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마을 초소에 도착한 인중은 자세를 낮추며 주의 사항을 말했다.
대충 내용을 살펴보자면 이런 건데.
“말씀드렸다시피 여기서부터는 차원이 다릅니다. 마을 초소에는 4성급 검사도 두 명이나 있고…….”
그래서 뭐 어쩌라고.
나는 초소로 다가가 닫힌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안녕.”
몇 명이 모여 있건 상관없었다.
승패를 가르는 건 힘의 질이지, 힘 쓰는 사람의 숫자가 아니니까.
빠각―
문 앞에서 시작된 주먹질은 수많은 옥수수를 만들어 내며 초소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난입한 나와 별은 이전과 동일하게 빠른 진압에 성공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 두 녀석.
나름 오러 유저라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저항을 이어 가고 있었다.
그러니 예를 갖춰 줄 수밖에.
나는 움켜쥔 해머를 들어 수평으로 휘둘렀다.
“허억!”
그것으로 상황은 종료됐다.
엄청난 풍압이 녀석의 얼굴을 때리는 순간, 놈들의 검은 사이좋게 부러졌다.
쨍깡―
이윽고 또다시 날아든 주먹에 놈들은 곤죽이 되었다.
녀석들은 그대로 야무지게 묶여 가지런히 뉘어졌다.
“장작을 쌓아두는 것 같네.”
격의 차이란 이런 거다.
계란이 아무리 많다 한들, 바위를 깰 순 없는 법.
[인간과 결투에서 승리.]
진행도 : 43/50
순조롭게 진행된 성장 시스템은 어느덧 후반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가시죠. 두목의 집은 맨 끝에 있습니다.”
남은 일곱 명을 채우기 위해 우리는 마을 안쪽을 향해 가벼운 걸음을 내딛었다.
* * *
이런 게 가능한 걸까.
메말라 버린 숲을 보며 빅터는 30년 전을 떠올렸다.
오러와 마력을 수련하는 것만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최대의 기적이라고 생각했던 그때.
신의 축복을 받은 신탁의 기사들은 새로운 경지를 보여 줬다.
그들은 오러를 사용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마력을 사용하지도 않았다.
지금의 이반처럼.
정체를 알 수 없는 힘을 가진 그들은 설명할 수 없는 이능으로 마족들을 물리쳤다.
카이 형제를 비롯한 신원 미상자들을 쫓던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그들이 가진 특이한 능력.
영웅들과 겹치는 그들의 모습에서 황제의 악행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신이 허락한 맹약을 어겼고.
야망을 위해 혈육을 살해했으며.
끝내는 신의 이름으로 배신을 선택했던 남자.
그의 야망이 만들어 낸 결과와 신원 미상자들의 모습은 부정하려 할수록 더욱 가깝게 이어졌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들려오는 그레이시의 말에 빅터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의 생각이 맞는다면.
그리고 그레이시가 이 말에 동의한다면.
대륙은… 다가올 종말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저와 같은 생각을 하셨군요.”
그레이시는 굳어 버린 얼굴로 말라 버린 숲을 바라보았다.
이 복잡한 심경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말없이 서 있는 그레이시를 보며 빅터는 마른세수를 했다.
저 녀석은 알고 있을까.
재앙을 끝낸 영웅들이 또 다른 재앙의 씨앗이 되었다는 걸.
안타깝지만…….
지금 이 순간을 기점으로 인과율의 추는 기울기 시작할 것이다.
아니, 이미 기울고 있었다.
마기를 품은 마수들이 그 증거일 테니까.
인마대전의 잔재려니 했었는데, 결국 그레이시가 이유였다.
카론과 루즈가 살아 있다면 그 역시 마찬가지.
지금까진 견뎌 왔으나… 이젠 달라질 것이다.
“말씀하신 신원 미상자들… 아무래도 저와 같은 부류인 것 같네요. 지금 이 녀석도 그렇고.”
“…….”
그레이시의 말처럼, 신의 맹약을 어긴 존재는 계속해서 나올 테니까.
카이 형제.
그리고 죽은 채로 발견됐던 수상한 녀석.
거기에 여전히 뒤를 쫓고 있는 신원 미상의 소녀까지.
설마 했던 이 능력자는 사실이었고, 누군가 그들을 다시 세상 속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막을 수 있을까.
작금의 크루시아에 재앙을 막아 낼 힘이 있는 것일까.
“저놈이 우리 편에 설 것 같으냐.”
“글쎄요. 밝은 미래는 그려지지 않는군요.”
그렇다면 제거할 수밖에.
하나가 될 수 없다면 차라리 모두 사라지는 게 옳다.
“가자.”
빅터와 그레이시는 메마른 숲을 헤치며 모습을 감췄다.
* * *
“저 집입니다!”
인중 녀석은 손가락을 쭉 뻗어 커다란 집을 가리켰다.
금칠이라도 한 건가.
주변과 어울리지 않는 두목의 집은 오후의 햇살을 받아 유난히 반짝거렸다.
인정할 수 없다.
나보다 잘사는 건달이라니.
놈을 혼내야 할 이유를 하나 더 추가한 나는 녀석의 집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이럴 거면 차라리 성벽을 쌓지.
쓸데없이 긴 담장을 지나 개방된 앞마당에 들어섰다.
그리고 나는.
“브루스가 어떤 놈이야?”
다짜고짜 놈들의 두목부터 찾기 시작했다.
“어랍쇼? 이건 또 뭐하는 잡놈이야?”
“뒈지려고 환장을 했구나!”
“브루스가 네 친구냐?”
그 한마디에 놈들은 벌 떼처럼 들고일어났다.
저마다 손에 쥔 무기를 흔들어 대며.
“왜? 쫄았냐?”
“캬하하하하하!”
긴장감 없는 모습으로 조롱을 날려 대고 있었다.
일단 두목 찾기는 실패.
움켜쥔 해머를 휘둘러 시시덕거리는 놈을 날려 버렸다.
“아, 힘드네…….”
살살 치려고 했는데 녀석은 눈을 까뒤집고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렇다고 맨손으로 놀아 줄 수도 없었다.
인중 녀석의 말대로 놈들은 모두 4성급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 봐야 5성이 한 명 섞인 것이지만, 어쨌거나 장난치듯 상대할 단계는 이미 넘어섰단 얘기다.
나는 진심을 살짝 섞어 덤벼드는 놈들을 상대했다.
역시나 힘 조절은 실패…….
쓰러진 놈들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가며 거품을 물고 있었다.
“크어억!”
남아 있던 한 놈이 별의 칼자루에 쓰러졌고.
“귀찮다. 그냥 보내 버리면 안 되겠나?”
별은 칼자루를 매만지며 불만을 표현했다.
이해한다.
나도 똑같이 생각했으니까.
아예 죽일 생각으로 싸우면 모르겠는데, 상대를 봐주면서 싸우는 건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특히나 별의 입장에선 더욱 애매할 터.
적들의 수준이 높아져서 이젠 전력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최선을 다해 싸워야 할 판에 기절만 시켜야 하니, 오히려 별의 목숨이 더 위험한 상황이었다.
“칼자루 쓰지 말고 이젠 그냥 베어 버려. 가능하면 팔다리 같은 데만 골라서. 위험하면 어쩔 수 없고.”
“알겠다.”
“그래, 무조건 네가 안전할 수 있게 싸워. 그게 가장 중요한 거니까.”
끄덕이는 별의 어깨를 도닥이고 텅 빈 앞마당을 덤덤히 가로질렀다.
하나 그 순간.
“잠깐만요.”
인중이 부르는 소리에 나는 가던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막 들어가시면 안 돼요. 저 안에는 정말 괴물들이 있어서.”
“어쩌라고?”
“…네?”
“노크라도 하라는 거야?”
“아… 그건 아니지만, 위험하니까 조심하시는 거죠…….”
“고마워.”
“뭐가요?”
“걱정해 줘서.”
쾅―
나는 현관을 때려 부수며 실내로 들어섰다.
그리고…….
슈아악― 챙!
은밀한 환영 인사에 해머를 들어 화답했다.
여기서부터는 다를 거라더니.
뻗어 오는 검의 기운이 지금까지와는 달랐다.
본격적인 느낌이려나.
“좀 하네?”
검을 거둔 건달을 보며 나는 엄지를 추켜세웠다.
농담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녀석의 칼은 예상보다 더 날카롭고 무거웠다.
두목의 왼팔쯤은 된다는 걸까.
오러의 수준을 떠나 검을 다루는 모양새가 상당히 능숙해 보였다.
이를테면 군부의 기사라거나, 산전수전 다 겪은 용병 같은 그런 느낌.
그런 나의 생각은 틀리지 않은 것 같았다.
이어진 놈의 공격은 매서웠고, 덕분에 나는 여전히 현관에 묶여 있는 상태였다.
― 리베가 자유도시로서 견고히 버틸 수 있던 이유가 무엇인지 아느냐?
― 정치 놀음에 질려 버린 괴물들이 그곳으로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들었던 빅터의 말처럼 리베엔 숨은 고수가 많은가 보다.
이 녀석도 그렇지만, 뒤를 이어 등장한 놈도 만만치 않아 보였다.
아… 그냥 그렇단 얘기다.
일반적인 기준으론 분명히 고수의 수준이니까.
하필 상대가 나였다는 게 놈들에겐 불행이었던 것뿐.
콰직!
녀석의 흉갑을 박살 내며 집안 어딘가로 날려 버렸다.
지들이 어디 가서 7성급 이상을 마주해 봤겠나.
뒤를 이어 나타난 놈은 익숙지 않은 눈앞의 상황에 벌어진 입만 뻐끔거렸다.
“빨리 가자.”
낮게 중얼거린 나는 해머를 들어 놈의 머리로 향했다.
녀석의 검이 머리 위로 떠올랐고.
콰직!
힘없이 꺾이며 자신의 어깨를 파고들었다.
“크아악!”
고통에 가득 찬 비명을 뒤로 한 채 놈의 등짝을 향해 마무리 일격을 날렸다.
그렇게 현관을 벗어났고, 우리는 널찍한 거실로 싸움터를 옮겼다.
소란스런 입구의 상황에 놈들의 움직임도 거실로 향하고 있었다.
또다시 시작되는 전투.
모습을 드러낸 놈들은 나와 별을 향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한데 별의 상황이 좋지 않아 보인다.
무기의 상성 때문이랄까.
별의 대검을 마주한 무기는 톱니 같은 홈을 장착한 소드 브레이커라는 무기였다.
검을 부수기 위해 만들어진 기이한 혼종.
가뜩이나 열세인 별의 입장에선 불편한 무기까지 상대해야 했다.
“크윽…….”
결국 별은 뒤로 물러나며 놈의 공격을 받아 내야 했다.
좋지 않다.
저렇게 몰리다가 한순간에 검이 상하고, 톱니에 검이 물려 움직임이 봉쇄되는 순간.
“큭큭큭!”
반대편에 쥔 장검에 치명상을 입게 되고 말 것이다.
하나 늘 그랬듯.
빠캉!
보통은 그렇다는 얘기다.
나의 무기는 검이 아니니까.
별을 괴롭히던 놈의 소드 브레이커는 내리친 해머로 인해 두 조각으로 나눠져 버렸다.
“어어?”
멍청한 소릴 내는 녀석을 바라보며, 나는 어깨너머로 걸친 해머를 높게 치켜들었다.
“어는 뭐가 어야?”
그러고는 놈의 얼굴을 향해 해머를 내리쳤다.
빠캉!
경쾌한 쇳소리가 귀를 스치며 울려 퍼졌고.
“어어어?”
하나 남은 놈의 장검마저도 힘없이 부러져 버렸다.
“이게 진짜 소드 브레이커지.”
나는 해머를 들어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상황은 반전되어 별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사악하고.
잔인하게.
마치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놀 듯, 별은 맨손이 되어 버린 놈을 향해 대검을 휘둘러 댔다.
그렇게 상황은 정리되어 갔다.
별의 칼부림이 계속되는 사이, 나는 거실로 진입한 모든 놈들을 기절시켜 바닥에 눕혀 놓았다.
이제 남은 건 두목인 브루스 한 명뿐.
거실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간 나는 복도 끝에 있는 방문을 있는 힘껏 날려 버렸다.
그리고 활짝 열린 문을 향해 덤덤히 걸음을 내딛었다.
두 번째 발걸음을 때던 순간.
“파이어 버스트.”
낮은 음성이 들리며 서 있는 일대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시야는 붉게 물들었고.
콰아아앙―
넘실거리는 화염 사이로 귀를 찢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
또다시 이어지는 낮은 음성.
“파이어 버스트.”
치솟던 화염은 더욱 거세게 나의 주위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아, 깜짝이야…….
두목의 정체는 마법사.
타이밍부터 위력까지 모든 게 완벽했던 녀석의 공격은.
[화염 내성으로 인해 발화가 차단되었습니다.]
[화염 내성으로 인해 열기가 차단되었습니다.]
나의 특별한 능력으로 인해 허망하게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니 이걸로 끝.
놈은 나의 사정거리에 들어와 있고, 주문을 외우는 순간 녀석 머리통은 박살이 날 것이다.
“…….”
“뭘 보고 서 있어.”
귀신을 본 듯한 두목에게 해머를 들이밀었다.
그러고는 담백하게 본론을 말했다.
“운영권 내놔라.”
“…….”
하나 브루스는 대답이 없었다.
“대답 안 하네. 힘으로 얻은 건 힘으로 뺏길 수 있다. 이게 너희 법칙 아니었어?”
“…어르신이 가만히 안 계실 거다.”
빈정거리는 나의 말에 브루스가 입을 열었다.
“누구? 누가 뒤라도 봐주는 거야?
“네깟 놈들이 상상도 못할 분이다. 이제 너희들은 끝장 났…….”
“루드겐 마이어를 말하는 건가?”
“어? 그걸 어떻게…….”
“그래봤자 브라함 사람이잖아. 아하… 리베에도 누가 있구나.”
“…….”
정곡을 찔린 브루스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마른침을 삼켰다.
저렇게 표정 관리를 못 해서야.
“연금 조합장은 내가 잘 처리해 줄게. 그러니까 넌 운영권이나 내놔.”
사태를 파악한 브루스는 허물어지듯 주저앉아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리고 나의 눈가엔.
[인간과 결투에서 승리]
진행도 : 50/50
보상 : 순발력 1% 증가.
새로운 보상이 나를 반기고 있었다.
내 목숨 99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