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목숨 99개-119화 (119/203)

119화

“그게 무슨 말이야?”

나는 화를 내듯 스노우를 다그치며 물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녀석은 자신의 존재를 시스템 사용자라고 당당하게 밝혔다.

이제 와서 갑자기 말이다.

뜬금없고 황당하게.

난데없이 이런 얘길 듣고 반가워하긴 쉽지 않았다.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어떻게 알았지?

그 다음은 무슨 수작이지?

마지막으론 이 자식 진짜 정체가 뭐야?

이런 순서로 나의 생각은 변해 갔다.

이건 스노우의 잘못이 아니다.

현시점에서 시스템이란 인류를 구원했던 영웅이거나, 파괴하러 온 악당이기 때문이다.

나야 전자가 되고 싶어 하는 후보에 불과할 뿐, 그 외에 다른 사람들은 후자일 확률이 매우 높았다.

그러니 머릿속이 복잡해질 수밖에.

“그게 무슨 말이냐고!”

나는 표정을 바꾼 스노우를 보며 다그치듯 되물었다.

“뭐긴 뭐예요. 아저씨랑 같은 사람이죠.”

그에 녀석은 볼멘 목소리로 퉁명스레 대답했다.

뭐,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여러모로 같은 사람인 건 맞으니까. 하지만 내가 궁금한 것은 쫓겨 다니던 진짜 이유를 말하는 거다.

깊게 묻지 않았던 스노우의 과거.

바바라에게 도망칠 수밖에 없던 숨겨진 사연.

내 생각이 맞는다면.

“너… 카론이나 루즈와 함께 있었던 거니?”

빅터의 염려가 현실이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카론과 루즈가 살아 있고, 소환 의식을 진행해 능력자들을 모으고 있다는 그의 가설.

“아뇨.”

하나 스노우의 답은 부정이었고.

“저를 소환한 사람은 로이드였어요.”

낯선 남자의 이름이 그들을 대신했다.

그러나 상황의 심각함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 상황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저와 같은 사람들을 모아서 관리하고 있었죠.”

가설의 핵심인 소환자의 존재였다.

심지어 사람들이라고 부를 만큼, 이미 많은 수의 소환자가 대륙에 있다는 것이 문제의 본질이었다.

“그 사람들은 어디에 있는데?”

주도한 사람의 정체는 이제 중요한 게 아니었다.

놈의 이름이 로이드라고 해서 상황이 바뀌진 않을 테니까.

빅터의 말대로라면 소환자들로 인해 세계의 균형은 무너지게 된다.

인과율의 추가 인간계로 기울게 되고, 그로 인해 마계의 문이 조금씩 열리게 되는 것이다.

관건은 소환자들의 존재감이었는데…….

“능력에 따라 지내는 곳이 달라요. 몇몇을 제외하곤 쓰레기장이라는 곳에 감금돼 있는데, 주기적으로 장소를 옮겨서 위치는 저도 몰라요.”

아직까지 마계가 열리지 않은 이유는 이 때문인 듯했다.

능력 수준이 낮은 소환자들.

스노우의 말은 그런 사람들을 따로 모아 두었다는 얘기였다.

‘쓰레기장이라니.’

단둘이 시작된 이 대화는 빅터와 그레이시가 합류하며 더욱 심각하게 이어졌다.

“하면 그 로이드라는 놈은 어디에 있느냐.”

상황을 파악한 빅터는 굳은 얼굴로 낮게 읊조렸다.

“슈탈렌에 있는 흑마탑이요.”

그에 돌아온 스노우의 대답은 예상했던 대로 흑마탑이었다.

“왜 감췄던 거야?”

나는 고개 숙인 스노우를 보며 이유를 물었다.

질책이 아니었다.

의심은 더더욱 아니었고.

그럴 수밖에 없었던 사연이 있다면 덜어 내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

짧은 침묵이 이어졌다.

나는 그저 기다릴 뿐.

망설이던 스노우는 고개를 들어 힘겹게 입을 열었다.

“…무서웠어요.”

“우리가?”

“아니요. 다신 평범한 생활로 돌아가지 못할까 봐… 그게 두려웠어요.”

예상을 빗나간 녀석의 대답이 무겁게 나의 마음을 짓눌렀다.

그것은 믿음을 운운하는 빤한 핑계도 아니었고, 감춰야 할 비밀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스노우가 원했던 건 고작 평범한 17세 소녀의 삶.

그 한마디에 나는 모든 걸 이해할 수 있었다.

스노우가 견뎌야 했던 힘겨운 시간들을. 낯선 세계로 소환돼 휘둘려야 했던 작은 소녀의 번민을.

한데 스노우는 감출 수 있었음에도 스스로 비밀을 드러냈다.

나를 지켜 주겠다는 맹랑한 이유로 말이다.

나는 의미 없는 질문을 포기한 채 무거운 마음을 추슬렀다.

대화는 끊어졌고, 좁은 방안은 또다시 침묵에 빠져들었다.

“역시 흑마탑이었군.”

지켜보던 빅터가 중얼거리듯 흑마탑을 입에 담았다.

이제 무언가 시작될 터.

의미심장한 그의 말에 우리는 촉각을 곤두세우며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다.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먼저 얘길 꺼낸 건 그레이시였다.

짧은 그의 말속에는 선제공격과 관망이라는 두 가지 선택지가 숨어 있었다.

“뿌리를 뽑아 버려야지.”

빅터의 선택은 공격이었다.

차갑게 식은 그의 얼굴은 잔혹한 결과를 예감케 했다.

* * *

다음 날 저녁.

하루를 꼬박 휴식에 투자한 나는 가벼운 몸으로 도개교 앞에 섰다.

목적지는 사라센의 수드라.

곁에는 망토를 걸친 스노우가 서 있었고, 대검을 둘러멘 별은 출발을 기다리며 몸을 풀었다.

드드드드드―

쇠사슬 감기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도개교가 아래로 내려왔다.

나는 고개를 돌려 도열해 있는 빅터의 정예병들을 바라보았다.

숫자는 대략 30명 정도일까.

도개교가 열리면 빅터 역시 흑마탑으로 향하게 된다.

이른바 양동작전이라는 거다.

물론 둘 사이엔 아무 관계도 없었지만…….

‘본격적인 느낌이네.’

그래도 이렇게 준비하고 있으니 뭔가 대단한 일을 하러 나가는 것 같다.

“수드라… 적국이 아니었으면 꼭 가 보고 싶었던 땅이었는데요.”

마중을 나온 베르는 구경 중인 나에게 부럽다는 듯 말을 건넸다.

“왜요? 뭐 좋은 게 있나요.”

“유적지 때문이죠. 유적이 많은 사라센에서도 수드라 유적지는 꽤 유명해요.”

이유는 지역의 명소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것을 논하기 위해서는 좀 더 오래된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황무지와 사막으로 대변되는 사라센은 본래 비옥한 초원이었다.

갑작스런 기후변화로 인해 푸르던 대지는 말라가기 시작했고, 결국 사라센은 황량한 사막지대로 변하게 되었다.

유달리 폐허의 잔재가 많은 이유는 이 때문이었다.

사막화된 도시는 결국 버려졌으며, 남아 있던 문명의 흔적은 불어오는 모래 폭풍에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하나 인간의 호기심은 선조들의 발자취를 좇았으니, 사라진 고대 도시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발견된 지역을 유적지라고 하는데, 도시의 모든 것이 드러난 것은 아니기에 여전히 유적지는 베일에 싸인 미지의 영역이었다.

따라서 이랬다 카더라… 하는 소문들은 늘 떠돌기 마련이었고, 베르처럼 지적 호기심이 왕성한 사람들에겐 살아 있는 박물관이나 다름없는 장소였다.

“시간이 될지 모르겠는데 여건이 되면 슬쩍 들러 보세요. 오죽하면 대륙의 3대 절경이라고 하겠어요.”

정보를 전하는 베르의 얼굴은 부러움을 넘어 슬퍼 보이기까지 했다.

마음 같아선 데려가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베르는 이곳에서 해야 할 임무가 있었다.

“벌써부터 준비하는 건가요.”

“슬슬 몸을 풀어야죠.”

오직 베르만이 할 수 있는 비기.

알바트로스를 이용한 공중정찰이었다.

“작전 종료될 때까지 감시하려면 저도 좀 준비할 게 많아서.”

베르는 슈탈렌 일대를 감시하며 도주하는 놈들을 추적하게 된다.

그러니 수드라는 다음 기회로 미룰 수밖에.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베르는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출발하는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 * *

거대한 도개교가 내려오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왠지 모를 울림이 있다고 해야 하나.

이 땅에 온 시간이 적지 않았건만 이런 웅장한 장면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야, 저 박력… 영화로 보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데? 저것 봐봐.”

그에 레이는 잔뜩 신난 얼굴로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팝콘만 있으면 완벽한데.

그 하나가 아쉬운 에비오는 쓴웃음을 지으며 내려오는 도개교를 바라보았다.

“뭔가 나올 것 같지 않아? 난 느낌이 빡 오는데 말이야.”

“글쎄?”

“하… 왜 그렇게 무디냐. 어? 이 늦은 시간에 저게 왜 열리겠냐고.”

에비오는 눈살을 찌푸리며 레이의 면박을 받아넘겼다.

문 내려오는 시간이야 지들 필요할 때 올리고 내리겠지.

별걸 다 가지고 유난 떤다 싶던 에비오는 고개를 돌려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이세계 로망은 개뿔.

가축만도 못한 생활환경에 삶에 대한 회의만 늘어 가고 있었다.

감옥 같은 골방을 벗어났더니 이젠 노숙이라니.

그래도 움직일 자유를 얻었으니 이전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을 한 셈이었다. 이번 임무만 잘 해내면 더 나은 환경까지 주어질 테고.

관건은 저 싸가지 없는 놈이 어떻게 하는가에 달려 있었다.

제 밥벌이 정도는 했으면 좋겠는데, 만약 주둥이만 산 놈이라면 영혼을 확!

이런저런 잡생각을 하며 에비오는 애꿎은 풀잎을 괴롭혔다.

한데 그 순간.

“빙고…….”

레이는 도개교를 건너는 남자를 보며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큰 키에 떡 벌어진 어깨.

거대한 해머를 둘러멘 남자는 뒤를 따르는 두 여자와 함께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 * *

국경을 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신분이 필요한 이유는 원활한 활동을 위함일 뿐, 이깟 경계선을 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을 만큼 손쉬운 일이었다.

심지어 스노우조차 쉽게 할 수 있는 아주 평범한 일.

“후후… 봤죠?”

녀석은 우쭐한 표정을 지으며 목책을 넘었다.

사실 넘으면서도 의구심이 들었다.

이깟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저 줄긋기 용도로 쓰인 이 목책들은 마음먹기에 따라 언제든 지워질 하찮은 것에 불과했다.

국경이라는 상징.

그 하나뿐인 의미를 우리는 가뿐히 타 넘었다.

하나 그 행위가 의미하는 건 결코 가볍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다면…….

그들도 가능한 까닭이었다.

그렇기에 이 임무가 중요했다.

간간이 이어질 적의 탐색전이 지나고 나면 전면전이 벌어질 테니까.

강화 인간을 앞세운 놈들은 이곳을 넘어 브라함을 피로 물들일 것이다.

그것을 막기 위해 나는 국경을 넘어섰다.

고작 세 명으로.

언제 끝날지 모를 임무를 위해 사선을 넘길 자처한 것이다.

그런 나를 향해 누군가는 조국과 충성을 이어 붙이며 존경스럽다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에겐 그따위 허울 좋은 명목 같은 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데드릭인지 나발인지 알게 뭔가.

그깟 황제의 나라 따위 어떻게 되든 신경 쓰고 싶지 않다.

세비앙만 무사하다면 나머진 어찌 되건 상관없고, 무엇보다 황제의 마지막을 내 손으로 장식하고 싶다.

그게 지금 나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곳에 있는 건 빅터의 존재가 나를 이끌어 주기 때문이었다.

또한 내가 살아오던 땅.

그곳에 살고 있는 그리운 모든 이들을 지키기 위함이다.

하여 나는 사라센 놈들의 허튼짓을 철저히 박살 낼 생각이었고, 상대가 어떤 놈이든 마주한 모든 놈들을 이 땅에서 지워 버릴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조국에 대한 충성이 아닌 개인의 의지일 뿐.

‘데드릭.’

얼굴도 모르는 그 황제 놈은 나의 살생부 명단에 당당히 자리 잡고 있었다.

“다 온 것 같군.”

걸음을 멈춘 별의 시선은 어슴푸레한 새벽 공기를 지나 낯선 도시로 향했다.

드디어 도착한 수드라.

황제를 향한 나의 분노는 고대의 신비를 간직한 도시 너머로 소리 없이 흩어지고 있었다.

내 목숨 99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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