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불타오른 종이를 보며 빅터는 들고 있는 지도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흠…….”
그러고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썹을 찌푸렸다.
“무슨 일입니까?”
“아무것도 아니다. 제자 녀석이 마법 도구라고 줬는데 고장이 난 것 같구나.”
빅터는 녹색 표시가 그려진 지도를 보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확실히 잘못된 것 같다.
방금 신호를 보냈으니 지도의 표시는 보라색으로 바뀌었어야 했다.
한데 여전히 녹색이다.
“어쩔 수 없지.”
빅터는 지도를 접어 다시 품안에 넣었다.
“생각보다 길어지네요. 원래 이것보단 더 자주 움직이던 놈이었는데.”
숲길을 지켜보던 그레이시는 기지개를 켜며 푸념했다.
오늘이 벌써 3일째.
늘어나는 체류 기간에 빅터는 리베에 신호를 보내려고 했다.
따로 연락할 방법이 없으니 이렇게라도 해서 길어지는 일정을 알리려 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지도의 상태는 이상했고, 남은 일정은 기약할 수 없었다.
“돌아가셔야 하는 것 아닌가요? 갑자기 나오셔서 준비도 못 해 오셨을 텐데.”
“괜찮다. 이만치 기다렸으면 끝을 보고 가야지.”
입장을 살피는 그레이시의 말에 빅터는 괜찮다는 뜻을 전했다.
하기야 누가 누굴 걱정하겠나.
연락 없이 몇날 며칠이 지나간들 조바심 내며 걱정할 이들이 아니었다.
어린애들도 아니고.
대륙 어디에 던져 놔도 무사할 사람이 빅터일 테니까.
하나 이런 그의 상념은 다급한 그레이시의 행동에 지워지고 말았다.
“나타났습니다!”
낮게 외친 그레이시는 고개를 숙이며 덤불 사이로 몸을 숨겼다.
뒤를 이어 빅터의 모습도 자취를 감췄고, 인적이 사라진 숲길 사이로 거체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
기척을 지운 빅터의 눈이 낯선 남자를 좇았다.
사람이 저렇게까지 클 수 있나?
순간, 빅터는 인간과 비슷한 몬스터라고 착각했다.
그게 아니고서야 저런 크기는 말이 안 되니까.
짙은 갈색 피부의 사내는 거대한 근육을 움직이며 대수림으로 향하고 있었다.
“저 녀석입니다.”
곁에 있던 그레이시가 작은 목소리로 놈의 정체를 알려 왔다.
이상한 놈이라던 그레이시의 표현은 적절했다.
저 남자에게 풍기는 기운은 빅터가 아는 상식과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흠…….”
오러도 아니고, 그렇다고 마족과 같은 마기도 아니다.
보다 원초적인 감정이라고 해야 하나.
죽이겠다는 열망이 실체화돼 사방팔방으로 뻗어 나오고 있었다.
말하자면 살기.
그저 존재하는 것으로 저런 살기가 나온다는 게 빅터의 입장에선 이해되지 않았다.
보통 살기라는 것은 그런 거니까.
특정 대상을 향한 명백한 적의가 있을 때 발현되는 것이 살기라는 것이다.
한데 저놈은.
“제 얘기가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존재 자체가 살기로 이루어진 순수한 악이었다.
마족보다도 더 마족 같은.
악마보다도 더 악마 같은.
지켜보는 빅터조차도 시선을 유지하기 위해 심력을 소모해야만 했다.
“저것이 놈의 능력이냐.”
“보시면 아실 겁니다. 솔직히 전 뭐가 능력인지도 모르겠더군요. 그냥 저 녀석 자체가 신비한 놈입니다.”
그에 빅터는 말없이 남자의 뒤를 따랐다.
놈은 그저 걷기만 했다.
대수림 깊숙한 곳을 향해.
정체불명의 남자는 칼날 같은 살기를 뿌려 대며 느긋하게 걸음을 반복했다.
아직까진 그랬다.
하나 평범한 숲길을 지나 몬스터의 영역에 들어서는 순간.
“저게 대체…….”
빅터는 눈앞에 펼쳐진 기이한 광경에 해야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이것이 놈의 능력인가?
남자와 마주한 모든 몬스터는 자세를 낮추며 사지를 부들거렸다.
익숙하지만 낯선, 아주 괴이한 장면.
빅터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체념이라는 두 글자였다.
너무 강력한 상대를 만났을 때.
혹은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에 직면했을 때.
인간과 동물은 본능적으로 대항을 포기한다.
그것을 체념이라 하고, 이것은 몬스터와 짐승을 나누는 중요한 척도가 된다.
몬스터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놈들에게 남은 건 오로지 공격 본능뿐.
하나 이 남자 앞에선 모두가 삶을 포기했다.
저 몬스터들이…….
차례로 순서를 기다리며 남자의 손에 무참히 죽어 가고 있었다.
‘환영을 보는 것인가…….’
살면서 마주한 그 어떤 장면보다도 괴이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몬스터를 찢어 버린 놈은 두 팔을 벌려 바위 같은 근육에 힘을 모았다.
짙은 구리빛 피부에 혈관이 튀어 나오기 시작했고.
“크아아아아아아아!”
고막을 찢는 기함과 함께 붉은 피 안개가 사방으로 펼쳐졌다.
피할 틈도 없이 빠르게.
빅터의 코앞까지 펼쳐진 핏빛 안개는 확산을 멈춘 채 범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
붉은 안개 속은 고요했다.
쩌렁쩌렁하던 남자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고, 주위는 완벽한 침묵에 잠식당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짧은 기다림이 지나 빅터는 안개가 걷힌 숲을 마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가 기억하던 모습이 아니었다.
푸르던 숲과 참혹한 사체는 어디론가 사라진 지 오래.
“허…….”
생명의 기운을 빼앗긴 메마른 숲이 을씨년스럽게 남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 * *
“그간 잘 지냈는가.”
“네. 저야 잘 지내고 있죠.”
“다행이구나. 한데 오늘은 어쩐 일로 들린 건가. 보아하니 해머는 딱히 수리할 곳이 없는 것 같은데.”
작업 중이던 게브네는 흐르는 땀을 닦으며 반갑게 맞이했다.
“그냥 지나는 길에 들린 거예요. 안부도 전할 겸 해서요.”
“아, 그랬군. 어쨌건 잘 왔네. 온 김에 해머도 봐줄 테니 거기 내려놓고 쉬고 있게나.”
가벼운 인사를 전한 나는 해머를 내려놓은 채 대장간을 둘러보았다.
그리운 느낌.
눈에 익은 장비들과 매캐한 용광로의 냄새는 데릭과 함께했던 시간 속으로 나를 데려갔다.
‘잘 지내고 있을까 몰라.’
그 괴팍한 성격에 식사라도 잘 챙기는지 모르겠다.
맨날 버럭버럭하고 다녀서 주변에 친한 사람도 거의 없는데.
아픈 곳은 없는지.
일은 잘하고 있는 건지.
괜스레 뭉클해지며 못생긴 데릭의 얼굴이 그리워졌다.
쪼르르 뒤를 따르던 엘리스와 바란, 그 외에 꼬마 악동들까지도…….
불현 듯 떠오른 지나간 추억에 가슴 한편이 먹먹해졌다.
“요즘 어떠세요? 듣자하니 재미있는 얘기가 있던데.”
나는 아련해진 감정을 뒤로 하며 슬쩍 미끼를 흔들었다.
“단체장 선거를 말하는 건가.”
“뭐, 그렇죠. 흘려듣기엔 적지 않은 소문이니까요.”
게브네는 달리 부정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반기는 눈치도 아니었지만.
“재미는 없네. 하나 뭔가 바꿔 보려고 노력 중이긴 하지.”
게브네는 반쯤 내려놓은 느낌으로 선거에 대해 얘기했다.
상황이 좋지 않다더니.
실제로 마주한 게브네는 피로한 모습으로 풀무질을 이어 가고 있었다.
“저쪽에서 재료 상인들을 규합했다면서요?”
“그게 어디 한두 해 얘기겠는가. 아마 리베가 시작된 이후로 계속 그래왔을 걸세.”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상인들에게 있어 원재료의 가치란 재품의 가격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니까.
그래서 리베는 법으로 재료 상인의 조합을 금지시켰다.
그 여파가 너무 강력했기 때문이다.
하나 우습게도 그 법은 특정인의 야합을 손쉽게 만들었다.
기본적으로 사람들은 공익이 아닌, 개인의 이익을 위해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렇기레 법이란 이름으로 제한된 재료 상인의 욕망은 비밀스레 자라났다.
분출하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내가 가격을 올리면.
다른 누군가는 그 틈을 노려 가격을 내린다.
경쟁하듯 재료의 가격이 낮춰지고, 이윤은 계속 줄어든다.
하여 더 많이 낮추고, 대신 더 많이 팔기 위해 매달린다.
품질에 따라 공정하게 경쟁하면 될 것을, 그들의 욕망은 가장 손쉬운 방법을 선택했다.
때문에 그들은 스스로 무너졌다.
경쟁을 부추긴 상인들은 싸게 구입해 큰 이윤을 남기고, 그렇게 축적된 자본은 매점매석이라는 형태로 발전해 갔다.
하여 오늘날의 리베가 완성되었다.
그리고 그런 리베는 고작 세 명의 조합원을 가진 연금 조합장에게 철저히 유린당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담합 좀 끝내려고 했는데 생각처럼 되질 않고 있다네.”
게브네는 거칠게 풀무를 당기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 모습이 허탈하게 느껴지는 건 괜한 상상은 아닐 것이다.
재료의 담합이란 그런 거니까.
재료의 가격과 공급이 출렁이면 상인이고 장인이고 존재할 수 없다.
시장은 급격하게 무너지고, 그에 대한 피해는 시민들이 떠안게 된다.
나 같은 놈도 아는 기본적인 상식이니, 수십 년 외길을 살아온 게브네는 이 상황이 더욱 씁쓸할 것이다.
“아예 가능성이 없는 건가요? 대장 관련 재료들은 경로가 두 개뿐이라 어떻게 손쓸 틈이 있을 것 같은데.”
채광을 통해 나오는 광석류와 몬스터를 통해 나오는 전리품이 전부다.
산과 들을 오가며 각종 재배지와 채집을 거치는 다른 업종에 비한다면, 확실히 대장 재료는 수급 경로가 단순한 편이었다.
“그렇긴 하네만 가장 중요한 철광산이 저쪽 편에 있네. 게다가 전리품은 용병 조합과 재료 상인이 거래하니 우리는 끼어들 틈이 없는 게지.”
“용병 조합은 그래도 가능성이 있지 않나요? 사실 비영리 단체나 마찬가진데.”
그에 게브네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의 말에 공감했다.
용병 조합은 순수하게 용병들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설립된 단체일 뿐.
수익 사업에 매달리는 다른 조합과는 기본적으로 결이 다른 단체였다.
“그게 문제가 된 거라네.”
하지만 게브네는 오히려 그것을 문제 삼았다.
“귀찮은 걸세. 대장 재료 따로 팔고, 약재 따로 팔고… 큰 재료상 하나만 붙잡으면 알아서 다 처리해 주는데 뭐 하러 일을 키우겠나.”
“아…….”
역시 사람 사는 세상이다.
좋으면 좋은 대로, 나쁘면 나쁜 대로.
어딜 가나 인간은 주어진 환경에 따라 문제를 만들어 낸다.
“그럼 해결법은 아예 없는 건가요?”
“없진 않지.”
“그럼 말씀해 주세요. 저도 도울게요.”
나는 게브네의 등을 보며 찾아온 목적을 얘기했다.
“흠…….”
풀무질을 멈춘 게브네는 뒤를 돌아 철광석을 향해 다가갔다.
그중에 가장 커다란 조각을 꺼내 들더니.
“이 철광산은 브루스라는 건달패가 장악했고, 용병 조합은 조합장이 바뀌지 않는 이상 해답이 없네.”
“그래서요?”
“이해 못 했는가? 철광산을 장악한 브루스 패거리는 연금 조합장의 오른팔일세. 절대로 넘어오지 않을 거란 얘기지.”
“그리고요?”
“용병 조합장은 하려고 나서는 이가 없어 현 조합장이 10년째 이어 가고 있는 형편일세.”
“왜요?”
“말했잖은가. 수익은 없는데 사건 사고는 끊이질 않고, 해야 할 일은 많은데 상대할 놈들은 죄다 거칠고 험하지. 그러니 누가 하려고 나서겠나?”
이제 상황 파악이 되는가?
…라는 말은 생략한 것 같다.
저 긴 대화의 내용은 모두 그것을 말하기 위해 진행됐을 테니까.
하지만.
“브루스라는 건달은 두들겨 패서 정신 차리게 만들면 되고.”
“…….”
“용병 조합에 날뛰는 놈들도 두들겨 패서 정신 차리게 만들면 되겠네요.”
“…….”
“그 뒤에 조합장은 부지런한 사람 하나 앉히면 끝. 간단한데요?”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설명을 마쳤다.
“이 사람아,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잖은가?”
“안 될 일도 아니잖아요.”
정색하는 게브네의 말을 적당히 흘려들었다.
문제될 게 없으니까.
건달을 쥐어팬다고 달려올 공권력은 없고, 용병 세계는 힘이 전부다.
게다가 지금 나는.
[성장 시스템 가동.]
인간과 결투에서 승리
진행도 : 0/50
보상 : 순발력 1% 증가.
어떤 핑계를 대던 싸워야 할 이유가 생겼다.
내 목숨 99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