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목숨 99개-91화 (91/203)

91화

“히이이이이익―”

엎어져 있던 자하르는 큰 숨을 몰아쉬며 감은 눈을 번쩍 떴다.

처음 사용해 봐서 그런지 몸에 남은 마법의 잔재가 영 좋지 않은 느낌이었다.

불편한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무슨 주먹이 그렇게 맵누.”

자하르는 정체불명의 남자를 떠올리며 부어오른 뺨을 매만졌다.

어찌나 강렬하던지.

마법 시전이 늦었다면 정말로 저세상으로 갈 뻔했다.

그런데…….

그 남자는 어떻게 이곳을 찾아 온 것일까.

멍청한 노이의 수하들이 떠벌리고 다녔나?

하기야, 그렇게 들쑤시고 다녔으니 약간의 소란은 각오했던 참이었다.

한데 연구실이 들통나다니.

이것은 상정했던 범위를 넘어선 비상사태라고 할 수 있었다.

“싹 잡아다가 족쳐야겠군.”

자하르는 미덥지 못한 사병들을 떠올리며 냉랭하게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기지개를 펴며 온몸을 잡아 늘렸다.

“그건 그렇고… 가사 상태일 때 몸의 부담이 너무 크군. 이건 보정이 필요하겠어.”

자하르는 빈 종이를 펼쳐 술식을 적어 나가기 시작했다.

조금 전 자신이 사용했던 마법.

일시적인 죽음에 이르게 하는 흑마법 언데스에 대한 보정이었다.

“오호… 여기가 문제였군.”

술식을 적어 나가던 자하르는 히죽거리며 무릎을 쳤다.

“여기를 이렇게 하면.”

홀린 듯 펜을 휘갈기더니 완성된 술식을 보며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좋아. 이건 해결됐고.”

이어진 그의 행동은 연구실을 둘러보는 것이었다.

가지런히 정돈된 기구들과 각종 실험 재료들.

벽면을 가득 채운 집기들을 보며 자하르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애착이라고 해야 하나.

뿌듯함과 아쉬움이 섞인 얼굴로 연구실 곳곳을 눈에 담았다.

이곳에 있는 모든 것들엔 자하르의 의지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이런 거다.

저 길쭉한 집게는 늘 실험대 왼편 선반에 있어야 하고, 살점을 가를 때 사용하는 나이프는 중앙 선반에 있어야 한다.

지금껏 그래 왔고, 단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았다.

기껏 공들여 만들어 놨는데.

“여긴 이제 버려야겠군.”

쓸 만해지려니까 갑자기 떠나야 할 상황이 돼 버렸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정체가 노출됐으니 장소를 옮겨야 할 수밖에…….

또다시 장소를 물색하고 집기를 옮기고 뭐 어쩌고저쩌고 번거롭게 돼 버렸다.

하지만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뜻밖의 수익이 생겼으니까.

“이참에 진짜 사마르로 살아 봐?”

귀찮은 모든 화살을 사라센 흑마탑으로 돌리게 됐으니 등가교환은 완벽하다 할 수 있었다.

아니지.

장기적인 안목으로 봤을 때 이것은 분명 큰 이득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사마르는 주목받게 될 테고, 그것은 그의 목적을 이루는 데 있어 걸림돌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적을 이용해 적의 뒤를 친다.

“후후후… 뜻밖의 기연이로군.”

정체불명의 남자가 사라센 흑마탑을 좇는 동안, 자신은 유유자적하게 때를 기다리면 된다.

자신을 사마르라고 알고 있는 놈이 알아서 밥상을 차려 줄 테니까.

주먹질 한 방과 연구소 이전의 대가로는 더할 나위 없는 훌륭한 보상이었다.

* * *

산자락 마을로 넘어간 나와 별은 백마를 되찾아 카슈타르로 향했다.

본의 아니게 증인이 사라졌지만 경고라도 전해야 했다.

이제는 카슈타르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마들레앙은 물론이고, 헤미르 영지도 피해 지역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중심에 카슈타르가 있을 뿐.

“사라센 흑마탑이라고 했는가?”

소식을 접한 제논 백작은 눈을 부릅뜨며 놀라움을 드러냈다.

대관절 아리안의 영지에서 사라센이 왜 등장한단 말인가.

심지어 흑마탑이라니.

흑마법을 인정하지 않는 왕국의 입장에선 국가적인 마찰을 불러일으킬 만큼 중차대한 사안이었다.

게다가 주민의 피해가 발생했다.

헤미르 마굴부터 시작해 순찰대장이 내통했던 마인 마을까지.

에르텔을 찾아 떠나기 전, 나는 제논 백작과 반크스에게 상황의 심각성을 이미 전달했었다.

“갑자기 목책을 설치하더니… 그 이유가 그것이었군.”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노이의 땅에 대한 감시는 사실상 중단된 상태나 다름없었다.

“오가는 사람들을 감시하긴 했네만 그런 일이 있었다니…….”

“외삼촌에게 말씀드려서 왕실의 군대를 보내야 하지 않을까요?”

탄식하는 백작을 보며 로제는 반크스를 떠올렸다.

로제뿐만이 아니다.

나 역시 그랬고, 솔직히 이보다 확실한 방법은 없다고 생각한다.

반크스가 누군가.

그는 왕실 기사단의 단장이고, 아리안 무력의 상징과도 같은 남자다.

그런 그가 나선다면 마론 후작도 어쩔 도리가 없을 터.

“마인이 된 사람들을 찾진 못했으니 물적 증거가 없는 상태입니다.”

하지만 명분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왕실의 군대가 귀족에게 향했다는 건 명백한 배척의 행위니까.

결과를 만들어 내지 못하면, 오히려 왕권에 타격을 줄 수 있는 양날의 검이기도 했다.

“흠… 다른 사람도 아닌 마론 후작이니 의심할 수밖에 없군.”

제논 백작은 탄식 같은 숨을 내쉬며 배경을 설명했다.

“사실 이 나라는 교묘하게 귀족의 힘을 눌러 왔다네. 그리고 마론 후작은 그것에 대해 반감을 드러내곤 했었지. 페이소스 후작가는 강경파의 대표라고 할 수 있다네.”

아리안 왕국이 무력 국가가 아닌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오러와 마력에 재능이 없는 타고난 혈통도 하나의 문제이지만.

지방 정치와 중앙 정치를 양분한 왕권에도 일말의 책임이 있었다.

“지방 영주에겐 자치 권한을 주었지만, 중앙 정치엔 관여하지 못하게 했지. 반대로 중앙의 귀족에겐 강력한 정치력을 준 대신 사병을 허락하지 않았다네.”

이렇듯 아리안의 왕권 강화 정책은 강력한 중앙 귀족과 지방의 영주들을 갈라놓고, 결탁하지 못하도록 다른 길을 제시했다.

중앙에서 어깨에 힘을 주든가.

아니면 시골에서 군주 놀이를 하든가.

어떤 선택을 하건 대가는 반드시 존재했다.

중앙 정치인은 한방에 훅 가는 촛불 같은 생명력.

지방 영주는 분기별로 파병을 시행해야 했다.

“그래서 지방 귀족에 후작이 없는 걸세. 대부분 자작이고, 세습 백작은 나를 포함해 세 명뿐이지.”

공작 및 후작, 그리고 세습 백작의 대부분은 중앙에 있다는 얘기였다.

사병이 허락되지 않는 중앙 귀족.

어떻게 보면 나쁜 조건도 아니다.

왕의 비위만 잘 맞추면 되니까.

그저 귀 닫고 세치 혓바닥 관리만 잘하면 대대손손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편안한 자리인 것이다.

하지만 사람 마음이 어디 다 똑같던가.

가끔은 양의 탈을 쓰고 태어난 맹수의 새끼도 있는 법이다.

마론 후작이 그런 사람이었고.

그는 두 가지 모두를 갖길 원했다.

“그래서 중앙 귀족들이 마론 후작을 멀리했지. 곁에 있다 불똥이 튈까 겁났던 거라네.”

“그런데 왜 데릴사위를 받으려고 하셨나요?”

맞잖은가.

제논 백작은 자신의 사후를 염려해 데릴사위를 들이려 했다.

그중에 노이가 선택된 건, 정치에 관심 없는 파락호에다가 강력한 가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집안 운영엔 관심 없고 배경만 좋은 사위.

제논 백작은 후작가의 위명만 등에 업기 위해 쓰레기 같은 노이를 데릴사위로 선택했다.

한데 저렇게 정적이 많은 사람이면 오히려 위험해지지 않겠나.

“그건 마론 후작의 정치 감각을 믿었기 때문이네. 불만을 가지고 있는 것과 그것을 드러내는 것은 다른 문제니까.”

마론 후작은 입으로 정치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왕실의 기조와 맞지 않는 사상을 가지고 있음에도 권력을 유지한다는 것은, 그의 절제력과 판단력이 그만큼 절묘하다는 뜻이었다.

“절대 스스로를 망가뜨릴 사람이 아니라네. 한데 뒤에서 이런 준비를 하고 있었다니…….”

예상치 못했던 뒷사정에 제논 백작은 침음성을 흘렸다.

“강화 인간의 핵심은 강제로 승급을 시킨다는 겁니다. 특정 방법으로 손쉽게 강해진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자아를 잃게 되는 부작용이 있다.

그런 사병들을 계속 모은다?

이런 확연한 특징이 있는 이상, 결국 꼬리가 밟힐 날은 반드시 오게 될 것이다.

그러니 지금으로선 다른 방법이 없다.

무리를 해서라도 영지의 치안을 늘리고, 지속적인 감시와 추적을 병행하는 수밖에 없었다.

증거가 드러날 때까지.

이런 엄청난 짓을 꾸미고 있다면 언젠가 실수하는 날이 분명히 찾아올 테니까.

“반크스 님과 의논해 보셔야 할 것 같네요. 왕실의 사정에 가장 정통하실 테니 뭔가 해법이 나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마론 후작을 상대할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왕실이다.

필요한 증거를 더 찾아내든가.

아니면 들이쳐서 찾든가.

이 이상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그렇겠군. 이 문제는 반크스 경이 오면 상의해 보겠네. 매번 이렇게 도움을 받기만 하니 미안하군.”

“별말씀을…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아니네. 그게 어디 자네가 해야 할 일이던가. 늘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네.”

노이의 사유지 문제는 일단 더 큰 힘에게 넘어갔다.

이후 대화의 주제는 가벼운 사담으로 이어졌다.

로제는 성에서 있었던 시시콜콜한 소식을 전했고, 나는 서리고원에 갔던 얘기와 부족장의 제자리 찾기 과정을 들려주었다.

“거 봐요. 부족장이란 호칭을 안 바꾸길 잘했다니까요?”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듣기만 하던 별도 이 순간엔 긍정의 대답을 했다.

“부족장은 훌륭한 족장의 자질을 가지고 있다. 아직 철없는 구석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다.”

왜 아니겠나.

미련할 정도로 우직하고 의리와 약속에 충실한 남자다.

때로는 영악스러운 계책까지.

부족장의 자리를 되찾기 위해 나를 끌어들인 건, 예상치 못한 녀석의 완벽한 한 수였다.

그러니 믿음이 갈 수밖에.

“잘하고 있으려나.”

“잘하고 계실 거예요. 애초에 뭘 잘못해서 그 자릴 내려왔던 게 아니잖아요.”

녀석의 안부를 떠올리는 나에게 로제는 밝은 얼굴로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그 말이 정답이 아닌가 싶다.

애초에 날 만나지 않았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까.

“시련이 사람을 만든다잖아요. 그러면서 더욱 좋은 족장으로 성장하는 거죠.”

“흠… 좋은 말이다.”

훈훈한 로제의 말에 별은 고갤 끄덕거리며 대답했다.

주제가 부족장이라서 그런가.

어쩐지 두 사람은 주거니 받거니 얘기가 통하고 있었다.

한동안 이어지던 부족장 얘기가 끝이 나고.

“아참, 외삼촌이 그러시는데 이반 님 작위가 자작이 될 거래요.”

“아, 네… 엣? 왜요?!”

“왜긴요. 에르텔에 대한 공로 때문이죠. 그날 삼촌이 말씀하시는 거 같이 들으셨잖아요.”

로제는 나에게 잊고 있었던 기억을 상기시켰다.

새카맣게 잊고 있던 기억을.

“헐…….”

“헐이 아니구요. 세습 귀족이면 남작이고, 세습하지 않는 단승 귀족이라면 자작까지 가능할 거라고 하셨어요.”

세상에…….

그 얘기가 진짜였어?

하루 아침에 귀족이 되다니.

그 말을 누가 진심으로 귀담아 들었겠냐고!

“아마 단승 귀족이 될 확률이 높을 거라고 하시네요. 외국인에게 주는 작위들이 대부분 그렇대요.”

세습인지 단승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다.

귀족이 된다는 게 핵심이지.

“2주 뒤가 건국 기념일인데 아마 그날 작위 수여가 이루어질 것 같다고 하셨어요.”

흘려들었던 반크스의 얘기는 현실이 되어 다가왔다.

“저기요, 이반 님? 제 얘기 듣고 계신 건가요?”

듣고 있다.

대답할 상황이 아니라서 이러고 있는 것뿐.

나는 여전히 정신줄을 놓고 있었고.

“하… 멍 때리는 것도 잘생겼어.”

턱을 괸 로제는 속마음을 끄집어내며 홀로 중얼거렸다.

내 목숨 99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