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아침 식사를 마친 나는 느긋하게 용병 조합으로 향했다.
역시나 오늘도 화창하고 좋은 날씨다.
적당히 시원한 바람이 목덜미를 스치니 담판을 지으러 가는 길마저 가볍게 느껴졌다.
“계획은 있는 건가.”
“당연하지.”
계획을 묻는 별의 말에 나는 자신감 넘치는 말투로 대답했다.
누구에게나 계획은 있으니까.
하지만 중요한 건 누구나 계획을 이루진 못한다는 것이다.
“잘됐으면 좋겠군.”
“응, 그렇게 될 거야.”
준비한 계획을 이룰 수 있는 조건은 간단하다.
실행에 옮길 수 있는 능력이 나에게 있는가.
이 질문 하나면 모든 게 정리된다.
구태여 계획의 치밀함을 논할 필요도 없다는 얘기다.
어차피 능력이 안 되면 백약이 무효하고 생각은 망상으로 변할 뿐이다.
그리고 나에겐.
“어서 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모든 계획을 현실로 만들 힘이 있다.
남은 건 번거로운 과정을 하나씩 밟아 나가는 것뿐.
“그래요. 이제 어떻게 풀어 나가실 생각인가요?”
계획을 묻는 용병 조합장의 말에 나는 오히려 반문했다.
“용병들이 사람을 평가하는 방법이 뭐겠습니까?”
무엇을 가장 최우선하는지.
“두말 할 것 없이 힘이죠. 용병에겐 수주 등급이 자존심이니까요. 곁에 있는 반투족 여전사님도 이게 어떤 느낌인지 잘 아실 겁니다.”
조합장은 별을 바라보며 넌지시 공감을 유도했다.
굳이 그럴 필요도 없었다.
반투족이야 힘이 따르다 못해 숭상하는 부족이니까.
“당연한 얘기다. 전사는 아무에게나 머리를 숙이지 않는다.”
질문의 요점이 이것이었다.
새로운 조합장이 선출되려면 용병들의 동의가 필요한데, 녀석들이 행실이 그리 곱지 않다는 것이 걸림돌이다.
찬성의 대가로 금품을 요구하는 건 기본이었다.
그것을 빌미로 무리한 부탁을 하는 경우도 많았고, 협박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그들이 이러는 이유가 뭐였을까.
조합장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그냥요.”
어차피 그들은 조합장이 누가 되건 관심 없었다.
그저 죽지 않고 오늘 하루도 무사히 넘길 수 있는 것이 최대의 관심사이자 목표인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새로운 조합장이란, 오래간만에 찾아온 재미있는 놀 거리에 불과했다.
하나 이 모든 악습을 한 번에 잠재울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힘.
최강자가 움직이면 그 이하는 알아서 따라간다.
높은 파도가 움직이니 생각 없이 따라갔다 적당히 돌아오는 것이다.
“그래서 이걸 하려고요.”
나는 7개월째 방치된 의뢰서를 뽑아 조합장 앞에 당당히 내밀었다.
“이, 이걸 하겠다는 겁니까?”
“네.”
“음… 보시다시피 일단 7성이라는 단서가 붙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승급 증명서는 있으신가요?”
“아니요. 하지만 비슷한 것은 있습니다.”
나는 제논 백작이 적어 준 증명서를 테이블 위로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아리안의 카슈타르 영주가 저의 능력을 보장해 준 증명서입니다.”
조합장에게 내민 서류는 카잔을 넘어갈 때 사용했던 증명서였다.
고급스런 종이 위엔 가문의 문장이 찍혀 있었고, 반투족 흉내를 내야했던 나를 위해 제논 백작은 7성에 준하는 자라고 표기해 놨다.
“흠… 그렇다고 해도 이건 하지 마세요. 의뢰가 들어와서 어쩔 수 없이 올려놨지만, 이건 수주하라고 받은 의뢰가 아닙니다.”
하지만 조합장은 고개를 저으며 완강하게 만류했다.
그도 그럴 것이.
[데스 아이 토벌]
보상 : 10골드.
수주 조건 : 7성 혹은 7서클 이상.
수주 조건이 무려 7성이기 때문이었다.
한데 보상은 10골드.
대륙을 통틀어 고작 일곱 명뿐인 사람들이 나서기엔 동기부여가 너무 적다.
거기에 카리프까지 합친다 해도 여덟 명이고 나를 포함하면 아홉 명이다.
리베의 어딘가에도 분명히 있을 텐데 그들은 나서지 않고 있다.
7개월이나 방치됐다면 수주할 생각이 없다는 뜻일 터.
“이 의뢰는 사실 알브족이 올린 의뢰입니다. 원체 세상과 담을 쌓은 부족들이다 보니 금전 개념도 희박하죠. 의뢰 당시에도 그냥 있는 것 없는 것 다 모아서 맡긴 게 저거였습니다.”
그거야 내겐 상관없는 문제였다.
보상을 바라고 하는 일이 아니었으니까.
조합장 문제도 해결할 겸 현재 내 상태가 어느 정도인지 명확하게 선을 그어 보고 싶었다.
“그리고 이 의뢰는 이미 한 번 실패했던 전적이 있었습니다.”
“아, 그래요?”
“네. 듀란의 팀이었습니다. 설마 모르시진 않겠죠?”
“용병왕 듀란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이름이라면 알고 있습니다.”
관심이 없더라도 알 수밖에 없었다.
열손가락에 꼽히는 7성 중에 한 명이 바로 듀란이니까.
나의 대답을 들은 조합장은 굳은 얼굴로 당시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듀란은 카잔 출신의 기사입니다. 한때 기사단의 부단장까지 올라갔던 사람인데, 권력 싸움에 밀려 고국을 버린 사람이죠.”
“아깝게 됐네요.”
“이곳 리베엔 그런 사람들이 많은 편이죠.”
낯선 얘기는 아니었다.
정치와 권력을 등진 사람들이 이곳에 모였다는 건 이미 알고 있던 얘기였으니까.
“하여간 결론부터 말하면 실패했습니다. 심지어 팀을 이뤄서 갔는데, 여섯 명 중에 네 명이 사망하는 대참사로 마무리됐지요.”
“그 사람들 수준은 어떻게 됐는데요?”
“듀란을 제외한 다른 이들은 6성급이었습니다. 의뢰 수주자가 조건을 충족했기에 문제는 없던 상황이었죠.”
한데 네 명이나 죽어서 왔다면 보통 녀석은 아니란 얘기일 터.
“그 뒤론 계속 방치된 상태였습니다. 사실 더 이상 해결할 방법이 없는 의뢰인 셈이죠. 그러니 이 의뢰는 포기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조합장의 긴 설명은 이렇게 끝났다.
그는 나의 안전을 염려하며 뽑아 온 의뢰를 되돌리라 권유하고 있었다.
‘흠…….’
설명을 듣고 나니 의뢰서가 다르게 보이긴 했다.
한층 더 위험하게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오늘 출발할게요.”
하여 나는 이 의뢰를 끝내기로 결심했다.
“예? 아, 뭔가 제 설명이 부족했던 것 같은데…….”
“아니요. 말씀은 충분히 잘 들었습니다.”
그날 카리프를 만난 이후로.
아직까지 나는 이렇다 할 상대를 마주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의 소소한 상황이 싫은 건 아니지만, 죽음을 목전에 둔 치열함이 그리운 건 어쩔 수 없는 감정이었다.
그래서 더욱 하고 싶어졌다.
시작은 게브네를 돕기 위함이었지만, 이 순간부턴 나를 위해서다.
조금 더 높은 곳을 위해, 그리고 나의 한계를 다시 한번 넘어서기 위해.
“다녀와서 뵙겠습니다.”
의뢰서를 접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출입구로 향했다.
* * *
“이봐 그게 사실이야?”
“네! 사실이라니까요. 몇 번을 말해요?”
“허허…….”
이반이 떠나간 용병 조합은 술렁이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게시판 한쪽을 장식하고 있던 의뢰서 하나가 어느 순간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누가 수주했는데?
“조금 전에 나간 잘생긴 분 있잖아요. 얼굴에서 막 광채가 나시던 분요. 그분하고 반투족 한 명이 함께 수주했어요.”
이반이 들고 나간 7개월 묵은 의뢰서가 이 소란의 이유였다.
“이 의뢰는 형식상 올려 둔 것 아니었어? 수주 금지로 알고 있었는데?”
“맞아요. 그런데 조합장님이 특별히 허락해 주신 거예요.”
“조합장이?”
그에 접수창구 앞은 도떼기시장처럼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저 의뢰가 어떤 존재였나.
리베 용병왕 듀란의 실패가 각인된 금단의 열매였다.
취하는 자는 최강의 자리에 오를 수 있지만, 그 누구도 손대지 못했다.
누구에게나 목숨은 하나뿐이고.
그 하나뿐인 목숨을 위해 인간은 평생을 바치기 때문이다.
한데 지금.
흉물스럽게 방치돼 있던 한 장의 의뢰서는 누군가의 손에 모습을 감추었다.
“성공할 수 있을까.”
“에이… 여섯 명이 가서 네 명이 죽었는데 둘이서 어떻게 토벌하겠어.”
사람들의 분위기는 부정적이었다.
그만큼 듀란의 그림자는 짙었고, 그가 아닌 다른 강자는 없을 것처럼 사람들은 이반의 실패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중에 한 사람.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것이 영웅 아니겠습니까. 한번 지켜보죠. 새로운 영웅이 탄생하는지.”
실패의 주인공이었던 듀란은 덤덤히 말하며 의뢰 게시판으로 다가갔다.
* * *
의뢰자인 알브족의 영토는 미르니 철광산을 지나 리베의 최북단인 달의 계곡에 있었다.
사실상 대륙의 끝이기도 한 이 지역은 척박한 사암으로 이뤄진 계곡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하나 신기하게도 단 한 곳만은 짙은 녹음을 간직하고 있었는데, 그 일대가 바로 알브족의 영토인 달의 계곡이었다.
토벌 대상인 데스 아이는 그 녹음과 사암의 경계에 모습을 드러냈다.
“알브족에 대해 아는 게 있어?”
“없다. 마력에 의지하는 족속이 아니던가. 우리완 가는 길이 다른 이들이다.”
“음, 그렇겠네.”
바보같은 질문이었다.
반투족 입장에선 알아야 할 이유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았을 테니까.
자신들이 싫어하는 짓만 골라서 하는 부족인데 뭐가 궁금해서 알아봤겠나.
다만, 걱정인 것은 알브족의 영토를 지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뭐 그런 것 있잖은가.
누가 신성한 부족의 영토에 허락도 없이 발을 디디는가!
이런 것 말이다.
반투족을 경험해 본 입장에서 말하자면 알브족 역시 뭔가 싸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이 느낌은 머지않아 현실로 나타났다.
“누가 신성한 부족의 영토에 허락도 없이 발을 디디는가!”
나의 상상과 완벽하고 똑같이.
“미쳤…….”
토씨 하나 틀리지 않은 알브족의 등장에 나는 돋아나는 소름을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예지력이 이런 건가?
막 1초 앞을 내다보고 그러는 거?
갑자기 등장한 다섯 명의 알브족은 다행스럽게도 준수한 복장을 갖추고 있었다.
마법에 특화된 종족이라기에 궁금했는데, 생김새 또한 준수했다.
아니, 그 이상일지도.
턱 끝을 치켜든 알브족들은 호리호리하고 늘씬했다.
작지만 비율 좋은 느낌이랄까.
시선을 돌린 나는 곁에 있는 별을 바라보았다.
다르다.
눈앞에 서 있는 이 알브족은, 당당하고 커다란 반투족과 완벽한 비대칭을 이루고 있었다.
극과 극.
손등과 손바닥.
엉덩이와 궁둥이.
아… 이건 아닌가.
좌우지간 맨 앞에 있던 알브족 여인은 지팡이를 내밀며 큰소리로 외쳤다.
“그 더러운 발을 치워라!”
물론 깨끗하지는 않다.
가능하면 그렇게 해 주고 싶기도 하고.
그러나 물러설 수 없는 이유가 있기에 점잖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아, 저는 달의 계곡에 볼일이 있어서…….”
“닥쳐라!”
“아니, 그게 아니라…….”
“닥치라고 했다!”
“내 말 좀…….”
“파이어 볼트!”
하나 여인은 다짜고짜 나에게 화염구를 날렸다.
이거 왜 이렇게 익숙한 걸까…….
격하게 떠오르는 누군가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시선을 돌렸다.
“가는 길이 다르다고?”
다르긴 개뿔이!
불과 몇 개월 전 나는 눈앞의 알브족과 꼭 닮은 인간들을 마주한 적이 있었다.
“저런 발칙한 것을 봤나!”
하지만 별은 그런 자신의 모습을 까맣게 잊은 채 노성을 지르며 대검을 뽑아 들었다.
“시끄럽다! 당장 물러나지 않으면 진짜로 공격할 것이다!”
“이봐요. 우리는 당신들이 의뢰한…….”
“아이스 볼트!”
“라이트닝 볼트!”
“윈드 커터!”
하… 이 미친.
이름에 무슨무슨 족이 들어가면 한판 붙고 시작하는 게 규칙인가?
원한다면 붙어 줄 수밖에.
“그래… 일단 맞고 시작하자.”
지면을 밟은 나의 두 다리는 붉은 사암을 박차며 알브족을 향해 날아들었다.
내 목숨 99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