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영감님?”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다름 아닌 빅터였다.
이틀간 그토록 찾아 헤맸던 남자.
눈알이 빠지도록 길을 노려보며 찾았던 그 빅터 크로제였다.
“네 녀석이 여기서 뭐하는 게냐?”
“뭐하긴요. 스승님 찾으러 왔죠.”
오랜만에 마주한 나와 빅터는 보자마자 티격태격하기 시작했다.
“아니, 지도는 왜 확인 안 하시는 거예요?”
“그게 무슨 소리냐?”
“비상사태라고 신호를 보냈는데 연락이 없으셔서 찾아온 거잖아요. 스승님 찾는다고 무리해서 베르는 막 쓰러지고…….”
하지만 시끄럽게 떠들던 나는 하던 말을 멈춰야 했다.
그 이유는 뒤에 있던 한 남자.
“네가 진의 아이였구나.”
리베의 쥐구멍에서 만난 정체불명의 치료사 때문이었다.
“…….”
나는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한 채 마른침을 삼켰다.
그토록 기다렸던 순간이었건만, 마주한 나는 벙어리가 되어 입술만 움찔거릴 뿐이었다.
“다행이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그레이시였다.
무엇이 다행이라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네 엄마를 빼닮아서.”
이어진 그의 말은 언젠가 했던 빅터의 말과 똑같은 내용이었다.
도대체 나의 아버지가 어떻게 생겼기에 이러는 건지.
“진이 못생긴 게 아니라, 미리암이 너무 아름다웠지.”
다행스럽게도 나의 아버지는 못난 얼굴이 아니었다.
그저 좋은 거 옆에 더 좋은 게 있었을 뿐.
“만나고 싶었다.”
인물 평을 마친 그레이시는 온화한 얼굴로 나의 눈을 마주했다.
‘저도요’ 같은 말은 하지 않았다.
나는 짧게 주억거렸을 뿐.
기다렸던 세 사람의 만남은 잔잔하고 차분하게 이루어졌다.
“아이작은 어떻게 찾았냐.”
“저를 키워 주신 분이 알려 주셨어요.”
나는 데릭과 있었던 일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그리고 카슈타르에서 있었던 로제와의 얘기까지.
“그랬구나.”
그레이시는 담백하게 답하며 조용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제 질문은 나의 순서로 바뀌었고.
“제 부모님은 누가 죽인 건가요.”
나는 가장 묻고 싶었던 얘기를 단도직입적으로 꺼냈다.
이 질문을 가장 먼저 하고 싶었다.
내 혈육의 최후가 어땠는지.
억울한 죽음이었다면 그 원흉은 어디에 있는지.
“진은 배신한 동료에게 죽었고, 미리암은 루드겐 마이어가 납치했다.”
그레이시의 대답은 간단했다.
한쪽은 모르는 사람들이고, 한쪽은 아는 놈이었다.
루드겐 마이어.
그래, 놈은 이제 죽은 목숨이라 치자.
어차피 두루두루 엮여 있으니 조만간 어떤 식으로든 마주칠 놈이었다.
그러니 이제는 정보가 없던 아버지의 차례였다.
“아버지를 배신했다는 동료는 누구죠?”
“함께 싸웠던 신탁의 기사들이다.”
하나 돌아온 얘기는 더욱 이상한 말이었다.
“신탁의 기사가 왜…….”
“그걸 설명하려면 꽤 긴 시간이 필요하단다.”
그에 그레이시는 씁쓸한 표정으로 이유를 대신했다.
“…….”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복수를 하고자 해도 이제는 만날 수조차 없는 사람들이었다.
거기에 숨겨진 얘기도 많은 것 같고.
“혼자 온 것이냐.”
침묵하는 나를 보며 빅터는 동행 여부를 물었다.
“아니요. 전에 보셨던 반투족과 함께 왔어요.”
“그랬구나. 한데 비상사태라는 게 무얼 말하는 게냐.”
그렇게 대화의 주제는 과거에서 현실로 돌아왔다.
“사라센 흑마탑이 심상치 않아서요.”
그에 수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빅터에게 전달했다.
다름 아닌 바로 이곳 흑마탑에서.
“흠, 우리도 그 때문에 오긴 했다만, 너흰 그걸 어찌 알았더냐?”
“제가 카슈타르에 갔다가 알았어요.”
“허허… 그쪽에도 이능력자가 나타났단 말이냐.”
하나 빅터는 처음 듣는 얘기로 나의 말에 대답했다.
“이능력자요? 그 사람들은 강화 인간이라고 하던데.”
“강화 인간?”
“네. 사람을 강제 승급시키는 기술이에요.”
동상이몽인가.
빅터와 나는 같은 듯 다른 얘기를 하며 서로의 말에 물음표를 달았다.
그것은 빅터와 그레이시도 다르지 않았다.
나의 설명을 듣던 두 사람은 무언의 대화를 나누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반이 하는 얘긴 다른 걸 말하는 것 같네요. 능력자들과는 결이 다릅니다.”
“흠…….”
그레이시의 말대로 나와 빅터는 다른 얘기를 전하고 있었다.
다만 한 가지.
“이능력자도 이곳과 관련 있는 건가요?”
“그런 것 같구나.”
결과는 다르지만 우린 같은 범인을 말하며 흑마탑을 바라보았다.
* * *
“이번 건국 기념일에 작위 수여가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렇게 됐지요.”
“외국인이라면서요?”
“네, 그것도 평민이죠. 한데 국왕께서는 단승 자작을 수여하실 생각인가 봅니다.”
설명을 이어 가는 남자의 표정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짜증스럽다고 해야 할까.
말하는 그의 얼굴엔 불편한 기색이 가득했다.
사실 많이 거르고 걸러서 나온 게 이 정도였다.
만약 성질대로 할라치면.
‘정말 못 봐 주겠구나.’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 도륙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분노 가득한 남자는 마론 데 페이소스 후작.
아리안의 왕도 귀족인 그는 궁내부 장관이란 직책을 가진 거물 정치가였다.
표정 없기로 유명한 후작이 이토록 화를 내는 건, 두 가지 이유가 크게 작용했다.
첫 번째는 작위 수여 대상자.
이반이라고 알려진 이 녀석은 아들인 노이의 혼사를 접게 만든 눈엣가시 같은 녀석이었다.
물론 자신이 나선 건 아니었으나, 그 이면엔 제논 백작의 적극적인 접촉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랬던 제논 백작이 갑자기 혼담을 포기했다.
이유는 딸에게 자유를 주고 싶어서라고 했지만, 실상은 이반이란 놈에게 부녀가 홀랑 빠져 감히 후작 가문을 외면한 것이었다.
한데 그 빌어먹을 놈이 중대한 공을 세워 작위를 수여받게 됐다.
좋다.
작위를 하사하는 것은 국왕 고유의 권한이며, 공을 세운 이들이 작위를 받는 건 낯선 장면도 아니었다.
하지만 두 번째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문제의 대상은 앙리 데 베르사체 후작.
궁내성 주류관인 그는 왕실의 각종 행사를 주관했고, 귀족에 관한 재판권이 있었으며, 국왕의 식탁과 와인을 관리하는 자였다.
또한 마론 후작의 정적이기도 했다.
직책의 특성상 앙리 후작은 왕실과 접촉이 빈번했다.
전형적인 딸랑이랄까.
왕가의 비위를 맞추며 정치적 영향력을 키워 가는 왕정파의 대표 귀족이었다.
이제껏 잘 참아왔는데.
반크스 기사 단장이 제안한 작위 수여가 일을 키웠다.
‘단승 백작이라고?’
그 미친 딸랑이 귀족은 이반이란 평민 놈에게 단승 백작 수여를 제안했다.
차음 들었을 땐 자신의 귀가 잘못됐나 의심했다.
물론 에르텔을 획득함에 있어 그의 역할이 독보적이었다는 건 인정한다.
에르텔의 가치 또한 국보급이라는 것도 인정한다.
한데 백작은 아니잖은가.
아무리 영지 없는 명예 귀족이라 한들, 타국의 평민에게 단승 백작은 말도 안 되는 사치였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제안이 나온 이유는 단순했다.
에르텔을 확보한 국왕은 들떠 있었고, 그 기분을 맞추기 위해 앙리 후작이 개소리를 지껄인 것이었다.
거기에 카슈타르 백작의 후작 서임까지.
실제로 제논 백작은 후작으로 승급이 확정되었고, 이반의 백작 서임도 확정 단계까지 진행되었었다.
그걸 이를 갈면서 막은 것이 마론 후작.
이반의 백작 서임만큼은 어떻게든 막아 낸 것이었다.
그러니 이토록 화가 날 수밖에.
반왕파인 그의 목표는 왕권 정치를 끝내고 과두정치를 세우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가장 먼저 숙청시킬 후보 0순위가 바로 국왕과 앙리 후작이었다.
‘웃을 수 있을 때 웃어 둬라.’
모든 준비는 조금씩 진행돼 가고 있으니까.
머지않은 미래를 떠올리며 마론 후작은 차가운 비소를 흘렸다.
* * *
“하면 이곳에서 만든 강화 인간이 카렌 영지를 공격했다는 게냐?”
“네. 카리프도 이곳을 통해 강화 인간이 됐어요.”
옛 성터에 도착한 우리는 이동 중에 멈춘 얘기를 계속해서 이어 나갔다.
“그래서 비상사태라고 신호를 보낸 거죠. 베르와 에스카는 전면전을 예상하는 것 같더라고요.”
“그렇겠지.”
빅터는 무거운 표정을 지으며 공감을 표현했다.
그러고는 그레이시에게 고개를 돌려 의견을 물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놈들의 목표치가 어디냐에 따라 다르겠죠. 그걸 감한다고 해도 시간문제라고 봅니다.”
의견을 묻는 빅터의 말에 그레이시는 베르와 비슷한 답을 내놓았다.
요점은 준비된 강화 인간이 얼마나 되는가.
그것에 따라 사라센의 움직임이 달라진다는 얘기였다.
“…….”
대화를 멈춘 빅터는 주름진 미간을 당겨 더욱 깊은 주름을 만들었다.
심각한 고민 중이란 증거.
나 역시 하던 말을 멈추고 조용히 모닥불 앞을 지켰다.
불어오는 바람에 불티가 날아올랐다.
구석에 누운 소녀는 이른 잠에 빠져들었고, 불가에 앉아 있던 별은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하루 종일 앉아 있었더니 몸이 찌뿌둥하군.”
그러곤 대검을 들어 어디론가 향했다.
“어디 가는데?”
“바람 쐬러 간다.”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겸사겸사 여러 가지 일이 있을 테니까.
나는 멀어지는 별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가 듣기론 7성 초입이라고 들은 것 같은데.”
그런 나를 향해 그레이시는 무위의 수준을 물어봤다.
“아마 그 정도는 될 거예요.”
“오러는 당연히 못 쓰니 결국 그 기운 때문이겠구나.”
역시나 그레이시는 처음 만났던 그때로 돌아갔다.
사실 나에게 있어 진짜 본론은 전쟁이 아닌 이것이었다.
내 힘의 근원.
또는 정체.
나의 부모까지 물어봤을 땐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진의 몸도 너와 똑같았다.”
그레이시는 그 첫 번째 이유를 유전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짐작은 하고 있었다.
우리 두 사람은 비슷한 길을 걷고 있으니까.
“다른 점이라면, 너는 코어가 있던 몸이었고, 진은 본래부터 없던 몸이었지. 너에게 홀이 생긴 이유는 아마 네 엄마 때문일 거다.”
그리고 이번엔 다른 점을 설명했다.
“음… 이해가 잘… 어머니도 검을 쓰셨다. 뭐, 이런 얘긴가요?”
한데 이해가 영 되지 않았다.
방금 전 그레이시가 한 말은 기본적으로 틀린 말이기 때문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홀.
이것은 코어가 형성되기 이전의 기본적인 형태를 말하는 것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일 뿐.
수련에 의해 변화됐을 때가 특별한 것이지, 홀 그 자체로는 의미 없는 것이었다.
하나 그레이시는 홀이 생긴 이유를 어머니 탓으로 돌렸다.
그래서 이해가 안 되는 것이다.
이미 말했듯 이것은 부모님 탓이 아닌, 내가 인간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생긴 일일 테니까.
그런대 왜 그레이시는 저런 말을 하는 걸까.
“나에게 아직 말하지 않은 것이 있을 텐데.”
“무슨 의미죠?”
“말 그대로다. 네가 나에게 감추고 있는 것.”
“글쎄요…….”
“여기에 뭔가가 보이지 않아?”
그레이시는 눈앞을 가리키며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들어 올린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리며.
“시스템… 그거 너만 있는 게 아니란다.”
감추고 있던 금역에 덜커덕 발을 내딛었다.
“어, 어떻게 그걸?!”
당황한 나는 고개를 돌려 빅터를 바라봤다.
하지만 빅터는.
“그게 너의 아비와 영웅들이 특별했던 이유다.”
이런 충격적인 얘기를 아무렇지 않게 입에 담고 있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버지도 시스템이 있었다는 얘긴가요?!”
“아니, 진을 포함한 8인 모두가 있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지…….
지금 빅터가 하고 있는 말들은 나와 그들이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과거 빅터가 했던 약속처럼.
―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이다.
전설의 영웅들과 나란히 설 수 있는 특별한 존재가 되었단 얘기였다.
하나 감춰진 30년의 비밀은 이제 겨우 첫 걸음을 떼었을 뿐.
“그런 능력이 왜 주어졌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빅터는 이제껏 보지 못한 진지한 얼굴로 나를 향해 이유를 물어왔다.
내가 그걸 어찌 알겠나.
지금 나의 머리는 생각이 불가능할 정도로 흥분한 상태였다.
하지만 닫혀 있던 비밀의 상자는 열리고야 말았고.
“신들의 맹약으로 소환된 자… 그들은 모두 이(異)세계인이었다.”
빅터는 나의 아비를 다른 세상의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내 목숨 99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