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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숨 99개-99화 (99/203)

99화

결론부터 말하자면 박살 났다.

내가 아니라 알브 족을 말하는 것이다.

마법을 잘 쓰는 건 알겠는데, 전장에서 마법사가 후위에 있는 건 나름의 이유가 있어서다.

철광산에서 브루스가 그랬듯이 근접전이 시작되면 마법사는 힘을 쓸 수 없었다.

게다가 이 녀석들의 마법은 초급을 갓 넘긴 수준이었다.

파이어 볼트…….

아이스 볼트…….

라이트닝 볼트…….

그 밖에 기타 등등.

여러 속성의 공격을 다양하게 하는 것은 역시 알브족다웠지만, 마법의 수준이 낮았다는 게 녀석들의 발목을 잡았다.

“알겠냐? 먼저 물어봤으면 이런 일 없잖아.”

“죄송합니다.”

“저는 물어보자고 했는데 파파야가 갑자기 덤벼서.”

“윽, 배신자 놈들!”

응징당한 알브족은 서로에게 책임을 넘기며 아옹다옹하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처지를 금방 잊은 모양이랄까.

“조용히 안 해?”

윽박지르는 나의 한마디에 녀석들은 소란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마치 어른들에게 혼나는 꼬마들처럼, 무릎을 꿇은 녀석들은 두 손을 높이 들고 입술을 삐쭉이며 그렁그렁한 눈을 굴려 댔다.

그렇다.

작고 비율 좋은 이 알브족은 알고 보니 어린 꼬맹이들이었다.

“어른들은 어디가고 너희들이 경계를 서는데?”

“그놈이 갑자기 마을로 향하는 바람에 막으러 가셨어요.”

“그놈?”

“데스 아이요. 토벌하러 오신 그놈.”

하여 우리는 데스 아이가 출몰했다는 지점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걸음을 재촉했는데…….

“잠깐 스탑!”

뒤를 따르던 나는 가던 걸음을 멈추고 녀석들을 불러 세웠다.

이대로는 안 되겠으니까.

나름 길을 안내하겠다고 달리는데, 이 녀석들 느려도 너무 느리다.

“너희들 이리 와 봐.”

“네?”

짧은 다리로 달리려니 그 속도가 어련하겠나.

올망졸망한 꼬마 알브족을 끌어안고 출몰 지역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주변의 풍경은 극적으로 변해 갔다.

퍼석한 사암 계곡을 지나 들풀들이 모습을 드러냈고, 솟아오른 아름드리나무가 녹색의 벽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앞에는.

“눈을 마주하지 마라!”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진짜 알브족이 있었다.

“싸우려 하지 말고 방향만 바꾸면 된다! 무리하지 말고 놈이 가는 길만 막아라!”

난장판이 된 숲 사이로 늘씬한 남자가 상황을 지휘하고 있었다.

길게 흐르는 백발에 날카로운 턱선.

조각상처럼 생긴 남자는 공격과 지휘를 넘나들며 데스 아이와 전투를 이어 갔다.

“저 남자는 누구야?”

“족장님이세요.”

“아빠에요.”

정체를 묻는 나의 말에 두 가지 대답이 동시에 돌아왔다.

족장이라는 말은 이해했고, 아빠라는 말의 출처를 찾아 시선을 돌렸다.

녀석이었다.

파파야라고 불렸던 작은 소녀.

녀석은 초롱초롱해진 눈으로 아빠의 모습을 열심히 좇고 있었다.

“시작된다. 모두 물러나서 눈 감고 귀를 막아라!”

다급한 족장의 외침에 알브족들은 저마다의 방법으로 소리를 차단했다.

누군가는 주저앉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그들은 두 눈을 질끈 감으며 귀를 틀어막았다.

원인과 결과를 예측할 수 없던 막연하고 답답한 순간.

그어어어어어어어어―

폐부를 진동시키는 저음이 바람을 타고 울려 퍼졌다.

그것이 신호였다.

멀쩡하던 심장이 두근거리며 뛰기 시작했고, 불편한 울렁거림이 감각을 지배했다.

이제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초유의 감각.

갑작스레 찾아온 이 낯선 느낌은, 전신으로 퍼져 나가며 나의 몸을 나른하게 만들었다.

이런 기분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설명할 수 없는 생소한 감각에 나의 몸은 조금씩 힘을 잃어 가고 있었다.

왜 이렇게 피곤하지.

귀찮은 건가?

불현 듯 떠오른 생각은 이 감각의 정체를 무력감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고작 소리 한번 울렸을 뿐인데.

나의 몸은 물에 젖은 솜처럼 축 늘어지는 기분이었다.

하나 이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곁에 있던 아이들은 눈을 까뒤집은 채 기절했고, 무방비 상태로 서 있던 별은 머리를 감싸 쥐며 주저앉았다.

선연히 보이는 떨림은 차마 말할 수 없을 정도.

둘러본 전투의 현장은 바닥을 기는 알브족들로 처참한 모습을 연출하고 있었다.

“의식이 남은 자는 동료를 챙겨 후퇴한다!”

비척거리며 외치는 족장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상태를 추슬러 지휘를 이어 갔지만, 떨리는 그의 다리는 꺾였다 서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참살의 현장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모습을 드러낸 데스 아이는 커다란 눈알을 굴리며 느릿하게 수풀을 지나쳤다.

말 그대로 눈알이었다.

그냥 사람보다 거대한 눈알이 미끄러지듯 유영하는 것이다.

기괴한 놈의 본체가 쓰러진 알브족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눈알 옆으로 솟은 촉수를 이용해 남자의 몸을 덮쳤다.

“미친…….”

굳어 있던 남자는 그렇게 사라졌다.

입도 없는 괴상한 놈에게…….

단 한 번의 저항도 못해 본 채 남자는 빨려 들 듯 녀석의 촉수에 집어삼켜졌다.

상황은 다시 변했다.

그어어어어어어어어―

가슴을 파고드는 괴음과 함께 데스 아이의 눈은 굳게 닫혔다.

“지금이다! 활동 가능한 자는 공격을 시도하며 마을 반대편으로 후퇴한다!”

하나 그 명령을 이행할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공격은커녕, 무기력해진 몸을 추스르는 것조차 그들에겐 힘겹게 느꼈다.

그제야 알 수 있었다.

듀란의 팀이 왜 실패했는지.

“제기랄…….”

놈의 음성을 듣는 순간 온몸이 무거워지고, 녀석의 눈과 시선을 마주한 이들은 몸이 굳어 움직이질 못했다.

유일한 방법은 그저 눈을 감고 귀를 틀어막는 것뿐.

시선을 피한 이들만이 간간히 움직이며 쓰러진 자들을 부축해 도망치고 있었다.

이런 이유였던 것이다.

싸우려 하지 말고 방향만 유도하라는 건, 사실상 싸울 방법이 없기 때문이었다.

“마법이 안 통해…….”

아, 그게 아닌가.

마법이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건 데스 아이가 아닌 알브족 탓인 것 같다.

쓰러진 자들은 차치하고, 서서 움직이는 자들의 마법 또한 어딘가 모르게 이상했다.

덩치만 큰 아이 같다고 해야 하나.

겉모습은 요란한데 결과는 허무하기만 했다.

이대로 있다간 전멸을 면치 못할 터.

나는 무거워진 다리를 움직여 힘겨운 걸음을 내딛었다.

“크윽!”

도대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가는 떨림은 여전히 계속됐고, 의욕을 잃은 몸은 주박에 걸린 것처럼 힘겹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는 주인을 거부하는 다리를 움직여 전장을 향해 다가갔다.

그 한걸음이 또 다른 걸음으로 이어지던 순간.

그어어어어어어어어―

놈의 감긴 눈이 떠지며 끔찍한 괴성이 다시금 울려 퍼졌다.

또 다른 절망의 시작이었다.

미처 대응하지 못한 이들은 속절없이 무너지며 무력감에 잠식됐다.

누군가는 바닥에 엎드린 채.

또 다른 누군가는 풀려 버린 눈으로 석상처럼 굳어 버렸다.

상황은 나락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굳어 버린 알브족들이 데스 아이의 촉수에 빨려 들어갔다.

놈의 크기는 더욱 커졌고, 또 다른 먹잇감을 찾아 녹음 짙은 숲을 가로질렀다.

그러던 놈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아니, 방향만 같을 뿐 데스 아이의 목적지는 힘겹게 움직이는 족장이었다.

“포기하지 마라! 다들 움직여!”

족장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미끼가 돼 버린 파파야의 아빠는 효과 없는 마법을 날리며 놈의 시선을 붙잡고 있었다.

한데 나는…….

멍청하게 서서 뭘 기다리고 있는 걸까.

이대로 끝나기를 기다리나?

빌어먹을.

살면서 가장 열받는 순간이 무엇인지 아는가.

바로 지금 같은 상황이다.

무기력한 나의 모습을 그저 지켜보기만 해야 하는 개 같은 상황.

“크으윽!”

나는 천근같은 다리를 움직여 다가오는 놈을 향해 마주 걸었다.

한 걸음.

그렇게 또 한 걸음.

무방비 상태로 당한 나의 몸은 서서히 주인의 명령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의 눈앞엔.

[사용자의 의지가 육체를 지배하기 시작합니다.]

[현 상황에 대한 데이터 수집.]

[데이터 분석 중…….]

[분석 완료.]

[시스템 보정을 시작합니다.]

[시스템 보정 10%…….]

언젠가 보았던 익숙한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고 있었다.

놈을 향한 나의 걸음은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했고.

[보정 완료. 새로운 스텟 의지력을 생성해 적용했습니다.]

[의지력 스텟으로 인해 상태 이상 저항이 발현되었습니다.]

[상태 이상 저항으로 인해 무력감이 감소합니다.]

마침내 나는 흉물스런 데스 아이의 눈에 날카로운 피켈을 때려 박았다.

그어어어어어어어어―

폐부를 찌르던 놈의 소리는 더 이상 없었다.

나에겐 그저 시끄러운 단말마의 비명처럼 들릴 뿐.

날아오는 촉수를 향해 묵묵히 잿빛 해머를 휘둘렀다.

퍼어엉!

맞닿은 촉수가 육편이 되어 허공을 나르고, 물컹한 데스 아이의 몸이 피켈에 찢겨 나갔다.

그것이 끝이었다.

용병왕 듀란을 박살 낸 데스 아이는 의지력이라는 스탯 앞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쓰러진 알브족들이 하나둘 몸을 일으켰다.

누군가는 두 팔을 흔들었고, 달려온 꼬맹이는 반가운 얼굴을 향해 작고 가벼운 몸을 날렸다.

“아빠!”

족장의 품에 안긴 파파야는 반달 같은 눈웃음으로 아빠를 마주했다.

* * *

“이 고마움을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소. 정말 감사하오.”

알브족의 족장은 거듭 감사의 말을 전하며 고개를 숙였다.

도도하다는 소문은 편견이었나.

지금까지 본 족장의 모습은 겸손하고 진실하기만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놈의 이상한 괴성 때문에 마법을 제대로 시전할 수 없었소. 하여 지금껏 속수무책으로 당해 왔는데 덕분에 부족의 안전을 도모하게 되어 깊이 감사하고 있소.”

이렇듯 받은 도움에 대해 낮은 자세로 보답하니, 곁을 지키던 알브족도 나에게 깊은 감사를 표시했다.

“저야 의뢰를 수락했을 뿐인데요.”

나는 반으로 접힌 의뢰서를 펼쳐 족장에게 보여 줬다.

“부끄럽소. 우리가 바깥 생활을 하지 않기에 물질적인 보상은 빈약하오만, 언젠가 당신을 도울 날이 온다면 그땐 알브족의 이름으로 그대의 편에 설 것이오.”

그에 알브족의 족장은 비장한 얼굴로 맹세하듯 보은을 약속했다.

심지어 부족의 이름으로.

“어차피 당신 아니면 죽었을 목숨… 도울 날이 오길 기다리고 있겠소.”

“네. 도움이 필요할 때 부탁드리겠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얻기 힘든 게 사람의 마음이라고 했던가.

오지랖으로 시작된 나의 여정은 이렇게 또 하나의 인연을 만들며 순조롭게 마무리됐다.

‘부족 전체의 도움이라.’

돈 몇 푼보다야 그편이 훨씬 값지겠지.

어떻게 변할지 모를 난세가 다가오고 있으니까.

“나의 이름은 타르가.”

“저는 이반입니다.”

그렇게 우린 통성명을 끝냈고.

“그대는…….”

“됐다. 반투족 전사의 이름은 가볍지 않다.”

이름을 묻는 타르가의 말에 별은 무심하게 대답했다.

서로 맞지 않는 부족의 특성 탓일 수도 있겠지만.

‘하여간 솔직하지 못하다니까.’

녀석의 성격상 아무것도 하지 못한 자신을 질책하며 타르가의 인사를 외면하고 있을 것이다.

한데 그게 숨긴다고 되는 것이겠나.

“고마워요, 언니.”

“무엇이 고맙다는 것이냐.”

“기절한 우리들을 끌어안고 지켜 주셨잖아요.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활짝 웃으며 인사하는 꼬마들의 모습에 별은 얼굴을 붉히며 뒤돌아 걷기 시작했다.

내 목숨 99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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