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이세계인.
쉽게 말하자면 다른 세계의 존재라는 것이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크루시아 대륙은 물론이요, 바다 건너에 있는 판테라 대륙의 사람도 아니다.
그냥 다른 곳에서 왔다는 얘기였는데.
“저런 별에도 사람이 산다고요? 반짝반짝하는 저런 별에?”
“그래.”
“우리 같은 사람이?”
“훨씬 더 많이 산다더구나.”
빅터는 나에게 다른 세상의 존재를 믿으라고 말하고 있었다.
우리가 사는 세상 이외에 다른 세상이 있다니.
― 저 달에는 짝짓기를 좋아하는 야한 드래곤이 살고 있어요.
이런 상상은 코흘리개 시절에나 주고받는 대표적인 망상이 아니던가.
한데 그게 사실이라고?
심지어 빅터는 그들이 우리보다 더욱 인구가 많다고 했다.
이런 황당한 말을 믿어야 하는 건가.
하지만 노망이냐고 되묻기도 그런 것이, 지금의 나 역시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다.
신체 능력은 물론이요.
[시스템 사용자 : 이반.]
[클래스 : 레버넌트.]
이런 특별한 현상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고 있다.
그러니 마냥 얼빠진 소리만 할 수도 없고, 믿을 수 없다며 도리질을 하고 있을 수도 없었다.
“그러면 그레이시 님도.”
“그래, 나 역시 다른 행성에서 소환됐다.”
“설마 스승님은…….”
“나는 아니다.”
다행히 영감은 아니었다.
차라리 빅터가 소환자라면 이해가 빨랐을 것을.
특이한 성격이나 행동으로 봤을 때 오히려 빅터가 소환자에 어울렸다.
하지만 그는 대륙의 사람이었고.
“세비앙에서 싸웠던 카이 형제를 기억하느냐?”
빅터는 나에게 레이와 로우의 싸움을 상기시켰다.
오러를 지워 버렸던 형인 레이와 변신을 하던 로우.
나는 마법의 샘 입구에서 레이에게 죽었었고, 세비앙 풍차 마을에서 놈에게 복수했다.
“아마 그놈들도 소환자였을 게다.”
한데 빅터는 그 녀석들도 이세계인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시는 이유는요?”
“능력 때문이다. 소환된 자들은 저마다 고유의 능력이 있었다.”
당시에 보여 줬던 신기한 능력이 추측의 근거였다.
그 시작은 30년 전.
“인과율의 추가 기운 탓이었지.”
빅터는 지워진 시간의 진실을 꺼내 나에게 들려주었다.
* * *
30년 전 그날.
크루시아 대륙의 모든 국가는 이날을 기점으로 종말을 향해 달려갔다.
“마계의 입구가 열렸습니다!”
설마 했던 일은 현실이 되어 버렸고, 수십 년에 걸친 마물들의 창궐은 마계의 현현이라는 대참사로 이어졌다.
차마 표현할 수 없는 일방적인 학살.
인세에 등장한 마족의 권세는 마주하는 모든 생명을 지우며 대륙의 땅을 피로 물들였다.
인류의 존망이 위태로웠던 그때.
“판테르 대륙에서 12현자가 찾아왔사옵니다!”
빛의 여신 엘라흐를 따르는 사도들이 바다를 건너 브라함에 도착했다.
선왕인 ‘알칸타 폰 케이사르’를 대면한 그들은 인과율의 추에 대해 긴 설명을 이어 갔다.
그것은 빛의 신 엘라흐와 어둠의 신 호세크의 맹약.
인간계와 마계의 균형이 깨질 때, 그것을 중재할 힘으로 인간계는 이세계인의 소환을, 마계는 닫힌 문을 열어 인간 세상에 간섭하기로 했다.
먼저 기울기 시작한 것은 인간계였다.
수백 년간 지속 돼 온 인간계의 발전은 마계에 영향을 미쳐 조금씩 세상을 바꿔왔다.
평범한 동물들이 몬스터로 변하기 시작했고, 그중에 특별한 놈들은 마기를 품은 마수로 변해 갔다.
그것이 신호였다.
마수와 마인들이 창궐하며 인간 세상을 좀먹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둠의 신 호세크는 선을 넘었고, 권속인 마족이 인간계를 침입했다.
인과율의 추는 걷잡을 수 없이 기울었다.
그에 빛의 여신 엘라흐가 맹약을 실행했으니.
“어둠의 권세가 창궐하매 빛이 깃들고, 신의 사명을 이을 자가 세상을 구원하도다.”
마력의 샘에 집결한 12현자는 여신의 권능인 에르텔을 사용해 소환 의식을 행했다.
그 결과로 소환된 이가 최초의 소환자 진.
소환에 성공한 12현자는 소환자를 책임질 1인만을 남긴 채 마력의 샘과 함께 봉인되었다.
맹약의 악용을 막기 위해.
그들은 여신의 뜻에 따라 마력의 샘과 함께 세월 속으로 사라졌다.
한편 소환된 진의 등장으로 전세는 뒤바뀌었다.
침입한 마족은 패퇴하기 시작했고, 피로 물든 대수림은 본래의 자리를 찾아가는 듯했다.
하지만 인간의 왕을 꿈꾸던 자는 여기서 만족하지 못했다.
“전하, 남아 있는 현자를 이용해 추가 소환을 진행하시지요.”
서자인 데드릭의 말에 선왕 알칸타는 노여워했다.
이것은 신의 맹약을 저버리는 금기이자 죄악.
“단 한사람의 무력이 대지를 흔드옵니다. 소환자가 늘어난다면, 제국을 향한 전하의 야망도 결코 꿈으로 끝나지 아니할 것입니다.”
하나 데드릭의 요청은 끊임없이 이어졌고.
“네놈이 책임져야 할 것이다.”
탐욕에 물든 알칸타는 자신을 닮은 서자에게 모든 것을 일임했다.
이후 거듭된 고문과 핍박 끝에 마지막 현자는 의지를 굽혔다.
마력의 샘으로 향한 현자는 의식이 치러진 곳이 아닌, 의식을 돕던 보조 구역으로 사람들을 이끌었다.
그곳에서 현자는 7인의 이세계인을 소환했다.
그에 마계의 문은 더욱 활짝 열렸으니, 이로 인하여 인마대전은 본격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그 후로 1년.
“못다 이룬 전하의 야망은 서자인 제가 이루어 드리겠습니다.”
인마대전에 승리한 서자 데드릭은 선왕을 시해한 뒤 스스로 왕좌에 올랐다.
그렇게 1년의 시간이 또 지나갔고.
“신의 맹약에 따라 소환자를 처단하겠다.”
브라함을 제국으로 만든 데드릭은 충신 빅터를 향해 배신을 지시했다.
* * *
모닥불을 사이에 둔 세 사람은 각기 다른 얼굴로 지금의 심정을 표현했다.
빅터는 덤덤하게.
그레이시는 무겁게.
그들을 지켜보던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인마대전이 확산된 이유가 소환자 때문이란 건가요?”
그리고 빅터는.
“그래. 추가 소환된 사람들로 인해 인과율의 추가 다시 인간계로 기울게 되었지.”
나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다시금 확인시켜주었다.
하지만 이것은 잔혹한 운명을 뜻했다.
어차피 소환자들은 소모품이었다는 것.
“아버지 혼자 있었어도 결과는 같았겠네요.”
인간계와 마계의 균형을 맞추려면 소환된 이들과 마족 모두 남아 있어선 안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소환자들은 여전히 남아 있었고, 마기를 품은 마수들은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인과율의 추가 이미 기울어져 있다는 얘기다.”
“하면…….”
“존재에 따른 무게가 다르니 마수들로 교환되고 있는 것이지. 하지만 존재감이 큰 소환자들이 계속 나타나게 된다면…….”
“…마계가 열리겠군요.”
말끝을 흐리던 빅터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대신했다.
그리고 나의 시선은 빅터의 곁에 있던 그레이시에게로 향했다.
“가진 재주라곤 하찮은 치유뿐인데…….”
여전히 살아 있는 이세계인.
“그래도 소환자라고 영향을 주고 있었나 보네요.”
그레이시는 자조 섞인 말을 내뱉으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분위기는 더욱 무겁게 가라앉았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으나, 결과적으로 그레이시는 세상에서 사라져야 할 존재가 되고 말았다.
“아직 괜찮다.”
이런 빅터의 위로도 의미는 없어 보였다.
돌려 말하면 비중 없는 소환자라는 얘기니까.
마족을 막기 위해 홀로 소환된 아버지와 비교한다면 그 존재감 차이가 어땠는지 여실히 느낄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레이시…….”
“아니에요. 그게 사실이니까요. 카론도 루즈도… 어차피 이 세 명은 혼자선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무슨 소릴 하는 게냐. 너희들 모두가…….”
“마족에게는 의미 없었죠.”
빅터의 말을 막으며 그레이시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
그의 말에 수긍하듯 빅터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불편한 진실이랄까.
그레이시를 비하할 생각은 없었지만, 이제야 나는 확실히 이해할 수 있었다.
소환자가 있음에도 마계가 열리지 않았다는 건, 그들의 비중이 마계의 문을 열만큼 높지 않다는 뜻이었다.
“이 전쟁… 우리가 먼저 시작할 지도 모르겠구나.”
빅터는 바빌리안을 바라보며 굳은 표정을 지었다.
그 말인 즉, 더 이상의 소환 의식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뜻.
“하면 아케른으로 돌아가실 건가요?”
“그래야겠구나. 이참에 너도 함께 돌아가자.”
“아, 저는 바로 못 가요.”
다음 일정을 묻는 나의 말에 빅터는 동행을 제안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왜 그러는 것이냐?”
나에겐 다른 일정이 있었으니까.
“다음 주에 아리안을 가야 해서.”
그 다음은 양피지로 설명을 대신했다.
[작위 수여식 확정.
일시, 건국 기념일 행사 당일.
작위, 단승 자작.
축하드려요, 이반 님♡]
“허허…….”
“제가 좀 바빴습니다.”
헛숨을 내쉬는 빅터에게 나는 겸손하게 대답했다.
위대한 빅터 크로제의 제자이자 아리안의 자작이며, 용병왕의 자격을 갖춘 리베의 숨은 실세가 되는 계획은 아직 미완성이니까.
다가올 데뷔의 날을 위한 나의 준비는 이렇게 하나씩 완성되고 있었다.
* * *
다음 날 아침.
결국 빅터는 나와 함께 움직이기로 했다.
“실력을 뒷받침해 줄 배경이 있다면 더할 나위없지.”
하여 작위 수여 자리에도 참석하기로 했다.
제자가 출세하는 날이 아닌가.
비록 타국의 작위지만, 이것으로 나는 무시할 수 없는 배경을 지니게 되었다.
게다가 이중국적까지.
“너를 활용할 방법이 크게 늘어나겠구나.”
중립국인 아리안의 귀족이 되었으니, 사실상 대륙 어디를 가도 문제될 것이 없었다.
신원 보장은 완벽하게 되었으니까.
“잠입이나 추적은 사절입니다.”
혹시 모를 부탁을 미연에 방지하며 나는 리베를 향해 말을 몰았다.
우리의 여정은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흠, 저 국경을 어떻게 넘어간다…….”
최종 관문인 국경을 앞두고 있었다.
문제는 빅터였다.
애초에 사라센으로 들어올 때부터 불법이었으니 나갈 때도 몰래 가야 하는 것이다.
“너희들 먼저 가거라, 나는 저 산을 넘어…….”
“아니요. 이거만 있으면 됩니다.”
나는 가죽으로 만든 삼각팬티를 빅터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뭐 하자는 게냐?”
“뭐 하긴요. 입는 거죠.”
“미친놈.”
“원래 미친 척하고 입는 옷이에요.”
산으로 가려는 빅터를 붙잡아 계속해서 팬티를 들이밀었다.
“이거만 입으면 무조건 통과됩니다.”
“이게 뭔데 그렇단 게냐?”
“반투족 방어구에요. 그냥 제가 알려드린 대로만 하시면 쉽게 끝나니까. 우리 고생하지 말자고요.”
그렇게 우린 국경 초소로 들어섰다.
선두엔 그레이시가 있었고, 그 다음은 이름 모를 소녀.
뒤를 이어 전통 복장으로 환복한 별과 내가 서 있었다.
나는 정상적인 복장이다.
통행증도 있거니와 내 옷은 빅터에게 넘겼기 때문이다.
일단 그레이시는 무사통과했다.
출입이 까다로운 거지, 출국은 가방 검사 수준으로 가볍게 끝났다.
다음 순서인 소녀도 문제없이 지나갔고, 별의 순서가 왔을 땐 눈도 안 마주치고 통과됐다.
그냥 손들고 휘적거린 느낌?
나 역시 같은 절차로 통과됐다.
통행증을 돌려준 심사관은 빅터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뭐 이렇게 많아…….
대충 이런 분위기였다.
하여간 빅터는 출국 심사관 앞에 다가섰다.
얼굴은 스카프로 적당히 가렸고, 가죽 팬티 한 장만 걸친 채 눈을 부라리며 서 있었다.
“통행증.”
“없다.”
“통행증이 없으면 어떻게 해요. 그거 없으면 못 나가요.”
“허튼소리! 반투족의 길을 막은 죄, 죽음으로 갚아야 할 것이다!”
빅터는 노성을 지르며 검을 뽑아 들었다.
그에 심사관은 한숨을 내쉬었고.
“또 지랄이네…….”
그렇게 빅터는 무사히 초소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내 목숨 99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