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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숨 99개-123화 (123/203)

123화

오른쪽 길로 향하자 머지않아 넓은 방이 나왔다.

좁은 복도를 벗어나니 반갑고 마음이 놓이는 기분마저 들었지만.

‘뭐 하는 곳이지?’

마력 등 불빛이 채 닿지 않을 만큼 방의 크기는 상당했다.

하여 용도를 짐작하는 건 일단 포기했다.

추측할 단서도 없거니와, 그보다 중요한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음……?”

어둠을 뚫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거대한 소.

나보다 머리 네 개는 더 큰 이놈은 도망친 녀석의 다리를 입에 물고 나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부자연스러운 건지.

이족 보행을 하는 소는 보기에도 이상했고, 남자의 다리를 씹고 있는 건 더더욱 이상했다.

육식을 하는 소라니…….

너무 괴이한 녀석이 아닌가.

출생지와 종류를 알 수 없던 이 괴물은 널찍한 대검을 들고 내 얼굴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상한데, 건방지기까지 하다.

게다가 놈과 나 사이엔 기이한 눈싸움마저 진행되고 있었다.

이래서야 사람과 싸우는 결투 같잖나.

휙―

급기야 놈은 씹던 남자를 들어 구석에 내던졌다.

날아가 처박히는 정체불명의 남자.

그것을 신호로 거대한 소는 나를 향해 터벅터벅 다가오기 시작했다.

예상되는 거리는 30보.

다시 줄어 20보.

“이놈 봐라…….”

나는 다가오는 놈을 마주 보며 얕은 탄식을 내뱉었다.

부딪쳐 봐야 아는 게 몬스터라지만, 그럴 필요 없는 녀석들도 존재하는 법.

가까워지는 거리만큼 놈이 풍기는 위압감은 더욱 짙어졌다.

그런 나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자신의 간격에 들어선 놈은 어떤 조짐도 없이 다짜고짜 대검을 휘둘렀다.

이런 간결함은 차라리 배우고 싶을 정도.

내리치는 놈의 대검을 해머를 들어 여유 있게 막았다.

그렇게 막았는데.

“어어?!”

[충격 내성으로 인해 대미지가 감소하였습니다.]

완벽한 방어였음에도 충격 내성이 떠올랐다.

처음 겪어 보는 당혹스런 상황.

한 걸음 물러선 나는 저릿한 손을 털며 놈의 대검을 바라보았다.

‘이거 익숙한 느낌인데.’

어디서 경험했는지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뭐였을까.

그사이 놈의 공격이 연이어 들어왔고.

카아앙!

이어지는 다음 공격에 감각의 정체를 떠올릴 수 있었다.

방어하면서도 속이 진탕되는 기분…….

머릿속에 떠오른 건 암석 골렘의 공격이었다.

그보다 훨씬 깊고 무거워진, 고생스러웠던 그날의 기억은 또 다른 모습으로 나에게 찾아왔다.

“쯧…….”

쓰게 혀를 찬 나는 자세를 바꿔 공격으로 전환했다.

방어를 할수록 수렁에 빠지는 것은 내가 될 터.

크게 뽑아 든 해머를 휘둘러 놈의 머리에 내리꽂았다.

콰앙!

나름 빠르게 휘둘렀건만 나의 공격은 녀석의 대검에 가로막혔다.

이어서 측면.

쾅!

이번엔 아래에서 위로.

콰앙!

역시 놈은 만만치 않았고, 빈틈은 쉽사리 잡히지 않았다.

뭐, 그럴 수 있다.

싸움이라는 건 어차피 상대적이니까. 녀석이 강하다면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모든 것이 불합리한 상황.

공격하는 입장이 나였음에도 놈의 충격파는 계속해서 되돌아오고 있었다.

[충격 내성으로 인해…….]

[충격 내성으로 인해…….]

놈의 검과 맞닿을 때마다 나의 몸은 조금씩 진탕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방어하는 것보단 그래도 이것이 훨씬 나을 터.

쾅! 콰앙! 쾅! 쾅!

주도권을 잡은 채로 놈의 빈틈을 노리며 파고들었다.

마침내 드러나는 놈의 얼굴.

길게 튀어나온 주둥이를 향해 잿빛 해머를 때려 박았다.

쩌엉―

한데 소리가 이상하다.

응당 들려왔어야 할 ‘쩌억’이 아닌 다른 소리가 귓가를 자극했다.

‘쩌엉?’

뿔이었다.

놈은 커다란 뿔을 앞세워 맞닿은 해머를 여유 있게 막아 내고 있었다.

하나 상황 파악도 잠시.

되돌아오는 강렬한 충격파에 나의 몸은 거칠게 반응하며 붉은 토혈을 뱉어 냈다.

“크윽.”

이렇게 전세는 다시 역전.

몰아치는 놈의 대검을 얼굴을 구기며 막아 냈다.

그저 움직임만으로 싸운다면 이토록 애먹진 않았을 것을.

놈의 기묘한 파장은 매순간 나의 몸속에 깊은 대미지를 누적시키고 있었다.

크워워워워워워―

그 와중에 놈은 기세를 올렸다.

이대로 가다간 결국 반응할 타이밍조차 놓치게 될 터.

나는 최대한 거리를 벌리며 놈과의 접촉을 피했다.

일단 난리가 난 몸속을 진정시켜야 뭐라도 다시 할 테니까.

하나 저 눈치 빠른 소대가리는 틈을 주지 않았다.

그대로 돌진한 놈은 대검을 둘렀고.

“칫…….”

날아오는 대검을 피해 나는 반대편으로 몸을 돌렸다.

이제 놈과 나의 위치는 처음과 반대인 상황.

좋지 않다.

놈의 방어를 피해 공격을 직격하지 못한다면 이 악순환은 계속될 것이었다.

그러나 뾰족한 타개책이 없었다.

조금만 우월했다면 좋을 것을, 엇비슷한 놈과 나의 신체 능력은 의미 없는 평행선을 이어 가고 있었다.

물론 속으로 곯고 있는 건 나였지만.

크워워워워―

기함을 지르는 소대가리를 보며 나는 미간을 끌어당겼다.

시간이 흐를수록 불리해지는 건 나일뿐.

“시끄러 소대가리…….”

좀 더 빠르게 움직이고 대차게 두들겨 보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에 따른 고통은 오롯이 나의 몫.

결심을 굳힌 나는 놈의 품을 향해 쏘아지듯 달려 나갔다.

바닥을 끌며 올라오는 잿빛의 해머.

삼신기 3번 자세로 시작된 공격은 휘두르기와 내려치기로 흐름을 바꾸며 집요하게 날아들었다.

결과는 선명했다.

가로막힌 공격은 충격파로 되돌아왔고, 나는 그대로 버티며 다음 공격을 쑤셔 넣었다.

“크흑.”

치미는 피를 삼키며 또다시 공격을 이어 갔다.

나의 결심은 이것.

남아 있는 숫자를 93으로 바꾸더라도 이 소대가리는 반드시 꺾을 참이었다.

콰아아앙―

쾅! 콰앙! 쾅쾅!

뒤를 남기지 않는 파상 공세에 놈의 다리가 크게 한 걸음 물러섰다.

드디어 밀리는 건가?

하나 놈의 후퇴는 공격을 위한 준비일 뿐이었다.

그럼 그렇지.

쉽지 않은 상대를 보며 입꼬리를 당겼다.

나의 해머는 위로 향했고.

카아아아앙―

강렬한 놈의 일격이 해머 위로 떨어졌다.

또다시 위로 향하는 대검.

진탕하는 몸을 이끌어 이어지는 참격을 막아 냈다.

그 위로 또 한번.

같은 자리로 다시 한번.

그렇게 나의 몸은 한계로 내몰렸다.

두 손은 경련하듯 부들거렸고, 육체는 싸여 가는 대미지를 견뎌 내지 못하기 시작했다.

“하… 93을 보는 건가.”

올라가는 대검을 보며 나는 뇌까리듯 다음을 준비했다.

그러나 이대로 갈 수는 없으니까.

해머를 끌어 올려 마지막 발악을 준비했다.

하지만 그 순간.

끝을 각오하는 나의 눈에 선명한 푸른빛이 날아들었다.

의문과 함께 문자가 떠올랐고.

[프로텍션 적용 중.]

모든 피격 대미지 20% 감소.

지속 시간 60분.

들어 올린 해머 위로 거대한 놈의 대검이 단두대처럼 떨어져 내렸다.

하나 나의 해머는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니.

[스트렝스 적용 중.]

대미지 20% 증가.

지속 시간 60분.

[헤이스트 적용 중.]

공격 및 이동속도 20% 증가.

지속 시간 60분.

연이어 날아오는 붉은색과 초록색의 빛은 나의 몸속에 스며들며 또 다른 문자를 쉬지 않고 만들어 냈다.

“93은 안 봐도 되겠네.”

드리워진 대검을 치워 내며 놈의 어깨로 해머를 휘둘렀다.

한 박자 늦게 따라오는 놈의 대검.

방어가 늦어진 놈의 어깨엔 날카로운 피켈이 들어박혔다.

크워워워워웍!

괴성을 지른 놈은 늘어진 왼팔을 두고 오른팔로 대검을 휘둘렀다.

하나 더 이상은 소용없는 일.

휘둘러진 놈의 대검을 쳐 내 바깥쪽으로 빗겨 냈다.

사기 마법 3종을 장착한 나에겐 아까와 같은 약점은 남아 있지 않았다.

이제 흐름은 나에게 돌아왔을 터.

새로운 목표를 찾은 나의 해머는 거대하게 솟은 뿔을 향해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쩌어억―

단단하게 버티던 놈의 뿔은 썩은 나무처럼 부러져 바닥에 나뒹굴었다.

크워워워워워워웍―

고통에 찬 녀석의 비명이 너른 방을 가득 채웠고, 나는 비어 있는 무릎에 잿빛 해머를 때려 넣었다.

중심을 잃은 놈이 휘청거리며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나는.

콰지직―

지금껏 노려 왔던 놈의 주둥이에 마지막 한 방을 때려 넣었다.

힘없이 처박히는 놈의 머리.

커다란 거체가 허물어지며 어린 소녀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들려왔다.

“저랑 있으면 강해질 거라고 했잖아요.”

귀에 익은 여린 음성.

모습을 드러낸 겨울은 반달눈을 하며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웠다.

“여긴 어떻게 찾아왔어?”

놀라움과 반가움을 뒤로한 채 나는 우선 질문부터 꺼내기로 했다.

용케 찾아왔다 싶은 것이다.

“언니가 가자고 했어요.”

그에 겨울은 손가락을 길게 뻗어 구석을 가리켰다.

다리가 절단된 남자.

그 앞에 앉아 있던 별은 굳은 얼굴로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숨이 끊어졌다.”

그랬을 것이다. 그렇게 물고 뜯겼는데 무사할 리 없잖은가.

“이놈들도 우리가 찾는 강화 인간이었나?”

“아니, 이 사람들은 정상인 것 같아.”

근거리에서 마주하진 못했지만, 강화 인간은 아니었다.

이들에겐 명백한 자의식이 있었으니까.

자력 후퇴가 없는 강화 인간과는 여러모로 다른 행보를 보였다.

“그나저나 아깝게 됐네.”

이들의 출발지나 목적 등, 생생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기회였는데 말이다.

“이건 쓸 만해 보인다만.”

하지만 별은 낡은 가죽 가방을 나에게 내밀었다.

핏물이 얼룩진 갈색 가방.

사망한 남자의 것으로 보이는 가방 안에는 몇 등분으로 접은 지도와 작성 중인 보고서가 들어 있었다.

“이거 뭔가 중요해 보이는데.”

적혀 있는 내용들은 강화 인간들의 성장 과정과 단계.

그리고 향하는 목적지가 자세하게 적혀 있었다.

그 많은 것 중에 특히 눈길을 잡는 게 따로 있었는데.

보고서에는 이상한 숫자들이 이름을 대신하고 있었다.

바빌리안 45.

바빌리안 46.

바빌리안 47.

뭐 이런 식이었다.

45번째, 혹은 46, 47번째라는 말일까?

“이 숫자가 뭐라고 생각해?”

나는 보고서를 보여 주며 두 사람의 의견을 물어봤다.

“뭐로 봐도 이름인데요.”

“내 생각도 마찬가지다. 그저 부르기 쉽게 구분해 놓은 것 같다.”

이것으로 나는 두 가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일단 우리가 해치운 놈 말고도 41명이 더 있다는 얘기였고, 다른 하나는 사라센이 이들을 철저히 소모품으로 사용한다는 사실이었다.

“정말 대량생산이라도 한다는 건가.”

앞 번호의 강화 인간이 지금 어떤 수준일지도 모르고, 아직 바깥에 나오지 않은 놈들은 또 얼마나 있을지 모를 상황이었다.

“계속 여기 있어야 하나…….”

그래서 고민스러웠다.

이들의 본거지와 연결 관계가 그림처럼 떠오른 탓이었다.

“다른 생각이 떠오른 것인가?”

“아니, 좀 깊게 연결해 봐야 할 게 있는 것 같아서.”

별의 질문에 답하며 바빌리안을 떠올렸다.

대표적인 시설이라면 역시나 흑마탑.

하지만 그곳에는 그에 못지않은 특별한 장소가 존재하고 있었다.

“바빌리안에 부대가 생겼다고 했나?”

“네, 맞아요.”

군부대를 떠올린 나의 질문에 겨울은 크게 끄덕이며 대답했다.

강화 인간의 재료와 군부대.

그 부대의 병사가 곧 실험 재료이고, 완성된 이들이 정상인의 자리를 대신한다.

‘게다가 실험실은 같은 도시 내.’

강화 인간의 숫자를 확인하자 바빌리안의 이면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이후의 일은 베르에게 연락해 보면 알게 될 터.

“일단 챙길 거 챙겨서 나가자.”

자리를 털고 일어선 나는 바닥에 널브러진 대검과 부러진 소뿔을 챙겼다.

기왕 챙긴 거 하나 더.

반대쪽 뿔마저 부러뜨린 나는 들어온 통로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길로 못 간다.”

“왜?”

“통로가 무너졌어요.”

“통로가 왜 무너져?

“언니가 뭘 건드렸는데 갑자기…….”

무너졌다는 얘기였다.

내가 그렇게 있는 함정 없는 함정을 다 긁으면서 왔건만.

“너네들도 어지간한 똥손이구나.”

나는 위안과 위로를 동시에 주고받으며 걸음을 되돌렸다.

이젠 출구를 찾아야 할 차례.

들어온 반대편을 향해 계속해서 걸어 나갔다.

적당히 걸어간 끝에 벽을 마주하게 되었고.

스윽―

겨울은 불 꺼진 횃불과 몇몇 장식을 건드려 닫혀 있던 문을 열어 버렸다.

그리고 녀석은.

“뭐야, 어떻게 알았는데?”

“어드벤처 게임 좀 하다 보면 이 정도는 기본이죠.”

신기해하는 나에게 더욱 신기한 말을 건넸다.

당최 알아들을 수 없어 갸웃거렸지만.

“손바닥 내밀어 봐요.”

겨울은 또다시 내게 알 수 없는 행동을 부탁했다.

그에 나는 손을 내밀었고.

“이건 하이 파이브라고 하는 건데요. 모든 게 잘 풀렸을 때 자축하는 의미로 치는 거예요.”

그렇게 설명을 마치고는 폴짝 뛰어 나의 손바닥을 마주쳤다.

한데 그 순간.

[누적된 충격으로 인해 충격 내성 레벨이 상승합니다.]

“아놔, 진작 올려 주든가!”

피를 토할 것 같던 나의 몸은 저 작은 손바닥으로 경계를 넘어섰다.

내 목숨 99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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