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쓰러진 바바라를 들쳐 매고 객실로 돌아왔다.
그 곁에는 작은 소녀가 있었고, 그 소녀의 뒤로 화가 안 풀린 별이 주먹을 움켜쥐고 있었다.
마치 고문이라도 할 기세랄까.
왜 저렇게까지 흥분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기절한 바바라를 눕혀 두 팔과 다리를 결박했다.
“그냥 버려두지 뭐 하러 데려왔는가.”
“이래야 발견하는데 오래 걸릴 거 아냐.”
오가는 사람들이 가만 놔둘 리 없잖은가.
그것이 선의건 악의건 간에, 바깥에 놔둬 봐야 괜히 정신 차리는 시간만 빨라질 게 빤하다.
“여기서 자긴 글렀으니까 일단 나가자.”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괜스레 깨어나기라도 하면 불편하고 복잡한 상황만 이어질 테니까.
두 사람의 사이의 진실이 무엇이건, 나는 내가 한 선택에만 집중할 뿐이었다.
“…….”
그래도 아는 얼굴이 기절해 있으니 조금 마음에 걸리긴 했다.
그렇긴 하지만.
‘도와 달라고 해서 도와준 건데 뭐.’
더군다나 어린 소녀잖나.
사람을 돕는 이유는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본다.
‘미안.’
기절한 바바라를 객실에 놔둔 채 우리는 객잔을 나와 어두운 밤거리로 향했다.
길가로 나온 우리는 별이 이끄는 곳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유라면 야영지 때문인데.
“도시 외곽에 옛 성터들이 많다더군. 거기서 밤을 지내는 게 좋을 것 같다.”
각자 진행한 탐문 과정에서 별은 도시 외각에 대한 정보를 습득한 모양이었다.
소란을 피하기엔 차라리 그편이 훨씬 수월할 터.
“좋아, 일단 가자.”
하여 우리는 선두에 선 별을 따라 외곽으로 향했다.
중심을 벗어난 도시의 풍경은 짙은 어둠으로 표정을 바꾸었다.
형형색색의 마력 등은 자취를 감추었고, 은은한 달빛이 어슴푸레 길을 비추고 있었다.
그 와중에 나의 눈은 소녀의 다리로 향했다.
붉게 물든 작은 무릎.
찢어진 소녀의 바지는 흘러내린 피로 인해 선홍빛으로 변해 있었다.
“너 정말 괜찮은 거 맞아?”
“네…….”
하나 소녀는 말끝을 흐리며 괜찮다고 대답했다.
“괜찮기는.”
말에서 내린 나는 가방을 열어 붕대를 꺼냈다.
굳이 이런 걸 왜 챙기나 했는데.
‘이걸 이렇게 써먹네.’
챙겨 가라던 베르의 오지랖이 고맙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포션도 살짝 부어 놨으니까 자고 일어나면 괜찮을 거야.”
“감사합니다…….”
그에 소녀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소심하게 대답했다.
아직 두려워하는 느낌이랄까.
조심스러운 소녀의 반응은 충분히 이해되는 부분이었다.
하기야 벌써부터 헤헤, 하면 그게 더 이상할 터.
저 소녀에게 있어 나와 별은 너머를 알 수 없는 불확실한 문일 것이다.
원하던 곳으로 향하는 탈출구일지.
아니면 또 다른 나락으로 향하는 무거운 지옥문일지.
“나는 탈출구인데…….”
“…네?”
그에 소녀는 의아한 표정으로 나에게 되물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달밤에 혼잣말이라니…….
마음의 소리가 튀어나온 나는 로제를 떠올리며 고개를 저어 댔다.
그새 물들기라도 한 건가.
흥분하면 나오는 로제의 말버릇을 무심결에 흉내 내고 있었다.
“크흠.”
머쓱해진 나는 손을 휘적거리며 다시 말에 올랐다.
멈췄던 우리의 이동은 다시 시작되었고.
“저 성터가 좋아 보이는군.”
별은 무너진 폐허를 가리키며 말머리를 잡아당겼다.
무너진 성터를 차지한 것은 부드러운 모래였다.
사암으로 만든 벽돌은 흉물스레 나뒹굴었고, 켜켜이 쌓인 금빛의 가루들은 바람을 타고 세월의 흔적을 덮어 버렸다.
“그나마 여기가 낫네.”
나는 형태를 유지한 건물을 찾아 조심스레 내부를 살폈다.
나쁘지 않다.
이 정도라면 하룻밤을 지새우는 데 부족함이 없어보였다.
적당한 자리에 짐을 놓은 나는 주변을 살펴 반쯤 파묻힌 문짝을 뜯어냈다.
그렇게 우리는 모닥불 앞으로 모여 앉았다.
그리고 나는.
“아까 그 여자와는 무슨 관계니.”
내내 궁금했던 질문을 소녀에게 전했다.
“…모르는 사람이에요.”
하나 돌아온 대답은 타인이라는 말이었다.
“모르는 사람인데 그렇게 쫓아와?”
“…….”
논리에 맞지 않을 때, 결국 이런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
대답을 하지 못하거나, 시선을 피하는 것들.
그 외에 다른 걸 들자면 손가락을 꼼지락거린다든가 입술을 깨무는 것들이 있을 것이다.
바로 이 소녀처럼 말이다.
“단지 궁금해서 물어봤을 뿐이야.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복잡해지는 건 싫으니까.
계획에 없던 일로 마음 쓰며 불편해지고 싶지 않았다.
“갈 곳은 있니?
“아니요…….”
“우리는 볼일 좀 보고 리베로 갈 거야. 네가 원한다면 데려다줄 수 있고.”
소녀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이어지는 침묵.
“잘 자라.”
나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모닥불 곁에 누웠다.
내일 아침이면 자연스레 알게 될 테니까.
타닥거리는 소릴 들으며 나는 조용히 잠을 청했다.
* * *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깬 우리는 물을 끓여 가벼운 아침을 만들었다.
말 그대로 가벼운.
그냥 끓는 물에 건조된 재료를 넣어 만드는 간편한 수프의 한 종류였다.
“먹을 만하네.”
하나 생각보다 괜찮았다.
이런 걸 다 어디서 챙겨 오는 건지.
뜨끈한 수프를 삼키며 베르의 오지랖에 다시 한번 감사를 전했다.
“이제 슬슬 내려가 볼까.”
식사를 마친 나는 짐을 정리하곤 이동을 준비했다.
곁을 오가던 별도 준비를 마쳤고, 나는 머뭇거리는 소녀를 바라보며 조용히 대답을 기다렸다.
“…저도 데려가 주세요.”
생각이 많던 소녀는 우리와 함께하기로 결정했다.
“그럴래?”
“네…….”
이렇게 되면 나도 계획을 바꿀 수밖에.
“네가 여기 좀 지켜 줘. 혼자 다녀올게.”
“알겠다.”
소란을 자처할 이유는 없으니까.
나는 소녀와 별을 남겨 둔 채 홀로 빅터를 찾아 나섰다.
* * *
“으으응…….”
옅은 신음을 뱉어 내며 바바라는 눈을 떴다.
느껴지는 감촉은 푹신한 침대.
가늘게 뜬 눈으로 들어오는 풍경은 넓지 않은 크기의 조촐한 침실이었다.
어떻게 된 걸까.
바바라는 지난밤 기억을 떠올리며 시간을 되돌렸다.
분명 자신은 영업이 끝난 업장에서 목표했던 소녀를 찾았다.
상황을 파악한 소녀는 도망쳤고, 뒤를 쫓다가 잘생긴 그 남자를 다시 만나게 됐다.
남자는 협조하지 않았다.
그에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죽음의 키스를 전하려 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그대로 의식을 잃었고, 지금은 낯선 방 안에서 눈을 떴다.
이러고 있을 게 아니었다.
서두르지 않으면 소녀의 행방을 다시 놓치게 된다.
다급해진 바바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좁은 방을 벗어나려 했다.
하나 그것은 그녀의 바람일 뿐.
“하… 망했네.”
결박된 바바라의 몸은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질 않았다.
뜻대로 되지 않은 게 어디 불편한 팔다리뿐이었을까.
창밖을 바라본 바바라는 이내 모든 걸 포기했다.
태양은 이미 중천에 떠올랐으니까.
그렇다는 건.
‘벌써 사라졌겠네.’
이미 어디론가 도망쳤을 거란 얘기였다.
이어진 바바라의 행동은 체념이었다.
그대로 눈을 감은 바바라는 지난밤의 남자를 떠올렸다.
‘두 번이나 까였네.’
생각해 보니 살면서 처음이었다.
살로메로 살았을 때는 물론이요, 바바라를 포함한 그 어떤 삶에서도 이런 경우는 없었다.
당황스러웠다.
유혹을 거절당한 것도 놀라웠지만, 그 방법은 더 황당했다.
‘팔굽혀펴기라고?’
이건 거절 정도가 아니라 아예 무시당한 수준이었다.
대관절 어느 남정네가 여인의 추파를 그런식으로 거절할까.
그녀를 거부한 남자는 이 남자가 처음이었고, 두 번이나 거절당한 것은 남은 평생에도 절대 없을 경험이었다.
게다가 얻어맞고 기절까지.
물론 그 남자의 짓은 아니었지만, 이런 취급은 처음 겪는 일이었다.
그런데 왜…….
왜 이렇게 마음에 남는 것일까.
‘…갖고 싶다.’
이런 감정은 또 뭐고.
승부욕인가?
아니면 낯선 결과에서 오는 호기심?
어쩌면 숨 막히게 매력적인 그의 외모 탓일지도 모르겠다.
처음 보는 순간 두근거렸던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으니까.
뭐가 됐건 찾아야 할 대상이 겹쳐졌으니 그녀의 입장에선 나쁠 것이 없었다.
남자와 소녀가 함께 떠났다면 그 남자를 찾으면 될 일.
‘리베에서 왔다고 했지.’
바바라는 그 남자의 출신지를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지역만 알면 찾는 것은 시간문제일 터.
결박을 푼 바바라는 본체인 살로메로 모습을 바꿔 좁은 방 안을 걸어 나갔다.
* * *
바빌리안으로 돌아온 나는 별이 알려 준 장소로 이동해 흑마탑 주위를 어슬렁거렸다.
예상되는 지점은 이곳이 아니면 군부대뿐.
손잡고 여행 중인 게 아니라면 빅터는 분명히 이곳으로 올 것이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게 아니라면 앞으로가 너무 암담했기 때문이다.
‘다시는 안 해.’
아이작을 찾으면서 느꼈지만, 탐문 같은 건 할 짓이 못되는 것 같다.
그냥 집착의 끝이다.
정신병 같은 집요함이 없으면 이런 짓은 성공할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될 정도였으니까.
“아흠…….”
후회와 오기 사이를 오가며 흑마탑 주위를 계속해서 주시했다.
간간이 드나드는 사람 외에 딱히 거슬리는 사람은 없었다.
굳이 의심을 하자면 스카프를 두른 채 오가던 몇몇의 남자들이었다.
하지만 의미는 없었다.
‘다 똑같으니 원.’
돌아다니는 사람들 모두 스카프를 두른 탓이다.
그저 얼굴을 가리고 안 가리고의 차이일 뿐.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내가 더 이상한 모습이었다.
그래서 더 힘들다.
오가는 사람마다 붙잡고 스카프를 벗길 수도 없잖은가.
뭔가 수상한 행동을 보이는 사람을 찾고 있었지만, 이 중에 제일 수상한 사람은 누가 봐도 나였다.
“거 남의 집 앞에서 뭐 하는 거요?”
이렇게 쫓겨나고.
“엄마, 이 아저씨 이상해.”
또 자릴 피해야 했다.
이게 다 바바라 때문이었다.
맘 같아선 흑마탑 앞에 누워 있고 싶었지만, 괜히 들켜 꼬리를 밟힐까 봐 이렇게 숨어 있게 된 것이다.
그러니 최후의 선택은 흑마탑이 보이는 식당에 들어가 거리를 살피는 것이었다.
물론 공짜는 아니니까.
덕분에 내가 앉아 있는 테이블에는 먹다 남은 접시들이 하나둘씩 쌓여 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에 식당 아줌마는 싱글벙글.
“내일도 오면 할인해 주나요?”
“내일도 오려고? 당연하지! 내일 또 오면 음료수는 서비스로 줄게.”
나는 극진한 배웅을 받으며 털레털레 무너진 성터로 향했다.
해는 이미 떨어졌으니까.
“베르에게 연락해 봐야겠네.”
뻑뻑해진 눈을 비비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완전 회복까지 2일이 걸린다 했으니 내일이면 베르도 탐색을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대략적인 계획을 세우며 외곽으로 향했다.
한데 뭔가 거슬렸다.
처음엔 그냥 우연인가 싶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확실하게 느껴졌다.
‘젠장.’
나는 지금 누군가에게 미행을 당하고 있는 중이었다.
대상은 스카프를 쓴 남자 2명.
놈들은 나의 속도에 맞춰 능숙하게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녀석들은 바바라와 연관된 사람들이 분명한 것 같았다.
동기도 분명했고, 소녀에 대한 바바라의 말 중엔 배신이라는 말도 있었다.
그러니 혈안이 되어 찾고 있을 터.
도시를 벗어난 나는 해머를 움켜 쥐며 다가올 위협에 대비했다.
그런 나의 예상은 적중했으니.
부아아악―
쩡!
달려오는 놈들의 기를 느끼며 날카롭게 해머를 휘둘렀다.
하지만 나의 해머는 공중에 멈춰 섰고.
“이놈 기세가 사나워졌구나.”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남자의 스카프가 흘러내렸다.
내 목숨 99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