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인간은 법이라는 족쇄를 스스로에게 채웠다.
하나 그것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수많은 현실의 문제가 있었으니, 사람들은 관습이라는 형태의 규칙과 습관으로 나름의 행동 양식을 발달시켜 왔다.
그중에 가장 기본적인 걸 꼽으라면 늘 주고받는 인사일 것이다
매일 보는 사람이나, 처음 보는 사람이나 모든 만남의 시작은 늘 인사였다.
그런데…….
나는 지금 그 인사가 너무 무서웠다.
“만나서 반갑소, 이반 공.”
“소문만 무성하던 귀인을 이제야 보는군요. 저는 소라가스 가문의 가주이자 왕령 행정인…….”
간단하게 말해 왕궁에서 일하는 사람을 알고 있는 지방의 귀족이란 말이었고.
“봉신을 축하드립니다. 이거 가까이서 뵈니 더욱 훤칠하시군요. 근래에 들어 별자리에 수상한 징조가 보이더니 이런 경사가 보게 됩니다. 한데 결혼은…….”
이건 자기 딸이 첫눈에 반해 난리가 났으니 혼인해 달라는 말이었다.
그 외에도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찾아와 와인 잔을 부딪치며 인사를 건넸다.
인사 공포증이 생길 것 같은 심정이다.
두렵다.
누가 쳐다보기만 해도 다가올까 두려워 고개를 돌리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끝까지 따라와 눈을 맞추며 얘기했다.
‘미치겠네.’
이 넓은 왕궁에서 내가 숨을 곳은 없었다.
이렇게 큰데.
그리고 저렇게 방도 많은데.
가는 곳마다 사람이 있는데다가 가려고 하면 막아선다.
한마디로 난 살아 있는 감옥에 갇혀 버렸다.
‘다들 어디 간 거야.’
그것도 홀로 남은 채…….
이리저리 휘둘리다 보니 어느새 나는 낯선 무리들 사이에 있었다.
아는 얼굴이 없다는 것이 이토록 불안할 줄이야.
나는 맹수에게 둘러싸인 초식동물처럼 가련한 눈동자를 굴리며 빠져나갈 구멍을 살폈다.
하지만 의미 없었다.
사람 옆에 사람이고, 그 옆에 또 사람이니까.
‘젠장.’
나는 사라진 일행들을 찾아 바쁘게 눈을 굴렸다.
그런 간절함이 통한 것일까.
“이반 님?”
사색이 되어 가는 나의 등 뒤로 구원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름다운 음성의 주인은 로제 데 카슈타르.
“크윽… 보고 싶었어요!”
나는 격한 반가움을 드러내며 로제의 손을 붙잡았다.
“아… 그건 저도…….”
그에 로제는 말끝을 흐리며 살며시 고개를 돌렸다.
하나 홍조 띈 로제의 얼굴은 이어진 나의 말에 제자리로 돌아왔다.
“다들 어디에 있는 거죠?”
“아, 지금 국왕님의 집무실로 이동하셨어요.”
나 빼고 다들 조용한 곳으로 이동했던 것이다.
“그런데 왜 여기에 계신 거예요? 이반 님 모습이 보이질 않아서 한참 찾아다녔어요.”
그래 내 탓이었다.
몰려드는 사람들을 피한답시고, 연회장 구석 어딘가에 처박혀 있던 나의 잘못이지.
“어서 가요. 다들 기다리고 계실 거예요.”
그제야 나는 이 끔찍한 사람 지옥을 빠져나올 수 있게 되었다.
쏟아지는 시선을 무심한 듯 흘리며.
‘던전이냐고.’
미로와 같은 복도를 구비 돌아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앞을 지키던 근위대가 집무실 문을 열었고.
“어서 들어오시오.”
그런 나에게 처음으로 말을 건넨 사람은 다름 아닌 국왕이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니, 송구하다가 맞는 건가.
예법에 맞는 문장들을 달달 외웠건만, 보람 없는 일이 되어 버렸다.
적당히 대답하며 고개를 숙인 나는 앉을 자리를 찾아 시선을 돌렸다.
모르는 얼굴 셋에 아는 얼굴이 넷이었다.
상석에 있는 사람은 모를 수가 없는 국왕 발롱 데 마리아누.
그 옆으로 익숙하다 못해 친근한 반크스가 있었고, 이후 모르는 세 사람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방안을 빙 돌아 반대편으로 이동했다.
그곳엔 후작이 된 제논과 빅터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나의 자리는 자연스레 빅터의 옆이 되었고, 그런 나의 곁으로 로제가 다소곳이 자리했다.
“이제야 차분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겠군.”
발롱 국왕은 기다렸다는 듯 말문을 열었다.
이제 또 다른 질문과 난해한 단어들이 쏟아질 터.
‘말 걸지 마라, 말 걸지 마라, 말 걸지 마라…….’
나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애먼 찻잔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눈 맞추면 시작될 테니까.
주문을 외우듯 빌었건만 국왕의 시선은 나를 향해 고정돼 있었다.
심지어 매우 흥미로워 보이니, 아무래도 피하긴 그른 것 같았다.
“이반 공은 참으로 잘생겼소. 내 생전 이리 귀한 외모는 본 적이 없거늘. 게다가 용맹함까지 갖추고 있으니 귀공이야 말로 에포나의 축복을 한 몸에 타고났나 보오.”
“…과찬이십니다, 전하.”
필사적인 고민 끝에 나는 간결한 문장을 완성했다.
그에 모든 사람들이 잔잔한 미소를 지었으니.
좋았어!
이런 느낌으로 가면 돼!
공략 법을 찾아낸 나는 비슷한 종류의 말들을 떠올리며 이어질 질문에 대비했다.
“음, 이반 공은 모르실 테니 내 직접 소개하겠소. 이쪽은 나의 아우인 모리에 데 마리아누 공작이오.”
“전하께 소개받은 모리에 데 마리아누라고 하오. 아리안을 향한 귀공의 헌신에 깊은 감사를 드리는 바이오.”
소개를 받은 모리에 공작은 국왕과 비슷한 말투로 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어쩔 수 없는 핏줄이라는 건가.
“…과찬이십니다.”
이번에도 나는 똑같은 한마디로 깔끔하게 대답했다.
참으로 놀라운 말이 아닐 수 없다.
상대가 아무리 길게 말해도 저 한마디면 모든 것이 정리된다.
나의 두 번째 무적의 해답.
― 해 보면 알겠지.
이것에 이은 새로운 무적의 답이 나의 사전에 등록되었다.
그러나 이어진 국왕의 소개는 나의 표정을 굳어지게 만들었다.
“그 옆에는 궁내부 장관인 마론 데 페이소스 후작이오.”
마론 후작.
노이라는 희대의 망작을 만들어 낸 죄 많은 인간이자, 더 큰 죄를 지을 예정인 자.
마르고 차가운 그의 표정은 보는 사람이다 불편해질 만큼 냉랭한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래서 좋다.
이런 놈들 앞이라면 오히려 난 편해질 수 있으니까.
“축하하네.”
마론 후작은 귀찮은 느낌을 한껏 담아 간소하게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놈보다 한 글자가 더 많았다는 게 분했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대답은 해야 했고, ‘네’라고 답할 만큼 철없는 멍청이는 아니었다.
그저 최소한의 예의를 지켜 주었을 뿐.
그래도 한 글자 더 말한 건 여전히 찝찝하고 기분 나빴다.
“이반 공 덕분에 취약했던 국력이 크게 오르게 되었소. 비록 영지는 수여되지 않았으나 그에 걸맞는 보답은 있을 것이오.”
“…감사합니다.”
반사적으로 나오는 ‘과찬’을 억누르며 국왕의 호의에 화답했다.
“참으로 귀한 인연입니다, 전하. 이반 공 같은 훌륭한 인재가 봉신을 맹세했으니, 시대의 정점인 빅터 공도 더 이상 남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아리안의 기사단장으로서 참으로 든든하기 그지없습니다.”
반크스였다.
존경하는 무인이 빅터라던 반크스는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시대의 정점에게 목례를 했다.
“그러게 말이오. 이래서 좋은 스승이 필요한가 보오. 스승과 제자가 이리 훌륭하니 말이오.”
“과찬이십니다.”
빅터는 나의 필살기를 가로채 국왕에게 사용했다.
그러고는.
“저야 그저 슬쩍 거들었을 뿐,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니 제가 아니었어도 크게 될 인재였습니다.”
나에 대한 칭찬으로 대답을 마무리했다.
‘웬일이래.’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던데.
하여간 빅터는 능숙한 언변으로 대화를 이어 나갔다.
모리에 공작은 차분하게 자리를 즐겼고, 반크스는 빅터에 대한 존경심을 아낌없이 드러냈다.
하지만 단 한 사람.
마론 후작은 싸늘한 시선으로 와인 잔만 바라보고 있었다.
* * *
아리안의 건국 기념일은 3일간 계속된다.
오늘은 겨우 그 첫날.
오늘 밤부터 왕도는 이틀간 축제에 접어든다.
화려한 볼거리와 먹거리가 무상으로 제공되고,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은 축제를 즐기며 기념일을 축하한다.
하지만 우리에겐 그 모든 걸 즐길 여유가 없었다.
브라함이라는 긴 여정이 남았으니까.
“벌써 가시다니 아쉽습니다, 빅터 공.”
왕궁 앞까지 배웅 나온 반크스는 서운한 표정을 드러내며 작별 인사를 건넸다.
그것은 로제와 제논 후작도 마찬가지.
“또 먼 길을 가셔야 한다니 어쩔 수 없지만…….”
로제는 말끝을 흐리며 애먼 손가락을 배배 꼬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가방을 열어 작은 노트 몇 권을 꺼냈다.
“이거 받으세요.”
베르가 만들어 준 메신저였다.
[이게 마지막 메신저에요. 흑흑.]
하도 자주 보내는 통에 이전에 준 메신저는 이미 바닥이 난 지 오래였다.
“어머, 정말 필요했던 건데!”
“넉넉하게 챙겼어요.”
무슨 보석이라도 받은 냥 로제는 활짝 웃으며 좋아라 했다.
저런 소박함도 로제의 장점일 터.
“아껴 뒀다가 잠들기 전에 한 번 씩만 쓸게요!”
로제는 서로의 모습이 점이 되도록 나의 가는 길을 지켜봐주었다.
* * *
리베로 돌아온 우리는 브라함으로 가기 위해 필요한 여정을 준비했다.
향후 일정이 어찌 될지 모르는 바, 장시간 비워질 것을 대비해 베르의 준비는 더욱더 부산스러웠다.
바쁜 것은 나또한 마찬가지.
“잠깐 나갔다 올게요.”
리베 제1의 자리를 놓고 듀란과 대결을 해야 했다.
사실 이긴다고 한들 돌아오는 보상은 없다.
그저 명예가 전부일 뿐이고, 그로 인해 이득을 취하는 사람은 내가 아닌 게브네와 상인들이다.
그럼에도 내가 대결을 하려는 이유는.
강자가 거기에 있고.
이기고 싶기 때문이며.
아끼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였다.
‘그거면 됐어.’
싸워야 할 이유도, 이겨야 할 이유도 모두 충분하다.
이제 남은 것은 승리라는 두 글자뿐.
대결 장소인 북문 밖에는 몰려든 용병들로 인해 벌집처럼 바글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벌집은.
“이반이 나타났다!”
누군가가 내지른 한마디에 떨어진 벌통이 되어 들끓기 시작했다.
“자, 마감 10분 전! 거실 분들은 지금 빨리 거세요.”
“이반에게 50실버!”
“나는 듀란에게 40실버!”
“이반한테 30실버!”
“난 듀란 10실버!”
“이반 1실버!”
뭐, 이것도 나름의 여흥일 테니까.
그런데 1실버는 너무한 거 아냐?
어떤 새끼냐?
하여간 몰려든 사람들은 결과를 놓고 내기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멍청하긴, 나한테 걸어야지.’
듀란이라는 이름이 들릴 때마다 나는 쓰게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저게 뭐라고 이렇게 신경 쓰이는 건지.
눈앞의 상대에게 집중하려 했건만, 팔랑거리는 나의 귀는 들려오는 이름에 집착했다.
‘흥! 돈을 잃어 봐야 정신 차리지.’
‘오호! 저 자식은 사람 볼 줄 아는군.’
뭐 이런 식이다.
‘흥!’과 ‘오!’를 반복하며 나의 두 귀는 계속해서 팔랑거리고 있었다.
팽팽한 장외의 접전은 그렇게 무르익어 갔고.
“두 사람 중앙으로!”
대결의 입회인인 용병 조합장은 나와 듀란을 가운데로 불러냈다.
도떼기시장 같던 대결 장소는 어느새 잠잠해져 적막이 감돌았다.
움직이고 있는 사람은 듀란과 나 두 사람뿐.
마주 선 듀란과 나는 날선 눈빛을 교환하며 투지를 끌어 올렸다.
“준비됐습니까?”
상태를 묻는 한스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듀란도 마찬가지.
한스의 말에 응답한 녀석은 짙푸른 오러를 끄집어내 전신에 휘감았다.
7성급.
최소한 중반 이상.
나는 마주한 또 하나의 벽을 넘기 위해 해머를 그러쥔 손에 힘을 더했다.
내 목숨 99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