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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숨 99개-124화 (124/203)

124화

“아니, 이게 왜 이제 뜨냐.”

거, 한두 대만 먼저 떴어도 93을 볼 각오까진 안 했을 것을.

뒤늦게 도착한 새로운 시스템은 아리송한 말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충격 내성 LV2]

흡수할 수 있는 대미지의 한계가 증가합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떠오르는 건 이거였다.

견뎌 낼 수 있는 충격의 강도의 증가.

예를 들자면 조금 전 나의 상황이 완벽한 본보기가 되는 것이다.

나의 충격 내성 말이다.

이제껏 멀쩡히 잘 적용되던 충격 내성은 소대가리를 만난 이후로 무용지물이 돼 버렸다.

심지어 눈앞에선 계속 대미지가 감소했다고 떠들어 댔건만, 나의 몸은 부들부들 떨리고 피를 토하며 죽다 살아나길 반복했다.

이것을 바탕으로 추론하자면, 감당하기 힘든 대미지가 들어오면 내성의 기능을 잃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충격 내성 LV2 라는 건 대응 가능한 범위를 넓혀 줬다고 이해하면 될 터.

“그나저나 너희들은 내가 여기 있는 걸 어떻게 찾아왔어?”

출구로 향하던 나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별을 바라봤다.

“갈 곳이 빤한데 못 찾는 게 이상한 거다.”

“빤했다고?”

“당연한 것 아닌가. 바위 아래로 난 길을 따라가면 이 지역이 나오고, 그중에 가장 숨을 곳 없는 델 찾으면 여기가 나온다.”

아… 나만 이상했구나.

이곳으로 내려오기 위해 나름 있는 머리, 없는 머릴 다 굴렸는데.

하여간 뭘 찾건 찾는 것 하나는 정말 잘하는 것 같다.

“아참, 너 이거 휘두를 수 있겠어?”

화제를 돌린 나는 소대가리가 휘두르던 대검을 들어 별에게 넘겨주었다.

검신의 폭만 해도 한 뼘은 족히 되니 널빤지라고 해도 좋을 만큼 넓은 모양이 특징이다.

“음… 무게감이 달라서 그렇지 사용은 할 수 있다.”

“그럼 한번 휘둘러 봐.”

다룰 수만 있다면야 크기가 무슨 상관이겠나. 하다못해 들고만 다녀도 근력 향상이 될 테니, 이참에 무기를 바꿔 보는 것도 긍정적인 효과가 있을 것이다.

“좋다. 이런 거라면 얼마든 환영이지.”

하여 별은 넓적한 대검을 들어 자세를 만들었다.

그저 무기 하나 바꿨을 뿐인데.

“뭐야, 분위기 장난 아닌데?”

“와, 아마조네스 같아요.”

나와 겨울은 달라진 별을 보며 감탄을 내뱉었다.

게다가 처음 들어보는 말까지 섞어서.

“아마조네스가 뭐야?”

“제가 살던 곳에 있던 신화 속 여전사 부족이에요.”

되묻는 나의 말에 겨울은 싱글벙글 대답했다.

여전사 부족이라니.

별의 모습을 보던 나는 절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보다 잘 어울리는 말은 없을 테니까.

넓은 대검을 치켜든 별은 누가 봐도 완벽한 여전사의 모습이었다.

“좋아, 우리 여전사님 대검 맛 좀 보자고.”

눈썹을 끌어올린 나는 자세를 잡아 별을 마주했다.

앞전 싸움에 대한 부담이 채 사라지지 않았지만.

그거야 뭐…….

별의 수준을 꿰고 있는 나로선 염려할 부분이 아니었다.

그저 새로운 장비를 확인하는 정도일 터.

“간다.”

짧게 답한 별은 간결하게 대검을 내리그었다.

그런데 왜.

카아앙―

가로막은 내 손에선 저릿한 기운이 감도는 걸까.

[충격 내성으로 인해 대미지가 감소하였습니다.]

성장한 충격 내성이 작용했건만, 그 와중에도 충격파는 소량 전해졌다.

하나 이것이 별의 능력은 아닌바.

“그 칼이 요물이었네.”

소대가리의 대검에도 충격파가 흘러나왔다.

물론 본신의 강렬함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만 해도 상대방은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게 될 터였다.

“흠, 부딪치는 순간 생소한 감각이 전해지는군.”

“충격 파장이야. 당하는 입장에선 아주 괴롭지.”

나는 조금 전 상황을 떠올리며 작게 주억거렸다.

“그렇단 말이군.”

별은 대검을 바라보며 나직이 대답했다.

순간 희번덕거리는 녀석의 눈.

“다 챙겼으면 가자.”

나는 불안한 예감을 애써 무시하며 새로 열린 문을 지나 낯선 통로로 걸어갔다.

마력 등 빛을 앞세우며 들어선 통로.

어둠을 밀어낸 통로 양쪽엔 채색된 벽화가 시선을 끌며 길게 이어져 있었다.

“천사와 악마인가요?”

겨울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양쪽 그림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왼쪽은 악마요, 오른쪽은 천사.

길게 이어지던 벽화의 행렬은 정면에 마주한 막다른 벽에서 전투라는 형태로 뒤엉켜 있었다.

“신들의 전쟁인가?”

뒤를 따르던 별은 낮게 중얼대며 그림을 살폈다.

기원조차 불분명한 오래된 이야기.

그 앞에 선 나는 벽화의 중앙을 향해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보이는 것은 도톰하게 솟아오른 작은 요철을 조심스레 누르자 막다른 벽에 작은 공간이 생겨났다.

“오∼ 응용력이 좋으시네요.”

이어지는 겨울의 칭찬에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반응했다.

무릇 사람이란 경험을 통해 성장하는 법.

공개된 작은 공간 안엔 기도할 때 손에 쥐는 작은 성물이 들어 있었다.

열어 달라는 길은 안 열어 주고 왜 이걸 주나 했더니만.

“흠.”

성물의 뒷면에는 작은 글씨로 채워진 특정한 이름이 적혀 있었다.

“슐타나 나크시딜?”

처음 듣는 이름에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성물을 노려봤다.

그런다고 뾰족한 수가 생기겠나.

결국 내 손을 떠난 성물은 궁금해하는 겨울의 손에 쥐어졌다.

“음…….”

성물을 넘겨받은 겨울은 이리저리 둘러보며 특별함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렇게 열심히 찾아봤지만.

“이상하네.”

녀석이 찾던 뭔가는 끝내 드러나지 않았다.

그저 평범한 성물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보통 이렇게 숨겨져 있다면 특별한 용도가 있을 텐데요.”

하지만 겨울은 여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이렇다 할 성과가 없을 뿐.

녀석은 성물을 챙겨 주머니에 넣고는 까치발을 들어 열려진 작은 공간을 바라보았다.

“이건 제가 살펴볼 테니 이제 나가는 데 집중하죠. 저 안쪽 좀 봐 주세요.”

그에 나는 녀석의 뒤로 다가가 마력 등을 내밀었다.

그림자로 채워진 공간에 빛이 스며들었고, 그제야 나는 가장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작은 손잡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거참 신기한 녀석이네.”

으쓱거리는 겨울을 보며 나는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드르륵거리며 열리는 오른쪽 석벽.

벽화가 있던 자리에는 비좁은 통로가 시커먼 입구를 드러냈다.

* * *

오후의 햇살이 길게 드리워진 들녘 위로 한 무리의 남자들이 거칠게 말을 몰아 달렸다.

선두를 달리는 사람은 백발이 성성한 빅터와 그의 부관 켄드릭.

“로이드와 그 사람들이 같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정체는 상관없다.”

굳은 표정으로 묻는 켄드릭의 말에 빅터는 마른 입술을 열어 낮게 대답했다.

“그놈의 정체가 카론이건 루즈건 이제는 의미 없다.”

놈들이 행한 결과만이 중요할 뿐.

어떤 놈이 튀어나오건 빅터의 목적은 달라지지 않는다.

“황제의 정보원들도 분명히 눈치챌 텐데요.”

“그러니 더욱 요란하게 만들어야지. 황제가 나설 수밖에 없도록 해야 한다.”

“흠… 마법 원로원 때문인가요?”

“그래. 그 늙은이들 입을 막으려면 황제가 움직여야 해.”

단호한 빅터의 말에 켄드릭은 먼 곳을 바라보았다.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슈탈렌.

빅터의 말대로라면, 오늘밤 저곳에선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게 될 것이다.

불가침의 금기를 깨는 월권.

이 특별한 사연의 시작은 조금 더 먼 시간으로 흘러가게 된다.

대륙의 모든 국가가 그러하듯, 브라함 역시 마법사의 영역을 존중해 왔다.

사실상 자치라고 해도 무방할 수준.

국가의 안위를 흔들지 않는 범위라면 활동에 제재를 가하거나 특정 행위를 강요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국가의 권력이란 왕권과 군권, 그리고 마탑이라는 힘에 의해 조화롭게 돌아가는 까닭이었다.

그런 공생이 가능했던 건, 서로의 영역을 철저히 지켜 주었기에 가능했다.

특히나 마탑.

마탑에게 있어 독립성은 다른 무엇보다 더욱 특별했다.

두 집단의 특성 차이라고나 할까.

귀족들이 주축이 된 군권과 달리, 학자 기질이 다분한 마탑에선 출세보단 자유로운 연구에 더욱 큰 가치를 걸었던 탓이다.

학파와 상관없는 공통의 가치.

사라센을 보면 알 수 있듯, 흑마법이라 한들 이런 분위기는 다르지 않았다.

한데 브라함의 흑마탑은 왜 이리도 폐쇄적이고, 외부로부터 박해를 받는 걸까.

그 원인은 현 황제인 데드릭 때문이었다.

[브라함 마법 학회는 흑마법을 주요 학파에서 배제합니다.]

신탁의 기사 8인이 처형된 지 1년.

마법 학회에선 이 같은 공문을 각 지부에 전달했다.

내용은 말 그대로 흑마탑의 비주류 선언으로, 마탑의 영향력에는 있으나 국가의 지원을 받지 못하며, 사술로 인정되는바 국가의 관리를 받아야 한다는 게 주요 골자였다.

억지 주장이었다.

이것이 잘못된 결정이라는 것은 마법 학회 스스로가 더욱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놈의 비리.

유독 자리에 집착하던 마탑주는 흑마탑을 묻어버리는 조건으로 종신을 약속받았다.

그를 따르던 주요 인사들 또한 마찬가지, 그들은 그렇게 흔들리지 않을 탄탄한 아성을 쌓아 올리게 되었다.

묻어 둘 게 많은 황제와 흔들리기 싫은 마탑주는 서로의 불편함을 털어 내며 각자의 자리를 지켜 나갔다.

“한데 참 웃기지 않습니까?”

“뭐가 말이냐.”

“마탑주 말입니다. 흑마탑을 이렇게 남겨 둘 바에야 차라리 없애는 게 깔끔했을 텐데요.”

“체면이란 게다.”

부관 켄드릭의 말에 빅터는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 그나마 내가 있었기에 황제가 뜻을 굽힌 걸세. 명맥이라도 이을 수 있는 것에 감사하게.

마탑주는 그렇게 자신의 체면과 권익을 모두 움켜쥐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린 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흑마탑을 배척했음에도 그들은 오히려 이렇게 말하고 다녔다.

이 모든 게 우리 덕이라고.

참으로 편한 이유들이었다.

하나 그 짓거리도 이제 끝을 고할 터.

“그만큼 해 먹었으면 이제 내려올 때도 됐지.”

빅터는 가까워지는 슈탈렌을 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이제 정말 큰 파도가 몰려올 테니까.

* * *

“으아… 드디어 나왔네요.”

바깥공기를 마주한 겨울은 기지개를 켜며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대강 2시간 만인가.

그 좁은 지하 통로를 따라 내내 걷기만 했으니 오죽 답답했겠나.

지상 위로 올라온 지금은 천국을 맛본 듯 게걸스레 신선한 공기를 탐했다.

한데 왜 이리 어두운 걸까.

“벌써 해가 떨어지나.”

가늠되지 않는 시간에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두리번 거렸다.

작은 신전을 찾아 들어간 게 대략 오후 3시쯤, 그러니 이 시간이면 아직은 훤해야 했다.

하지만 주위를 메운 건 이른 저녁 같은 어둠뿐.

“구름이 낀 것 같군.”

주위를 살피던 별은 하늘을 보며 상황을 파악했다.

그러고 보니 낮게 깔린 구름들이 죄다 시커먼 먹구름이었다.

“얼마나 쏟아지려고 저렇게까지…….”

흐린 날이야 숱하게 봐 왔지만, 이렇게 컴컴한 날은 드문 것 같다.

아니, 이런 날을 보긴 했었나?

낮게 깔린 먹구름들은 내리는 빛을 가려 시간의 흐름을 알 수 없게 만들었다.

“빨리 돌아가야 할 것 같은데요. 이러다 꼼짝도 못하겠어요.”

이상함을 느끼는 건 모두가 같을 터.

불안해하는 겨울을 보며 나는 돌아갈 길을 살피기 시작했다.

하지만 잠시 후.

“어디로 가야 하지?”

나란히 선 나와 별은 초조해진 얼굴로 휑한 황무지를 바라봐야 했다.

방향을 잃은 까닭이었다.

지하도를 뺑뺑이 돌다 나왔으니 가야 할 방향을 종잡을 수가 없던 것이다.

게다가 하늘은 가려져 동서남북조차 구분이 안 되는 상황.

방향을 가늠할 단서가 없으니 목적지를 잡지 못한 채 지도만 뒤적거리고 있었다.

의미 없는 짓이었다.

현재 위치를 모르는데 지도는 봐서 뭐하겠나.

“일단 저 너머로 가 보자.”

나는 지붕조차 없는 이곳을 버리고 멀리 보이는 또 다른 폐허로 향했다.

내 목숨 99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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