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그림자처럼 도시에 스며든 우리는 해가 뜰 무렵에 골목 어귀를 나섰다.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딱히 인상적이지 않았다.
황무지의 도시들이 대개 그렇듯, 사암으로 만든 건물과 원색의 천이 단조로운 대비를 이루며 공간을 메우고 있었다.
대륙의 3대 절경이 있는 도시치고는 의외로 소박하고 특징 없는 모습이었다.
‘상관없지.’
이곳에 머물 계획이 아니니까.
우리가 머물 장소는 도시 내부가 아닌 외곽지역으로, 여기서 한 시간 거리에 위치한 유적지 부근이다.
도시로 진입하는 유일한 공도가 있는 곳.
그 지점에 대기하며 의심되는 놈들을 모조리 걸러 낼 생각이다.
하여 상점이 열리기만을 기다렸고, 열리는 순간 들어간 우리는 도적 떼처럼 각종 식료품과 필요한 물건을 쓸어 담았다.
“얼마예요.”
물론 돈은 주고 나왔다.
그렇게 준비를 마친 우리는 지도에 표시된 지역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아직 오전임에도 떠오르는 태양의 기세는 심상치 않게 느껴졌다.
“벌써부터 더우면 어쩌자는 거냐.”
의미 없는 푸념을 늘어놓으며 나는 털레털레 목적지를 향해 걸었다.
기왕 가야 한다면 더워지기 전에 도착하는 것이 좋을 테니까.
적당히 속도를 내기 시작한 우리는 땀이 송골송골 맺힐 쯤에 목적지인 유적 근처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근데 여긴 근처가 아닌데요?”
스노우는 주위를 둘러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말이 틀린 것도 아닌 게, 나 역시 지도와 주변을 번갈아 보며 현재 위치를 반복해서 확인하고 있었다.
“유적 근처라더니.”
암만 봐도 이곳은 유적의 한가운데였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공도 자체가 수드라 유적의 중심을 통과해 도시로 이어지는 형태였다.
“베르가 알면 배 아파 쓰러지겠군.”
대륙의 3대 절경을 구경하는 것도 모자라 그 안에서 임무를 수행하니 말이다.
덕분에 따로 시간을 낼 필요가 없으니 우리는 전망 좋은 곳을 찾아 이곳저곳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선택의 조건은 넓은 시야와 불평등한 조건.
우리는 훤히 볼 수 있지만, 상대는 이쪽을 볼 수 없는 그런 구조를 찾아다녔다.
그런 노력은 헛되지 않았고.
“여기가 좋겠다.”
우리는 모든 조건에 부합하는 자리를 골라 가져온 짐을 내려놓았다.
“아늑하네요?”
유적이 시작되는 곳에 위치한 이 건물은 도로변에서 조금 떨어져 살짝 안쪽에 가려져 있었다.
일단 위치는 합격.
진입하는 놈들을 살펴보기에 좋았고, 특이한 창문의 형태로 인해 외부에서 안을 확인할 수 없는 구조였다.
벌집이라고 해야 하나.
사선으로 이어진 격자무늬의 창은 그림자로 인해 실내가 보이지 않았다.
“훔쳐보기 딱 좋은 곳이군.”
왠지 죄짓는 느낌이 드는 표현이었지만, 별의 말은 정확했다.
이 건물은 지켜보는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했고, 감시하기에 최적화된 비밀 초소 같은 느낌이었다.
“그 녀석만 있으면 딱인데.”
엄청난 시력의 술을 떠올리며 나는 아쉬운 입맛을 다셨다.
일찍 발견할수록 준비할 시간은 더욱 늘어날 테니까.
하지만 별 역시 뛰어난 눈을 가지고 있었다.
술이 워낙 특별했을 뿐.
기본적으로 반투족은 시력과 청력 모두 보통 사람들보다 월등히 뛰어났다.
“저기 세 명이 다가오는군.”
이렇게 말이다.
별은 보이지도 않는 먼 곳을 보며 사람이 온다고 알렸다.
내 눈엔 그저 점일 뿐인데 별의 눈에는 저것이 사람으로 보이나 보다.
이러니 술의 시력은 도대체 얼마나 좋다는 것일까.
어쨌거나 우리는 다가오는 사람들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저 사람들은 아니야.”
나는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창가에서 멀어졌다.
이렇게 답할 수 있는 건 강화 인간인 카리프를 직접 상대해 본 경험 때문이었다.
녀석 특유의 느낌이 있다.
내가 마력이나 뭐 이런 것들을 잘 느끼진 못하지만, 마주한 카리프는 늘 독특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뭐랄까… 변색된 오러라고 해야 하나.
반투족이 말하는 마기는 잘 모르겠지만, 그 마기에 오러를 섞는다면 강화 인간의 느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제어되지 않았지.’
오러의 성질은 사용하기 전엔 보이지 않는다.
인식할 만한 형태나 기운을 드러내지 않는단 얘기다.
하지만 카리프는 그렇지 못했다.
나름 5성까지 올라갔던 녀석이 제어법조차 모르진 않을 터.
카리프의 몸에선 소량의 탁한 오러가 지속적으로 방출되고 있었다.
‘그건 확실해.’
마지막으로 본 연구실 앞에서도 놈의 몸에는 기묘한 오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따라서 저 세 명은 일반인.
보이는 대로 잡아 족칠 게 아니라면 나의 경험과 판단을 믿어야 한다.
“나가서 둘러보고 올 테니까 뭔가 보이면 이걸로 알려줘.”
나는 작은 노트와 양피지를 별에게 넘겨줬다.
“메신저라는 마법 도구인가?”
“어, 마법 안 좋아하는 건 아는데 그 녀석은 꽤 편리하거든.”
창가에 앉은 별은 고개를 끄덕여 나의 말에 대답했다.
“저도 같이 가요.”
돌아선 내가 계단으로 향하자 앉아 있던 스노우는 쪼르르 달려 나의 곁으로 다가왔다.
1층으로 내려온 나는 건물 뒤편을 바라보았다.
“음…….”
보통 굉장히 아름답거나 멋있는 경치를 가리켜 사람들은 절경이라고 말한다.
그게 일반적인 반응이고, 나의 생각 또한 그와 다르지 않다.
하지만 대륙 3대 절경의 기준은 조금 다른가 보다.
눈앞에 펼쳐진 수드라 유적지는 아름답지도 않고 멋있지도 않았다.
오히려 처량하고 스산했으니까.
하지만 관점을 바꿔서 생각해 본다면 이 또한 절경이라 할 수 있었다.
비탄으로 가득 찬 폐허의 느낌.
왠지 먹먹하고 비장해지는 이런 분위기는 다른 곳에선 쉽게 접하기 힘든 이곳만의 독특한 감성이었다.
“여러모로 굉장하네.”
일전에 바빌리안에서 보았던 옛 성터와는 비교할 수가 없었다.
그런 폐허가 끝도 없이 이어져 있다고 보면 될 테니까.
파괴와 파괴가 모여 만든 생소한 감동은 바라보는 인간의 존재를 한없이 작게 만들었다.
다르게 표현한다면 위압감이랄까.
어쩌면 위협적이란 말이 더 잘 어울릴 것 같은 그런 무겁고 서늘한 분위기였다.
뭔가 와악! 하고 튀어나올 것 같은 그런 느낌.
“외진 곳에 있는 유적에는 몬스터들이 많이 산다던데.”
본인이 말하고도 무서웠는지 스노우는 은근슬쩍 나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런 경우도 있긴 하지.”
나는 눈썹을 끌어올리며 녀석의 말에 공감했다.
실제로 외진 곳에 있는 유적에선 몬스터가 모이고 쌓여 마굴이나 던전처럼 진행된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여기야 도시로 통하는 길목에 있으니 그렇게 되지는 않겠지만.
분위기만큼은 드래곤이 나와도 납득할 것 같은 음울한 뭔가가 있었다.
“그런데 진짜 엄청 넓네요.”
“그러게. 저 끝에 가면 정말 몬스터가 있을지도 모르겠어.”
스노우의 말에 답하며 나는 지평선 너머에 있는 도시의 끝자락을 바라보았다.
가 보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놀러 온 것이 아니니까.
적당히 둘러본 나는 매복지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되돌렸다.
그러고는 가장 궁금했던 얘기를 조심스레 꺼냈다.
“너도 소환됐다고 했잖아.”
“그랬죠.”
“네가 살던 세계는 어땠어? 여기보다 커?”
녀석이 살아왔던 세상.
이세계에 대한 나의 관심은 그저 그런 호기심이 아니었다.
나의 아버지는 이세계인이었고, 나는 그의 피를 이어받은 혼혈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관심이 클 수밖에.
“음… 크루시아 대륙만 따지면 제가 살던 곳이 더 큰 것 같아요.”
그런 나의 질문에 스노우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아, 그렇구나.”
사실 나도 이 땅이 얼마나 큰지 작은지 잘 모르겠다.
비교 대상이 없으니까.
“거기는 살기 좋아?”
“흐음, 편한 걸 기준으로 하면 살기 좋죠.”
“얼마나?”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허…….”
이 또한 견줘 볼 게 없으니 녀석의 말이 뜬구름처럼 느껴졌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면 얼마나 차이 나는 걸까.
“우리가 대수림 통과할 때 거의 일주일 걸렸잖아요.”
“그랬지. 그냥 걸어갔으면 20일은 걸렸을 걸?”
그에 스노우는 적절한 비교 대상을 예로 들었다.
그리고 그 차이는.
“제가 살던 세상이었다면 두 시간도 안 걸렸을 거예요.”
“…어?”
너무 엄청난 격차라서 대답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웃기지 말라고 하고 싶은데 녀석의 표정이 너무 태연해 오히려 내가 잘못 들었나 싶었다.
“두 시간이라니… 비룡이라도 탔다는 거야?”
백번 양보해 비룡이라고 해도 두 시간 안에는 못 지나갈 것이다.
물론 탈 수 있다면 말이다.
이제껏 타 봤다는 사람이 없으니 이 또한 불가능한 얘기였다.
“비슷하긴 하네요. 우리는 비행기라고 부르니까.”
하지만 스노우가 살던 세상의 비룡은 인간이 탈 수 있나 보다.
심지어 몇 백 명이 탈 수 있다는데, 비행기라는 비룡은 얼마나 큰 날개를 가졌기에 그렇게 날 수 있는 걸까?
어쨌거나 우린 땅으로 달렸으니 저 얘긴 무효다.
“땅으로 갔으면 8∼10시간 걸렸을 거예요.”
“왜?!”
하지만 이쪽도 황당하긴 마찬가지였다.
터무니없는 녀석의 말에 나오는 건 멍청한 감탄사뿐.
엄청난 비룡에 이어 이번엔 날듯이 달리는 몬스터였다.
그런 세상에서 넘어온 사람들이라 소환자가 강한 건가 싶을 정도.
“사람만 따지면 이쪽 세계의 인간이 더욱 강해요.”
돌아온 대답은 또다시 나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냥 문명의 차이예요. 과학기술 뭐 그런 거.”
이어진 스노우의 말들은 대강 이랬다.
흑마탑보다 높은 건물이 수두룩 빽빽하고, 그 안에 사람들이 바글바글하게 살고 있으며,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고 한다.
또한 네모난 상자에 사람이 나온다고 하는데…….
치우자.
암만 설명을 들어도 당최 모를 이야기였다.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말들이 오가고, 결국 남아 있는 질문은 스노우가 살던 나라의 이름이었다.
“지구라는 행성에 있는 아시아 대륙이고요. 거기서 동쪽으로 가면 한국이라는 나라가 나와요.”
스노우는 지구라는 행성에 있는 한국에서 소환된 소녀였다.
게다가 녀석의 진짜 이름은.
“한겨울. 겨울에 태어나서 한겨울이에요.”
스노우가 아닌 한겨울이란 이름이었다.
성은 한에 이름은 겨울.
“뭔가 독특한 발음인데 듣기엔 좋네.”
“그렇죠? 이름 예쁘단 소리 자주 들었어요.”
녀석은 배시시 웃으며 나의 말에 대꾸했다.
“그런데 넌 뭘 해서 날 돕겠다고 한 거야?”
나는 곁을 따르는 겨울에게 어젯밤 이야기를 되물었다.
그토록 고집을 부렸을 땐 증명할 자신이 있으니 그랬을 터.
“후후… 보면 깜짝 놀라실 건데요.”
녀석은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뭐가 그리 대단한 건지 모르겠지만.
“호오∼ 그래?”
“훗… 결과 보고 난 뒤엔 늦은 거 아시죠? 저에게 점수 따실 거면 지금이라도 뭔가 해야 할 걸요.”
겨울은 도도한 표정을 지으며 씨익 웃어 보였다.
나이에 걸맞는 발랄한 모습.
그런 녀석의 행동이 귀여워 나 역시 피식 웃어 버리고 말았다.
150㎝는 넘으려나?
작고 뽀송뽀송한 녀석이 저러니 지켜보는 내 입장에선 아빠라도 된 기분이었다.
아니, 삼촌 정도…….
아무튼 하는 짓이 밉지 않은 건 겨울의 타고난 장점인 것 같았다.
“좋아. 놀랄 만하면 맨날 업고 다닌다.”
“됐거든요. 땀 냄새나는 등을 누가 좋아한다고.”
삐쭉거린 겨울이는 허공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 위치는 아마도 시스템이 떠다니는 곳.
“저의 클레스는 인첸터예요.”
“인첸… 뭐?”
“인첸터. 저와 함께 있으면 엄청나게 강해지죠.”
겨울은 턱 끝을 치켜들며 후훗 웃기 시작했다.
내 목숨 99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