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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숨 99개-118화 (118/203)

118화

“오, 소문의 그분이셨군요.”

나의 정체를 확인한 빅터의 부관들은 눈동자를 키우며 반색했다.

하나 뼛속까지 무관인 이들에게 아리안 왕궁 같은 관심은 없었다.

나의 외모는 그저 거들뿐.

“그나저나 보기 드물 게 훤칠하십니다.”

이런 짧은 칭찬을 끝으로 회의실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한데 아리안의 자작이시라니, 특이한 이력이시군요.”

오히려 이러한 배경적인 부분에 더욱 큰 관심을 드러냈다.

고국에선 평민이었던 남자가 타국에서 자작이 되었으니 그 사연이 궁금했을 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하하, 작위라는 게 어쩌다 생기겠습니까.”

적당한 나의 겸손에 부관들은 호의적인 표정을 지으며 살갑게 대답했다.

출세에 대한 미련이야 다들 비슷할 테니까.

저들의 눈에 비친 나의 모습은 그들이 걷고 싶은 또 다른 미래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것은 바로 무력의 수준.

“리베의 용병왕이라… 그곳에는 듀란이 있을 텐데요?”

전선에 속한 이들답게 무엇보다 이 대목에서 가장 흥미로운 반응을 보였다.

“네, 여전히 있습니다.”

“하면 그 듀란보다 높은 경지라는 건가요?”

“경지는 모르겠고, 제가 이긴 건 맞습니다.”

하여 나는 리베 제1용병이 되었고, 덕분에 짭짤한 수익도 얻었다.

무려 20골드.

하지만 이 사람은 그 말이 믿기지 않는가 보다.

“듀란을 이기셨다는 겁니까? 그 통곡의 벽을?”

이렇듯 다시 반문을 하고 있으니까.

“사실이다. 그 결투 현장에 나도 있었다.”

그에 빅터는 나의 승리가 사실임을 부관에게 대신 설명했다.

“허… 이거야 말로 놀라운 소식이군요. 듀란이라면 잔뼈가 굵을 대로 굵은 대어인데 말이죠. 카잔에 계속 있었다면 지금쯤 군부의 핵심에 올랐을 사람입니다.”

빅터의 말을 들은 부관은 장황한 설명으로 듀란을 포장했다.

그러니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질 수밖에.

“백작님께서 거물급 제자를 거두셨군요.”

부관들은 표정을 바꾸며 나와 빅터를 번갈아 보았다.

서서히 돌아오는 빅터의 시선.

“네가 정리해 볼 테냐?”

빅터는 가라앉은 눈으로 나의 생각을 물었다.

“네.”

나는 담백하게 대답했다

놈들의 이동 경로를 치자는 건 나의 생각이었으니까.

“그렇다면 이반 님이 나서시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인 것 같습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회의실의 분위기는 나를 중심으로 새롭게 재편되고 있었다.

누구를 보낼 것인가에서 어디로 갈 것인가로.

이후 적의 탐색전이 어디에서 시작될지 예측하는 과정으로 돌입했다.

침입이 예상되는 지역은 총 세 군데.

국지전이 벌어졌던 카렌 영지와 인근의 국경 지대인 번츠, 그리고 빅터가 버티고 있는 아케른이 탐색전의 주요 후보였다.

대응이 가능한 아케른은 일단 제외시키고, 카렌과 번츠를 놓고 부관들은 의견을 나누었다.

“카렌으로 다시 올 겁니다. 그래야 이전 결과와 비교할 수 있을 테니까요.”

실험을 반복한다면 동일한 대상에게 할 거라는 추측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할 경우 사라센은 준비된 상대와 싸워야 하는 부담을 지게 된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지요. 다시 온다면 분명히 번츠로 올 겁니다.”

이렇게 의견은 반으로 나뉘었다.

어느 쪽을 선택하는가에 따라 결과는 극명하게 바뀐다.

적의 정체를 파악하며 피해를 줄 수도 있고, 멍하니 시간 낭비만 할 수도 있다.

쉽지 않은 선택의 기로에서 회의실의 고민은 점점 깊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 왜?

우리 땅에서만 싸우려고 하는 걸까.

“내가 넘어가도 되잖아요?”

선택지를 줄일 수만 있으면 어디든 상관없다는 말이었다.

“여기 수드라.”

나는 테이블에 펼쳐진 거대한 지도를 보며 국경 너머 작은 도시를 가리켰다.

“이곳을 지키면 어디로 가든 다 잡아낼 수 있습니다.”

이유는 수드라가 가진 지리적 특성 때문이었다.

바로 도로가 끝나는 지점이라는 것.

사라센 내륙에서 뻗어오는 공도는 수드라에서 끝이 나고, 이후 두 갈래로 나눠져 번츠와 카렌이 맞닿은 국경 지대로 이어지는 까닭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고민할 필요는 없겠죠. 한데 넘어가셔도 오래 버티긴 힘들 텐데요?”

지켜보던 베르가 오래간만에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의 말은 옳았다.

국경도시의 특성상 잦은 검문검색은 당연할 테고, 활동에 제약이 많다는 건 놈들의 움직임을 쫓기 힘들다는 결과로 이어진다.

하지만 나에겐.

“저는 여분의 신분이 있으니까요.”

반투족의 웅장한 놈도 있고, 아리안의 자작도 있다.

상황에 따라 골라 쓰면 될 터.

“제가 넘어갔다 올게요.”

긴 시간 이어진 회의는 국경을 넘는 것으로 종결되었다.

* * *

아케른의 첫날은 도착과 동시에 정신없이 지나갔다.

시작부터 장시간 회의라니.

회의장을 벗어난 나는 침실로 향해 휴식을 취하려 했다.

하나 그런 나의 생각은 몇 걸음 못 가 접어야 했다.

내성 앞마당을 지나가던 나는, 아케른 성의 남자들을 만나며 본격적인 환영식을 치러야 했다.

소감이라면 역시 빅터의 성.

빅터에게 단련된 이곳의 사람들은 생각부터 행동까지 빅터의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다들 미쳤어.’

광기에 휩싸인 빅터의 분신들 같았다.

“저도 한판 부탁드립니다!”

듀란을 이겼다는 남자의 등장에 아케른 성은 때 아닌 대련 열풍에 휩싸였다.

그리고 그 대상은 바로 나.

‘하…….’

의욕과 기대에 가득 찬 남자들은 저마다의 무기를 들고 내 앞에 다가와 대련을 신청했다.

“으윽, 제가 졌습니다.”

대련의 결과야 빤한 것이지만, 기다리는 숫자가 엄청나다는 게 문제였다.

마치 세속인이 된 반투족 같다고 해야 하나.

호승심 강한 아케른 성의 남자들은 새로운 강자를 바라보며 부러움이 아닌 도전을 선택했다.

철의 장벽 아케른이란 말은 괜히 나온 얘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즐기는 이가 따로 있었으니.

“크윽! 제법이구나!”

원조 싸움닭인 별은 몇 시간째 대련을 이어 가며 눈을 빛내고 있었다.

이제 지칠 법도 하건만…….

생기 가득한 별의 얼굴은 승패와 상관없이 눈앞의 상대에 집중하고 있었다.

자신을 시험하며.

마주한 한계에 좌절하지 않고 새로운 싸움을 이어 가고 있었다.

그런 별의 모습은 반투족이 왜 전투 민족인지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멋지다.

또한 존경스럽다.

녀석은 지금, 승리와 패배 속에서 느리지만 확실하게 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크허허, 대단한 힘이오!”

이젠 좀 들어가서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다하다 이젠 팔씨름이라니…….

“이게 정녕 인간의 힘인가?!”

오러 한 톨 없는 순수한 나의 강함은 아케른 성의 전사들에게 신세계를 열어 주었다.

“훈련 방법이 따로 있는 거요?!”

“비결을 알려 주시오!”

그런 게 있으면 나도 후딱 알려 주고 쉴 것을.

“팔굽혀펴기 1,000번! 쇠 봉에 매달려 몸 끌어올리기 200번! 사람 등에 업고 앉았다 일어나기 500번! 오러 사용 금지입니다!”

알려 줄 게 없던 나는 적당히 둘러대며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오오! 그게 훈련인 거요?”

그럴 리가 있나.

그저 찌뿌둥할 때 몸풀기로 가끔씩 하는 것들이다.

물론 저것보다 훨씬 더 힘들게 하지만, 어찌됐건 나에게는 의미 없는 반복 행위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들에겐 다른 의미였나 보다.

“백구십…구우우우!”

오러에 의지해 오던 인간의 육체는 생각보다 훨씬 나약했다.

고작 팔굽혀펴기 200개에 부들거리다니.

지켜보던 나는 고개를 저으며 자리를 털었다.

저게 쉽게 되면 인간이 아닐 테니까.

그대로 돌아서 방으로 향하던 나의 귓가에 답답해하는 사람들의 외침이 푸념하듯 들려왔다.

“이걸 한 번에 하라는 거요, 아니면 하루 동안에 하면 된다는 거요?”

보통 사람이라면 하루 동안이라는 게 맞는 설명이겠지만.

“별, 잠깐만 나 좀 도와줘.”

나는 별을 어깨에 태워 사람들 앞에서 시범을 보여 주기 시작했다.

팔굽혀펴기 1,000개와 앉았다 일어나기 500번, 등에 업은 채로 몸 끌어올리기 200번.

이 모든 과정들을 단 한 번의 휴식도 없이 단숨에 끝내 버렸다.

“크허어어…….”

“허큘레스가 따로 없군.”

구경하던 사내들은 감탄하며 혀를 내둘렀고, 별은 얼굴을 붉힌 채 먼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또 그 증상이다.

갱년기라고 했던 그거.

“꾸준히 하다 보면 여러분 모두가 잘할 수 있습니다!”

나는 홍조 띈 별을 지나 내성으로 몸을 숨겼다.

그날 저녁.

찻잔을 두고 마주한 스노우는 진지한 얼굴로 자신의 생각을 전했다.

“저도 갈게요.”

수드라에 함께 가겠다고.

무슨 바람이 불어 따라오겠다고 하는지 모르겠으나 나의 대답은 하나였다.

“안 돼.”

“왜요. 저도 데려가 주세요.”

“위험해서 안 돼.”

몇 번을 말해도 마찬가지.

애초에 목적이 살상인 만큼, 비전투 인원이 합류하는 건 바람직한 판단이 아니었다.

하지만 스노우는 끈질기게 동행을 요구했다.

“제가 꼭 필요할 거예요.”

“괜찮아. 물 많이 챙겨 갈게.”

“마주치면 싸울 거라면서요.”

“싸워도 내가 싸우니까 걱정 마. 이번엔 그냥 여기 있어.”

자기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 녀석인데 그런 싸움판엘 어찌 데려가겠나.

자칫하다간 짐덩이로 전락해 서로의 발목을 잡을 가능성이 매우 컸다.

아니, 그럴 가능성 100%라는 데 나의 모든 걸 걸 수 있다.

그러나 녀석은 포기하지 않았다.

“위험한 싸움일수록 제가 필요할 거예요.”

오히려 심각한 얼굴을 하고선 자신의 필요성을 나에게 충고하듯 어필했다.

“왜 그렇게 따라가려는 건데?”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위험한 곳을 굳이 따라오려는 이유도 모르겠고, 기껏 도망쳐 나온 사라센을 뭐하러 다시 가려는지도 모르겠다.

“아직 이해를 못 한 것 같은데…….”

“이해하고 있어요.”

“그래? 잘됐네. 그러면 여기서 기다려.”

“아니요. 그래서 제가 필요한 거예요.”

녀석은 한마디도 지지 않고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하… 너 진짜 왜 그러냐?”

나는 긴 한숨을 내쉬며 녀석의 눈을 바라보았다.

철없는 아이 같으면 나을 건데 너무 진지하니까 오히려 더 신경 쓰인다.

자고로 사고라는 놈들은.

뒷받침할 실력 없이 의욕만 가득할 때 필연적으로 따라오기 때문이다.

“지켜드리고 싶어서 그래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녀석은 이런 엄청난 대답을 하기에 이르렀다.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이런 필요 이상의 진지함은 걱정과 기대를 동시에 만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걱정이 더 큰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나는 고개를 저으며 스노우의 청을 거절했다.

스노우는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손가락을 펴 눈앞에 내밀었다.

“여기에 글씨가 떠다니죠?”

“…어?”

그에 나는 멍청한 소릴 내며 녀석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비슷해서 그랬다.

그레이시가 나에게 했던 얘기와 너무 똑같아 할 말을 잃은 채 녀석의 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설마 이 뒤에도 같은 말을?

“그거 아저씨만 보이는 게 아니거든요.”

역시나 스노우는 같은 말을 하기 시작했고.

“저도 시스템 사용자예요.”

녀석은 어디선가 들었던 말로 나의 생각을 마비시켰다.

내 목숨 99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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