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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숨 99개-110화 (110/203)

110화

떠오른 해가 한낮으로 향할 때쯤, 여장을 챙긴 안전 가옥의 식구들은 말 위에 올라타 고삐를 잡아당겼다.

우리의 목적지는 카슈타르.

“드디어 가는군요.”

기대에 들뜬 베르의 말을 시작으로 평민 고아의 인생 역전은 그 서막을 활짝 열었다.

“자작이라니… 이제 후배님하곤 말도 못 섞는 거 아닙니까?”

베르의 너스레처럼 나는 지금 아리안 건국 기념일에 맞춰 왕도로 향하는 중이다.

하나 낯선 곳을 굳이 우리끼리 갈 필요는 없지 않겠나.

가는 길에 카슈타르에 들러 제논 백작과 함께 왕도로 향하기로 했다.

작위 수여식은 나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에르텔에 대한 공로를 크게 인정받아 카슈타르 가문은 큰 경사를 맞이했다.

제논 백작은 후작으로 승급되고, 이 자리에서 왕은 로제의 가문 승계를 인정할 예정이라고 했다.

좋은 일 옆에 또 좋은 일이 생긴 것이다.

“그러면 뭐 해요. 정작 고국에서는 여전히 평민인데.”

베르의 너스레에 나는 푸념하듯 대답했다.

“아이고, 평민이라고 다 같은 평민입니까. 급이 다르죠, 급이.”

“하긴 지금도 차이는 많이 나.”

“뭐가?”

“너하고 이반 님. 얼굴도 그렇고, 몸도 그렇고, 평민이라고 다 같은 평민은 아니더라고.”

투덜대는 베르의 말에 에스카는 잔인하게 확인 사살을 했다.

“허…….”

“확실히 급이 다르지.”

그것도 두 번이나.

너는 다를 것 같냐는 베르의 말을 에스카는 귓등으로 날렸다.

아웅다웅하는 두 사람을 보고 있자니 문득 세비앙에 있는 노인네가 떠올랐다.

데릭이 이 사실을 알면 뭐라고 할까.

잘됐다고 막 감동하려나?

아니다.

촌놈이 출세했다고 툴툴거릴 게 빤하다.

생전 칭찬 한마디해 본 적 없고, 남 좋은 일에 축하 한마디 해 본 적 없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그런 데릭의 모습을 보고 싶은 건 어쩔 수 없는 정인가 보다.

‘들려야겠네.’

아케른에 가려면 어차피 지나쳐야 하니 그 참에 들려 안부도 확인해야겠다.

엘리스와 바란같은 꼬맹이들도.

괜스레 분위기를 잡던 나는 카슈타르 성을 향해 잔잔한 여정을 계속했다.

* * *

“어서 오십시오, 빅터 공. 위명이 자자하신 분을 이렇게 뵙게 되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참으로 반갑습니다.”

내성 입구까지 나온 제논 백작은 빅터를 보며 성대한 환영 인사를 전했다.

우리의 방문이 어지간히 좋았나 보다.

접견실이 아닌 입구에서 맞이하는 걸 보면 말이다.

“못난 제자 놈이 심려를 많이 끼쳤다고 들었습니다. 한데 귀히 여겨 이리도 반가이 맞아 주시니 노구는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어쨌거나 빅터는 제논 백작을 향해 예를 갖춰 화답했다.

“못난 제자라니요. 덕분에 카슈타르와 아리안 왕국은 큰 은혜를 입게 됐습니다. 그게 다 위대한 스승인 빅터 공의 은덕이 아니겠습니까.”

“허허… 과찬이십니다. 제 앞가림도 못 하는 녀석이 행여 누가 될까 걱정했는데, 어쩌다 보니 이런 덕을 쌓게 되었습니다. 이게 다 평소 제논 공께서 이루신 선행의 결과일 것입니다.”

인사만 하다 밤샐 생각인가.

마치 누가 더 길게 인사할 수 있는지 내기라도 하는 것 같다.

“저럴 때보면 완전 다른 사람 같네요.”

“흐흐흐, 그런 면이 좀 있죠. 왕궁에 가시게 되면 계속 보게 될 거예요.”

낯선 빅터의 모습에 베르와 나는 숙덕거리며 힐끔거렸다.

저 가식적인 말과 행동이라니.

망나니처럼 칼춤을 추던 모습을 내가 다 알고 있는데!

하여간 가면을 쓴 빅터를 지나 다음 환영 인사는 나에게로 이어졌다.

“잘 지냈는가. 자네의 모습은 늘 봐도 기분이 좋군.”

딱 봐도 그렇게 보였다.

입꼬리가 귀에 걸쳐 있으니까.

인사를 전하는 제논 백작은 세상 반가운 얼굴로 나의 손을 붙잡았다.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하지만 나는 이 정도까지만 반응했다.

그 이상은…….

나는 빅터처럼 얼굴이 두껍지 못하기 때문이다.

저렇게 길게 인사를 할 수 있다는 게 그저 신기할 뿐.

“어서 오세요, 이반 님.”

화사한 미소와 함께 등장한 로제는 길고 긴 인사의 끝을 알려 왔다.

점심 식사를 마친 우리는 차를 마시며 담소를 계속했다.

주된 내용이라면 역시나 노이의 영지에 있던 동굴.

작위 수여식에 대한 얘기는 식사를 하며 적당히 주고받았고, 지금은 무거운 주제를 가지고 진중하게 의견을 나누고 있는 중이었다.

“아직 목책은 그대로 있다는 거네요?”

“그렇더군. 하지만 입구를 지키던 경비대는 자취를 감췄네.”

그사이 노이의 땅에 변화가 일어난 모양이었다.

“안에는 들어가 보셨나요?”

“마찰을 각오하고 잠입을 보냈네만 특별한 건 발견하지 못했네. 연구실이라고 했던 동굴도 텅 비었다더군.”

그냥 변화가 아니라 놈들은 아예 철수한 것 같았다.

하기야 그렇게 들통나 버렸으니 계속 있는 것도 이상하지.

‘괜히 건드린 건가…….’

어설프게 손대서 꼬리만 잘린 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강화 인간의 정체를 알게 되었으니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닐 것이다.

그들을 만드는 사라센 흑마탑과 구매하려는 마론 후작까지 확인했으니까.

“마론 후작은 반크스 경이 계속 감시를 붙이기로 했다네.”

이렇게 피아 구분이 되는 것만으로도 뒤통수 맞을 일은 크게 줄어들 것이다.

자고로 등 뒤의 적이 가장 무서운 법.

“왕도 안에서는 외삼촌의 손을 벗어날 수 없죠. 증거가 나올 때까지 철저하게 파헤치실 생각인가 봐요.”

로제는 반크스의 상황을 전하며 시간을 확인했다.

“아쉽지만 담소는 다음으로 미뤄야 할 것 같네요. 이제 슬슬 출발해야 할 것 같거든요.”

그러고는 왕궁을 향할 때가 왔음을 모두에게 전했다.

* * *

순조롭다는 말이 있다.

익숙한 말이라서 자주 사용하는 것 같지만, 생각해 보면 그리 많이 쓰이는 표현은 아니었다.

그래서 지금 써 보려고 한다.

우리의 여정은…….

매우 순조롭다.

“여기는 늘 한결같네요.”

풍경을 살피는 로제의 말에 나도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리안 특유의 정서라는 건가.

이동하는 길들의 대부분이 이렇게 평화롭고 느긋했던 것 같다.

도로 정비도 잘돼 있고, 풍경도 좋다.

빙빙 돌아가는 길은 물론이요, 그 흔한 오르막과 내리막도 없는 평탄하고 순조로운 길이었다.

특히나 지금 지나는 공도는 왕도로 이어지는 길답게 널찍하고 깔끔한데다가 심지어 지금은 포장도로가 보이기 시작했으니.

“여기서부터가 벨마레에요.”

해질 무렵에 도착한 왕도는 아름다운 건축물들로 나의 눈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아…….”

이렇게 돌아다닐 때마다 느끼지만, 참 좁은 세상에 갇혀 살았던 것 같다.

28년을 살아왔던 세비앙 영지는… 알고 보니 가장 좁고 낙후된 전형적인 시골 영지였다.

‘그때는 내성 구경만 해도 좋았는데.’

지금이라면 코웃음을 치며 돌아 나올 만큼 세상은 넓고 멋진 곳으로 가득했다.

하기야.

나부터가 이미 크게 변했으니까.

누더기 같던 단벌 작업복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여기에서 하룻밤 자고 내일 왕궁에 입장할 겁니다.”

로제가 안내한 곳은 반크스가 기거하는 저택이었다.

빅터와 반크스가 만나면 어떤 그림이 펼쳐질까 궁금했는데.

“외삼촌은 오늘 못 들어오신대요. 내일 기념일 행사 때문에 왕궁에 일이 많은가 봐요.”

아쉽게도 그 장면은 내일로 미뤄야 할 것 같았다.

그 대신 우리는 이른 시간에 침대에 들어 여독이 쌓인 몸에 휴식을 선사했다.

다음 날 아침.

멀쩡했던 나의 심장이 눈을 뜨자마자 두근대기 시작했다.

이제 와서야 실감하는 건가.

어젯밤에 들었던 봉신의 절차는 어디로 사라진 건지, 선언 내용과 문답에 대한 모든 말들이 머릿속에서 거짓말처럼 지워져 버렸다.

‘돌대가린가.’

백지가 돼 버린 나의 머리는 들어오는 모든 정보를 지워 내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열심히 설명하는 로제의 말은 한쪽 귀로 들어와 다른 쪽 귀로 자연스럽게 사라지고 있었다.

‘망했네…….

어쩌면 오늘, 국경을 초월한 희대의 멍청이가 자작이란 호칭을 달고 탄생할지도 모르겠다.

아니, 벌써 태어난 것 같다.

심지어 지금 나는 포크를 들고 수프를 떠먹는 엽기적인 짓을 하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이반 님… 수프가 줄줄 새고 있는데요?”

걱정스런 로제의 말도 메아리처럼 귓가에서 흩어졌다.

어디로 삼켰는지도 모르게 식사는 끝이 났고, 나는 입성을 위해 예복으로 환복했다.

“아… 이건…….”

가장 먼저 들려온 소리는 로제의 탄성이었다.

그 다음은 베르와 에스카.

“와, 후배님은 지금까지 옷을 거지같이 입고 있던 거군요…….”

“태생이 귀족이었나…….”

두 사람은 모습을 드러낸 나를 향해 낯 뜨거운 감탄을 연발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나를 향한 지나친 관심은 제논 백작도 마찬가지였다.

“허, 역시 우리 사위답구만.”

“저 녀석이 허우대가 멀쩡하긴 하지요. 한데 지금 사위라고…….”

“제가요? 저는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만.”

제논 백작은 마음의 소리를 꺼내는 습관이 유전임을 빅터 앞에서 증명하고 있었다.

‘후…….’

이제 와서 피할 수도 없는 일.

험난한 신분 상승의 길을 향해 나는 정신을 다잡으며 크게 한 걸음을 내딛었다.

“후배님.”

“네?”

“지금 같은 손발을 내밀며 걷고 있거든요…….”

젠장.

나의 어깨를 두드린 베르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고개를 저었다.

* * *

빰빠라밤― 빠바바 빰빠라밤―

태어나서 처음 듣는 팡파르는 가슴을 파고들어 심장을 죄였다.

보통 작위 수여나 기사 서임은 접견실에서 한다는데…….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지금 우리는 왕궁 안에서도 가장 큰 홀에 들어와 나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침착하자.’

같은 소리만 수백 번을 되뇌이며, 앞서 진행되는 제논 백작의 수여식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나 제논 데 카슈타르는 위대한 아리안의 주인이신 발롱 데 마리아누께 봉신을 서약합니다.”

서약을 마친 제논 백작은 국왕이 내민 검에 입맞춤을 했다.

이후 봉토를 상징하는 한 줌의 흙이 하사되었고, 국왕의 선언과 함께 제논 백작은 후작으로 승급되었다.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성에 다음 차례인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브라함의 아들이자 빅터 크로제의 후견을 얻은 이반은 앞으로 나오라.”

“…….”

생각보다 긴 호명을 들으며 국왕 앞으로 나가 무릎을 꿇었다.

“위대한 아리안의 주인인 나 발롱 데 마리아누는 그대의 업적에 보답하고자 작위를 수여하노라. 아리안 왕가에 충성을 맹세하고 봉신의 예를 취할 것을 서약하는가.”

꿈결 같은 소리였다.

밤새 외워 놓고도 눈뜨자마자 잊어버렸던 바로 그 절차들.

저 길고 장황한 물음에 대답하면 평민의 신분을 벗어나 귀족의 신분으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비록 이반이라는 나 자신은 달라지지 않겠지만.

“브라함의 아들인 나 이반은 위대한 아리안의 주인이신 발롱 데 마리아누께 봉신을 서약합니다.”

나는 기적처럼 떠오른 서약문을 말하며 긴 여정의 끝을 향해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딛었다.

절차는 순조롭게 진행되어 마지막을 앞두고 있었다.

보석으로 세공된 은빛 검이 나의 얼굴 앞으로 다가왔고.

“…….”

나는 가벼운 입맞춤으로 서약을 완성했다.

천천히 되돌아가는 은빛 검.

“위대한 아리안의 주인인 나 발롱 데 마리아누는 그대의 서약을 받아 봉신의 서를 수여하노라.”

고아로 시작된 나의 삶은 연회장을 가득 채운 함성과 함께 눈부시게 날아올랐다.

내 목숨 99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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