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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숨 99개-102화 (102/203)

102화

극적인 별의 변신.

달리 표현할 말을 떠올려 봐도 이만 한 건 없을 것 같다.

승급했다고 봐야 하나.

처음 만났을 때 수준이 4성급 후반이었다면, 지금은 5성 중반은 너끈히 뛰어넘었다.

어쩌면 5성 후반일지도.

느리긴 하나 꾸준히 성장하고 있으니 잘하면 6성의 수준도 노려볼 만했다.

“대단한데? 이거 한 병 더 마시면 더 세지는 거 아니야?”

“흠, 글쎄요. 여기에 그런 건 적혀 있지 않아서 뭐라고 답을 못 드리겠네요.”

효과가 있다는 걸 알았으니 추가 복용의 호기심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다만, 뭐든 과하면 독이 되니 진짜 부작용이 염려됐을 뿐.

“죽진 않겠지?”

“마셔 보면 알지 않겠나.”

별은 또 다른 비약을 망설임 없이 들이켰다.

그리고 모두는 이어질 현상을 기다리며 초초한 기색을 드러냈다.

나는 마른침을 삼켰고, 페드로는 입을 가리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별은 오히려 반응이 없었다.

“괜찮은 거야?”

“아무 느낌 없다.”

녀석은 맨 처음 나와 비슷한 현상을 겪고 있었다.

하나 너무 강해져서 그런 것 같진 않고, 아마도 한 번 작용했기 때문에 더 이상 몸이 반응하지 않는 듯했다.

어쨌거나 고생한 보람이 있어서 다행이다.

이 정도 성취라면 엄청난 시간을 단축한 샘일 터.

시간 날 때 부족장과 술에게도 하나씩 나눠 줘야겠다.

간 김에 꼬마 워 울프도 잘 크고 있는지 확인해 보고.

“아참, 형님 소문이 벌써 쫙 깔렸던데요. 미르니 철광산 접수하신 거랑 용병왕 자리에 올랐다고.”

“그게 벌써 소문났어?”

“네. 오전에 재료상 아저씨가 와서 얘기해 주시더라고요. 앞으로 용병 조합에서 나오는 모든 전리품들은 재료상 안 거치고 제조 업체에 직접 판매하신다고.”

역시 재료상들이 가장 먼저 사실을 확인했다.

이제 슬슬 도시 전체로 소문이 퍼져갈 터.

“용병 조합과 전매했던 재료상이 가만있지 않을 거라던데요. 용병 조합과 직거래하는 업체에겐 재료를 판매하지 않겠다고 했나 봐요.”

벌써부터 기존의 큰손들은 자신의 영역을 지키기 위한 다음 행보를 이어 갔다.

“그게 뭐? 그놈이 안 팔면 다른 사람에게 사면되지.”

“아, 그게…….”

“연금 조합장이 담합시켜서?”

“아무래도 그렇죠.”

“신경 쓰지 마. 이런 싸움은 아쉽다고 먼저 움직이는 쪽이 지는 거야.”

아닌 말로 모든 제조 업체가 용병 조합과 거래하면 재료 상인도 방법이 없는 것이다.

이때부턴 지난한 기 싸움이 시작될 테고, 견디지 못한 누군가가 살길을 찾아 움직이면 너 나 할 것 없이 무너지게 돼 있다.

한쪽은 물건을 못 만들어서.

다른 한쪽은 물건을 팔지 못해서.

결국 해법은 수입과 수출뿐인데, 재료야 수입하면 그만이지만 수출은 다른 문제였다.

그 나라에 없는 재료가 아닌 이상 재료상의 해외 진출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건을 사러 온 외국인에겐 친절해도, 지 밥그릇 뺏으러 온 외국인을 환영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

교역을 전문으로 하는 상단이 괜히 있는 게 아니란 얘기다.

그리고 그런 상단에선 어디에나 있는 흔한 재료 따위는 취급조차 하지 않았다.

결국 특정 재료만 소진되는 기이한 현상이 지속될 것이고, 그 여파는 팔리지 않는 재료의 생산자에게 돌아갈 것이다.

“이참에 너희 누나도 재료상에 도전해 보라고 해. 요즘 원산지 돌아다니고 있다며.”

원산지의 생산자들은 새로운 판매자를 선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기회를 잘 이용하면 독점되었던 재료 시장에 큰 틈새를 만들 수 있게 될 터.

“흠…….”

“목말라 죽겠는데 누군가 물을 마시면 결국 못 참고 물병을 여는 게 사람이지. 담합이란 거 생각보다 깨지기 쉬운 거라고.”

나는 비약을 챙겨 가방에 옮겨 담았다.

“누나가 물을 마시는 역할이군요. 이따가 집에 오면 한번 말해 볼게요.”

“그래, 그리고 주변 상인들과 얘기해서 의견을 모아 봐. 재료가 무기가 되면 안 되는 거니까. 게브네 아저씨도 찾아가서 만나 보고.”

“네, 알겠습니다.”

어차피 양쪽 모두가 손해 보는 멍청한 싸움이다.

서로가 안 사고 안 판다고 해도, 양측은 어떤 식으로든 충당하고 판로를 찾아 끼워 맞출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본성은…….

절대로 쉬운 길을 두고 어려운 길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

그저 의지가 강한 쪽이 살아남는 것뿐.

이득을 노리고 모인 단합은, 새로운 이득 앞에 흩어질 수밖에 없다.

그것이 앞으로 게브네가 해야 할 일이고, 그 조력자로 남매 같은 이들을 모아야 할 것이다.

만약 게브네가 그 일을 해낸다면.

‘후후후…….’

나는 위대한 빅터 크로제의 제자이자 아리안의 자작이며, 용병왕 자격을 갖춘 리베의 숨은 실세가 되는 것이다.

* * *

건조하기로 유명한 사라센에서도 더욱 건조한 땅이 있었다.

드넓은 영토의 80%가 사막과 황무지로 이루어져 있고, 끝없이 펼쳐진 마른땅을 지나면 거짓말 같은 화려한 도시가 나온다.

사막 한가운데에 핀 도시의 이름은 바빌리안.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발달한 이 도시는 최근 들어 전례 없는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사람 때문이었다.

얼마 전 새로운 군대가 들어선 바빌리안엔 소문을 접한 상인과 유흥업자들이 앞을 다투어 몰려들었다.

몰려든 사람들은 또 다른 사람을 불러 모았고, 고요했던 사막의 오아시스는 환락으로 가득 찬 불야성이 되었다.

특히나 많은 무희들이 몰려들었는데, 그중에 하나가 살로메가 찾는 소녀였다.

“어디에 숨어 있니.”

야자수 그늘 아래에 앉아 망중한을 즐기던 살로메는 표적을 떠올리며 긴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러고는 태양에 반짝이는 옥빛 호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마른 땅 위에 넓게 펼쳐진 옥색의 호수는 주변 환경과 묘한 대비를 이루며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어디 자연경관만 아름다울까.

호수를 중심으로 늘어선 형형색색의 가옥들은 이곳이 낮선 타국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시선을 자극하며 이질적인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래서 짜증이 났다.

그 많은 가옥들을 빠짐없이 수소문했건만 어딘가에 있을 작은 소녀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제 남은 곳은 두 군데.

여기서도 찾지 못한다면 또 다른 도시를 찾아 정처 없이 이동해야 한다.

물론 상관없었다.

돌아간다고 해도 그곳이 살로메의 집은 아니었으니까.

이 땅에 있는 모든 곳을 갈 수 있지만, 그 어디에도 살로메의 진짜 집은 없었다.

“귀찮은 년이네.”

말 그대로 귀찮을 뿐.

또 뭔가를 물어보고 거짓 웃음으로 비위를 맞추는 과정들이 짜증 나는 것이다.

남자라는 놈들은 그냥 다 똑같았다.

“오, 일찍 나오셨네. 내가 좀 늦었소, 바바라 양.”

“이참에 경치 구경도 하는 거죠. 나름 좋은 시간 보내고 있었답니다.”

이번에 사용하는 모습은 바바라라는 아담한 여인이었다.

작고 여리여리하지만 굴곡진 몸매.

남자들의 허세를 자극하는 바바라의 매력은 살로메의 7변신 중에도 특히 잘난 척하는 놈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왜 그런 놈들 있잖은가.

무언가 아는 척하길 좋아하고, 떠벌리는 걸 즐기는 녀석들.

― 어머, 너무 재미있다. 더 얘기해 주세요. 네?

그런 남자들은 백치미가 살짝 도는 바바라의 표정에 미칠 듯이 빠져들었다.

“내가 바바라 양을 위해서 힘을 좀 써 봤소. 놈들을 구워삶느라 애를 먹었지. 흠흠.”

바로 이놈처럼 말이다.

아직 탐문을 하지 못한 두 군데 업장은 근무하는 무희들과 마주할 수 없었다.

‘비밀 회원제라니.’

회원제로 운영하는 두 업장은 무희들의 신원도 철저히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따라서 출입하는 고객들의 수준이 높은 건 당연하고, 그로 인해 내부의 정보는 더욱 알아내기 힘들었다.

심지어 무희를 가장해 진입을 시도해 봤으나.

― 저희는 찾아오는 무희를 받지 않습니다.

녀석들은 근무하는 무희조차도 철저하게 관리하고 있었다.

고객의 수준이 높은 만큼, 지켜 줘야 할 비밀의 수준도 높아지기 때문이다.

“일단 바바라 양이 얘기한 인상착의로 먼저 조사를 해 봤네.”

“기대되네요.”

바바라의 표정을 살핀 남자는 헛기침을 내뱉곤 다시 말을 이어 갔다.

“155㎝에 하얗고 마른 체형인데 추정 나이가 15세라……. 일단 이런 조건의 무희가 있다는 게 놀라운 일이겠더군.”

그야 나이가 걸리니까.

크루시아 대륙의 그 어떤 나라에서도 16세 이하의 무희는 법으로 금지돼 있었다.

“하지만 더 놀라운 건 그런 무희가 진짜로 있더라는 거지.”

“아, 역시…….”

“크흠, 거듭 말하지만 쉽지 않았네.”

“알고 있답니다. 보답할게요. 기대하셔도 좋을 거예요.”

“크흠흠.”

그에 남자는 얼굴을 붉히며 헛기침을 계속했다.

그러고는 가까이 다가와 앉으며 호수 건너편에 위치한 붉은 지붕을 가리켰다.

“저 집일세. 내일 밤 영업이 끝나면 뒷문으로 그 아이를 데리고 나올 걸세.”

결과를 알리는 남자의 얼굴엔 보답에 대한 기대로 상기되어 있었다.

그 모습이 역겨워 쓴웃음이 나오는 살로메였지만.

“헤도네의 축복이 함께하시길.”

퍽퍽한 남자의 입술을 향해 자신의 붉은 입술을 가볍게 포갰다.

짧은 환희의 대가는 죽음.

털썩―

죽음의 키스를 받은 남자는 고통에 가득 찬 얼굴로 뻣뻣하게 굳어 가기 시작했다.

* * *

집으로 돌아온 나는 계속해서 별에게 시달렸다.

“대련이다, 이반!”

예전엔 쓰러지면 풀 죽고 그랬는데 지금은 무한 도전이다.

방금 대련을 마치고 돌아섰거늘.

“이반!”

녀석은 또다시 좇아와 귀찮게 이름을 불러 댔다.

“아 좀 적당히 하라고!”

거력의 비약인지 뭔지, 괜스레 잘못 먹여서 혹독한 대가를 치르는 중이다.

“날씨가 좋으니 대련 어떤가.”

“구름 꼈잖아.”

“하면 그늘 져서 시원하겠군. 좋아 대련이다.”

아마도 비약의 부작용은 고통이 아니라 정신에 있는 것 같았다.

약을 섭취한 이후로 별은 하루 종일 훅훅 거리며 투견판의 개처럼 어슬렁거렸다.

“크오오오!”

가끔씩 저 혼자 소리도 버럭 질러 대고.

“건방진 놈. 한 방에 썰어 주지.”

아무도 없는 벽을 바라보며 대검을 휘둘러 댔다.

도대체 누구랑 대화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하여간 별은 열심히 떠들고 열심히 휘둘렀다.

‘무서워…….’

아무래도 저 방엔 귀신이 살고 있나 보다.

그것도 건방진 귀신이.

하여간 기력 넘치는 별을 피해 나는 서재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나의 걸음은 서재가 아닌 거실에서 멈춰야 했다.

“괜찮은 거야, 베르?”

“어, 움직일 만해.”

정신을 차린 베르가 비척거리며 나타났기 때문이다.

“후…….”

소파에 앉은 베르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그렇게 숨을 고르고는 마나 포션을 들어 한입에 꿀꺽 들이마셨다.

“미쳤어? 마나 번에서 깨어나면 휴식으로 자연 회복해야지!”

그에 에스카는 성내듯 소리치며 포션을 빼앗으려 했다.

하지만 베르의 태도는 완강했고.

“지금 놓치면 더 찾기 힘들어져.”

중단했던 탐색을 다시 준비했다.

“안 돼, 위험해.”

“해야 돼. 도시로 들어가 버리시면 정말 어려워져. 알잖아. 건물에 사람들까지, 수색 환경 자체가 몇 배로 힘들어진다고.”

만류하는 에스카에게 베르는 단호히 자신의 뜻을 전했다.

에스카 역시 그저 바라볼 뿐.

저런 베르의 모습이 흔하지 않기에 나는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았다.

그렇게 베르의 마법은 다시 시작됐다.

푹신한 소파에 눕듯이 기대앉은 베르는 날아간 알바트로스를 통해 세상을 내려 살피기 시작했다.

* * *

시간은 기약 없는 지나갔다.

내리 쬐던 오후의 햇살이 기울기 시작했고, 창문에 걸친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역시 발견하기 힘든 걸까.

지켜보던 에스카와 나는 막연한 현 상황에 대해 부정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제 슬슬 끝내야 할 시간.

일어선 에스카의 손이 베르의 어깨를 향해 조심스레 다가갔다.

하지만 그 순간.

“…바빌리안.”

푸른 눈동자로 돌아온 베르는 낯선 도시의 이름을 말하며 지친 몸을 일으켰다.

내 목숨 99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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