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안전 가옥의 아침은 부산스럽게 시작됐다.
부엌 한편에선 식사 준비가 한창이었고, 다른 쪽에선 여장을 꾸리느라 정신없었다.
특히나 베르의 경우는 더욱 분주했는데.
“뭐 하는 거예요?”
“경계 마법이죠. 누군가 침입하면 엄청난 소음과 빛이 번쩍 거릴 거예요.”
장기간 집을 비워야 하니 이래저래 준비할 것이 많은 탓이었다.
오늘은 대이동이 시작되는 날.
잠시 후 우리는 아케른 성이 있는 빅터의 영지로 긴 여정을 떠나게 된다.
우두커니 앉아 있는 작은 소녀를 제외하고 말이다.
“내가 한 얘기 잘 생각해 봤어?”
“…네.”
“얼굴을 보니 쉽지 않은 결정이었나 보네.”
“목적이 특별하니까요.”
생각을 묻는 나의 말에 스노우는 가라앉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결론은?”
“저도 따라갈게요.”
“큰 싸움에 휘말릴 수도 있어.”
“그런 건 상관없어요.”
담백하게 대답한 스노우는 한숨을 쉬듯 이야기를 이어 갔다.
“제가 도움이 안 되는 게 문제인 거죠.”
우리가 놀러 가는 건 아니니까.
아케른으로 향하는 이유는 다가올 사라센과의 전면전을 준비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니 스노우의 입장에선 고민스러울 수밖에.
남아 있자니 숨어 다녀야 하고, 함께하자니 전쟁을 감수해야 할 까닭이었다.
“음, 물 없인 못 살잖아.”
“…….”
“그럼 도움되는 거 맞네. 가서 짐이나 빨리 챙겨.”
스노우의 자괴감을 일축하고 짐 정리를 위해 내 방으로 향했다.
딱히 챙길 건 없었지만, 중요한 게 남아 있었다.
국가급 마법까지 사용케 한다는 엄청난 마력의 돌.
목함 속에 보관되어 있던 선홍빛의 에르텔이었다.
‘이게 정말 그 정도라고?’
결계석을 넣어 만든 목함을 열자 진한 마력이 흘러나왔다.
강렬하다 못해 저릿한 느낌이랄까.
이렇게 요란한 걸 보면 뭐가 되도 될 것 같긴 하다.
‘써 보면 알겠지.’
무적의 답을 꺼내 든 나는 목함을 닫아 가방 안에 넣어 두었다.
어차피 마법사들의 역할이니 내가 고민할 문제는 아닐 터.
“자, 다들 나와서 식사하세요!”
준비를 끝낸 나는 에스카를 따라 식당으로 향했다.
든든한 아침 식사를 마친 우리는 각자의 짐을 챙겨 안전 가옥을 나왔다.
“이제 가면 언제나 올까.”
두 번 다신 못 올 것처럼 베르는 울상을 지으며 청승을 떨고 있었다.
“때 되면 오겠지. 요령 부리지 말고 짐이나 똑바로 들어.”
“하… 감성이 메마른 너는 이해할 수 없겠지. 정든 곳을 떠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말이야.”
“걱정 마. 농땡이 치면 어떻게 되는진 잘 알고 있으니까.”
에스카는 커다란 가방을 집어 베르의 어깨에 걸쳤다.
그 옆에 있던 작은 손가방도.
“어이, 나는 몸 쓰는 사람이 아니라고.”
“이참에 써 봐.”
아랑곳없는 에스카는 또 다른 가방을 떠넘겼다.
그러게 적당히 챙겨 나올 것이지.
베르는 마법 도구 제작에 필요하다며 여러 가지 물건들을 가방에 쓸어 담았다.
손에 익은 걸 써야 한다나.
다시 말해 저 많은 짐들은 베르의 개인 물품이란 얘기였다.
굳이 들고 갈 필요가 없는 그런 것들.
그 외에 다른 사람들은 적당한 가방을 챙겨 대수림으로 향했다.
* * *
브라함에서 리베로 올 때는 레서 가고일을 타고 오면 된다.
비록 착지할 때는 소중한 그곳을 조심해야겠지만, 시간만큼은 엄청나게 단축시켜 준다.
반면 리베에서 브라함으로 가는 길은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
시간을 줄일 수 있는 건 그저 최단 거리로 걷는 것뿐.
하여 우리는 몬스터가 득실거리는 대수림 중앙으로 이동 경로를 잡았다.
사실 아케른이 목적이라면 이쪽으로 갈 필요는 없었다.
이곳으로 향하는 루트는 시작의 마을이 있는 접경지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케른은 이쪽 방향이 아니었다.
사라센과 가까운 함브룩이 정확한 경로였고, 그곳으로 가려면 중앙이 아닌 대수림 오른쪽으로 향했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욱 먼 길을 선택한 것은, 나를 배려한 빅터의 결정이었다.
이쪽으로 가야 세비앙이 나오니까.
데릭을 보고 싶다는 나의 말에 빅터는 시작의 마을 방향으로 코스를 설정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시작의 마을은 정말 오래간만이네요.”
경로를 확인한 그레이시는 감회에 젖은 표정으로 설렘을 드러냈다.
사실 그레이시는 이 여정에 참여하지 않으려 했다.
기록상의 그레이시는 이미 죽은 사람이었고, 그의 생존이 황제에게 알려진다면 과거가 재현될게 빤한 탓이었다.
― 세월이 많이 지났지 않느냐.
하지만 빅터는 시대가 변했음을 상기시켰다.
16살의 그레이시를 기억하는 이들은 얼마 남지 않은 소수의 사람들뿐.
― 아무 생각 없이 마주치면 떠올리기 힘들지 않을까요?
베르는 세월이 주는 망각에 대해 일말의 기대를 품었다.
16살과 44살은 다를 테니까.
과거를 아는 사람이라고 해도 단번에 알아채긴 쉽지 않을 터였다.
― 알고 마주치는 것과 모르고 마주치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니까요.
하여 그레이시는 우리와 함께 아케른으로 향하게 되었다.
“오늘은 여기서 야영을 하자꾸나. 곧 어두워질 테니 주변 정리부터 시작하고.”
빅터의 말을 신호로 나와 에스카는 근처 숲으로 내달렸다.
화근을 자른다고 해야 하나.
밤이 되면 강해지는 대수림 몬스터의 특성상, 야영지 일대를 미리 소탕하는 건 기본적인 절차였다.
쿠웨엑―
케엥―
산발적인 단말마가 울리며 소탕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주변 몬스터의 수준은 그다지 높지 않은 4성급 전후.
하나 어두운 밤이 찾아오면, 놈들은 6성급을 넘보는 괴물로 탈바꿈한다.
따라서 서식지가 바뀌는 지점까지 소탕해야 잠결에 공격당하는 걸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다.
“이게 마지막인가.”
석양이 지는 숲을 바라보며 나는 거대한 사슴을 도축했다.
황소보다 큰 녀석이었는데, 놈의 두툼한 갈빗살 구이는 리베의 식당에서도 꽤나 인기 있는 메뉴였다.
“역시 고기는 갈빗살이지!”
이 환상적인 때깔이라니.
군침을 삼킨 나는 타워 실드 같은 갈빗대를 챙겨 야영지로 복귀했다.
* * *
사슴 갈비를 즐긴 사람들은 각자의 자릴 찾아 하루를 정리했다.
불가에 앉은 빅터는 베르와 대화를 나눴고, 그레이시는 명상을, 에스카와 별은 서로의 검을 들여다보며 들리지 않는 얘기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이반은 졸음이 온다며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스노우가 보기엔 그저 놀러 나온 느낌이었다.
이곳이 대수림이란 사실을 잊을 만큼, 이들의 모습은 평상시와 다를 바 없었으니까.
막강한 무력을 바탕으로 한 절대적인 안정감.
이들을 만난 이후 스노우는 처음으로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
* * *
― 여기가 어디죠?
눈을 떠보니 낯선 동굴이었고, 이상한 복식을 갖춘 사람들이 자신을 에워싸며 어디론가 끌고 갔다.
저항?
155㎝의 작은 소녀가 그 많은 성인 남자를 어떻게 감당했겠나.
두려움 속에 끌려간 스노우는 이름 모를 곳에 감금되어 새로운 삶을 준비해야 했다.
처음엔 그저 울기만 했다.
낯선 이곳도 두려웠고, 근처를 오가는 사람들도 모두 다 무서웠다.
그중에서도 가장 힘들었던 건.
눈앞을 오가는 정체 모를 글자들이었다.
도대체 왜 이런 것들이 보이는 건지.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았고, 제멋대로 떠올랐다 사라지길 반복하고 있었다.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
정체 모를 누군가에게 원망과 비난을 퍼부으며 하루하루를 힘들게 보내야 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알기 전까진 말이다.
― 우리 모두가 똑같아.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스노우와 같은 형편이었다.
영문도 모른 채 소환된 이들은 자신과 같은 현상을 겪고 있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제각각 특별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
저마다의 능력을 바탕으로 사람들은 새로운 이세계의 삶에 조금씩 적응하기 시작했다.
― 로이드?
소환된 사람들은 그 남자를 가리켜 로이드라고 불렀다.
동굴에서 처음 보았던 금발의 중년 남자.
무관심하던 로이드는 어느 날 갑자기 스노우를 따로 격리시켰다.
관심받기 싫어 일부러 능력을 감췄는데.
한순간의 실수로 스노우는 감춰 둔 능력을 로이드에게 들키고 말았다.
그날 이후로 모든 게 뒤틀렸다.
물만 따르던 스노우는 드러난 능력으로 인해 여러 현장에 동원되어야 했다.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는 삶이었다.
누군가 죽는 모습을 봐야 했고, 나와 같은 사람들이 소환되는 현장도 지켜봐야 했다.
견디기 힘들었다.
낯선 이세계의 삶은 스노우에겐 버거운 시간의 연속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빅터라는 사람이 나타나 흑마탑 일대를 들쑤셨다.
임무를 마치고 복귀 중이던 스노우는 목적지를 바꿔야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한때 알고 지냈던 리를 마주하게 됐다.
― 도망가자. 난 도저히 못 견디겠어.
회귀의 능력을 가지고 있던 리는 스노우에게 탈출을 제안했다.
도망이라니.
정말 이곳을 벗어날 수 있는 걸까?
생각만으로도 겁이 덜컥 나고 손바닥은 땀으로 흥건해졌다.
하지만 리는 결심을 굳힌 듯 단호하게 얘기했다.
― 어차피 죽을 목숨. 발악이라도 해 봐야지.
그런 리의 말에 스노우는 깊은 공감을 전할 수밖에 없었다.
죽어야만 발동되는 회귀의 능력.
그는 수없이 많은 죽음과 회귀를 계속해서 반복해 왔다.
로이드의 필요에 의해.
리는 다양한 방법으로 끔찍하게 살해를 당해 왔다.
― 알겠어요!
결국 스노우는 결심했고,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 탈출을 감행했다.
탈출은 순조롭게 성공했다.
하나 거듭된 추격을 뿌리치는 과정에서 리와 스노우는 헤어지게 되었다.
그렇게 홀로 떠돌다 정착한 곳이 바빌리안의 유곽이었다.
잡다한 일을 하며 몸을 의탁해 왔지만, 로이드가 보낸 추적자가 들이닥치고 말았다.
어떻게 도망쳤는지도 모르겠다.
정신없이 달려가다 큰 덩치의 남자를 발견했고, 다짜고짜 살라 달라며 매달렸다.
그렇게 스노우는 로이드의 추격을 떨쳐낼 수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 남자는 일행이 있었다.
잘 어울린다고 해야 하나.
잘생긴 남자 옆에 멋있는 여자가 있었다.
그렇게 세 사람은 도시 외곽으로 몸을 숨겼다.
다음 날 아침.
누군갈 찾고 있다던 남자는 두 여자를 남기고 홀로 도시에 돌아갔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 어둠이 찾아왔다.
홀로 떠난 남자는 낯선 남자 둘과 함께 성터로 돌아왔다.
조용히 눈치를 살피던 스노우는 잠을 핑계로 그들 틈에서 멀어졌다.
아직은 두려웠고, 아직은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스노우는 이 모든 생각을 뒤집어야 했다.
― 빅터?
밤늦도록 이어진 그들의 대화에 잠든 척 누워 있던 스노우는 떨리는 가슴을 억지로 진정시켰다.
기억 속 어딘가에 남아 있던 익숙한 이름인 탓이었다.
그 남자였다.
흑마탑 주변에 나타나 로이드를 숨게 만든 남자.
세 남자의 대화는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 소환자였다고?
그레이시란 남자는 스노우와 똑같은 소환자였다.
무려 30년 전에 소환되었던…….
놀라움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스노우를 구해 줬던 이반은 소환자의 아들이었고, 그 남자와 빅터는 카이 형제를 죽였다고 말했다.
로이드의 부하들 중에 가장 잔인하다고 소문난 놈들을 말이다.
직접 마주한 적은 없지만, 그들의 악명은 소환자들 사이에서도 유명했었다.
그런 미치광이 살인마 카이 형제가 이 남자들 손에 죽었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은 누구의 편이지?
적의 적은 나의 편이라고 하지 않았나?
뜬눈으로 밤을 지센 스노우는 혼란스런 마음으로 이들을 따라나섰다.
그렇게 리베에 도착해 일주일을 함께 보냈고.
― 크리에이티브 워터!
― 오옷! 맛있어!
스노우는 이 사람들과 함께하기로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같이 있으면 즐거웠으니까.
모두가 잠든 고요한 이 순간에도…….
“에잇! 망할 영감탱이!”
이반의 요란한 잠꼬대는 여정이 지친 스노우를 웃음 짓게 만들었다.
내 목숨 99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