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은은하다.
그러나 느낌은 확실하게 전해진다.
얇은 피막에 둘러싸인 모습.
여섯 남자는 탁한 오러를 흘리며 유적지 입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
“알 것 같다. 확실히 오러와 다른 느낌이군.
나의 설명을 들은 별은 고개를 끄덕이며 차이점을 인식했다.
“이제 어쩔 셈인가.”
“다 정리해야지. 심문할 녀석 하나만 남기고.”
걸어오는 놈들을 보며 나는 차가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어차피 이러려고 넘어왔으니까.
실험 중인 사라센의 행보를 막고, 전쟁의 시작을 늦추는 게 우리의 목표였다.
‘망설이지 마.’
계단으로 향하며 각오를 다졌다.
작정하고 사람을 해하는 건 카이 형제 이후 이번이 처음.
나름의 정당성과 이유가 있지만, 불편한 감정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내가 먼저 나설 테니까 뒤를 잡아. 겨울이는 여기 남아 있고.”
“알겠다.”
“네.”
두 사람의 대답을 들으며 나는 지상으로 내려왔다.
놈들은 곧 이 앞을 지나갈 터.
코앞으로 다가온 남자들을 보며 나는 차분히 실력을 가늠했다.
‘역시 6성급인가.’
정해진 기준 같은 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카리프와 비교하는 것뿐.
현저하게 옅은 기운이 놈들의 수준을 예상하게 만들었다.
“시작한다.”
짧은 말을 남긴 나는 측면을 달려 놈들에게 몸을 날렸다.
노리는 것은 끄트머리에 있는 녀석.
공중으로 뛰어오른 나는 행렬의 끝을 노리며 해머를 내리쳤다.
콰직―
표적이 된 녀석이 반응했으나 이미 늦었다.
내지른 해머는 방어를 뚫었고, 그대로 지나쳐 놈의 머리를 직격했다.
갑작스런 기습에 놈들의 시선이 나에게 향했다.
하지만 그뿐.
‘표정도 없네.’
자아가 없다던 연구원의 말은 이것을 뜻하는 것 같았다.
흔한 탄성이나 고성조차 없었으니까.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강화 인간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나 지금의 나는 겨울이의 마법이 활성화된 상태, 20%나 빨라진 움직임은 놈들의 공격을 여유 있게 흘려 냈다.
콰직―
이제 남은 강화 인간은 넷.
또다시 한 놈을 쓰러뜨리며 크게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아랑곳없다.
자아를 잃은 놈들의 공세는 계속되었고, 무너지는 강화 인간의 뒤로 달려오는 별의 모습이 보였다.
날아오르는 별의 그림자.
겨울의 마법을 등에 업은 별은 고점에 이른 대검을 붙잡아 사납게 내리그었다.
가가각―
배후가 텅 빈 녀석이 별의 공격에 허망하게 당했다.
하지만 놈들은 개의치 않았다.
남아 있는 두 녀석은 여전히 나를 향했고, 눈앞에 있는 적을 쫓아 집요하게 달려들었다.
빠캉!
해머에 치인 강화 인간의 칼이 허공을 갈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놈의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무기를 잃은 강화 인간은 맨주먹을 휘두르며 더욱 거세게 온몸을 날려 왔다.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뒤가 없는 강화 인간의 공격 방식은 상대하는 나의 머리를 갸웃거리게 만들었다.
무모하다고 해야 하나?
6성이라는 뛰어난 조건과 수적 우위를 갖췄음에도, 놈들은 큰 허점을 드러내며 싱겁게 무너지고 있었다.
만약 상대의 수준이 비슷했거나 그 이하라면 충분히 통했을지도 모르겠다.
박살 난 머리로 손을 내미는 모습은 분명히 경악스러웠으니까.
저렇게 몸을 아끼지 않고 덤빈다면 마주하는 입장에선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니, 속수무책이었을 터.
하지만 나에겐 통하지 않았다.
감당할 수 있는 저 공격들은 의미 없는 몸짓에 불과했고, 두려움을 잊은 놈들의 모습은 무모함에 불과했다.
그러니 결과는 빤할 수밖에.
콰직―
날아간 나의 해머는 맨주먹 남자를 박살 냈다.
남은 것은 뒤를 따르던 한 놈뿐.
스걱―
검을 치켜들던 마지막 강화 인간은 별의 대검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다.
다시 한번 이어지는 참격.
쓰러진 놈의 두 다리는 기능을 잃은 채 흐느적거렸다.
그러나 놈의 공격 본능은 여전했고, 남아 있는 두 팔을 움직여 나를 향해 기어왔다.
“쯧…….”
기괴한 그 모습에 혀를 차며 얼굴을 구겼다.
그대로 해머를 들어 올린 나는.
콰직―
남아 있는 두 팔마저 철저히 봉쇄해 버렸다.
“기분 나쁜 놈들이군.”
여전히 꿈틀대는 놈을 보며 별은 미간을 찌푸렸다.
두려움도 고통도 없는 살인 병기.
자아를 잃은 전투 인형은 눈앞의 적을 향해 끝없이 움직이며 달려들 뿐이었다.
“정체가 뭐냐?”
의미 없는 걸 알면서도 나는 놈에게 질문을 던졌다.
역시나 돌아온 답은 없었고.
“인간의 탈을 쓴 마인이다.”
대검을 치켜든 별은 고개를 저으며 의미 없음을 전해 왔다.
나 역시 공감하는 바.
가볍게 끄덕이며 결정권을 넘겼다.
스걱―
별의 대검은 망설임 없이 놈의 생명을 거뒀다.
“일이 많아졌네.”
주변을 둘러본 나는 푸념을 섞어 낮게 중얼거렸다.
계속해서 잠복을 하려면 현장 정리는 필수일 테니까.
긴 한숨을 내쉬고는 널브러진 놈들을 살폈다.
한데 그 순간.
“음?”
쓰러진 강화 인간을 살피던 나의 눈에 이상한 모습이 포착됐다.
시선이 향한 곳은 놈들이 걸어온 유적지 입구 방향.
“저거 사람 아니야?”
나는 손을 길게 뻗어 먼 곳에 있는 바위 지대를 가리켰다.
“어딜 말하는 건가.”
“저 바위들 뒤쪽. 방금 숨는 걸 본 것 같거든.”
분명히 걸어오던 두 사람이 있었고, 손을 뻗는 순간 그들은 몸을 숨겼다.
물론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봐선 안 될 현장이라고 판단했다면 얼마든지 숨을 수 있고, 또한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저 사람들은 수상했다.
단순히 행동 때문이 아니라 쓰러진 이놈들과 행색이 같은 까닭이었다.
‘파란 색상의 긴 스카프.’
나는 사라진 놈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강화 인간들을 바라보았다.
색상은 물론이요, 상체를 덮을 만큼 커다란 크기까지.
어딜 봐도 똑같고 수상하기 짝이 없다.
이런 스카프는 흔치 않을 터.
가늘어진 별의 시선은 나의 손끝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지켜보길 몇 분.
“내가 가서 확인할 테니 여기 좀 정리해 줘.”
현장을 맡긴 나는 바위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같은 놈들로 추정되는데 숨었다는 것이 마음에 걸린 탓이다.
하면 놈들이 배후일지도…….
‘당연한 걸 생각 못 했네.’
자아가 사라진 놈들끼리 올 리 없는데 말이다.
내딛는 걸음에 속도를 올려 달려가기 시작했다.
아직 특별한 반응은 보이지 않는 상황, 달리던 그대로 뛰어올라 바위를 타 넘었다.
“흠…….”
하지만 보이는 것은 황량한 마른 땅뿐.
근처 여기저기를 둘러봐도 딱히 숨을 곳은 보이지 않았다.
무슨 공간이동이라도 했다는 건가.
움직이는 모습도 못 봤는데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르겠…….
“하… 저 틈으로.”
나는 작은 점처럼 움직이는 형체를 바라보며 짙은 탄식을 내뱉었다.
기어서 빠져나갔다니.
낮은 바위 언덕을 지나자 푹 꺼진 땅이 이어지고 있었다.
나와 별은 그것도 모르고 노려보고 있었고.
“젠장.”
인상을 구긴 나는 저 멀리 점을 쫓아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 * *
놈들이 사라진 곳에 도착한 나는 빠르게 주위를 살폈다.
크고 작은 건물 몇 채와 부서진 잔해들, 간간히 보이는 석상들 사이로 좁은 신전이 보였다.
“어디로 간 거지?”
빠른 선택이 필요한 순간이었건만, 내게는 상황을 추측할 만한 단서가 보이지 않았다.
발자국을 찾아볼까?
하지만 솔직히 잘 모르겠다.
뭔가 흐트러진 흔적은 보이지만, 저것에 발자국이냐 묻는다면 대답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이 근방은 돌투성이였고, 모래 바닥이 아닌 사암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흔적이…….”
없었다.
어차피 보이지도 않았고, 내 능력으론 유의미한 흔적을 찾아낼 수 없었다.
그렇다면 상상에 맡길 뿐.
늘어진 잔해와 이어진 길을 보며 선택지를 좁히기 시작했다.
숨기 편한 건물로 들어갔을지, 아니면 더 먼 곳으로 갔을지 말이다.
나라면 어디를 택했을까.
건물로 피하기엔 너무 제한적이고, 도망칠 다른 길은 은밀함이 보장되지 않았다.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지만 거슬리는 곳.
숨을 공간이 빤히 보이는 곳을 지나 저긴 아니겠지 싶은 장소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마주한 곳은 좁은 신전.
두 사람이 서면 꽉 찰 공간엔 작은 제단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 뒤로 작은 틈이 있었는데.
‘틈?’
좁은 공간과 어울리지 않는 불필요한 틈에 수상한 느낌이 짙게 밀려왔다.
무릇 사건의 실마리는 의외의 단서로 풀리는 법이니까.
나는 막연한 기대를 품고 제단 위로 올라섰다.
그러고는.
“찾았다. 이 자식들.”
쓴웃음을 지으며 제단 아래를 바라보았다.
그곳에 있는 건 감춰진 통로.
제단 너머에 있는 좁은 틈새엔 지하로 향하는 계단이 이어져 있었다.
턱―
제단을 내려온 나는 비좁은 계단으로 몸을 구겨 넣었다.
이렇게 가다가 찡겨서 오도 가도 못 하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흠…….”
내려온 지하 통로는 생각보다 크고 번듯한 모습이었다.
문제는 심각하게 어둡다는 것.
나는 새로 구입한 소형 마력 등을 꺼내 허리춤에 매달았다.
‘신형이 좋긴 좋네.’
크기는 손가락만 했으나 성능은 탁월했던 탓이다.
덕분에 통로는 환하게 드러나 추격을 이어 갈 수 있었다.
다만 아쉬운 것 한 가지.
[스트렝스 적용 중.]
대미지 20% 증가.
지속시간 00:00
지속시간이 지난 겨울의 마법들이 하나씩 사라지고 있었다.
나름 든든했는데 말이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통로를 향해 걸어갔다.
‘생각보다 길어.’
무슨 근거로 짧을 거라 예상했는지 모르겠다.
들어오는 입구 자체가 좁아서 그랬던 것 같지만, 막상 들어온 이 통로는 기이할 정도로 길게 이어져 있었다.
넋 놓고 가다간 거리감조차 잊을 만큼.
구불구불 이어진 통로를 걷다보니, 어느새 긴장감은 답답한 감정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어디까지 이어지는 거야?’
기세 좋게 내려왔건만, 끝없이 이어지는 통로에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던 찰나.
나의 눈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함정?”
통로 오른쪽 벽으로 철창에 꿰뚫린 남자의 사체가 꼬치처럼 매달려 있던 것이다.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지금도 붉은 피가 뚝뚝 흐르고 있으니까.
채 식지 않은 사체의 온기를 느끼며 길게 이어진 통로를 바라보았다.
“이런 거 좋지 않은데…….”
두려워서가 아니다.
그저 똥손인 나의 선택을 믿지 못함일 뿐.
둘 중 하나일 때 내 선택은 늘 안 좋았기 때문이다.
이제 와서 돌아갈 수도 없고.
“쯧…….”
쓰게 혀를 차며 뻥 뚫린 통로를 걸어갔다.
그리고 나는.
“깜짝이야!”
라고 소릴 지르고.
“이런 개……!”
라고 외쳐야 했다.
이미 예견했듯이 기관 장치란 장치는 죄다 밟으며 지나가고 있는 중인 탓이다.
나는 분명히 멀쩡한 길을 걸어왔는데, 발 딛고 손닿는 모든 곳이 함정으로 변하며 나를 공격하고 있었다.
‘젠장, 그놈은 어떻게 간 거야.’
이쯤 되니 나머지 한 놈이 존경스러울 지경이었다.
내가 둔해서 이런 건가.
그래서 이렇게 함정만 골라 가고 있나?!
심란한 이 와중에도 기관 장치는 끊임없이 발동하고 있었으니.
콰아아앙!
커다란 돌기둥을 박살 내며 이어진 길을 걸어 나갔다.
그렇게 떠오른 충격 내성만 세 차례에 화염 내성이 한 번.
마침내 나는 처음으로 마주하는 갈림길에서 잠시 고민해야 했다.
이놈의 손가락이 선택하면 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하나 그 고민도 잠시.
뼈를 긁어 대는 기묘한 괴성에 나의 걸음은 오른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내 목숨 99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