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목숨 99개-101화 (101/203)

101화

일곱 살 때의 기억이다.

여느 때와 다름없던 화창한 그날.

한가롭게 정원을 거닐던 어머니와 작은 소년은 그들 앞으로 전해진 작은 상자를 바라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뭐죠?”

“전장에 계시는 카라얀 님의…….”

아버지의 안부를 전하는데 이 상자는 왜 내미는 걸까.

소식을 전하러 온 아버지의 부관은 침통한 표정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어머니 제가 열어 볼까요?”

“아니다. 너는 물러나 있는 게 좋을 것 같구나…….”

소년의 의문이 정점에 이를 무렵, 어머니는 떨리는 손으로 닫혀 있는 상자를 열었다.

모습을 드러낸 건 흐린 눈을 한 아버지의 수급.

“허억!”

“이, 이게 무슨!”

경악하는 사람들 사이로 소년의 어미는 무너지듯 쓰러졌다.

그날 처음 알았다.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이 죽을 수 있다는 것을…….

“마님!”

“어, 어서 안으로 모셔라!”

소년의 지옥은…….

그날부터 시작되었다.

― 쯧쯧… 저 불쌍한 아이를 어찌할꼬.

처음은 그랬었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천애고아가 된 소년에게 따스한 온정의 손길을 보내 왔다.

아버지를 대신해 가문을 이끌어야 한다고.

우리가 너를 도와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그렇게 사람들은 소년의 가문을 좀먹기 시작했다.

“영지에 가뭄이 들어 영지민들이 고생이 심합니다. 우리가 곳간을 열어 그들을 도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큰일이군요. 저는 잘 모르니 경께서 알아서 영지민들을 살펴봐 주세요.”

“훌륭하십니다. 도련님에 대한 영지민들의 칭송이 하늘을 가릴 것입니다.”

허기진 그들에게 있어 이 가문은 잘 차려진 진수성찬이었다.

수많은 재화와 보물들이 자취를 감추고, 끝이 보이지 않았던 가문의 땅이 하나둘 지워지기 시작했다.

여기는 이런 이유로, 저기는 또 다른 이유로.

그렇게 줄어들기 시작한 가문의 영토는 기거하는 저택 하나만 남긴 채 소리 없이 사라졌다.

안타깝게도 소년은.

그런 승냥이들의 웃음에 밝은 미소로 화답해 주었다.

“아버님께서도 도련님 나이에 검을 잡으셨다고 합니다.”

“정말인가요?”

“그럼요. 훌륭한 아버지의 피를 이었으니 도련님도 훌륭한 무인이 되실 겁니다.”

그래서 소년은 노력했다.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고사리 같던 손에 검을 쥐어 기억 속 아비를 따라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또 다른 하루가 찾아왔다.

작고 여린 손에 가득했던 쓰린 물집들은 터지고 아물길 반복하며 굳은살로 변해 갔다.

“역시 핏줄은 속일 수 없나 봅니다. 하하하.”

“그렇군요. 무스타파의 피가 어디 가겠습니까.”

그런 소년에게 사람들은 아낌없는 칭찬을 쏟아 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장하십니다, 도련님. 꼭 그렇게 되실 겁니다.”

처음엔 그런 줄 알았다.

대륙의 지존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자신도 훌륭한 무인이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나 소년의 키가 훌쩍 자라 어른이 될 무렵.

소년은 무예의 재능이 없음을 그제야 깨닫게 되었다.

피를 토하는 시간을 인내했건만, 그의 도전은 5성 이라는 벽 앞에서 비참하게 무릎을 꿇어야 했다.

소년은 그제야 알아차렸다.

늘 웃어 주던 승냥이들마저 모두 떠나고 없다는 것을.

그렇게 소년은 버려졌고, 사람들은 그를 향해 멸문한 검술가의 재능 없는 아들이라 불렀다.

복수하고 싶었다.

이 썩어 문드러진 세상을 향해.

나와 가문을 뜯어먹고 피둥피둥 살을 찌운 살찐 승냥이들을 향해, 또 아버지를 죽여 가문을 몰락시킨 원수를 향해 잔혹한 최후로 보답하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청년이 된 소년은 낯선 남자를 만나게 되었다.

― 사라센 흑마탑에 가면 그대를 도울 방법이 있을 것이오.

기연이라고 해야 할까.

이름 모를 그 남자의 말에 홀린 듯 흑마탑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것은 소년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 주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강해질 수만 있다면 목숨도 바치겠다.”

“허… 다짜고짜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하하하하.”

그 한마디에 흑마법사는 껄껄 웃었다.

“어떻게 찾아오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마침 좋은 방법이 있는데… 한번 도전해 보시겠습니까?”

“무엇이든 하겠다.”

“좋소. 내 이름은 사마르라고 하오.”

자신을 사마르라고 소개한 그 남자는 청년이 된 그에게 복수할 수 있는 힘을 주었다.

부모를 잃은 소년은 재능 없는 검술가의 아들이 되었고, 그 아이는 자라 스스로 괴물이 되길 자처했다.

비웃음거리로 전락한 가문의 이름을 위해.

카리프 무스타파는 끔찍한 고통의 시간을 묵묵히 견뎌 강화 인간으로 거듭났다.

한데 그 사람은 누구였을까.

이름 모를 그 남자는, 비참한 나날을 보내던 카리프에게 흑마탑을 소개해 줬다.

배신으로 가득 찬 그의 삶에 있어 유일한 등불이었던 그 남자.

카리프는 단정히 빗어 넘긴 금발을 떠올리며 등받이 깊숙이 몸을 파묻었다.

* * *

“너무 무리하는 것 아니야? 어제도 하고 오늘까지 하면 마나 번이 올 거야.”

“그래서 마력 쓸 일은 미리 다 해 놨잖아. 혹시 번아웃되더라도 며칠은 상관없어.”

푹신한 1인용 소파로 다가간 베르는 에스카의 걱정을 흘리며 밝은 표정을 지었다.

한데 하나도 밝아 보이지 않았다.

말이야 태연하게 하고 있지만, 얼굴에 드러난 피로감은 감출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런데 제가 봐도 좀 쉬셔야 할 것 같은데요.”

“내 생각도 그렇다. 눈도 퀭한 것이, 널어놓은 마른 생선을 보는 것 같다.”

이렇게 말이다.

염려를 보태는 나의 말에 별은 더욱 직설적인 표현을 추가했다.

“마른 생선이라뇨. 하하하…….”

그에 베르는 슬프게 웃으며 준비를 이어 갔다.

그런데…….

솔직히 내가 봐도 그렇게 보이긴 한다.

한데 어쩌겠나.

본인이 괜찮다니까 그런가 보다 할 수밖에.

“이렇게 시야를 공유하면 어디까지 확인할 수 있는 건가요? 대수림 정도만? 아니면 좀 더 멀리도 가능한가요?”

나는 근처에서 퍼덕거리는 알바트로스를 보며 마법의 효용에 대해 질문했다.

“그건 시야를 공유하는 대상의 비행 능력과 저의 마력 량에 따라 다르겠죠. 저 녀석 같은 경우라면 최대 브라함 근처까지는 갈 수 있을 겁니다.”

“와우…….”

“아주 자세한 확인이 필요할 땐 종류를 바꾸기도 하지요.”

질문에 답한 베르는 그대로 소파에 기댔다.

그리고 에스카는 테라스로 나가 알바트로스를 준비시켰다.

“좋아, 시작하자.”

가벼운 베르의 신호로 거대한 새는 힘찬 날갯짓을 했다.

살짝 아래로 가라앉는 듯하더니, 이내 바람을 타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

그것이 전부였다.

뭔가 휘황찬란한 걸 기대했는데 베르는 그저 조용히 누워 있을 뿐이었다.

특이점이라면 안구의 색상이 바뀌었다는 것인데, 푸른색의 베르의 눈은 잿빛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후로는 기나긴 기다림이었다.

찾는 사람이야 바쁘겠지만, 우리는 할 게 없으니까.

호기심에 곁을 지키던 나는 결국 포기하고 테라스로 향했다

반나절 가까이 버텼으니 지루할 수밖에.

하여 길거리를 구경 중인 별에게 다가가 양손 검지를 세웠다.

이대로 옆구리를 쿡―

하고 찌르면.

“꺄하하!”

어울리지 않는 소리를 지르며 미친 듯이 몸부림을 친다.

이후로 주먹이 날아오는 단점이 있지만.

“꺄하하하하!”

녀석의 주먹을 요리조리 피하며 집요하게 약점을 공략했다.

반응이 워낙 강렬해 놀리는 맛이 있어 재미 들리면 계속하게 된다.

하지만 나는.

“찾았다.”

지친 베르의 음성에 하던 장난을 멈춰야 했다.

그에 나는 고개를 돌렸고.

빠각!

분노에 가득 찬 별의 주먹이 나의 턱을 강타했다.

[충격 내성으로 인해 대미지가 감소하였습니다.]

따라서 별다른 느낌은 없었지만.

“아이고…….”

나는 얻어맞은 턱을 문지르며 베르에게 다가갔다.

주먹질하는 보람은 느껴야 할 테니까.

소란을 정리한 나는 베르의 곁에 앉아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후…….”

본래의 눈동자로 돌아온 베르는 긴 한숨을 내쉬며 호흡을 가라앉혔다.

그러고는 자신이 발견한 사실을 미심쩍게 얘기했다.

“찾긴 했는데… 그게 하필 사라센이네.”

“뭐라고? 스승님께서 사라센을 왜? 잘못 본 거 아니야?”

그에 에스카는 대놓고 베르의 말을 의심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라센에서 빅터의 존재는 언젠가 반드시 제거해야 하는 최대의 적이기 때문이었다.

그 사실을 빅터가 모를 리 없을 터.

“아니야. 정확하게 봤어. 조금 전에 한 남자와 사라센 국경을 넘으셨어.”

하나 이어진 베르의 말은 그런 에스카의 말을 완벽하게 부정했다.

“같이 있는 남자는 그때 그 치료사가 맞네. 그 사람이 그레이시였어.”

그리고 베르는 미지의 인물에 대한 해답도 함께 알려 주었다.

종잡을 수 없는 빅터의 행적에 모두의 얼굴이 복잡해졌다.

본래 어디로 튈지 모를 괴팍한 영감이라지만, 이건 좀 너무 뜬금없잖은가.

사라진 지 4일 만에 모습을 드러낸 빅터는 그레이시와 함께 사라센으로 향하고 있었다.

“후… 나 잠깐만 쉬다올게.”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난 베르는 세 걸음만에 기절하듯 쓰러지고 말았다.

* * *

쓰러진 베르를 침대에 눕힌 나와 별은 페드로의 가게인 현자의 돌로 향했다.

며칠 전에 부탁한 거력의 비약이 완성되는 날이기 때문이다.

“내가 마른 생선 같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게 있다가 쓰러질 줄 알았다.”

가는 길에 별은 베르의 얘길 입에 담았다.

언뜻 들으면 빈정거리는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웬일이야. 다른 사람 얘길 다 하고.”

녀석의 입장에선 나름 걱정하고 있다는 마음의 표현이었다.

별은 그런 녀석이니까.

이 정도로 입에 담았다면, 꽤나 신경 써 주고 있다는 증거라 할 수 있다.

“그가 비실비실해서 그렇다. 남자라면 그대처럼 크고 강해야지.”

결국 마무리는 내 얘기로 끝이 났다.

“흠흠.”

나야 뭐.

여러모로 크고 강하니까.

어쩐지 으쓱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상점에 들어섰다.

“오셨습니까, 형님!”

“오냐.”

살가운 페드로의 인사를 받으며 나는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페드로는 작은 시약병을 챙겨 카운터 위에 올려놨다.

“이거야?”

“네, 맞아요.”

그중 하나를 들어 내용물을 살펴보았다.

색상은 와인 비슷한 느낌이었고, 점도는 조금 찐득해 조린 과일즙을 보는 것 같았다.

“그런데 정제할 때 혈액 소모가 의외로 많아서 생각했던 것보단 개수가 적게 나왔어요.”

“그렇구나.”

완성된 결과물은 채취해 온 귀신버섯과 똑같은 10병이었다.

“만든다고 고생했겠네. 수고했다. 고마워.”

나는 그 즉시 뚜껑을 따 한입에 털어 넣었다.

이리저리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효과 보려고 만든 시약이고, 완성됐으니 확인하는 거였으니까.

“엇, 그거 그렇게 막 드시면 안 돼요!”

하나 페드로는 기겁을 하며 카운터를 뛰어나왔다.

“부작용이 있어서 진통제를 먼저 드시고 먹어야 해요! 그냥 드시면 큰일 난다구요!”

마치 독약을 마신 사람이라도 본 듯 녀석은 요란을 떨며 또 다른 약병을 내밀었다.

보아하니 진통제 같은데…….

“흠.”

굳이 마셔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으니까.

“형님은 왜 멀쩡하신 거죠?!”

페드로의 말대로 부작용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 대신 나의 눈앞엔 이런 글이 떠올라 있었다.

[미약한 기운이 체내에 흡수됐습니다.]

그게 끝이었다.

아무런 변화도 없었고, 부작용 같은 건 먹고 죽으려 해도 없었다.

뭐지?

약효가 생각보다 약한 건가.

짧았던 나의 기대는 실망과 당혹감으로 끝나 버렸다.

“흐음…….”

의아해하는 녀석에게 딱히 해 줄 말이 없었다.

아무 반응이 없으니 해 줄 말도 없을 수밖에.

대신 한 가지 집히는 건 있었다.

그것은 미약한 기운이라 표시된 내용.

즉, 복용해서 효과를 보기엔 이미 나의 기운이 월등하게 높았단 얘기다.

흐르는 강물에 물 한 바가지 붓는다고 달라질건 없을 테니까.

나는 페드로가 내민 진통제를 들어 별에게 넘겨주었다.

“어쩌라는 건가.”

“한잔하라고.”

약병을 받아 든 별은 단숨에 진통제를 들이켰다.

사실 거력의 비약은 애초부터 삼인조를 떠올리며 만든 약이었다.

체내에 오러와 마력의 기운이 있으면 효과를 볼 수 없고, 일반인은 견디질 못해 복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완벽하게 나와 반투족을 위한 비약.

하지만 나는 시스템이란 녀석의 도움을 받고 있으니, 이 시약은 삼인조에게 주고 싶었다.

녀석들의 강함이 곧 나의 힘이 되어 줄 테니까.

어쨌거나 나에겐 효과가 없었고, 이제 본래 목표였던 별의 순서가 돌아왔다.

“고통스럽다니까 각오하고 마셔.”

“흥. 반투족에게 고통이란 유흥일 뿐이다.”

별은 호기롭게 외치곤 단숨에 비약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효과는 그 즉시 일어났다.

“크어어억!”

부작용이 시작된 것이다.

진통제를 복용했음에도 별은 바닥에 쓰러져 고통에 몸부림쳤다.

“이거 괜찮은 거야?!”

예상을 넘는 별의 반응에 나는 당황하며 페드로를 바라보았다.

녀석이라고 뾰족한 수가 있겠나.

페드로는 허겁지겁 달려가 오래된 책을 뒤적거렸다.

“하… 약효를 받아들이면서 생기는 부작용이니까 스스로 견디는 수밖에 없나 봐요.”

결국 고통은 오롯이 별의 몫이었다.

하지만 별은 견뎌 냈다.

긴 시간을 몸부림쳐 땀에 흠뻑 젖은 별은, 널브러진 대검을 주워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다짜고짜 대검을 휘둘러 나의 몸을 노려왔다.

“막아 봐라.”

그에 나는 해머를 들어 올렸고.

“어억?!”

묵직한 녀석의 검에 멍청한 소릴 내뱉고 말았다.

내 목숨 99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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