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늘 그랬듯 로이드는 단정하게 자신의 금발을 빗어 넘겼다.
집착이라고 해야 하나.
어쩌면 강박관념이라고 표현해도 상관없을 것 같다.
본인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으니까.
젊은 시절부터 이어진 이런 습관은 그 긴 세월을 지나오며 로이드의 한 부분이 되었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용납하지 않았다.
언젠가 마주하게 될 그날을 기다리며, 로이드는 단정한 이 모습을 변함없이 유지해 왔다.
“사마르가 배신을 준비하는 게 분명합니다.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맡겨 두신 에르텔부터 찾아와야 합니다!”
그런 로이드를 향해 보좌관은 이렇게 열변을 성토했다.
본래 말 수가 적고 자기주장이 없는 녀석인데…….
저렇게까지 속내를 드러내는 것을 보면 현 상황이 좋지 않음은 분명했다.
물론 그도 알고 있다.
사라센 흑마탑의 속셈이 무엇인지, 사마르가 가려는 길이 어느 곳을 향하고 있는지 로이드 역시 알고 있었다.
서로의 목적이 다를 뿐.
두 사람에게 있어 이능력자들은 반드시 필요한 존재였다.
― 빅터의 정보원들이 도처에 깔려 있습니다. 뭔가 눈치를 챈 모양입니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심각하게는 생각하지 않았다.
감시쯤이야 따돌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고, 또 그렇게 잘해 왔으니까.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황실의 개입이 시작되었다.
빅터가 움직이니 수상한 낌새를 챈 황실마저 빅터를 따라 모여든 까닭이었다.
안 그래도 박해를 받던 브라함의 흑마탑은 이로 인해 더욱 입지가 좁아졌다.
결단이 필요했다.
이대로 있다간 계획을 이루지도 못한 채 정체만 드러날 것이 자명했다.
하여 로이드는 고심 끝에 발상을 바꾸기로 했다.
의식을 치르러 나갈 수 없으니 마력의 샘에 있던 에르텔을 아예 들고 오는 것이었다.
물론 효율은 떨어지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라도 해서 계획은 지속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단, 이곳이 아닌 사라센에서…….
여기서 전전긍긍할 바엔 활동이 자유로운 사라센이 현명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보좌관의 생각은 달랐다.
“어쩔 수 없이 의식을 넘기긴 했지만 이대로 방치하는 건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가 걱정하는 건 사마르의 배신.
“사마르 님이 우리에게 협조하는 건, 내세울 수 있는 게 없어서입니다. 분명히 저희를 배제하고 독단적으로 행동할 날이 올 겁니다.”
감색 로브의 사내는 사마르의 성격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로이드는.
“상관없다.”
오히려 그것을 바라고 있었다.
힘에 대한 갈증이 사마르를 폭주하게 만들길, 하여 더욱 많은 이능력자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기를 원했다.
그런 로이드의 계획은 적중했다.
38번째 의식을 통해 마주한 능력자는 사마르가 원하던 이상형에 완벽하게 부합했다.
물론 로이드 역시 흥분되었던 건 사실이지만, 사마르와는 그 의미가 사뭇 달랐다.
사마르는 강한 능력자가 자신에 손에 들어왔기 때문이었고, 로이드는 강한 능력자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하나 이대로라면 저희가 너무…….”
“좁게 보지 마라. 우리 대신 춤춰 주고 있을 뿐이니까.”
로이드는 불안해하는 보좌관에게 덤덤히 대답했다.
어차피 브라함에서 의식을 진행하는 건 이제 모험에 가까운 상황. 그를 대신할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로이드의 계획은 성공을 향해 달려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신경 쓰지 않았다.
로이드 입장에서 사마르는.
원하던 장난감을 손에 쥔 욕심 많은 아이에 불과했다.
하여 방관했다.
질투에 가득 찬 그가 강화 인간을 만들었을 때도 견제하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오히려 더욱 날뛰며 힘에 취하길.
더 많은 강화 인간을 만들어 온 세상을 적으로 돌리길 원했다.
죽고 죽이고…….
모든 것을 잃은 놈의 욕망이 능력자에 대한 탐욕으로 절정에 이를 때.
“놈이 하는 짓이 그 작은 머리에서 나왔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30년을 기다린 로이드의 목표는 사마르의 손에서 완성될 것이다.
“설마…….”
그런 로이드의 계획은 생각보다 일찍, 그리고 더 깊은 곳까지 뿌리내려있었다.
* * *
“게브네가 그러던가요?”
“네. 아저씨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조합장님께서 오래전부터 무리하고 계시다고.”
용병 조합에 찾아온 나는 다짜고짜 조합장을 만나 대화를 시작했다.
게브네를 통해 자초지종을 들었고, 그것에 대해 이런저런 할 말이 있노라고.
본래라면 어림없는 일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찾는 경우가 워낙 많다 보니, 애초에 서면으로 접견 신청을 하고 이유에 따라 가부가 결정되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쿵! 하는 소리 못 들으셨나요?”
“네?”
“당신을 본 제 심장이 놀라는 소리죠.”
“어머…….”
“조합장과의 만남을 빨리 끝내고 당신과 아름다운 노을을 바라보고 싶군요.”
모든 과정을 생략한 채 초고속으로 조합장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조합장이라… 그래요. 사실 하고 싶어서 앉아 있는 자리는 아닙니다. 어쩔 수 없다고 해야 하나… 누구도 하려 하지 않아 이렇게 오랜 시간 있게 됐죠.”
그래서 10년째 이어지고 있었다.
대체 불가의 수준이랄까.
현 조합장 이전엔 1년을 버틴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목숨이 오가는 직업인만큼, 의뢰 보수 문제로 인한 마찰은 끝없이 이어졌고, 각종 사고와 그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하루가 멀다 하고 반복되고 있었다.
쉽게 말해서.
“요구하는 건 쉽지만 책임지는 건 힘드니까요.”
이 거친 용병 바닥은 나 자신이 가장 소중한 곳이었다.
조금 더 넓히면 함께하는 동료 몇 명이 전부일 뿐.
그나마도 위기에 처하면 내 목숨이 먼저였다.
의리 없고, 이기적이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용병이고, 그렇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었다.
용병에게 있어 부상이란 생계가 걸린 절박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용병들은 의뢰를 포기하는 것에 망설임이 없다.
사는 게 먼저니까.
그 어떤 의미를 들이대도 이것을 뛰어넘을 수 없으며, 이로 인한 분쟁은 늘 조합장을 힘들게 했다.
“의뢰 수주할 때 여러 조건들이 있잖아요. 계약 파기에 관한 내용들도 있고.”
“그렇긴 하지요.”
하나 막상 일이 터지면 모두가 자기 입장만 내세우게 되는 것이다.
― 의뢰 조건이 잘못 측정되었다.
이 한마디로 수많은 분쟁이 시작되며 끝이 나기도 했다.
조건은 같지만 개인의 역량 차이에 따라 결과가 크게 바뀌기 때문이었다.
의뢰인은 용병의 수준이 과대평가됐다고 말하고, 용병은 수주 조건이 낮게 측정되었다고 말한다.
정답이 없는 얘기다.
진실은 당사자만이 알고 있을 뿐.
그렇게 조합장의 책상엔 분쟁에 관련된 서류가 끊임없이 쌓여 갔다.
“사람이라도 죽으면 난리가 납니다. 실력 부족을 인정하는 용병도 드물고, 실수를 인정하는 의뢰인도 없으니까요.”
“참 어려운 자리네요.”
“솔직히 지친 지 오래됐습니다.”
조합장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푸념 섞인 말을 내뱉었다.
내가 봐도 지쳐 보인다.
심지어 조합장은 40살이 채 안 됐음에도 50살이 넘어 보이는 노안을 자랑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래서 내가 온 것 아니겠나.
이 남자에게 삶의 안식을 찾아 주고, 용병들에겐 더 나은 환경을 제공해 주기 위해서.
“후임자가 있으면 이임하실 생각은 있으세요?”
“하하하, 적임자가 있으면 당연하지요. 한데 제가 넘기고 싶다고 해도 용병들이 동의가 필요합니다.”
“그것까지 받아내면 가능하다는 거네요?”
“당장이라도 위임하지요. 하나 해 보시면 알겠지만 쉽지 않을 겁니다. 이 자리가 10년째 고여 있는 건 나름에 이유가 있는 거니까요.”
어쨌거나 양도할 의양이 있다면 그걸로 됐다.
무릇 모든 벽이 무너질 땐, 작은 틈 하나로 시작되는 법이니까.
“그런데 누가 이 자릴 관심 있어 할까요?”
“이 친구요.”
후임자를 물어보는 조합장의 말에 나는 곁에 앉아 있는 한스를 지목했다.
“…네?”
“…이 사람이요?”
‘네?’는 한스였고, ‘이 사람이요?’는 그의 아내였다.
“성실한 친구입니다. 성격도 꼼꼼한 것 같고요. 무엇보다 의욕이 넘치니 조합장으로 딱 좋을 겁니다. 지금 새로운 삶이 필요한 친구거든요.”
그렇게 한스는 용병 조합장 후보가 되었다.
* * *
“스승님께는 연락이 왔나요?”
“아니요. 여전히 신호가 없습니다.”
“흠,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안전가옥으로 돌아온 나는 가장 먼저 빅터의 소식을 물었다.
어디 가서 몸 상할 노인네는 아니지만 하루가 지나도록 연락이 없으니 슬슬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고장 날 확률 같은 건 없는 건가요? 신호가 안 떠오르거나 뭐, 그런 거 있잖아요.”
“그럴 수도 있겠죠. 충분히 가능성 있는 얘기입니다. 잃어버리셨을 수도 있고요.”
이어진 나의 추측에 베르는 긍정적인 대답을 해 왔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유는 이것뿐이었다.
고장 났거나.
아니면 잃어버렸거나.
둘 중 하나가 아니라면 뭔가 엄청난 일이 생겼다는 건데…….
사실 빅터를 앞에 두고 불길한 생각을 하는 건 오지랖에 가까운 생각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신경 쓰이는 것은 만나러 간 대상이 그레이시이기 때문이다.
뭔가 신비스러운 조합이잖나.
한 사람은 당대의 지존이고, 다른 하나는 죽은 줄 알았던 과거의 영웅이다.
심지어 나와 일면식이 있기도 했다.
그러니 안전에 대한 걱정보다는 예상지 못한 일이나 상황을 염려하는 것이다.
게다가 지금 상황이 좀 어수선한가.
카리프를 시작으로 알게 된 강화 인간의 존재는 사라센 흑마탑을 지나 전쟁 준비라는 거대한 영역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만약 그 모든 강화 인간들이 카리프와 같은 수준까지 올라간다면?
브라함은 물론이요, 대륙 전체가 사라센 손에 떨어질 수 있는 시급한 문제였다.
“알바트로스였나? 그 새를 사용하면 안 되나요? 스승님도 보시면 뭔가 눈치채실 것 같은데.”
나는 골렘 서식지를 떠올리며 베르에게 질문을 던졌다.
당시의 빅터는 허공을 순회하는 거대한 새를 보며 검기를 날려 신호를 보냈었다.
그리고 그 장면을 이곳에 있는 베르가 지켜보았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베르와 알바트로스의 시야가 서로 공유됐기 때문이었다.
“오늘까지 기다려 보고 내일 날려 볼까 생각 중입니다. 한 번 시전하고 나면 한동안 마력을 사용할 수가 없어서요.”
“아… 그렇구나.”
빅터에 관한 일들은 이렇게 내일로 미뤄졌다.
“이 사실이 전해지면 스승님도 전선에 복귀하시겠네요?”
“아무래도 그렇겠죠. 이건 거절할 명분이 없으니까요. 아케른도 스승님이 돌아오시기 전엔 이 사실을 공론화시키지 않을 겁니다.”
지금이야 관직에서 물러나 있다지만, 결국 빅터의 복귀는 예정된 순서일 것이다.
그런 빅터의 행보는 나에게도 무관하지 않다.
빅터가 전선에 복귀한다면, 루드겐 마이어와 만남도 필연적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스승님이 돌아가시면 함께 가실 건가요?”
“사안이 사안인지라 일단 합류해서 대책 마련을 하겠죠. 이후 상황을 보고 리베로 복귀할지, 아니면 아케른에 남을지 결정하게 될 겁니다.”
질문에 대한 베르의 답은 일단 합류였다.
전쟁이란 명분을 거스를 만한 건 사실상 없다고 봐도 무방할 테니까.
“가만, 그러고 보니 후배님의 데뷔도 이제 머지않았네요? 이번엔 후배님도 함께 가게 될 테니 정식으로 아케른 일가가 되시겠네요.”
“그렇게 되려나요.”
“네, 그렇게 될 겁니다. 그나저나… 아케른이 시끌시끌하겠군요.”
“왜요?”
“왜겠습니까. 변경백 빅터 크로제가 후견하는 사람이 누군지 다들 궁금해하고 있는 거죠.”
“아…….”
길게 이어진 베르에 말에 나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별 느낌 없으신가 보네요? 전 아케른 성에 처음 갈 때 잠도 못 잤었는데.”
글쎄다.
일단 함께 가게 된다니 부탁할 필요 없어서 편해지긴 했다.
어떤 곳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기대야 되죠. 다만…….”
하나 나에겐 아케른 데뷔보다 더 큰 무대가 아직 남아 있었다.
어차피 다 알게 될 거.
궁금해하는 베르에게 반으로 접은 양피지를 펼쳐 보여 줬다.
“음, 메신저네요.”
베르는 대수롭지 않게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그렇게 잠깐의 시간이 지나가고.
“이게 무슨 말이죠?!”
두 눈을 부릅뜬 베르는 양피지를 펼쳐 내 눈앞에 들이댔다.
[작위 수여식 확정.
일시, 건국 기념일 행사 당일.
작위, 단승 자작.
축하드려요, 이반 님♡]
펼쳐진 양피지에는 로제가 보낸 손 글씨가 예쁘장하게 떠올라 있었다.
내 목숨 99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