다.
하루 일과가 이거였다.
아침에 일어나면 사냥을 나가고, 들어오면 고기를 굽는다.
그 사이 야채를 손질해서 큰 바구니에 담아야 하니, 녀석의 하루는 워 울프의 수발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도저히 안 되겠다. 이젠 힘들어서 못 키우겠다.”
“그러면 어쩌려는 건가.”
“이제 자랄 만큼 자랐으니 이반에게 돌려줘야지. 저 녀석 키우다가 내가 말라 죽을 것 같다.”
털썩 주저앉은 술은 지친 표정으로 넋두리하듯 말했다.
물론 녀석이 자초한 일이지만 엄살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솔직히 홀로 감당하기엔 워 울프 펜리르의 존재가 너무 거대해진 탓이다.
“한데 지금 이반은 아케른 성에 가 있다.”
“알고 있다. 그 소식을 전해 준 사람이 나다.”
“아, 그랬었군.”
부족장은 머쓱한 표정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생각해 보니 별의 편지를 전해 준 사람이 술이었다.
무슨 잡념이 그리 많아 이런 사실조차 잊어버린 걸까.
부족장은 씁쓸한 마음을 감추며 술의 얘기를 기다렸다.
“아케른으로 갈 생각이다.”
“직접 간다는 건가?”
“그럼 펜리르를 혼자 보내겠나. 내가 직접 데리고 갈 생각이다.”
“흠…….”
부족장의 침음을 끝으로 두 사람의 대화는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펜리르의 식사 시간이 시작됐으니까.
등 뒤로 다가오는 검은 그림자에 앉아 있던 술은 긴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 * *
“우리 꽤 많이 걸었잖아. 그치?”
“맞아요. 이 정도 걸었으면 국경도 나왔을 것 같네요.”
남쪽을 향해 이동 중인 우리는 몇 시간째 계속 걷기만 했다.
이러다 대륙의 남쪽 끝이 나오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이쯤 되면 뭔가 나와야 할 것 같은데 걸리는 것 없이 너무 순탄한 행보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게 문제였다.
이미 어딘가에서 걸렸어야 했는데…….
진작 모습을 드러냈어야 할 수드라는 보이지도 않았고, 끝없이 이어지던 황무지는 어느새 초원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우리 너무 많이 들어왔어. 이제 남쪽이 아니라 동쪽으로 틀어야 할 것 같아.”
초원이 보이기 시작했다면 수드라는 이미 지나쳤다는 얘기.
그렇다는 건 아케른과 국경을 맞댄 시에라일 확률이 엄청나게 크다는 것이었다.
“동쪽이라면 아케른으로 갈 생각인가?”
“돌아가진 않더라도 정확한 위치는 찾아야 할 것 같은데. 이대로라면 수드라로 가는 것도 쉽지 않겠어.”
이어진 나의 말에 별은 그림자를 찾아 동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일단 국경을 찾으면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하자.”
“알겠다.”
지금 가장 큰 문제는 우리의 위치를 정확하게 모른다는 것.
짧게 대답한 별은 재설정한 목적지를 향해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이쪽은 초원이라고 걷는 게 좀 더 편하네요. 말랑말랑하다.”
반나절을 넘게 걸었으니 이제 다리 아플 때도 됐다.
별이나 나처럼 신체적으로 강한 사람이 아니라면 솔직히 쉽지 않은 여정이니까.
그래도 야물게 잘 따라오는 걸 보면 보통 녀석은 아니지 싶다.
“근데 언니는 이름이 외자예요?”
“그게 무슨 말이냐.”
“이름이 별 한 글자냐고요.”
“아니다.”
“그러면요?”
아… 이거 오래간만에 재등장하는 패턴인데.
“나와 별 보러 갈래.”
“음… 그럴까요? 좋아요. 같이 가요. 그런데 언니 이름은요?”
“…나와 별 보러 갈래.”
“알겠어요. 그러니까 이제 이름을… 설마 그게 언니 이름?”
동그래지는 겨울의 눈을 보며 이어질 두 사람의 대화를 추측했다.
이제 곳 다양한 반응이 나올 터.
그러나 겨울의 반응은 지금까지완 뭔가 달랐다.
“와… 감성 터지네요. 대박.”
신선하다고 해야 하나.
일단 감성이 터질 수 있다는 걸 방금 새로 알았고, 대박이라는 말도 처음 들었다.
“아, 이게 무슨 말이냐면.”
겨울의 설명에 따르면 좋을 때 쓰는 말이었다.
∼터진다.
뭔가 특정한 분위기나 매력이 강렬하게 나올 때 사용하는 말이었다.
정확한 용도야 사용해 봐야 알겠지만, 하여간 여러모로 쓰인다는 유용한 표현이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뭔가 엄청 좋을 때 대∼박! 이라고 말하는 거예요.”
느낌부터가 그럴 것 같은 대박이란 말이었다.
“음, 이건 어감부터가 그렇게 느껴지는군.”
“그렇죠?”
이어진 별의 호응에 겨울은 배시시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꼭 좋을 때가 아니어도 써요. 예를 들어 황당하거나 어이없을 때도 사용하죠. 대박……. 이런 느낌이로요.”
이세계인의 말은 의외로 쓸 만한 구석이 있었다.
달랑 두 글자인데, 그 하나만 가지고도 엄청 좋을 때와 엄청 이상할 때 모두 사용가능했다.
“대박…….”
“그렇죠! 그렇게 쓰시는 거예요.”
이해가 쏙쏙 되는 겨울의 설명을 들으며 우리는 길게 늘어선 목책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국경.
이곳을 타고 내려가면 수드라로 이어지는 국경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뒤틀렸던 여정이 이제야 제자리로 다시 돌아오게 되는 것이었다.
“좋아. 다시 처음부터 가 보자.”
호기롭게 외치고 걸음을 내디뎠지만, 그 걸음은 얼마 지나지 않아 멈춰야 했다.
띠링―
맑게 울리는 종소리.
[스승님 복귀 중이십니다. 모든 일정 뒤로 미루고 아케른으로 돌아오시랍니다.]
베르가 보내온 메신저가 울렸기 때문이었다.
하여 목적지는 변경되었고.
“날아오셨어요?”
황당한 표정을 짓는 베르를 보며 내성 입구를 걸어 들어갔다.
* * *
베르의 방에 들어온 나는 가장 먼저 빅터의 상황을 물어보았다.
그리고 돌아온 대답은.
“흑마탑을 점령하긴 했는데, 로이드는 잡지 못하셨나 봐요.”
절반의 성공이라는 말이었다.
또 다른 말로는 예정된 실패.
“우리끼리도 로이드의 얼굴을 보는 건 쉽지 않았어요. 늘 관리자들이 대신 움직였거든요.”
겨울은 당연하다는 듯 결과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제는 당연한 얘기가 아닐 터.
지금 상황은 로이드에 대한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벌 때처럼 움직이거나 아예 숨거나 둘 중 하나일 겁니다.”
어느 쪽이든 순탄한 길은 아니었다.
굳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차라리 싸우는 걸로.
숨어들지 않기를 바라며 강화 인간으로 대화의 주제는 넘어갔다.
“여섯 명의 뒤를 따르는 두 명이 더 있었다는 거네요?”
“네. 뒤에 오던 사람들은 관찰 같은 걸 한 모양이에요. 소지품을 보니까 보고서 같은 게 있더라고요.”
나는 챙겨 온 보고서를 베르에게 넘겼다.
“그러네요. 이건 보고서가 분명해 보입니다.”
끄덕이는 베르를 보며 나는 강화 인간에 대한 설명을 추가했다.
실전을 치른 소감이랄까.
“움직임으로 가늠하면 6성 정도였어요. 하지만 생각이 없는 게 단점이었죠.”
상대했던 놈들을 떠올리며 그들의 특징을 전했다.
“카리프하곤 완전히 달라요. 녀석은 정상적인 사고를 했지만, 이번에 마주한 강화 인간은 그냥 싸울 생각만 했거든요.”
“정말 이성이 없었나 보네요?”
“네. 고통도 못 느끼는 것 같았고, 목적이 한번 정해지면 그것만 보는 것 같아요.”
꾸역꾸역 덤벼들던 놈들의 모습은 상대의 전의를 꺾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장치였다.
그게 소수라면 상관없는데…….
어딘가에서 계속 만들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바빌리안에 흑마탑과 새로 생긴 군부대가 있으니까, 그쪽을 집중적으로 조사해 보면 뭔가 나올 것 같긴 해요.”
나는 굳은 표정을 지으며 나름의 해법을 제시했다.
하지만 아는 만큼 보인다고.
“사라센엔 흑마탑이 총 네 개거든요. 바빌리안만 생각하면 허점이 생길지도 모르겠어요.”
베르는 나에게 새로운 정보를 알려 주었다.
“자, 여기 강화 인간들의 이름을 보면 바빌리안 뒤에 숫자를 적었잖아요.”
“네.”
“만약 바빌리안 대신 다른 도시의 이름들이 들어간다면 어떻게 될까요?”
“어 그러면…….”
이어진 베르의 질문에 나는 하던 말을 멈추고 동공을 키워야 했다.
지금 베르가 하고 있는 말의 내용은.
“그래요. 흑마탑이 있는 도시 이름이 다 들어간다면 강화 인간의 숫자는 네 배 이상 늘어나게 되겠죠.”
우린 지금 심각한 위기에 놓여 있다는 얘기였다.
내 목숨 99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