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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숨 99개-126화 (126/203)

126화

“이게 무슨…….”

터져 버린 남자의 머릴 보며 켄드릭은 표정을 구겼다.

너무 갑작스러워 차마 손쓸 방법조차 없던 상황.

“금제를 걸어 둔 것 같구나.”

빅터는 몸에 튄 육편을 털어 내며 널브러진 남자의 사체를 바라보았다.

탑주의 이름이 이렇게나 비밀스러웠던가?

누군가는 드러내지 못해 안달인 이름을 로이드라는 놈은 철저하게 틀어막고 있었다.

금제를 걸어가면서 말이다.

“이 정도까지 하는 걸 보면 확실히 뭔가 있나 봅니다.”

지켜보던 켄드릭의 표정에선 짙은 의심이 떠올랐다.

아니, 이젠 확신의 단계라고 보는 것이 맞을 터였다.

“한데 이자가 아니라는 걸 어찌 아셨습니까.”

“그저 아니라고 느꼈을 뿐이다.”

달리 부연 설명할 것이 없었다.

보는 순간 알았으니까.

자신을 로이드라고 말한 이 남자는 소녀에게 들은 모습과 전혀 달랐다.

― 금발 머리의 남자인데 머리 정돈하는 것에 집착이 심해요.

이반과 함께 있던 소녀는 로이드의 인상착의를 이렇게 설명했다.

달리 무슨 말이 필요할까.

그 얘길 듣던 순간, 빅터는 한 남자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살아 있다면 중년이 되었을 그 남자… 그 남자는 신탁의 기사였던 카론이었다.

“탑 내에 있던 인원 모두 체포했습니다.”

계속되던 빅터의 상념은 에스카의 보고로 인해 멈춰야 했다.

“총원 28명, 마법 학회에 등록된 명단에서 12명이 모자랍니다.”

체포된 흑마법사의 숫자는 예상했던 인원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소환자들을 따로 관리한다 했으니 파견은 필수였을 터.

“수고했다. 내려가자.”

방 안을 둘러본 빅터는 그대로 몸을 돌려 아래로 향했다.

“그런데 스승님, 이곳은 좀 많이 이상하네요.”

“어떤 걸 말하는 거냐.”

“아무리 주류에서 밀려났다고 해도 이곳은 마법적 소양이 너무 부족해요.”

에스카는 이곳을 점령하는 과정을 떠올리며 의뭉스런 표정을 지었다.

물론 마법사의 몸이란 게 일반인과 다름없는 빈약한 육체인 건 사실이다.

따라서 근접전 상성은 최악이라 할 수 있고, 이런 기습이라면 결과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이곳 사람들의 수준은 너무 얕았다.

“보조 마법이라는 특성을 감안한다고 해도 너무 약해요. 마법사들이 맞나 싶기도 하고요.”

에스카의 설명을 듣던 빅터는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대한 의견이라면 다르지 않은 까닭이다.

“이곳은 명목상 유지되는 곳 같구나. 주력 인원은 능력자들을 관리하는 곳에 가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럴까요?”

“간섭을 받아야 하는 이곳에 주요 인사들이 모여 있진 않겠지.”

더군다나 그들은 들켜서는 안 될 짓을 하고 있지 않았나.

“어딘지 알아내셨나요?”

“이제부터 알아내야지.”

빅터는 줄줄이 포박된 마법사들을 보며 차가운 시선을 날렸다.

그러고는 정보원을 향해 턱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잠시 후.

침묵이 내려앉은 흑마탑 1층 로비에는 황제의 정보원과 빅터가 시선을 마주하고 있었다.

“이게 뭐 하는 겁니까, 빅터 공. 마법 학회에서 이 사실을 알면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네를 부른 걸세.”

빅터는 포박된 흑마법사 앞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이들이 지금 엄청난 짓을 꾸미고 있단 말이지. 하여 심문이 필요한 참이었네만… 어떤가, 자네가 보기에 입이 가벼운 놈이 있다면 좀 골라 줬으면 싶군.”

뜬금없는 빅터의 말에 황제의 정보원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무언가 속셈이 있을 터인데.

드러나지 않은 빅터의 속내에 남자는 선뜻 말과 행동을 이어 가지 못했다.

“고민할 필요 없네. 이건 황제 폐하께도 굉장히 중요한 문제니까. 여기서 멈추지 못하면 정말로 큰일이 일어나고 말 걸세.”

망설이던 남자는 결국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잠시 그 자리에 서서 둘러보고는 맨 앞에 앉은 남자에게 다가가 손끝으로 가리켰다.

“자네가 직접 물어보게.”

“제가요?”

“탑주의 정체가 무엇이며, 지금 어디 있는지 말일세.”

황제의 정보원은 마른침을 삼키며 빅터를 바라봤다.

“묻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잖은가. 참고로 이 일은 황제께서 끔찍이 걱정하시는 일이기도 하다네.”

“…….”

무얼 기대하고 저러는지 모르겠다만… 황제라는 이름 앞에 남자는 의심의 방향을 마법사에게 옮길 수밖에 없었다.

“탑주에 대해 말하라.”

그의 심문은 이렇게 시작되었고.

퍼억―

로이드의 이름이 거론되는 순간 마법사의 머리는 폭죽처럼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어, 어떻게 된 겁니까?!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빅터 공?!”

황제의 정보원은 황망한 눈으로 빅터에게 물었다.

특별한 사술이 의심되는 상황.

“탑주가 걸어 놓은 금제일세.”

이어진 빅터의 말에 남자는 굳어진 얼굴로 다음 얘기를 기다렸다.

“더 확인하고 싶다면, 여기 있는 모두에게 물어보면 될 걸세.”

그런 미친 짓을 할 리 없잖은가.

황제의 정보원은 일그러진 얼굴로 빅터의 눈을 마주했다.

까닭 모를 침묵이 둘 사이를 지나갔고.

“황제께 전하게. 28년 전 그 일은 여전히 진행 중이였다고.”

빅터는 서슬 퍼런 눈으로 흑마법사를 바라보았다.

* * *

“와, 이 정도 내렸으면 이제 밝아질 때도 된 것 같은데.”

거칠게 쏟아지던 비는 아침까지 계속되다 멈췄다.

비 오는 거야 몇 날 며칠도 내릴 수 있다지만, 밤 같은 낮은 어찌 돼야 하는 것 아닐까.

저렇게 까매도 되나 싶을 만큼 하늘 가득한 먹구름은 좀처럼 사라질 생각을 않고 있었다.

“정말 특이한 날씨군.”

지난밤 내내 조용히 보냈던 별조차도 이 아침의 풍경은 이해하기 힘든 모양이었다.

오죽해야 이해 할 것 아닌가.

마치 종말이라도 열리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사라센의 하늘은 어둡고 기괴했다.

“제가 살던 곳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는데요…….”

그렇게 시작한 겨울의 얘기는 모래 폭풍으로 이어졌다.

“비구름과 먼지구름이 뒤섞여서 그렇다고?”

“네. 당시에도 원인은 사막 지역이었거든요. 우리가 있는 곳도 그런 위치잖아요. 환경이 비슷하니까 의심해 볼 만하다? 뭐, 그런 거죠.”

겨울의 얘기는 그럴듯해 보였다.

결국 낮과 밤이라는 건 햇볕의 유무로 달라지니까.

빛이 통과하지 못할 만큼 두꺼운 먼지구름이 하늘을 뒤덮었단 얘긴데.

“저쪽 하늘은 빛이 내려오는 것 같군.”

창밖을 내다보던 별은 지평선 너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네. 저쪽은 구름이 걷히는 것 같아.”

문제라면 꽤나 멀어 보인다는 것.

“저쪽이 어느 방향이지? 무턱 대고 갔다가 멀어지면 곤란하잖아.”

“그런 부담도 있지. 하지만 해를 보면 방위 확인이 가능하니 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별은 빛이 내려오는 먼 곳을 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하기야 동서남북조차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이니 이 얘기도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그래도 무작정 갈 수는 없는 거니까.

지하 통로의 길을 떠올리며 우리의 위치를 추정했다.

“결론은 아까 거기네.”

“그렇군.”

여러 가능성을 종합해 봤을 때 우리의 목적지는 별이 얘기한 구름이 걷힌 곳이었다.

물론 우리의 기억이 정확했다는 전제가 필요하겠지만.

“그냥 좀 더 기다릴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결정을 망설였다.

통로의 꺾이는 구간 하나만 놓쳐도 최종 위치는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요. 비가 그쳤을 때 이동하는 게 나을 것 같단 생각이…….”

하지만 겨울은 반대편을 바라보며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에 돌아본 나와 별은.

“가자.”

“당장 가자.”

각자의 짐을 챙겨 후다닥 건물을 빠져나왔다.

저건 어쩔 수 없으니까.

멀리 보이는 시커먼 하늘은 벼락을 내리꽂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촘촘하게…….

쏟아지는 라이트닝 볼트를 피해 우리는 구름 걷힌 땅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나는.

“와아!”

발이 느린 겨울을 업고 비에 젖은 황무지를 달리기 시작했다.

내가 답답해 죽겠으니까.

총총거리며 뛰는 녀석을 붙잡아 강제로 들쳐 업었다.

한데 녀석은 신났나보다.

“헤이스트!”

사기 마법을 걸어 주고는 두 팔을 벌려 불어오는 바람을 마주했다.

웬지 인력거 시절의 내가 떠올라 움찔했지만, 나는 사람이다…… 라고 되뇌며 양지를 향해 계속 달려갔다.

그렇게 달려 도착한 곳.

검은 구름 사이로 드러난 맑은 하늘은 거짓말 같은 경계를 만들며 어둠을 밀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별은 햇볕이 드는 장소로 이동해 마른땅에 대검을 꽂았다.

긴 그림자가 마른 땅 위에 드리웠고, 그 위에 작은 돌을 올려 위치를 표시했다.

10분 정도 지났을까.

이동한 그림자의 위치를 확인한 별은 양팔을 벌려 이렇게 외쳤다.

“왼손이 서쪽, 오른손이 동쪽이다.”

“오? 그럼 어디로 가야 해?”

“남쪽으로 가야지. 그래야 수드라가 나오든 국경이 나오든 할 것이다.”

우리의 목적지는 두 팔과 상관없는 남쪽이었다.

처음부터 이쪽이다! 하면 편할 것을.

하여간 우리는 남쪽을 목표로 다시 걷기 시작했다.

“흠, 그나저나 물을 구할 곳이 없군.”

털레털레 걸어가던 별은 수통을 흔들며 낯빛을 흐렸다.

텅 비어 작은 소리조차 없는 가죽 물통.

식전 댓바람부터 그리 달려 댔으니 아침의 공복을 물로 채운 것이었다.

“저의 마법이 필요한 순간이군요. 진작 말씀하시지.”

그에 겨울은 어깨를 으쓱이며 별에게 다가갔다.

쭈그러든 가죽 물통을 받아 들고는.

“크리에이티브 워터!”

투명한 물줄기를 만들어 물통을 채우기 시작했다.

잠시 후.

“자∼ 알레스카의 청정 빙하수도 울고 갈 겨울표 생수입니다.”

물통을 가득 채운 겨울은 너스레를 떨며 별에게 되돌려 줬다.

“흐음…….”

물통을 받아 든 별은 마른침을 삼키며 멈칫했다.

마법이라 찜찜했던 모양인데.

“아, 너는 처음 보는 건가? 그거 한 번 마시면 다른 물 못 마실 건데. 꽤 맛있거든.”

추천하는 나의 말에 별은 용기를 내어 물통을 입에 가져다 댔다.

그러고는.

“한 번 더!”

눈동자를 반짝이며 빈 물통을 내밀었다.

* * *

“여기서 끊겼네. 완전히 무너졌어.”

내려앉은 통로 앞에 선 레이는 고개를 저으며 돌아섰다.

기껏 쫓아왔는데 여기서 놓치다니.

“그럼 어떻게 해?”

더 이상 쫓을 수 없다는 레이의 말에 에비오는 눈을 키우며 반문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여기서 놓치게 된다면 어디서 다시 만나게 될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돌아가서 기다려야지.”

하지만 레이는 태평하게 답하며 통로를 되돌아 나갔다.

할 맘이 없어서 저러는 건가.

“가긴 어딜 가?! 저 돌덩일 치워서라도 쫓아가야지!”

참다못한 에비오는 씩씩거리며 가는 레이를 붙잡아 세웠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레이.

“건방지네?”

“그, 그게 아니라 지금이 아니면!”

붙잡은 손을 뿌리친 레이는 차가워진 눈으로 에비오를 바라보았다.

“이반을 죽이고 싶은 건 난데?”

“하지만 로이드 님이…….”

“아니, 로이드고 나발이고, 나만큼 그놈을 잡고 싶냐 이 말이지.”

“…….”

“어차피 빅터와 한패라는 건 알아냈잖아. 살아 있으면 아케른 성으로 오겠지. 안 그래?”

에비오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니 그의 말이 맞았다.

여기 남아 난리를 친들 저 돌무더길 어찌할 방법도 없었고…….

그렇긴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겁먹어서 끄덕인 게 에비오의 본심이었다.

“늦기 전에 돌아가서 동생도 마저 불러내자고. 마침 좋은 몸뚱이도 생겼잖아. 안 그래?”

“어… 그래…….”

어제 이반과 한바탕 싸웠던 정체 모를 녀석들.

레이가 말하는 몸뚱이는 모래톱에 파묻힌 여섯 명을 말하는 것이었다.

“추적은 잠깐 쉬자고. 그 대신 준비를 하는 거야.”

“뭘 준비하는데.”

“뭐긴 뭐야. 놈을 죽일 준비지. 다음에 마주치면 그 자리에서 죽여 버리자고 알겠지?”

쓰게 웃던 레이는 에비오의 어깨를 두드리며 통로를 돌아 나갔다.

[새로운 육체가 안정화되어 시스템을 재설정합니다.]

[시스템을 재설정합니다.]

[시스템 재설정 10%…….]

눈앞에 떠오른 새로운 문자를 바라보면서.

내 목숨 99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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