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리베로 돌아온 나는 가장 먼저 이 얘기를 들려주었다.
마력이나 오러도 필요 없고, 그저 특정 시술로 강해지는 사람들.
“사라센 흑마탑에 그런 기술이 있어요?”
“네, 강화 인간이라는 겁니다.”
베르와 에스카는 얼굴을 마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수련을 안 했는데도 승급이 된다는 얘긴가요?”
“네.”
“하… 이거 왜 이렇게 열받는 거지.”
설명을 듣던 에스카는 얼굴을 붉히며 언짢은 감정을 드러냈다.
낯선 얼굴이다.
감정 표현이 적은 그녀에게선 좀처럼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감정만은 충분히 이해한다.
허탈함, 또는 박탈감 같은 그런 것들…….
7성을 목전에 둔 에스카는 여전히 6성에 머물러 있었다.
승급이 갖고 있는 무게란 이런 것이다.
긴 시간과 끝없는 노력이 수반돼야 하는 지난하고 험난한 여정.
한데 시술 몇 번에 끝난다고?
이 말이 사실이라면 그녀가 지나온 모든 시간이 통째로 부정당하는 것이다.
도대체 왜…….
나는 무엇을 위해 그 시간을 견뎌 온 것일까.
“그 대신 자아를 잃는다고 하더군요.”
“생각을 못 한다는 얘긴가요?”
“그것보단 시키는 것만 한다는 뜻이 아닐까 싶어요.”
되묻는 베르의 말에 나는 내가 생각한 강화 인간의 정의를 차분히 설명했다.
그리고 베르는.
“시키는 것만 한다라… 그러면 완전 인형인데. 그것도 사람을 죽이는 데 특화된 인형.”
내가 하는 말의 의미를 완벽하게 이해했다.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 첫 번째는 카리프.
명확하게 얘기할 수 없는 놈의 정체가 인형이란 결과를 도출하게 만들었다.
모든 상황이 놈을 강화 인간이라고 지목하고 있는 데, 마지막 하나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 카리프는 5성에서 성장이 멈췄습니다.
바로 이 자리에서 베르는 내게 이런 얘기를 전했었다.
하나 이어진 얘기에선 1년 만에 7성을 넘겼다고 했다.
성장 수위와 속도.
모든 게 정상이 아니다.
‘하지만 놈은 멀쩡했어.’
카리프의 행적과 모습은 누가 봐도 정상이었다.
자아가 사라지기는커녕, 너무 강해서 후작가도 하인 부리듯 했다.
의심은 가는데.
그 의심에 허점이 있었다.
강화 인간의 조건을 다 가지고 있는데 이성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까지만 생각하면 부작용에 대한 의미를 다르게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모두 다 그런 건 아니다.’
이것을 뒷받침할 얘기는 연구실 남자를 통해 나왔다.
그는 카리프를 고객이라고 말했다.
그 말인즉.
카리프 스스로가 강화 인간이 되길 원했거나, 결과물을 필요로 하는 구매자라는 얘기가 된다.
하지만 카리프의 무력은 완벽하게 수상했다.
그러니 구매자 후보에서 일단 미뤄두고…….
여기서부터 두 번째 이유가 시작된다.
고객이라는 말.
그 고객의 명단 중에는 마론 후작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사람이 강화 인간일까?
글쎄.
그건 아닌 것 같다.
연구할 장소를 마련해 준 고객이라면.
그리고 그 고객이 원하는 바가 무력이라면.
강화 인간의 정의는 전투 인형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의 이런 가설은 베르를 향한 에스카의 말에 힘을 키웠다.
“어제 넘어온 첩보 항목 기억하지?”
“카렌 영지의 국지전?”
“그래, 사라센과 국지전이 있었다고 했지. 그리고 사라센 병력이 전부 6성급 전후였다고 했어. 그 정도 전력을 모아서 분대를 만드는 게 가능할까? 그것도 여러 개를?”
“하… 이게 그 이유였군…….”
길게 이어진 에스카의 설명에 흩어진 조각들이 제자리를 찾아갔다.
사라센.
강화 인간.
그리고 고객.
사라센 흑마탑에서 만든 강화 인간을 다른 누군가가 사들이는 것이다.
크게 보면 사라센 그 자체로 시작해서 국외의 마론 후작까지.
구분이 모호한 카리프를 돌연변이라고 가정한다면?
부작용을 피한 강화 인간이 카리프의 정체라면 이 모든 의문은 명확하게 정리된다.
“최악이네.”
고개를 숙인 베르는 무거운 얼굴로 속내를 드러냈다.
“아케른으로 모여야 하는 것 아닐까?”
“그래야 할 것 같아.”
에스카와 베르의 얘기는 다른 국면에 접어들고 있었다.
말 그대로 최악의 상황.
“전쟁이 다시 시작될 거라고 생각해?”
“당장은 아니더라도 결국 터지겠지. 시간문제라고 봐.”
모아지는 정보들이 전하는 말은 브라함과 사라센의 전쟁이었다.
“그럼 어떡하죠?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요!”
갑자기 전쟁이라니.
상상하지 못했던 결말에 나는 긴장을 감추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아직까진 괜찮을 겁니다. 지금은 기본 전력을 확인해 보는 단계겠죠. 본격적인 전쟁으로 가려면 아직 단계가 남았어요.”
그에 베르는 마른 입술을 물어뜯으며 다가올 미래를 예측했다.
그것이 신호였다.
깊은 한숨은 전염되었고, 거실의 분위기는 한층 더 무겁게 짓눌려 갔다.
“일단 마법사가 있는 이상 전면전은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지휘관급들을 먼저 처리하지 않으면 전쟁 자체가 난전이 되죠. 그래서 요인 암살이 먼저 시작됩니다.”
“암살이요?”
“네. 예를 들자면 스승님처럼 정점에 올랐거나, 그에 준하는 인물들을 먼저 제거하는 것이죠. 죽이지 못하더라도 참전만 막을 수 있으면 전력은 크게 기울 테니까요.”
일리 있는 얘기였다.
계란과 바위의 존재는 엄연히 다르니까.
일반 병사가 제아무리 몰려들어도 승급한 기사와 마법사를 상대할 순 없는 일이다.
그러니 암살이 선행될 수밖에.
상대의 주요 전력이 약해지는 시점이 전쟁의 서막이 되는 것이었다.
“스승님은 어쩌지?”
“어쩔 수 없지… 오실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흠… 그럼 일단 아케른에 소식을 전할게.”
대화를 마친 에스카는 지체 없이 서재로 향했다.
베르는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고, 나는 그가 준 양피지를 흔들며 의뭉스럽게 질문했다.
“스승님은 이거 안 들고 계세요?”
이름이 메신저였나.
간단한 글자를 전달해 주는 베르의 마법 도구였다.
“스승님이 떠나신 뒤에 완성된 거라서 전달해 드리지 못했네요.”
그 대신 베르는 지도를 펼쳐 한쪽 모서리를 찢어 냈다.
찢어진 종이를 삼등분으로 나누고는 한 장씩 불을 붙여 세 번의 종소리를 울리게 했다.
“3번째는 못 보던 기능이네요?”
“네. 3번 태우면 빨간색으로 표시돼요. 비상이라는 뜻이죠. 성력의 재단을 다녀온 뒤로 개조했습니다.”
베르는 붉게 표시된 지도를 확인한 후 테이블위에 올렸다.
“…….”
그리고 베르는 뚫어져라 지도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
“…….”
덩달아 나의 눈도 뚫어지게 지도를 바라보았다.
무얼 기다리는 건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바라보는 지도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하지만 기다림은 계속되었고, 견디다 못한 나는 도대체 왜 이러고 있는 지 베르에게 질문했다.
“뭘 기다리는 거예요?”
이렇게 멍 때리고 앉아 있기 시작한 게 벌써 30분이 다 되어 갔다.
심지어 별은 지루하다며 테라스로 향했다.
“스승님의 대답이요.”
그러나 돌아온 베르의 말은 나의 머리를 갸웃거리게 만들었다.
지도에 그런 기능도 있었나?
“빨간 표시가 들어오면 무조건 반응해 주기로 했거든요. 그런데 보시다시피 너무 조용하네요.”
대답이라는 말의 의미는 빅터의 위치 표시였다.
비상사태를 확인했으면 지도를 찢어 불태우라는 뜻이었는데…….
지도는 여전히 반응이 없었고.
“아직 못 보신 건가.”
떠오른 녹색 표시는 변함없는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 * *
안전 가옥을 나온 나는 별과 함께 페드로의 가계로 향했다.
상황이야 어찌됐건 애초에 목적은 달성해야 할 테니까.
“이야, 튼실한 놈으로 잘 챙겨 오셨네요.”
페드로는 넘겨받은 귀신버섯을 보며 만족스런 표정을 지어보였다.
하나하나 꺼내 상태를 살펴보고는.
“연금술도 요리와 똑같아요. 만드는 기술이 아무리 좋아도, 재료의 품질은 어쩔 수 없거든요. 좋은 재료가 좋은 결과물을 만든다?”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 말을 전하며 벙글벙글 웃기 시작했다.
하여간 사근사근한 녀석이다.
볼 때마다 늘 밝은 얼굴이니 친동생처럼 챙겨 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설원 오우거의 피는 무사히 정제됐어요. 저도 처음 다뤄 보는 재료라서 좀 고민했는데, 누나가 워낙 실력이 좋아서 잘 마무리됐죠.”
“그랬구나. 다행이네.”
너스레를 떠는 페드로의 말에 나는 옅은 미소로 화답했다.
한데 녀석의 누나인 샤샤는 오늘도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내가 그런 날만 골라서 오는 건지 모르겠지만.
“정말 그렇네요? 형님 올 때마다 누나가 없었네.”
생각해 보니 샤샤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 벌써 두 달이 다 되어 간다.
일부러 피하는 것이 아니고서야 이렇게 어긋나기도 쉽지 않을 터.
“누나가 좀 바쁘긴 해요. 여기저기 거래처를 새로 만든다고 외지로 출장도 자주 나가거든요.”
가업을 잇기 위한 남매의 노력은 안팎으로 계속되고 있었다.
“지난번에 조합장 때문에 고생했잖아요. 솔직히 지금도 원활하진 않아요. 그래서 원산지와 직접 거래하려고 누나가 나선 거죠.”
겉보기엔 순탄해 보였는데, 뒤쪽의 사정은 여전히 비슷했나 보다.
원산지까지 찾아 나서야 한다니.
“상황이 더 나빠질 것 같아서 저희도 미리 준비하고 있는 중이예요.”
부모의 그늘에서 벗어난 남매는 나름의 방법으로 세상과 싸우고 있었다.
그런데 왜 저렇게 바람 잘 날이 없는 걸까.
어차피 서로 물고 물리는 공생 관계인데 왜들 저렇게 난리인지 모르겠다.
하나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엔 나름의 이유가 있는 법.
“곧 있으면 단체장 선거가 시작되거든요. 그것 때문에 서로 힘자랑 하면서 세력 늘리기에 바빠요.”
평화로운 이곳에서도 전쟁은 소리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우리 편 아니면 물건 안 줘! 이런 건가?”
“네, 그런 식이죠. 지금 연금 조합장과 대장장이 조합장이 붙었는데, 연금 조합장이 유리한 상황이에요.”
또 그놈이었다.
샤샤 남매를 곤경에 빠뜨렸던 연금 조합장 녀석.
“연금 조합장과 재료상이 힘을 합치니까 대장장이 조합장이 힘을 못 쓰고 있는 상황인 거죠.”
“재료 수급 때문에?”
“네. 아예 안 풀면 큰 싸움이라도 날 텐데, 야금야금 풀면서 대장장이 조합원을 꼬드기니 다들 넘어가는 실정인가 봐요.”
이래서 머리 좋은 놈이 힘센 놈을 부려 먹나 보다.
조합원이 가장 적은 연금 조합이 몇 배나 큰 규모의 대장장이 조합과 재료 상인들을 쥐락펴락하고 있었다.
고작 세 개의 구성원을 가진 연금 조합이 말이다.
“난놈은 난놈이네.”
하는 짓은 거슬리지만, 수완 하나는 인정해 줘야겠다.
단체 구성이 불가능한 재료 상인들을 규합해서 대장 노릇을 하고, 그걸로 시장 전체를 아우르고 있으니까.
놈은 샤샤 남매를 괴롭힐 때와 똑같은 수법으로 여전히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게요. 이래서 재료상 조합이 법으로 금지된 건데…….”
하지만 없는 길도 만들어 내는 것이 인간의 욕망이 아니겠나.
무릇 야합이란, 사소한 욕심이 모여 만들어진 거대한 개미 지옥 같은 것이다.
한번 발 들이면 빠져나갈 수 없는.
“그런데 대장장이 조합장은 누구야?”
“게브네 영감이라고, 구시가지에 있는 유명한 대장장이에요.”
그 거대한 개미지옥이 나를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부술 수 있으면 부셔 보라고.
“그렇단 말이지…….”
대장장이 조합장 게브네의 이름은 소리 없는 돈의 전쟁에 초대장을 보내 왔다.
내 목숨 99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