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하아… 시발.”
“왜? 왜 그러는데? 뭐가 잘못된 거야?”
“좋아서.”
“그런데 왜 욕을…….”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 봐봐 내가 지금 코로 숨을 쉬고 있다고.”
“코? 그야… 당연히…….”
에비오는 하려던 말을 멈췄다.
레이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제야 알아들었기 때문이다.
“예전엔 왜 이런 기분을 못 느꼈을까. 어? 살아 있다는 게 이렇게 좋은 거였네.”
“아무래도 그렇겠지.”
에비오는 깊은 공감을 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도 살고 싶어 이러는 거니까.
죽어서 천국을 가느니 적당히 비비면서 삶을 누리자는 게 에비오의 평소 생각이었다.
“내 몸이 아니라서 그런가 영 부실하네.”
무덤을 나온 레이는 새로운 몸을 움직이며 소감을 전했다.
에비오의 입장에선 딱히 반응할 말이 없을 터.
“그 대신 새로운 능력이 추가된 건가.”
레이는 허공을 바라보며 비 맞은 개처럼 홀로 중얼거렸다.
“시스템?”
“어. 새로운 몸이라고 신경을 써 준 모양이야. 뭔가 이상한 게 생겼어.”
그렇게 말해도 역시나 에비오의 입장에선 할 말이 없었다.
이런 기이한 능력들은 누가 준다고 해서 생길 건 아닐 테니까.
그저 높으신 뭔가의 변덕이라고 생각하면 적당히 이해될 그런 거였다.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지?”
에비오는 들떠 있는 레이를 보며 향후 계획을 물어보았다.
말이 좋아 계획이지 속내는 빨리 추적을 시작하는 말이었다.
“일단 그 덩치 큰 새끼를 쫓아가야지.”
그에 레이는 정상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던 그때.
“그러다 쓸 만한 놈이 보이면 몸도 빼앗자고.”
“그건 왜…….”
“왜는 뭐가 왜야? 내 동생도 살려야 할 것 아냐.”
“아, 그래 적당한 놈 보이면 그렇게 해 보자.”
에비오는 레이의 말에 맞장구치며 다음 말을 감췄다.
이 녀석을 믿을 수 없는 까닭이었다.
죽기 전부터 ‘미친 형제’로 유명했던 놈들이다.
언제 회까닥 돌지 모르니 안전장치 하나쯤은 가지고 가야 했다.
[새로운 육체에서 이탈하면 영혼은 자동 소멸됨.]
싸우다 죽건 자신의 능력으로 이전 시키건, 놈의 영혼이 저 육체를 떠나는 순간 모든 것이 사라진다.
놈이 나를 위협한다면.
‘영영 지워지는 거지.’
비장의 한 수를 품은 에비오는 레이를 바라보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이제 가 보자.”
본연의 목적으로 돌아가 추적을 시작했다.
* * *
“이제는 괜찮은가 봐요?”
“응? 뭐가?”
“오싹거린다고 했던 거요.”
“어? 그러고 보니 오늘은 멀쩡했잖아?”
생각해 보니 하루 종일 아무렇지도 않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어제 저녁.
조금 더 세밀하게 따지면 어제 들렸던 마을을 나선 이후부터였다.
“그럼 귀신은 아닌 거네요.”
“그런가?”
개운치 않은 뒷맛을 남기며 귀신 체험은 그렇게 마무리됐다.
“조금만 더 가면 슈탈렌이네요.”
“그래, 한 시간 안에 도착하겠구나.”
후미를 따르던 빅터는 베르의 말에 답하며 지평선 너머를 바라보았다.
브라함 남부에 위치한 작은 지방도시 슈탈렌.
특색 없는 이곳에 빅터의 관심이 머문 건 그곳에 있는 특별한 건물 때문이었다.
이 거리에서도 보일만큼 높게 솟은 첨탑과 폐쇄적인 외관.
한눈에 봐도 수상한 이 건물의 정체는 브라함 흑마법의 근원인 흑마탑이었다.
“들리실 건가요?”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상황은 알아보고 가야겠지.”
빅터와 베르는 선두로 나서 길을 이끌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슈탈렌 근처에 있는 작은 농장에 도착했다.
“어서 오십시오, 백작님.”
모습을 드러낸 이들은 빅터의 또 다른 정보원들이었다.
인원은 모두 합해 여섯 명.
네 명은 흑마탑 주위에 나가 있고, 농장에는 두 명이 남아 빅터를 맞이했다.
“요즘도 조용한가 보구나.”
“네. 백작님께서 리베로 향하신 이후론 인적이 거의 끊긴 상황입니다.”
질문에 답한 정보원은 잠시 틈을 두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흑마탑이야 말할 것도 없고, 슈탈렌 자체가 조용해졌습니다. 보고 드릴 게 없을 정도죠. 오히려 황제가 보낸 놈들이 더욱 걸리적거리는 상황입니다.”
“흠, 그렇구나.”
빅터는 긴 호흡을 뱉으며 보고에 답했다.
그러고는.
“황제의 집착이야 무시해도 된다. 이렇게 움직여 주면 오히려 고맙지.”
그러더니 빅터는 황제의 감시를 이용하라는 지시를 추가했다.
어제오늘의 일도 아닐뿐더러, 덕분에 흑마탑 입장에선 더욱 활동하기 힘들 터였다.
“상황이 어찌 변할지 모르니 긴장 풀지 말고 감시해라.”
“네, 알겠습니다.”
이어진 빅터의 말에 정보원은 담백하게 대답했다.
“특히 우리가 모르는 중년 남성이 오가면 더욱 집중해서 살피고.”
“포착된다면 어디까지 확인할까요.”
“활동하는 모든 범위다.”
빅터는 생사가 불투명한 두 남자를 감시 범위에 포함시켰다.
배신한 신탁의 기사, 카론과 루즈.
사실상 빅터는 그들이 살아 있다고 믿는 분위기였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고.
그레이시에게 들은 그들의 마지막은 아무리 생각해도 내부의 힘이 작용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탈출할 방법도 없었을 테니까.
하여 빅터는 여전히 카론과 루즈가 흑마탑과 연결돼 있을 거라 예상했다.
등잔 밑이 어두운 법.
두 사람의 처형장소가 될 뻔 했던 흑마탑은 역설적으로 가장 좋은 은신처가 될 수도 있었다.
“살펴 가십시오.”
“그래, 부탁하마.”
빅터는 새로운 당부를 전하며 농가를 나왔다.
슈탈렌을 벗어난 우리는 속도를 더욱 높혔다.
함브룩과 아케른 사이에 있는 역참에서 말을 교환하고, 하루를 더 달린 끝에 지난한 여정의 끝을 맞이할 수 있게 되었다.
변경백 빅터 크로제의 영지 아케른.
브라함 제국 최대의 요충지인 아케른 성은 범접할 수 없는 위용을 뽐내며 국경을 수호하고 있었다.
“…….”
압도적인 그 모습에 나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강을 옮겨 놓은 거대한 해자와 도개교는 아케른 성의 용도를 직설적으로 보여 주고 있었다.
전쟁을 목적으로 지어진 성.
단 한 번의 침략도 허용치 않았다는 아케른 성은 수비가 필요 없을 만큼 구조적으로 완벽했다.
저 넓은 해자를 어떻게 건너올 것이며, 넘어왔다고 한들 이 성문을 어찌 뚫겠는가.
도시를 뒤집을 만한 국가 급 마법이 아닌 이상, 이 성을 함락한다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한마디로 난공불락!
도개교를 건너는 지금 심정은 전장으로 향하는 병사의 마음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미쳤다.’
성의 외관부터 시작해서 근무하는 병사들까지.
이곳의 분위기는 다른 도시의 성들과 태생적으로 달랐다.
이런 곳을 책임지던 사람이었으니 오죽했겠나.
그간 빅터의 괴상한 짓은 이 하나로 모두 납득되기 시작했다.
“엄청나죠?”
“보기만 해도 주눅 들겠네요.”
감상을 묻는 베르의 말에 나는 혀를 내두르며 짧은 소감을 전했다.
표정 없는 별조차 입을 다물지 못하니, 이곳의 위용이 얼마나 장대한지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음이었다.
“아저씨는 와 보셨나 봐요?”
“나야 몇 번 왔었지.”
덤덤해 보이던 그레이시는 역시나 유경험자였다.
“그동안 조금씩 바뀐 모양이구나. 예전엔 이런 것들은 없던 것 같은데.”
그레이시는 성문 주변의 장치들을 보며 호기심들 드러냈다.
내 입장에서야 모든 것이 신기할 따름이지만.
“바로 시작하자.”
입성한 빅터의 첫마디는 회의 시작을 알리는 짧은 여섯 글자였다.
그렇게 우리는 내성으로 향했고.
‘여기도 엄청나네.’
남다른 스케일을 자랑하는 회의실에서 열띤 토론을 시작했다.
“강화 인간은 계속해서 늘어날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막지 못할 겁니다.”
회의의 요점은 이것이었다.
전력 비대칭이 가속화되고 있다는 것.
카렌 영지의 국지전은 그저 서막에 불과하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하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일반 병사가 4성만 되어도 상황은 극적으로 바뀐다.
마법사도 포함되는지 모르겠으나 오러가 되는데 마력이라고 안 될 이유는 없을 터.
강화 인간 범주에 마법사까지 포함된다면, 전쟁의 양상은 끔찍하게 기울고 말 것이다.
상대적으로 부족한 마법 인력의 격차는 더욱 크게 벌어질 것이고, 강력한 보병의 지원을 받는 마법사는 전방의 모든 걸 지워 버릴 것이다.
물론 나에게 에르텔이란 비기가 있지만 그것이 모든 걸 해결해 주진 않는다.
용도 자체가 보조 도구.
부족한 마력을 지원해 주는 것이지, 사용자의 마법 수준을 올려 주는 게 아닌 탓이다.
“사라센 흑마탑을 선제공격해야 할까요?”
“글쎄요? 소득 없이 전쟁만 앞당길 확률이 클 것 같습니다.”
흑마탑이 아니어도 강화 인간은 만들어지니까.
나는 노이의 사유지에서 연구실을 발견했고, 그곳에서 강화 인간을 연구한다는 걸 확인했다.
물론 원점인 흑마탑을 공격하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겠지만, 그것은 전면전이 시작됐을 때의 상황이다.
지금처럼 애매할 때.
특히나 전력의 상태가 약세일 때 잘못 시작되면 되돌리기 힘든 상황에 직면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놈들의 계획을 두고 볼 수만도 없는 일 아닙니까. 어떤 식으로든 타격을 주고 강화 인간을 줄여 나가야 합니다.”
조급해하는 부관의 말을 들으며 현실적인 방법을 떠올렸다.
암살이나 그 외에 작은 선제 타격, 그리고 적의 도발에 대한 승리까지.
작은 승리를 쌓으며 확실한 목표를 찾았을 때… 그때엔 대상을 가릴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일을 쉽게 하려면 적의 탐색전을 아케른으로 끌고 와야겠죠. 놈들이 카렌으로 향하는 이상 우리가 끼어들기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잘라먹으면요?”
나는 베르의 말에 다른 가능성을 제시했다.
보다 손쉽고 현실적인 방법.
“굳이 끌고 올 것이 아니라 가는 걸 중간에서 치워 버리면 되잖아요?”
안 오면 가면 그만이다.
카렌으로 가는 놈들을 잘라먹든, 그 옆 도시로 가는 놈들을 습격하든. 어디로 향하든지 카렌 바깥에서 처리하면 문제될 여지가 없었다.
“놈들이 더 이상 안 나오면 그땐 안으로 파고들면 되겠죠.”
그에 빅터와 부관들은 서로 눈길을 주고받으며 토론을 이어 갔다.
분위기는 내가 제시한 의견으로 모이고 있었다.
관건은 누구를 파견시켜 결과를 얻어 낼 것인가.
이 대목에서 의견이 분분하게 갈리고 있었다.
하여 나는 또다시 끼어들어 의견을 제시했다.
“저를 보내 주시면 힘닿는 데까지 휘젓고 와 보겠습니다.”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상대의 수준이 최소 6성이면 이쪽에서 나갈 사람은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다.
이기고 싶다면 그 이상이 나가야 될 터.
빅터를 제외하면 나 혼자뿐이니 그 외에 다른 대안은 없다고 생각한다.
아니, 현시점에선 없다.
상대와 동급을 끌고 나가 서로의 병력을 갉아먹고 온다면, 결론적으론 우리만 큰 손해를 입게 되는 것이니까.
놈들에게 있어 성장은 시간과 노력의 산물이 아닌, 마석 하나의 가치인 까닭이았다.
강화 인간의 빠른 성장 속도로 인해 안정적인 전력을 유지할 게 분명했다.
그러니 남은 선택지는 더욱 강한 사람을 보내는 것뿐.
“한데 아까부터 계속 듣고 있긴 했습니다만, 백작님과는 어떤 사이신지…….”
호기심을 견디지 못한 부관 하나가 나의 정체를 물어보았다.
순간 문 앞에 있던 작은 소녀가 벌떡 일어나 앞으로 나왔고.
“그분은 고고한 아케른의 별 빅터 크로제의 제자이자, 아리안의 자작이며, 자유도시 리베의 용병왕이신 이반 님입니다.”
낭랑한 목소리로 자신의 임무를 훌륭히 완수했다.
내 목숨 99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