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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숨 99개-103화 (103/203)

103화

대수림을 빠져나온 빅터와 그레이시는 결국 사라센의 국경을 넘고 말았다.

브라함의 누구나 그랬겠지만, 빅터의 입장에선 더욱 위험한 선택이었다.

비록 일선에서 물러나 있다지만, 빅터는 국가 전력의 정점이자 적국의 제거 대상 1순위였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스스로 국경을 넘어섰다.

‘변곡점이다.’

빅터는 무언가 변하고 있음을 감지했다.

하여 무리한 결정을 감행했고, 그 선택을 하게 된 것에는 양국의 기이한 대치 상태가 크게 작용했다.

브라함과 사라센을 두고 혹자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모닥불 옆에 놓인 기름통과 같다고.

휴전도 종전도 아닌, 작금의 상황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휴화산처럼 불안한 평화를 이어 왔다.

그저 모른 척하고 있을 뿐.

전쟁은 두 가지 요인으로 인해 지금껏 억제되고 있었다.

하나는 빅터 크로제라는 존재였고, 다른 하나는 두 명의 7서클 마법사가 있는 사라센의 마법 부대였다.

이 억제력은 강력했다.

마지막 전면전 이후 양국은 18년이라는 세월 동안 다른 모습으로 발전해 왔다.

전통의 보병 강국 브라함과 마법 부대의 사라센.

그것이 현시점에 마주한 두 나라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힘의 균형이 다시금 깨지려 하고 있었다.

뒤를 좇고 있는 이런 괴물이 사라센에 소속되어 있다면 무게 추는 사라센으로 기울기 때문이었다.

저런 놈이 전장에 나서면 상황은 아수라장으로 변할 터.

후위에 있는 사라센 마법사들은 더할 나위 없이 강력해질 것이다.

“이제부터는 이걸 사용하세요.”

깊은 상념에 빠져 있던 빅터는 그레이시가 건넨 천을 받으며 생각의 늪을 벗어났다.

스카프였다.

건조한 지역이 많은 사라센에선 이것으로 얼굴과 머리를 가리는 경우가 많았다.

얼굴을 가려야 할 빅터에겐 꼭 필요한 물건이기도 했고.

“이런 걸 늘 들고 다닌 게냐?

“저에겐 필수품이니까요.”

그레이시는 능숙한 손길로 스카프를 두르곤 빅터를 바라봤다.

“흠, 못 봐 주겠군요.”

결국 빅터의 스카프를 다시 감아 준 그레이시는 멀어져 가는 놈의 뒤를 천천히 따라 걷기 시작했다.

“역시 흑마탑이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럴 수밖에 없지.”

빅터의 생각은 흑마탑으로 이어졌다.

브라함에서 마주했던 기이한 이능력자들.

확실한 증거를 잡기 전에 꼬리가 잘렸지만, 의심되는 건 역시나 흑마탑이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이놈은 이제껏 경험한 그 어떤 능력보다 이질적인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놈은 마주한 모든 생명체를 무릎 꿇린 채 엄청난 괴력으로 찢어발겼고, 그것도 모자라 주위의 모든 생명력을 흡수해 버렸다.

저런 놈이 어디서 갑자기 나타났을 리가 없다.

분명히 누군가 개입됐다.

과거 능력자들의 등장 과정을 모두 지켜보았던 빅터는 놈의 존재 뒤에 특별한 배후가 있음을 확신했다.

“하기야 여기엔 놈들의 흑마탑이 있으니까요.”

그레이시는 빅터의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추적을 계속했다.

하나 이 사실은 특별한 내용이 아니었다.

사라센에서 흑마탑은 음지의 마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부만 해도 네 군데가 있었으며, 마법 학파의 한 분야로써 당당히 인정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흑마탑의 존재 또한 비밀스러울 이유도 없었고, 심지어 그 주변엔 관련 상점이 생기기도 했다.

하여 이곳 바빌리안에는 그레이시가 말한 제1흑마탑이 하늘을 향해 뾰쪽한 첨탑을 세우고 있었다.

그런 이곳을 향해 놈의 행적이 이어졌으니 빅터의 의심은 점차 확신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만약 흑마탑이 본거지라면.’

저런 이능력자가 앞으로 얼마나 더 튀어나올지 모를 일이다.

사라센에서 흑마탑이란, 감시의 대상이 아니니까.

오히려 놈들은 흑마탑을 지원하며 전쟁 준비에 더욱 열을 올리고 있을 것이다.

그런 빅터의 추측은 틀리지 않았다.

길게 이어지던 놈의 행적은 이제 끝이 났고.

“결국 여기네요.”

그레이시는 높게 솟은 흑마탑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 *

아침이 밝자마자 나는 가벼운 여장을 꾸렸다.

목적지는 사라센의 바빌리안.

종잡을 수 없는 빅터의 행적도 신경 쓰였지만, 함께 있는 사람이 더욱 나를 애달게 했다.

― 그레이시는 생존해 있는 과거의 영웅이십니다.

나의 아버지와 동시대를 누볐던 사람이고, 아이작에게서 나를 떼어 낸 남자이기도 했다.

어쩌면 빅터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을 남자가 아닌가.

이 시점에 사라센에 가 있다면 뭔가 중요한 문제에 봉착했다는 것이고, 이후의 상황 또한 예측 범위를 넘어섰다는 결론에 도착하게 된다.

하여 이번에는 내가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기로 마음먹었다.

“국경은 어떻게 넘어가시려고요? 사라센의 입국 심사는 굉장히 까다로워요.”

“다 방법이 있지요.”

나는 잘 만들어진 가죽 팬티를 꺼내 들었다.

“허…….”

그에 베르는 헛숨을 들이켰고.

“기대되는군.”

별은 묘하게 눈을 빛내며 가죽 팬티를 노려보았다.

녀석도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되는 거니까.

아무렇지도 않게 이 방법을 떠올리는 걸 보면 나의 정체성도 슬슬 의심해 볼 때가 된 것 같았다.

“중간에 상황 바뀌면 바로 알려 주세요.”

“네. 지도하고 메신저 둘 다 챙겨 가니 걱정 마세요.”

걱정하는 에스카의 말에 나는 주머니를 툭툭 치며 대답했다.

그렇게 집을 나와 향한 곳은 사라센의 국경 초소.

“흠…….”

사라센이란 이름이 주는 압박은 생각보다 거대했다.

그렇다고 겁먹었다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카잔보다는 확실히 부담스러운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한들 방법은 달라지지 않는다.

난 이미 팬티 바람이니까.

속옷 같은 가죽 방어구를 걸친 나와 별은 입국 심사관의 질문에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전사에게 정해진 길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목적지를 묻는 심사관의 말에 별은 이렇게 대답했다.

한데 신기한 건 이 방법이 잘 먹히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제논 백작이 적어 준 증명서 덕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이 심사관은 설렁설렁 진행하고 있었다.

아리안보다 질문 몇 개 더하는 정도랄까.

“이름.”

“웅장한 놈.”

“목적지.”

“구름 아래 발 닿는 곳 어디든.”

“방문 목적.”

“어딘가에 있을 강함을 찾아 떠나는 길이다.”

까다롭다는 사라센의 입국 심사는 긴장이 무색할 만큼 간단하게 종료되었다.

“뭐지, 들은 거 하곤 완전 다른데? 하나도 안 까다롭잖아.”

“까다로울 게 뭐 있겠나. 나와 형제들은 이미 사라센을 몇 번 다녀왔다.”

“아…….”

어쩐지 형식적이더라니.

그동안 깔아 둔 공적이 쌓이고 쌓여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이었다.

심사관들이 얼마나 고생했을지 얘기만 들어도 그림이 그려지고,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이 훤히 보였다.

난 아직도 카슈타르의 조사실에서 벌어진 일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머리를 쥐어뜯던 경비대의 모습을.

그 끔찍한 과정을 겪었을 심사관들을 생각하니 지금 이 상황이 충분히 이해되고도 남음이었다.

“여러모로 대단하네.”

“무슨 뜻인가.”

“너희들 말이야. 그냥 대단하다고.”

의아해하는 별을 향해 나는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워 줬다.

“이제 바빌리안으로 가는 건가?”

“그래야지. 그전에 옷부터 갈아입자.”

하여 우리는 준비해 온 방어구로 환복했다.

사실 답답해할 별의 입장을 생각하면 그대로 놔두고 싶기도 했지만, 그러기엔 녀석의 모습이 너무 눈에 띄었다.

이미 카잔에서도 증명되었으니까.

저 복장의 별은 그 어디를 가더라도 주목받을 수밖에 없었다.

“준비 다 됐다.”

그래서일까.

이제는 본인 스스로 환복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는 듯했다.

그래 봐야 노골적인 노출만 사라졌을 뿐, 기본적으로 별은 눈에 띌 수밖에 없는 화려함을 타고난 녀석이었다.

거기에 실력도 갖추고 있고.

“그럼 가자.”

환복을 마친 우리는 바빌리안을 향해 말머리를 돌렸다.

* * *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도시가 발달한 사라센 제국은 확실히 다른 나라와는 다른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좋게 말하면 이국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질린다.

지겨울 정도로 똑같은 단색의 향연.

끝없이 이어지는 황토색의 향연에 나는 다른 색을 찾기 위해 수시로 고개를 돌려야 했다.

어찌 이리도 한결 같은 풍경인지.

출발한 지 한 시간만에 나는 경치 구경을 포기했다.

가끔씩 보이는 야자나무들이 은혜롭게 느껴질 정도.

힘겨운 시간을 견디고 견뎌 여섯 시간만에 바빌리안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 이제 좀 살겠네.”

적당한 객점을 선택한 우리는 늦은 점심을 먹으며 형형색색의 즐거움을 만끽했다.

마치 보상이라도 주려는 듯, 도시는 원색으로 가득 찬 풍경으로 지친 나의 눈에 신선한 자극을 선사했다.

음식의 수준도 나쁘지 않았고, 적대국이란 주홍글씨만 없었다면 꽤나 좋은 느낌으로 기억될 아름다운 도시였다.

“슬슬 나가 볼까.”

식사를 마친 나와 별은 객점을 나와 거리로 향했다.

한데 이렇게 몰려다니면 비효율적이지 않을까?

목적은 최대한 빨리 발견하는 것이니 흩어지는 게 나은 선택이라 여겨졌다.

“난 저 위쪽으로 돌아볼게. 적당히 살펴보다가 해가 지기 시작하면 객점에서 보자고.”

“알겠다.”

“막 싸우고 그러지 말고.”

“시끄럽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 다른 방향에서 빅터의 흔적을 찾기 시작했다.

무작정 찾아다녔다.

추적에 특별한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니, 그저 사람이 오갈 만한 곳을 기웃거리며 탐문을 이어 나갔다.

그렇게 두 시간 정도 걸었을까.

성과 없는 수색에 슬슬 지쳐 갈 때쯤 더위도 달랠 겸 시원한 음료수를 구입해 야자수 그늘 아래로 향했다.

“아이고 죽겠다.”

나는 업장에서 마련한 야외 테이블에 앉아 앓는 소릴 내며 몸을 기댔다.

때마침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기분 좋은 바람을 느끼며 손에 든 음료수를 들이켰다.

한데 그 순간.

“옆에 앉아도 될까요?”

푸른색 음료수를 든 아담한 여인이 미소를 지으며 옆자리를 가리켰다.

이 사람도 가게의 손님인 것 같은데…….

“네, 앉으세요.”

애초에 내가 싫다고 말할 입장도 아니었다.

업장에서 마련한 자리는 이것뿐이었으니까.

합석을 허락한 나는 음료수를 마시며 오아시스의 경치를 감상했다.

하나 그런 나의 소소한 여유는 오래가지 못했다.

“이 도시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혹시 외국인?”

“네, 리베에서 왔어요.”

곁에 앉은 여인의 관심 때문이었다.

여인은 진부한 방식으로 나에 대한 호기심을 드러냈다.

“잘생기셨네요.”

“종종 듣곤 하죠.”

하나 효과가 있을 리가 있나.

살면서 가장 많이 들어 본 얘기가 ‘키가 크시네요’와 ‘잘 생겼어요’인 탓이다.

“그러셨을 것 같네요. 저는 바바라라고 해요.”

하지만 여인은 꿋꿋하게 인사를 건네 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저도 누군갈 만나러 왔는데 경치가 너무 좋아서 반해 버렸지 뭐예요.”

그래, 알겠으니까 빨리 마시고 가라.

나 지금 엄청 급한 일 생긴 것 같으니까.

“같이 오신 일행 있으세요? 없으시면 저와…….”

하나 여인의 추파는 계속되었고.

“아이, 미치겠네!”

나는 벌떡 일어나 팔굽혀펴기를 시작했다.

어쩔 수 없었다.

[긴급 성장 시스템 가동.]

팔굽혀 펴기 0/1,000

제한시간 281초/400초

보상: 근력, 순발력, 지구력 1% 증가.

시스템의 시간은 벌써 줄어들기 시작했으니까.

“젠장!”

왜 갑자기 시스템이 지랄인지 모르겠지만.

일!

이!

삼!

줄어드는 시간을 보며 나는 정신없이 두 팔을 폭주시켰다.

내 목숨 99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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