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그렇게 불매를 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게 뭐요?”
역시 용병들의 반응은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차피 상인들의 기 싸움이니 불편을 감수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단편적으로 보자면 틀릴 것 없는 말이었다.
누구를 돕건 전리품은 알아서 잘 팔리고, 사야할 물건은 때 되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굳이 왜?
단골 가게를 바꿔 가며 상인들을 도와야 한단 말인가.
“그래야 우리의 이익을 지킬 수 있습니다.”
한스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이보다 정확하고 절실한 이유는 없으니까.
용병 조합과 상인들 간의 직거래를 위해선 이 싸움을 이겨야 했다.
여기서 밀리면 모든 게 원점으로 돌아간다.
게브네의 단체장 등극도 실패하게 될 것이고, 그것은 불합리한 악습의 반복으로 이어질 것이다.
“연금 조합장의 세력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저희들의 이권마저도 빼앗으려 하고 있죠.”
신임 조합장 한스는 용병들을 바라보며 또박또박 상황을 설명했다.
“흐음, 몹쓸 놈들이네. 어디 넘볼 게 없어서 목숨값을 넘봐?!”
“하지만 10년을 넘게 거래하던 상점인데… 거기 주인하곤 형 동생으로 지낸다고.”
“내 장비도 5년 넘게 한집에 맡긴 거라 다른 집은 좀…….”
“그까짓 게 대순가? 당장 한 푼이라도 더 챙기는 게 중요하지.”
“그렇지. 언제 뒈지고 다칠지 모르는데 돈이라도 모아야 편하게 은퇴하지 않겠어?”
사람들은 저마다의 생각을 드러내며 웅성거렸다.
모두가 맞는 말이었다.
돈도 중요하고, 오랜 세월 이어진 인연과 믿음도 중요하다.
그래서 정답은 없다.
상황을 악용하는 비열한 놈들이 있을 뿐.
어쩔 수 없는 싸움이지만, 결국 모두에게 상처가 되는 자학이다.
그러니 최대한 빠르게, 이 멍청한 싸움이 길어지지 않도록 단시간에 끝을 봐야 했다.
‘이럴 때 이반 님이 있었으면.’
용병왕의 입김이란 무시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그 남자는 용병을 생업으로 삼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상황이 생겨서 참여했을 뿐.
한스가 바라보는 이반은 우리와 같은 세상을 공유하지 않았다.
그는 더 큰 세상을 무대로 움직였고, 작은 이익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가 향하는 세상이 어딘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용병으로 살 사람이 아니라는 건 이제 확실하게 깨달은 한스였다.
하지만 대안은 있었다.
비록 의뢰 랭킹에서는 밀렸지만,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실력자가 이 안에 있었으니까.
그의 이름은 듀란.
상징적인 이반의 존재완 달리 듀란은 용병들 사이에 녹아든 실질적인 최강자였다.
방패를 이용한 절묘한 방어와 역공이 일품인 남자.
통곡의 벽이라 불리는 이 남자는 어수선한 현 상황을 제압할 가장 확실한 카드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듀란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지켜보기만 할뿐.
조합장이 바뀌던 순간을 떠올리며 듀란은 한스의 눈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당신들 여우같았어.’
이반이라는 남자와 한스.
거기에 조합장까지 합류한 세 사람의 연극은 혼란스럽던 상황을 이용해 자신들의 계획을 완벽하게 이루어 냈다.
그래서 아무 말 안 했다.
내세웠던 공약도 좋았고, 계략도 마음에 들었다.
할 마음 없는 인간보단 백배는 나을 테니까.
다만 걸렸던 건, 의뢰 실패로 인해 저평가된 자신이 영 불편하고 찝찝했다.
사실 듀란의 원정대는 본업에 충실하지 않은 조합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다.
부실한 정보에 의한 인명 사고.
하지만 듀란은 조합을 원망하지 않았다.
용병이란 그런 것이니까.
그는 비방이 아닌 자책을 선택했다.
― 이제 용병왕이 바뀌는 건가?!
하지만 이 말을 듣는 순간…….
억울하다는 생각이 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정보의 괴리가 심했던 자신과 달리 이반은 후발 주자였다.
정보의 상황은 많이 바뀌었고, 게다가 그는 알브족이 싸우던 상태에서 전투를 치렀다.
결과적으로 토벌에 성공한 것은 맞지만, 공정한 평가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제대로 붙고 싶었다.
진정한 용병왕의 자리를 놓고 말이다.
하지만 이반은 이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생활 방식이 아예 다르다고 해야 하나.
수소문으로 알아낸 그의 행적은 용병인 듀란과는 여러모로 상반된 모습이었다.
쉽게 말해 마주칠 수가 없던 것이다.
그러던 사이 오늘에 이르렀고, 조합장은 용병의 단합을 주장하고 있었다.
하여 듀란은 제의했다.
“이반에게 내 뜻을 전해 주시죠.”
나와 싸우자고.
결투의 대가는 승패와 상관없이 조합에 협조하겠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이반이 제안을 거부한다면…….
“저와 제 친구들은 끝까지 조합에 반대할 겁니다.”
네놈들이 판을 키웠으니 책임도 확실하게 지라는 얘기였다.
그에 한스는 제안을 수락했고.
“그래? 원한다면 해 줘야지.”
소식을 접한 이반은 입꼬리를 올리며 결투를 승낙했다.
* * *
듀란과의 대결은 아리안을 다녀온 뒤로 결정됐다.
나의 일정도 그렇지만, 어차피 듀란의 원정도과도 겹쳐 그날로 합의됐다.
‘기대되네.’
카리프 이후로 처음인 7성급과의 대결이다.
듀란의 수준은 어느 정도일까.
꽤 오래전에 7성에 올랐다고 하니 초입의 수준은 넘어섰으리라 예상된다.
그러니 나의 상태를 확인해 보기엔 최적의 상대라 할 수 있었다.
몬스터와 인간은 확실히 다른 느낌이니까.
말이 나온 김에 나는 거실에 앉아 있는 빅터에게 다가갔다.
“바쁘신가요?”
“그래.”
“아닌 것 같은데요.”
“생각하느라 바쁘다. 한데 왜 귀찮게 물어보는 게냐.”
생각은 무슨…….
방금 드르렁 소리 들었는데.
자기 코 고는 소리에 눈 떠 놓고는 생각 중이라고 말하고 있다.
“대련이나 한판하시죠.”
하여 나는 거짓말하지 말고 제자의 수련이나 도우라고 했다.
물론 마음의 소리였다.
“네놈하고?”
“네, 잠도 깰 겸.”
“좋지.”
낮잠 중이었다는 걸 인정한 빅터는 자리에서 일어나 목을 비틀었다.
우드득―
무슨 몸을 저따위로 푸는 건지.
저승구경 못 해 안달 난 사람처럼 빅터는 요란하게 고개를 꺾어 댔다.
‘어떻게 살아 있지?’
저러고도 멀쩡한 거 보면 확실히 불사에 가까운 몸이다.
어쩌면 인간으로 변신한 늙은 요괴일지도.
“내려가자.”
요란하게 준비를 마친 빅터는 검을 챙겨 뒷마당으로 향했다.
“7성 초입은 된다고 했느냐.”
“그럴 걸요.”
확실하게 검증된 건 아니니까.
카리프와 싸운 경험으로 추측했을 뿐 확정은 아니라 할 수 있었다.
“해 보면 알겠지.”
무심히 답한 빅터는 오러를 뽑아 검 끝에 휘감았다.
시리게 올라오는 푸른 검기.
“뭐 하세요?”
“뭘 말하는 게냐.”
“오러요. 그것 가지곤 안 돼요. 더 올려 주세요.”
나는 7성에 이른 빅터의 오러를 더욱 높여 달라 부탁했다.
“호… 그렇단 말이지?”
그에 빅터는 눈을 빛내며 오러를 끌어 올렸다.
아씨, 너무 많이 올라갔다.
검을 둘러싸던 푸른 기운은 이제 짙은 바다처럼 새파랗게 변했다.
저기서 한 단계 더 끌어 올리면 백색에 가깝게 변하고, 그것을 일컬어 8성이라고 한다.
그 말인 즉.
나는 지금 완숙한 7성을 마주하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망할 영감탱, 왜 중간이 없냐고…….’
사악하게 웃는 빅터를 보며 나는 그러쥔 해머에 힘을 실었다.
어차피 넘어야 할 산.
기왕 하는 연습이라면 피 터지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갑니다.”
시작을 알린 나는 날듯이 거리를 좁혔다.
목표는 중앙으로 올라오는 빅터의 검.
달리는 관성을 이용한 나는 첫 공격으로 빅터의 방어를 이끌었다.
쾅―
역시 단단하다.
가차 없이 휘둘렀건만 빅터의 검은 흔들림 없이 나의 해머를 받아 냈다.
하지만 상관없다.
나보다 셀 거라는 건 이미 각오했던 결과니까.
그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할 뿐.
부아악― 쾅!
이어진 공격으로 빅터의 검을 다시 한번 흔들었다.
그리고 또 한번.
이어서 또다시 한번.
가속이 붙은 나의 해머는 빅터의 이곳저곳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제법이구나.”
빅터는 눈썹을 움찔거리며 소감을 말했다.
저 백발의 괴물이 반응을 시작했으니 일단 만족할 만하다.
하지만…….
“아직 멀었어요.”
나의 공격은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
콰앙― 쾅! 쾅! 쾅!
단타에 집중하는 것이 아닌 연속기.
여유 있는 저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게 오늘 나의 목표라 할 수 있었다.
하나 이 정도는 가볍게 막아 낼 터.
“이번 공격은 좋았다.”
빅터는 내려치기를 빗겨 내며 나의 연속기를 칭찬했다.
하지만 그것은 허수일 뿐.
해머를 내리친 나는 그대로 몸을 회전시켜 뒷발을 내질렀다.
“허허…….”
얼굴을 스쳐 간 발차기에 빅터의 눈썹이 크게 올라갔다.
예상치 못한 공격일 테니까.
해머만 휘두르던 나의 공격은 이제 상황에 따라 온몸을 사용하는 그럴듯한 형태로 진화하고 있었다.
하나 이 역시 빅터의 허점을 만들기 위한 새로운 미끼일 뿐.
내지른 발로 땅을 차며 물러선 빅터를 따라 그대로 뛰어올랐다.
그렇게 거리는 한순간에 좁혀졌고.
콰아아앙―
나의 전부를 실은 공격이 빅터의 검을 내리쳤다.
“훌륭하구나!”
빅터는 상기된 표정을 지으며 고함치듯 소리를 질러 댔다.
“네놈 도대체 뭘 하고 다닌 것이냐?!”
빅터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달라진 나의 모습에 감탄을 보내고 있었다.
‘됐어!’
그간의 수련이 헛되지 않았음에 나는 밀려드는 쾌감을 느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하나 늘 그랬듯, 세상은 내 맘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흥이 오르는구나. 제대로 한판 붙어 보자!”
이렇게 말이다.
눈이 돌기 시작한 빅터는 오러를 뽑아내기 시작했다.
“아니, 그건 좀…….”
“…….”
“저기요.”
“…….”
“그만하시죠.”
“…….”
“아이, 8성은 아니잖아요!”
망나니처럼 날뛰던 빅터는 백광을 뿜어내며 칼춤을 추기 시작했다.
* * *
작위 수여식까진 아직 날짜의 여유가 있었다.
덕분에 한가한 시간은 크게 늘어났고, 나는 기본기 수련을 위해 모든 걸 쏟아붓고 있었다.
“그 엄청난 걸 잘도 휘두르네요.”
며칠째 이어지는 해머질을 보며 스노우는 고개를 저었다.
이제 좀 친해진 걸까.
녀석은 나의 수련을 따라다니며 감탄과 푸념을 내뱉곤 했다.
“넌 뭐 안 해?”
“저는 할 줄 아는 게 없잖아요.”
심심해하는 스노우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아니면 베르한테 마법을 좀 배워 봐. 생긴 건 저래도 굉장히 똑똑해서 잘 가르친다고.”
같은 마력을 다루는 사람이니 마법을 못 쓰는 스노우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스노우는 뽀송한 뺨을 만지다 빈 물병을 집어 들었다.
“크리에이티브 워터!”
그러고는 주문을 외우며 마법을 시전했다.
쪼르르르…….
물 떨어지는 소리였다.
마법을 시전한 녀석의 손끝에서 투명한 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어? 마법 할 줄 모른다며?”
“이것만 할 줄 알아요. 진짜 마법 같은 건 못해요.”
녀석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마법은 물을 만드는 마법이었다.
“완전 생활형 마법이네.”
“유용하죠.”
스노우가 건넨 물을 마신 뒤 손등으로 입을 닦았다.
“근데 왜 이렇게 맛있는 거지?”
그저 흔한 물인데 말이다.
이상하게 시원하고 달콤한 맛이 올라왔다.
심지어 톡 쏘는 느낌까지.
“훗… 위대한 마법의 힘이라고 해 두죠.”
스노우는 얄팍하게 우쭐거리며 배시시 웃어 보였다.
위대한 건진 모르겠지만, 틀린 말은 아니니까.
어쨌거나 스노우는 물 만드는 마법에 능통한 주방 전용 마법사였다.
공격과 방어 마법은 하나도 할 줄 모르는…….
“한잔 더 드실래요?”
“응.”
“크리에이티브 워터!”
요란하게 주문을 외운 스노우는 텅 빈 물병을 향해 뽀얀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내 목숨 99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