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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숨 99개-108화 (108/203)

108화

“반투족의 길을 막은 죄, 죽음으로 갚아야 할 것이다!”

“에이… 진짜요?”

“진짜라니까요? 이 가죽 팬티도 입고 계셨어요.”

“말도 안 돼. 스승님께서…….”

리베에 도착한 나는 제일 먼저 빅터의 활약상을 보고했다.

어찌나 잘 어울리던지.

순간 나는 빅터를 바라보며 족장님이라고 소리칠 뻔했다.

“아, 진짜 그 장면을 보셨어야 했는데. 검을 뽑아 들면서 똭…….”

“…….”

하지만 나는 그쯤에서 재현을 멈췄다.

빅터의 손에서 오러가 올라오는 걸 봤으니까.

“자, 이제 회의를 해 보십시다.”

나는 빠르게 태세를 전환하며 빅터의 오러를 무시했다.

“…….”

이렇게 노려보고.

“…….”

저렇게 째려봐도.

“역시 머리 쓰는 건 어렵군요.”

나는 태연하게 거실을 나와 1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럴 때 중요한 건 뻔뻔함이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나는 당신이 왜 오러를 뿜어내는지 도무지 모르겠으며, 볼일이 있으니 이만 나가 보겠다는 느낌으로 당당히 걸어야 한다.

“스승님!”

하나 기겁하는 베르의 외침이 등 뒤로 들려왔고.

‘젠장!’

나는 후다닥 내달려 1층으로 몸을 피했다.

그러고는 뒷마당으로 나가 홀로 서성이는 소녀의 곁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안녕.”

“…안녕하세요.”

그나마 다행인가.

분위기는 와락 울어 버릴 것 같은데, 그래도 꼬박꼬박 대답은 해 준다.

정작 필요할 땐 입을 닫아서 그렇지.

이틀 밤을 함께 지냈는데도 아직까지 녀석의 이름을 모르고 있다.

사실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너무 삭막한 게 아닌가 싶어 또다시 물어보았다.

“그런데 널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모르겠네. ‘야’라고 할 수도 없고, ‘꼬마야’하는 것도 그렇고…….”

“꼬마라고 하세요.”

“아∼ 이름이 꼬마구나.”

“…….”

하지만 녀석은 철벽이었다.

이름은 당연하고, 나의 농담에도 반응조차 안 했다.

무반응이라니.

애초에 웃는 걸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무슨 죽을 날 앞둔 사람 마냥 허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린 녀석이 말이다.

‘나름의 사정 같은 건가.’

그러니 그냥 내버려 두는 게 가장 좋은 선택이 될 것 같다.

하나 이놈의 오지랖은 계속해서 소녀의 정보를 알고 싶어 했다.

나이라든가.

뭐, 도망친 사연 같은 것들.

‘스스로 얘기하면 좀 좋아.’

여기까지 따라왔으면 말해 줄 법도 한데 말이지.

솔직히 이 꼬마는 너무 과하게 비밀스러웠다.

뭐든 정도를 지나치면 역효과가 나고 그러잖나. 사연 있어 보이던 첫인상도 슬슬 비호감으로 변하려고 했다.

“제 얘기를 듣고 싶은 거죠?”

“…어?”

하지만 소녀는 타이밍 좋게 반응했다.

마치 목마를 때 물 주듯이.

“그 여자는 처음 봤지만, 같은 사람 밑에 있던 건 맞아요.”

소녀는 나에게 그간의 사정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 사람과 함께 있고 싶지 않아서 도망쳤어요.”

역시나 내용은 얼추 비슷한 느낌이었다.

바바라가 했던 말은 사실이었고, 이 소녀의 말도 거짓은 없어보였다.

“혹시…….”

“빚진 거 없어요.”

“그럼…….”

“훔쳐 나온 것도 없고요.”

“그렇구나…….”

“저는 그 사람이 싫은데 그 사람은 제가 필요한 것뿐이에요.”

한번 열린 소녀의 입에선 알아서 척척 대답이 나왔다.

진즉에 이럴 것이지.

“너 말 잘하는구나.”

“…낯가림이 좀 있어서.”

심지어 지금은 옅은 미소까지 보였다.

“이젠 좀 편해졌나 보네.”

“믿을 수 있는 분들인 것 같아서요.”

흠, 빅터 영감 때문에 더 놀랐지 싶은데.

하여간 마음을 열은 것 같아서 내심 기분은 좋아졌다.

당장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인연이지만, 있는 동안 잘 지내다 가면 나도 마음 편하니까.

선한 영향력, 뭐 그런 것 있잖은가.

좋은 사람들과 지내다 보니 새로운 인연에 대해 긍정적인 시선이 생겼다.

“나는 이반이라고 하는데, 너는?”

“저는 스노우예요.”

“이름이 특이하네?”

“겨울을 워낙 좋아해서요.”

나는 대답 대신 조용히 스노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맑고 투명한 피부에 크고 검은 눈동자.

작고 아담한 스노우의 얼굴은 묘하게도 이름과 잘 어울렸다.

표현하자면 귀염상이다.

젖살이 남아 있는 뽀송뽀송한 얼굴은 귀여운 인상을 풍기며 첫인상을 지워 냈다.

이래서 사람은 대화가 중요한 거다.

간단한 말 몇 마디에 이렇게 사람의 느낌이 달라지잖나.

“그런데…….”

“17살이에요.”

“아…….”

게다가 스노우는 독심술 같은 것도 가지고 있었다.

그게 아니고서야 어찌 이리 알아서 대답하겠나.

“독심술은 없어요.”

“허…….”

이래서 안 놔준 건가?

마음을 읽는 재주가 있어서?

“그냥 자주 묻는 질문이라서.”

“…….”

의심스런 구석은 있지만 수상하지는 않았다.

저 얘기가 어떤 느낌인지 잘 알기 때문이다.

― 잘생겼어요!

― 키도 크시고요!

― 애인은요?

― 술 한잔할까요?

― 아, 나 취해써∼

그냥 다 빤한 질문과 대답들.

스노우의 독심술이 일견 이해되는 까닭이었다.

하지만 이것만은 여전히 의문스러웠다.

무희가 정말 직업이었을까.

내가 알고 있는 무희의 개념과 스노우의 모습은 무엇 하나 일치하는 부분이 없었다.

“그런데 바빌리안에서는 뭘 하고 지냈니?”

“접시 닦았어요.”

돌아온 대답은 허드렛일이었다.

그럼 그렇지.

묘한 안도감을 느끼며 나 혼자 고개를 끄덕거렸다.

스노우에게서 풍기는 순수한 느낌을 나름 지키고 싶었던 모양이다.

“본래 직업은 마법사예요.”

하지만 스노우의 본모습은 엉뚱하게도 마법사였다.

“그런데 마법을 못 써서…….”

“어?”

심지어 이어진 스노우의 고백은 쓸 줄 아는 마법이 없다는 말이었다.

* * *

“오, 어서 오게. 안 그래도 연락을 넣으려던 참이었는데 잘 왔네. 바쁘지 않으면 좀 기다려 주게나.”

대장간을 찾아온 나를 보며 게브네는 크게 반색했다.

모습을 보아 하니 왠지 좋은 일이 있을 것 같다.

그런 느낌 있잖나.

기다렸던 뭔가가 팍! 하고 터져 주는 느낌.

‘후후… 드디어 리베의 실세가 되는 건가?’

나는 현실과 기대를 넘나들며 다가올 장밋빛 미래를 아름답게 그려 보았다.

하나 늘 그랬듯 그런 나의 상상은 오래가지 못했다.

“안녕하십니까.”

경쾌하게 울리는 인삿말에 고개를 들었고.

“엇, 여기 계셨네요.”

익숙한 얼굴을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페드로였다.

또한 녀석의 뒤에는 어딘가에서 마주쳤던 사람들이 줄을 지어 들어오고 있었다.

맨 앞에 오는 사람은 가죽 공방의 주인이었고, 그 뒤로는 의상점의 주인이었다.

간간이 들리던 식당 주인까지.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낸 건 페드로의 누나인 샤샤와 용병 조합장 한스였다.

“오늘 무슨 날인가요?”

대장간을 꽉 채운 사람들을 보며 나는 게브네에게 사정을 물었다.

“이분들 모두 게브네 아저씨를 지지하시는 분들이에요.”

그에 페드로는 게브네를 대신해 사람들을 소개했다.

이 많은 사람들이라니.

‘열심히 했나 보네.’

모여든 사람들의 숫자는 서른 명은 족히 넘어 보였다.

어쩌면 그 이상이 될 것 같기도 하고.

“일단 상점을 비울 수 없는 분들은 못 오셨어요. 그리고 예상하셨듯이 재료 상인들은 아무도 안 오셨습니다.”

하여간 페드로는 모여든 사람들을 둘러보며 게브네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고생했네.”

게브네는 감사를 전하며 앞으로 나섰다.

그 자리에 서서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오늘부로 연금 조합장과의 지지도가 동률이 됐습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로 회합의 시작을 알렸다.

게브네가 알려 온 상황은 이랬다.

조합원들의 지지는 절반으로 갈라진 상태.

여전히 재료 상인은 상대 측에 붙어 있었고, 재료 상인과의 싸움을 포기한 제조업자들은 그들과 함께 연금 조합장을 지지했다.

문제는 두 가지였다.

재료 상인들이 결국 소모전을 선택했다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균형을 깨 줄 사람들이 용병이라는 것이었다.

“재료 상인은 어쩔 수 없나 보네요.”

“워낙 오래 결탁해 와서 그렇지. 사실 큰 기대는 없었네.”

푸념 섞인 나의 말에 게브네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한 놈만 마음을 바꿔도 손쉽게 해결될 텐데.”

무너지지 않는 그들의 담합에 감탄과 씁쓸함이 동시에 몰려왔다.

하지만 나는 더 큰 감탄을 준비해야 했다.

“그래서 아예 재료상을 하기로 했네.”

“누가요?”

게브네의 시선이 대장간 입구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엔 손을 모으고 서 있는 샤샤의 모습이 있었다.

“샤샤가요?”

“그렇다네. 샤샤가 원산지를 담당하고, 우리가 출자해 자금을 지원하기로 했네.”

결국 샤샤 남매는 결심을 한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연금 조합장과 재료 상인들로 인해 남매는 가게를 빼앗길 위기에 처하기도 했었다.

하나 이렇게 된다면 오히려 기회는 남매에게 찾아올 터.

“이미 원산지 주인들과 계약도 끝냈어요. 기존 재료상에 불만을 품은 분들이 많아서 진행은 수월하게 됐네요.”

그간의 진척 사항을 알리며 샤샤는 밝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대단한데?”

나는 그녀의 용기 있는 도전에 박수를 보내고, 힘을 모아 기회를 잡은 상인들에게 감탄을 보냈다.

이거다.

약자였던 이들이 강자인 그들을 잡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

강했지만 심하게 곪아 있던 부분을 샤샤와 상인들이 멋지게 후벼 팠다.

이제 남은 문제는 용병인데.

“용병들을 선동해서 불매를 한다고요?”

나쁘지 않은 방법이었다.

용병에게 의지하는 상점은 제법 될 테니까.

특히 무구점과 시약점은 거의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관건은 어떻게 선동할 것인가.

“저보고 해 달라는 거죠?”

나는 게브네를 보며 의중을 물어봤다.

하지만 돌아온 목소리의 주인은 한스였고.

“듀란을 꺾어 주세요.”

녀석은 나에게 과거의 용병왕을 이겨 달라 부탁했다.

* * *

리베에 도착한 살로메는 상점가로 향했다.

도시의 상점가는 한정돼 있고, 그 남자 같은 외모라면 기억하는 사람도 많을 터였다.

“사람을 찾고 있는데요.”

살로메는 남자의 모습을 떠올리며 인상착의를 설명했다.

한데 그 과정이 너무 웃기게 느껴졌다.

설명하는 말이 죄다 똑같았으니까.

“잘생겼어요. 아주 많이.”

결국 모든 설명은 잘생기고 매력적이란 말로 이어졌다.

거기에 신장이 크다는 말도 섞어 주고.

아, 체격도 좋다고 말했다.

말하고 나서 보니, 이게 사람을 찾는 건지 이상형을 설명하는 건지 당최 구분이 가질 않았다.

그래서 피식 웃었다.

추적이 재미있게 느껴지는 건 정말 오래간만이란 생각도 들었다.

이래서야 본래 목표조차도 헷갈릴 상황.

“찾으면 진하게 입을 맞춰 줄게.”

살로메는 죽음의 키스를 예고하며 느긋하게 상점가를 거닐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 그 남자 알지요. 리베에 있는 여자들은 모두가 다 알 걸요?”

붙잡고 물어보는 여자들은 열이면 열 모두가 그 남자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심지어 어느 여인은 자기도 보고 싶다며 어디 사는지 알려 달라고 했다.

‘바람둥이?’

한데 그것도 아니었다.

“하이고, 연애는 무슨 연애요. 눈길도 안 주는데.”

남자를 말하는 여인들은 하나같이 무시당한 얘기만 늘어놓았다.

그래서 더 궁금했다.

그 잘난 외모를 써먹지 않는 남자라니…….

얼굴값 안 하는 사람이 있었나?

살로메의 기억 속엔 이 남자가 처음이었다.

그러고 보니 여러모로 처음인 것이 많다.

‘재미있네.’

역시 찾을 맛이 나는 사람이었다. 또한 찾기도 쉬웠고.

그렇게 한참을 걷던 살로메는 어느 삼층집 앞에 도착했다.

그리고 문을 두드려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이반 님을 만나러 왔는데요.”

어찌나 유명한지 탐문 몇 번 만에 이름부터 알아내 버렸다.

살로메는 느긋한 모습으로 문이 열리길 기다렸다.

철컥―

마침내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누구세요?”

문틈으로 나온 남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살로메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너야말로 누구냐?!’

구겨지는 표정을 감추며 살로메는 침착하게 대응했다.

“저, 이반 님을 만나기로 했거든요. 지금 계신가요?”

얼굴가득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하지만 돌아온 남자의 대답은 살로메의 뒤통수를 때렸다.

“아, 그 잘생긴 남자… 이제 여기 안 살아요. 얼마 전에 사라센으로 이사 갔어요.”

그렇게 답한 남자는 무심히 모습을 감추곤 냉정하게 문을 닫아 버렸다.

“하…….”

살로메는 멍청해진 자신을 탓하며 이마를 문질렀다.

생각해 보니 리베에서 왔다고 했지 리베에 산다고 말하진 않았다.

“왜 이러는 거니, 살로메.”

고개를 저은 살로메는 삼층집을 나와 골목길을 벗어났다.

그런 살로메의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는 한 남자.

― 무심결에 리베에서 왔다고 했거든요. 혹시 찾아오거들랑 사라센으로 이사 갔다고 해 주세요.

“우리 후배님, 많이 똑똑해졌네.”

테라스에 몸을 기댄 베르는 이반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헛웃음을 지었다.

내 목숨 99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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