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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숨 99개-114화 (114/203)

114화

“망할 영감탱이?”

“뭔 소리에요.”

“분명 나에게 한 소리일 텐데?”

“허허… 밤새 뭘 잘못 자셨나. 뜬금없이 왜 이래요?!”

식전 댓바람부터 트집을 잡는 빅터에게 나는 정색하며 대들었다.

여기서 밀리면 안 되니까.

꿈이라고 생각했건만 아무래도 나는 또다시 요란한 잠꼬대를 했던 모양이다.

‘그게 꿈이 아니라니…….’

벽을 부셨던 그때를 떠올리며 주변을 훑어보았다.

하나 해머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고, 의심에 가득 찬 빅터의 시선만이 화살처럼 날아들고 있었다.

저기에 휘말리면 끝장일 터.

“아, 벌써 시간이!”

나는 모르쇠로 일관하며 이동을 준비했다.

“다 됐으면 출발하시죠.”

타이밍 좋게 나서 준 에스카는 피식 웃으며 내 앞을 지나쳤다.

덕분에 아침의 위기는 순탄하게 지나갔으니.

선두에 선 나를 따라 우리는 대수림 중앙을 빠른 속도로 가로질렀다.

“제 앞가림도 못 하던 녀석이 제법 쓸 만해졌구나.”

뒤를 따르던 빅터는 비난이 뒤섞인 묘한 칭찬을 했다.

거 앞에 몇 글자는 빼도 되겠구만.

괴팍한 저 성격은 바뀔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어쨌거나 나의 역할은 변하지 않았다.

시작의 마을까지 최단 경로를 잡아 앞을 가로막는 모든 걸 지워 냈다.

그야 말로 쾌속의 질주.

모든 몬스터는 내 선에서 정리되고 있으니, 후위에 있는 빅터는 산책하듯 따라올 뿐이었다.

“아이코!”

하지만 모든 게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모두가 나와 같은 육체를 소유한 건 아니니까.

나무에 걸려 넘어진 스노우는 그렁그렁한 눈으로 찢어진 무릎을 바라보았다.

“괜찮은 게냐?”

후미에 있던 빅터는 스노우의 곁으로 다가가 상처를 살폈다.

마치 손녀를 살피는 할아버지와 같은 모습에 나는 우두커니 서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첫 만남 때도 우리는 이렇게 마주쳤다.

스노우는 나를 향해 달려오다 넘어졌고, 그날도 저렇게 다친 무릎을 붙잡고 눈물을 그렁거렸다.

그때와 다른 점이라면 우리에겐 전문 치료사가 있다는 것.

샤아아아―

그레이시의 손짓 한 번에 스노우의 상처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우와…….”

사실 이동을 버거워하는 건 신기해하는 스노우뿐만이 아니었다.

육체 능력이 떨어지는 마법 계열들.

베르나 그레이시의 입장도 스노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물론 그레이시의 입장은 약간 달랐으나, 기본적으로 이들은 강한 육체를 필요로 하는 행동은 힘들 수밖에 없었다.

반면 가야 할 여정은 아직 까마득하니 이동속도는 느려질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흠… 미끼 작전을 써야겠구나.”

치료를 지켜보던 빅터가 이상한 말을 꺼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일전에 빅터와 함께 대수림을 통과했던 나의 경험은 저 말을 무시하라고 경고하고 있었다.

하나 그런다고 가만히 있으면 빅터가 아닐 터.

“따라와라.”

결국 우리는 빅터를 따라 경로를 벗어났다.

그렇게 이동한지도 벌써 반나절.

나는 너른 벌판 위에 서서 여섯 개의 발이 달린 커다란 몬스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크네요.”

“크지. 대여섯 명 정도는 너끈히 태울 수 있을 게다.”

“저걸 탄다고요? 꽤 사나워 보이는데.”

비교 대상을 찾자면 화염 도마뱀과 비슷하다.

형태만 그렇다는 것이다.

짧은 다리에 두껍고 긴 꼬리가 있다는 점은 같지만, 생김새와 크기는 이쪽이 훨씬 더 크고 흉악하게 생겼다.

게다가 다리는 한 쌍이 더 있다.

“바실리스크라는 사나운 녀석이지. 하나에 꽂히면 끝까지 쫓아가서 죽을 때까지 싸우는 놈이다.”

“음, 그런 놈을 어떻게 타요?”

“다 방법이 있다.”

빅터는 수상한 말을 뱉어 내곤 주위를 살폈다.

“마침 저 녀석 하나만 보이는구나. 정수리가 약점인 놈이라 해머로 한 대 치면 바로 기절할 게다.”

“그러다 죽으면요?”

“적당히 치면 된다.”

그걸 몰라서 묻는 거거든요.

결국 나는 근처에 있는 바위를 대상으로 그 적당을 찾기 시작했다.

쾅!

“세다.”

쾅!

“약하다.”

쾅!

“어정쩡하다.”

쾅!

“이상하다.”

아익! 이상하다는 뭔데?!

빅터는 그 뒤로도 계속 트집을 잡았다.

이건 분명히 ‘망할 영감탱이’에 대한 복수가 틀림없었다.

그게 아니고서야 요상하다, 괴상하다, 흉측하다, 미련하다, 한심하다, 그 외에 기타 등등!

이런 엉뚱한 말을 해 가며 시비를 걸 이유가 없잖은가.

‘이러니 망할 영감탱이지!’

하여간 한참을 실랑이하던 끝에 드디어 빅터는 이렇게 말했다.

“적당하다.”

하여 나는 커다란 놈의 머리에 해머를 내리쳤다.

크오옥!

정수리가 약점인 녀석은 적당한 나의 공격에 기절했다.

그 틈에 마나 계열 3인조와 빅터가 녀석의 등짝에 올라탔다.

“너는 그 앞에 있어라.”

바실리스크 위에 올라탄 빅터는 자리를 지키라며 나에게 당부했다.

뭘 어쩌려고 저러는 건지.

불안한 예감을 억누르며 나는 기절한 놈의 앞에 앉아 녀석이 깨어나길 기다렸다.

“슬슬 준비해.”

일어날 때가 됐는지 빅터는 나에게 신호를 보냈다.

나는 일어서서 놈을 주시했고.

끼에에에엑―

눈을 뜬 녀석은 나를 보자마자 괴성을 질러 댔다.

순간 이어지는 빅터의 한마디.

“달려라!”

빅터가 말한 미끼란 살아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 미끼는 다름 아닌 나.

“미쳤네, 진짜!”

나는 복수에 눈먼 바실리스크 앞을 달리며 마주 오는 몬스터를 날려 버렸다.

“왼쪽은 내가 맡지.”

“오른쪽은 제가 맡을게요.”

그에 별과 에스카가 합류하여 곁을 지키기 시작했으니.

“해 떨어지기 전까지 쭉 달려라!”

빅터는 불어오는 맞바람에 머리칼을 휘날리며 장검을 들어 앞으로 내밀었다.

* * *

속도는 일단 둘째 치자.

미끼 작전에서 중요한 건 빠르기가 아닌 지속 시간이니까.

“진짜 해 떨어질 때까지 달려요?”

“당연하지.”

역시 빅터의 입에서 나오면 그 어떤 말이라도 현실이 된다.

그냥 될 때까지 하는 것.

빅터의 생각을 이해하느니 그 시간에 몸을 움직이는 게 현명한 판단일 것이다.

지금의 나처럼 말이다.

“에휴…….”

입으론 투덜대면서도 두발은 멈추지 않고 계속 달리고 있었다.

몇 개월 전의 나라면 벌써 주저앉았을 터.

벌써 세 시간째 달리고 있지만, 아직까지 나의 호흡은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왼쪽에서 따라오던 별이 조금씩 뒤처지는 게 눈에 띄였다.

힘이 센 것과 지구력은 별개의 문제일 테니까.

“힘들면 올라타서 쉬어.”

가쁜 숨을 내쉬는 별에게 휴식을 권유했지만, 고개를 저은 별은 계속해서 달려 나갔다.

그렇게 30분을 더 달렸을 무렵, 별은 바실리스크에 올라타 지친 몸을 쉬게 했다.

반면 에스카의 상태는 아직까진 순조로웠다.

호흡도 흐트러지지 않았고, 달리는 속도의 기복도 보이지 않았다.

‘역시 오러 때문인가 보네.’

오러라는 기운이 신체 전반에 걸쳐 영향을 주니, 여러 면에서 강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쨌거나 이 황당한 빅터의 작전은 큰 효과를 보고 있는 중이었다.

‘빠르긴 하네.’

사람들을 바실리스크에 태워 달리니 이동 시간이 며칠 단위로 단축되는 것이다.

몬스터의 재발견이랄까.

레서 가고일도 그렇고, 빅터는 이런 걸 따로 연구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물론 뒤따라오는 놈은 그 목적이 전혀 다르긴 하지만…….

덕분에 잘 오긴 했는데 이제 녀석을 어찌 할 건지 결정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곧 해가 질 텐데 어떻게 해요?!”

밤새도록 달릴 순 없으니 어두워지기 전에 야영지 주변도 정리해야 하고, 바실리스크도 해치워야 했다.

“그럼 오늘은 이만하자. 저 앞에 있는 암벽 앞이 좋겠구나.”

빅터는 수풀 너머로 보이는 암벽을 가리키며 그곳에 멈추자고 말했다.

한데 그 녀석은 어쩌려는 건지.

먼저 도착한 나는 해머를 움켜쥐며 휘두를 태세를 갖췄다.

남은 거리는 대략 30보 내외.

여전히 놈은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져 20보.

다시 10보.

“젠장.”

더는 기다릴 수 없기에 놈의 머리를 향해 해머를 조준했다.

하지만 그 순간.

빅터는 칼자루를 휘둘러 녀석의 정수리를 내리찍었다.

크오옥―

바실리스크는 똑같은 소리를 지르며 기절했고.

“눈을 덮어놔라.”

빅터는 이불을 던지며 놈의 눈을 가릴 것을 지시했다.

“그러면 돼요?”

“저렇게 가려 놓으면 한동안 깨어나지 못할 게다.”

빛에 예민한 바실리스크의 특성 탓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해도 저런 놈을 곁에 두고 잠을 이룰 순 없는 일.

우리는 밤새 불침번을 돌며 녀석의 움직임을 감시했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이른 새벽.

잠에서 깬 빅터는 모두를 깨워 바실리스크 옆에 대기시켰다.

물론 나의 위치는 놈의 눈앞이었고, 옆에는 별과 에스카가 양쪽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

말없이 끄덕인 나를 보며 빅터와 세 사람은 녀석의 등에 올라탔다.

움찔거리며 반응하는 바실리스크.

동시에 놈의 눈을 가린 이불이 바람에 날리듯 벗겨졌다.

그리고 나는.

“에휴…….”

새벽 공기를 마시며 대수림을 달려 나갔다.

* * *

똑같은 짓을 몇 차례 반복하고 난 후에야 우리는 1차 목적지인 시작의 마을 근처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바실리스크를 처리해야 했으나, 정수리가 함몰된 녀석은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한 놈만 패겠다는 그 무서운 집념.

녀석의 끈기와 집중력에 감탄을 보냈지만.

‘미련해…….’

나는 그러지 말자는 다짐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다시 이동을 시작했고, 남은 거리를 느긋하게 걸어 마을 중앙에 있는 석탑을 마주 보게 되었다.

사실 이곳을 꼭 들려야 할 이유는 없었다.

브라함으로 향하는 길목에 있는 건 맞으나, 굳이 여기에서 쉬어 갈 필요는 없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찾아온 이유는 그레이시 때문이었다.

출발할 때부터 그레이시는 나에게 줄 것이 있다며 이곳을 들리길 원했다.

한데 남아 있는 것이 있을까.

로제와 함께 왔을 당시에도 우리는 마을 곳곳을 수색해 특이점을 살펴봤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었다.

기억에 남을 만한 것들은 결계석뿐, 그 외에 특별한 것들은 몇 번을 살펴봐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있던 세상에선 한때 타임캡슐이란 게 유행했었다. 지금 소중하게 느끼는 것들을 담아서 먼 훗날에 열어 보는 놀이였지.”

하나 그레이시에겐 유의미한 뭔가가 있었나 보다.

잠긴 목소리로 말을 꺼내곤, 석탑 앞으로 다가가 네모난 바닥을 들어 올렸다.

“인마대전이 끝나고 우린 이곳에 모여 타임캡슐을 만들었다.”

무릎을 꿇은 그레이시는 허리를 숙여 나무 상자를 꺼냈다.

나무와 철을 섞어서 만든 중형 궤짝.

개봉된 상자 안에선 낡은 종이 뭉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레이시는…….

“…30년 전 우리의 모습이다.”

짙은 그리움을 담아 나직이 설명을 이어 갔다.

그저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기만 할뿐.

나는 마땅한 대답을 떠올리지 못한 채 그레이시가 내민 초상화를 받아들었다.

긴 머리에 작은 눈을 가진 남자.

덧니가 눈에 띄는 여자…….

누군가는 웃고 있었고, 또 다른 누군가는 무심한 표정이었다.

자신에게 보낸 편지였을까.

그런 초상화 뒤편에는 뜻 모를 글씨가 길게 적혀 있었다.

손에 든 낡은 종이는 그렇게 한 장씩 뒤로 넘어갔다.

마침내 나는.

“…….”

마지막 초상화 앞에서 내려앉는 심장의 울림을 느껴야 했다.

이 막연한 감정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뺨을 맞댄 채 활짝 웃는 남녀의 얼굴에 가슴 한 구석이 시리게 아파 왔다.

그런 나를 향해 그레이시는 확인을 시키듯 말을 전했다.

“진과… 미리암이다.”

그들이 너의 부모님이라고.

예상하고 있었지만, 들려온 그레이시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처연했다.

“이분들이…….”

“그래, 이것만큼은 꼭 너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나는 먹먹한 감정을 추스르며 종이 위에 그려진 남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어머니를 닮아서 다행이라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잘생긴 남자 옆에 아름다운 여자가 있었는데… 그 여자가 너무 아름다워 남자가 보이질 않았다.

그에 나는 피식 웃어 버렸고.

“못 생긴 건 아니지만 어머니가 너무…….”

웃고 있는 나의 눈에선 까닭 모를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내 목숨 99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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