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사라센의 영토 구성은 기본적으로 황무지와 사막이다.
그 사이에 크고 작은 도시들 있고, 더 깊은 영토로 들어가면 오래전에 사라진 고대 문명의 흔적들이 파편처럼 남아 있었다.
이른바 유적이라는 것인데.
“어딜 가는 걸까요?”
“글쎄다.”
흑마탑으로 들어간 정체불명의 능력자는 별안간 되돌아 도시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뒤를 따라 이동한 곳이 바로 이곳.
이름조차 알 수 없는 폐허에 도착한 녀석은 그 자리에 우뚝 서서 큰소리로 이렇게 외쳤다.
“모습을 드러내라, 쥐새끼들!”
언제부터 눈치챘는지 모르겠으나, 놈은 미행 중인 두 사람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는 일.
“여기 있어라.”
빅터는 그레이시를 남기고 놈을 향해 걸어갔다.
계획이 틀어졌다.
한동안 머물며 또 다른 능력자의 존재를 살펴볼 생각이었지만, 이젠 녀석을 해치우고 흔적을 지워야 했다.
“굳이 일대일이 아니어도 되는데?”
다가오는 빅터를 보며 놈은 무표정하게 말을 건넸다.
하나 빅터는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풀리지 않는 의문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체격이 더욱 커졌다.’
녀석을 처음 본 이후로 놈의 체격은 계속해서 커져 갔다.
그렇다고 엄청나게 달라진 것은 아니지만, 본래 거대했던 근육이 그사이 더욱 팽팽해진 느낌이었다.
그저 몬스터를 찢어발기고, 그들의 피를 마시고, 생기를 빨아 댔을 뿐인데.
놈의 근육은 바람이라도 들어찬 듯 부풀어올라 기이하게 씰룩거렸다.
“음, 우선 이유를 들어 볼까? 납득이 되면 한번에 죽이고, 그렇지 않으면 조금 괴로울 거야.”
거대한 놈은 빅터를 바라보며 미행한 이유를 물었다.
“뭐하는 놈이냐?”
하지만 빅터는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녀석의 얼굴이 잘게 꿈틀거렸고.
“이래서 내가 애들과 노인을 싫어하지. 왜 그런 줄 알아?”
또다시 빅터에게 반문했다.
빅터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탓인지 녀석은 얼굴을 찡그리며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제멋대로거든. 그냥 지들 하고 싶은 것만 한다고. 당신처럼 말이야.”
말을 마친 놈은 빅터를 바라보며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그렇게 짧은 침묵이 흘렀다.
녀석은 뜻 모를 행동을 하며 비릿하게 웃고 있었고, 빅터는 미간을 좁히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뭐하는 놈이냐 물었다.”
내용은 동일했다.
이름부터 시작해 기거하는 곳과 하고 다니는 짓거리 모두를 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녀석이 택한 말과 행동은.
“뻐큐.”
또다시 의미를 알 수 없는 말과 내밀어진 두 팔이었다.
그것이 놈의 신호였다.
시뻘건 피 안개가 녀석의 주먹에서 뻗어 나왔고, 안개가 걷힐 무렵엔 놈의 모습이 변해 있었다.
검이었다.
핏빛으로 물든 놈의 주먹엔 거대한 검 두 자루가 이어지듯 쥐어 있었다.
“…….”
역시.
놈의 정체는 이능력자.
앞으로의 결과는 빅터가 아닌 녀석의 손에 달려 있었다.
오러도, 마력도 없다.
놈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은 어디에도 없었고, 칼끝을 맞대야 비로소 수준을 알 수 있을 것이었다.
이 싸움 또한 미지의 영역이 될 터.
빅터는 오러를 끌어 올려 뽑아 든 검에 휘감았다.
푸르다 못해 백색에 가까운 예기.
빅터는 준비를 마친 놈을 향해 점멸하듯 날아들었다.
콰가각!
검강이 실린 빅터의 검이 놈의 핏빛 검을 내리쳤다.
선 긋기였다.
놈의 수준을 알아내기 위한 한 방.
붉게 물든 녀석의 검은 아무렇지 않게 빅터의 공격을 견뎌 냈다.
“흐음.”
지금 순간의 감정이 기대인지 아쉬움인지 모르겠으나, 빅터의 결론은 하나였다.
이대로 놔두면 큰일 날 놈이라는 것.
오러의 강도를 끌어 올린 빅터는 수많은 잔상을 남기며 맹공을 이어 갔다.
여전히 놈은 방어에 급급했으나 빅터의 속내는 섬뜩함을 느꼈다.
이토록 긴 합이라니.
빅터의 공격을 이만큼 받아 낸 상대는 근 10년 내에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게다가 녀석은.
아직까지 공격을 시작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쯧……. 역시 능력자의 힘이라는 건가.’
빅터는 쓰게 혀를 차며 뻗은 검을 되돌려 얼굴 앞을 가로막았다.
반격이었다.
드디어 놈은 두 개의 검을 휘둘러 공세로 전환했다.
카앙―
캉!
카가각!
떠오르는 감정은 놀라움.
혈향을 풍기며 날아드는 핏빛의 검은 8성의 오러를 상대하며 조금의 물러섬도 없었다.
그저 검일 뿐인데.
심지어 피 안개를 뽑아서 만든 정체불명의 검은 마치 검강이라도 두른 듯 강렬했다.
그제야 빅터는 눈치챘다.
놈에게 있어 피 안개는 자신의 오러와 비슷한 개념이라는 걸.
“노인네가 불필요하게 강하군. 이러니 그렇게 고집이 셌지.”
녀석은 속도를 올려 빅터의 공격을 흉내 내기 시작했다.
잔상을 남기며 휘둘러지는 한 쌍의 붉은 검.
차가운 안광을 뿜어내던 빅터는 오러를 끌어 올려 8성의 경지로 대응했다.
“네놈은 위험해서 안 되겠구나.”
질문을 포기한 빅터는 녀석의 존재를 지워 버리기로 결정했다.
쿠우우웅―
모래 폭풍을 일으키는 오러 사이로 서릿발 같은 빅터의 검이 놈의 가슴을 내리그었다.
방어를 거부하는 절대적인 참격.
놈의 두꺼운 가슴은 핏빛 검과 함께 반으로 갈라지고 있었다.
“쿨럭!”
결국 피를 토한 녀석이 무릎을 꿇으며 주저앉았고.
콰가가가각!
놈을 뚫고 간 검강은 폐허의 잔재를 뒤집기 시작했다.
“이래서 노인들이 싫다니까…….”
비릿하게 중얼대던 놈은 피분수를 뿜어내며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것이 끝이었다.
오랜만에 마주한 미지의 강자는 자신이 흘린 피에 잠겨 최후를 맞이했다.
“…….”
빅터는 쭈그러드는 놈의 육체를 보며 표정을 구겼다.
“어떻던 가요.”
“너와 함께 했던 시절이었다면 누워 있는 건 나였겠지.”
빅터는 짧은 소감을 밝히며 놈의 사체에서 몸을 돌렸다.
“일단 흑마탑으로 가자.”
“네.”
그렇게 빅터와 그레이시는 걸음을 재촉해 흑마탑으로 향했다.
격랑이 휩쓸고 간 빈자리.
승자는 자리를 떠났고, 남아 있는 건 패배한 자의 비참한 주검뿐이었다.
하나 황토빛 모래 너머로 두 사람의 모습이 사라질 때쯤.
스스스스스…….
쭈그러든 남자의 사체에 검붉은 피가 모여 들었다.
마치 말라비틀어진 가죽 물통에 샘물을 채워 넣듯.
폐허를 적시던 핏물들은 남자의 몸을 향해 천천히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마지막 남은 핏물마저 자취를 감추던 순간.
“끄어어어어어…….”
남자는 가쁜 숨을 들이키며 거대한 몸을 일으켜 세웠다.
* * *
[긴급 성장 시스템 가동.]
목표 완료.
팔굽혀펴기 2,100/1000
제한시간 6초/400초
보상: 근력, 순발력, 지구력 1% 증가.
갑작스런 성장 시스템은 6초를 남기고 완료되었다.
결과만 보자면 만족스럽다.
힘들거나 어려운 과제는 아니었으니까.
― 거절의 방법이 특이하시네요.
그저 쪽팔렸을 뿐.
바바라라는 여인은 내 앞에 쪼그리고 앉아 한참을 구경했다.
마치 신기한 동물을 바라보듯…….
뭐 그런 것 있잖은가.
머리 두 개 달린 양이나, 다리가 여섯 개인 소 그런 거.
좌우지간 여인이 사라질 때까지 한참을 더 하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려 2,100개가 될 때까지!
덕분에 생각지도 않았던 보너스가 보상 항목에 따로 추가되었다.
[목표량을 초과 달성하여 보상을 재설정합니다.]
[추가 보상 의지력 1% 증가.]
이런 거라면 얼마든지 환영이지.
때와 장소만 가려 준다면야…….
하여간 뜬금없는 보상을 받은 나는 털레털레 걸어 객점으로 돌아갔다.
도착 직후에 별이 들어왔고, 우리는 각자 살펴본 상황에 대해 공유를 시작했다.
결론은 그거다.
별 볼일 없었다는 것.
우리는 주목할 만한 단서를 찾지 못한 채 빈손으로 객점에 돌아왔다.
“한데 이 도시에 흑마탑이 있는 것 같더군.”
“그래? 어디서 봤는데.”
“내가 내려갔던 아래쪽으로 가다 보면 작은 광장을 지나서 나온다. 꽤 멋지게 지어놨더군.”
이어지는 별의 감상평을 들으며 ‘아 그래서?’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빅터와 그레이시가 이곳으로 온 이유에 왠지 흑마탑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흑마탑에 대해 아는 바는 적지만, 연결시킬 이유는 충분했다.
별이 흑마탑을 발견했듯, 나는 위쪽을 돌며 군부대를 발견했다.
이거 연결되는 얘기잖나.
카렌 영지에서 국지전이 있었다고 했던 그 첩보 말이다.
베르와 에스카는 그것을 강화 인간의 짓이라 판단했고, 이곳에는 만든 자와 구매자가 동시에 있을지도 모른다.
흑마탑과 군부대.
내용을 알고 들여다보면 대강의 그림이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나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군대를 뒤집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흑마탑을 찾아갈 일도 아니다.
나는 그저 빅터를 찾아왔을 뿐.
그러니 내일은 흑마탑 근처를 돌며 두 사람의 행방을 찾아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일단 밥이나 먹자.”
식당으로 내려온 우리는 테이블 가득 음식을 시켜 배 터지게 먹고 마셨다.
경쟁하듯 식사를 마친 우리는 다시 객실로 들어왔다.
시답잖은 얘기를 주고받으며 시간을 보냈고, 녀석의 빈틈이 보일 때마다 옆구리를 찔러 댔다.
“꺄아!”
중독성 있는 반응이다.
이런 사실을 부족장과 술도 알고 있을까?
날아오는 주먹을 피하며 바빌리안의 첫날은 그렇게 저물어 가고 있었다.
어느덧 시간은 흘러 자정.
피곤하다던 별은 본인의 방에 들어가 먼저 잠이 들었고, 나는 객점을 나와 밤공기에 몸을 맡겼다.
황무지의 밤은 서늘했다.
한낮의 열기를 밀어낸 거리는 색색의 마력 등 불빛으로 모습을 바꾸었다.
나는 객점 앞에 놓인 의자에 않아 밤거리를 감상했다.
시골 촌놈이라 그런가.
어둠을 삼키는 마력 등의 불빛은 여전히 볼 때마다 감성을 자극했다.
그 아름다운 불빛 사이로 작은 소녀가 다가…….
아니, 달려오고 있었다.
부러질 것처럼 작고 얇은 소녀는 뭐가 그리 급한지 열심히 달리고 있었다.
가끔씩 뒤를 돌아보며.
넘어질 듯 위태로운 걸음으로 밤거리를 내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왜 저 소녀는 나를 바라보며 오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달려오던 작은 소녀는.
“살려 주세요!”
다급하게 외침과 함께 요란하게 자빠졌다.
“괜찮은 거니?”
나는 넘어진 소녀를 부축해 일어서는 걸 도우려 했다.
하지만 새로 다가온 그림자는 나에게 다른 행동을 요구했다.
“거기까지. 그 다음은 제가 할게요. 저와 선약이 있던 아이라서.”
새로운 목소리의 주인은 낮에 보았던 그 여인이었다.
바바라였나.
추파를 던지며 다가오던 그 여인은 야심한 밤에 어린 소녀의 뒤를 쫓고 있었다.
헷갈리는 상황이었다.
보통 이렇게 되면 둘 중 한 사람의 말을 믿어 줘야 할 테니까.
“잠깐만요.”
나의 선택은 어린 소녀를 돕는 쪽이었다.
“잘생긴 오빠, 아니야…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그에 바바라는 손가락을 저으며 울상을 지었다.
넘어진 소녀를 한번 내려다보고는.
“이 아이는 우리의 믿음을 배신한 아이거든. 그러니 여긴 나에게 맡겨 줬으면 좋겠어. 그렇게 해 주면 안 될까?”
유난히 촉촉한 목소리로 유혹하듯이 속사정을 말해 왔다.
어쩌면 이 여인의 말이 진실일지도 모른다.
약자는 약한 것뿐이지 그것이 진실이나 선함을 증명하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나는.
“일단 이 아이의 말 좀 들어 보고요.”
소녀의 편을 들기로 했다.
“하아…….”
그에 바바라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손을 들어 이마를 꾹꾹 누르기 시작했다.
“나 진짜 오빠가 마음에 들었었거든. 그래서 이 일이 마무리되기만을 기다렸는데.”
하나 바바라는 도톰한 입술을 깨물며 나에게 다가왔다.
과하다 싶을 만큼 가까이 다가오더니.
“빨리 끝내고 우리 뜨거운 밤을…….”
입술을 들이밀며 달콤한 숨을 내쉬었다.
하나 바바라의 입술은 나에게 닿지 못했다.
부우웅―
하는 소리가 귓전에 들려왔고.
“하윽!”
외마디 비명과 함께 그녀는 기절했다.
그렇게 쓰러진 바바라의 뒤에는.
“하찮은 것이 어딜 감히.”
분노에 가득 찬 별이 주먹을 움켜쥐고 서 있었다.
내 목숨 99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