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무슨 일인데 오라 가라 성화를 부리는 건가. 내 분명히 서신으로 보고하라 했을 터인데.”
의자에 걸터앉은 카리프는 짜증 섞인 얼굴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조심스런 상황이 아니던가.
어지간한 일로 자신을 찾지 말라 수차례 지시했었다.
한데 눈앞에 있는 이 인간은 도무지 말을 듣지 않는다.
이 인간의 이름은 자하르.
“위대한 무스타파의 혈족께서 사마르 따위를 신경 쓰시다니요. 무시하십시오. 사라센 흑마탑은 머지않아 카리프 님의 손에 떨어질 것입니다. 물론 운영은 제가 하겠지만요. 하하하하.”
녀석의 주둥이는 늘 시끄럽고, 또한 늘 요란했다.
보통이라면 이해해 주고 넘어갔겠지만.
“치워라. 아첨을 부릴 요량이라면 그 생각을 접어야 할 것이다.
지금 카리프의 기분은 저런 얘길 받아 줄 만큼 편하지가 못하다.
불필요한 관심이랄까.
카리프에 대한 흑마탑의 태도가 최근 들어 달라졌기 때문이다.
‘집요해졌다.’
자신의 행보에 대해 부쩍 관심을 드러냈고, 그 관심의 수위가 필요 이상으로 높아지고 있었다.
그 관심이 의심이라는 건 당연한 사실일 터.
의심의 시작은 남들과 같지 않은 카리프의 특징 때문이었다.
― 또 시험 문제군.
강화를 할 때마다 흑마탑은 카리프의 지적 능력을 시험했다.
간단한 수학부터 시작해 언어 문제까지.
사실 어려운 문제가 아니니 그저 생각할 줄 알면 풀 수 있는 손쉬운 것들이었다.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었다.
하나 카리프의 충신인 마살라가 광인이 된 이후, 놈들은 계속해서 카리프의 지능을 확인했다.
마치 정신이 나가길 바라는 듯.
시험 결과가 좋을수록 놈들은 억지웃음만 지어 댔다.
하지만 딱히 의심하진 않았다.
그들의 말처럼 단순한 부작용 테스트라고만 생각했다.
강화 인간을 만드는 데 있어 최대의 관건은 광인이었기 때문이다.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는 것.
하여 카리프는 스스로를 성공한 강화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 남은 과제는 훔쳐 온 자신의 실험 정보로 직접 강화 인간을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에는 막대한 자본이 필요했다.
하지만 멸문한 가문의 아들인 카리프는 사라센에서 자생할 수 없었다.
아니.
카리프 스스로가 사라센과의 협력을 거부했다.
그에게 있어 사라센은 복수의 대상이었으니까.
죽은 아비의 무덤에서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맹세했다.
가문을 물어뜯던 놈들에 피의 복수를 하겠노라고.
하여 카리프는 국외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마침내 아리안에서 파트너를 만나게 되었다.
그의 이름은 마론 데 페이소스.
아리안 왕국의 후작이자, 실세로 군림하는 정치계의 거물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커다란 고민이 있었다.
정적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사병이 없다는 것.
왕도의 귀족이란 특성상 페이소스 후작 가문은 무력 집단을 형성할 수 없었다.
왕가의 입장에선 안전장치였겠으나 후작가에겐 큰 위협으로 다가왔다.
특히나 급진적인 그의 성향은 많은 정적들을 만들고 있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만났다.
마론 후작에게 필요한 건 군사력이었고, 카리프에겐 실험을 이어 갈 자본이 필요했다.
― 좋소. 내가 실험에 필요한 장소를 만들어 드리리다.
그렇게 카리프는 강화 인간 제작에 뛰어들었다.
하나 그게 쉬웠겠는가.
성공한 자신의 자료가 바탕이 되었음에도 실험은 계속해서 실패했다.
하나 그 생각이 틀렸다는 걸 알게 된 건 자하르를 만나고 난 이후였다.
― 강화 인간의 핵심은 능력의 증가가 아닙니다. 자아를 지우는 게 성공의 기준이 되는 것이죠.
― 생각이 많은 개는 못 써먹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카리프 님은 완벽한 실패작입니다.
성공작이라고 생각했던 카리프 자신은 만들어져서는 안 될 위험한 실패작이었다.
자아가 살아 있는 전투 인형.
자신의 돌연변이 정보는 강화 인간 제작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 돌파구를 열어 준 것이 바로 자하르였다.
자하르 살라크.
과거 사라센 흑마탑의 일원이었던 그는 강화 인간을 기획한 최초의 흑마법사였다.
시작은 좋았다.
야심차게 출발한 강화 인간 계획은 사마르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급물살을 탔었다.
하지만 거듭되는 실패에 사마르의 시선은 차갑게 변해 갔다.
1년이 지나고.
또다시 1년이 지나갔다.
그렇게 지나간 실패의 시간이 도합 4년.
자하르는 강화 인간 계획에서 축출되고 말았다.
중책에서 밀려난 자하르는 잡스런 업무를 담당하며 절치부심했다.
그런 자하르와 카리프가 만난 건 운명이었을까.
자하르는 강화 인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고.
카리프는 자신의 실험 정보를 훔쳐 스스로 사병을 만들길 원했다.
한 사람은 마탑을 삼키기 위해.
또 다른 이는 빌어먹을 사라센을 뒤집어 버리기 위해.
두 사람은 그렇게 같은 목표로 향하고 있었다.
“아첨 때문에 뵙자고 한 건 아니니 안심하셔 됩니다. 오늘 뵙자고 한 건 중요한 요인을 발견했기 때문이죠. 너무 고마워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야 뭐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까요. 그게 다 좋은 재료가 생겨서 그렇게 된 겁니다. 이번에 버섯 농장에서 들어온 마인이 있었는데, 그놈들이 아주 좋은 원료로 쓰였죠. 머리통에서 나온 마석이 아주 순도가 높았거든요. 그래서 제안을…….”
“그만.”
“네? 아직 말씀드릴 게 많이 남았는데요.”
“됐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으니까.”
카리프는 자하르의 말을 끊으며 손을 휘적거렸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밤이 새도록 떠들 터.
“그래서 뭘 하고 싶은 것이냐.”
카리프는 마지막 결론을 요구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자하르의 대답은.
“이제 사라센 흑마탑은 안 가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토록 기다리던 카리프의 염원이었다.
그의 목표는 이성을 유지한 강화 인간을 만드는 것.
“완전히 성공한 것이냐.”
“네. 카리프 님처럼 완벽한 자아를 가지고 있지요. 노이와 함께 나갔으니 지금쯤 마론 후작을 만나고 있을 것입니다.”
훔쳐 낸 강화 인간의 계획은 원안자 손에서 빛을 보게 되었다.
“오실 때까지 기다리려 했는데, 하도 보채서… 애초에 지 새끼들 가지고 실험했으니 할 말도 없더군요.”
자하르는 뺨을 긁적이며 현 상황을 설명했다.
그에 카리프는 일어섰고.
“노이의 거처로 가겠다.”
짧은 말을 남기며 연구실을 나섰다.
* * *
“밤에 올 걸 그랬나.”
“나는 그렇게 하고 싶었다.”
“말을 해 주지.”
“이미 달려가고 있더군.”
기세 좋게 넘어온 것까진 나쁘지 않았다.
동굴의 위치도 알고 있겠다, 그저 찾아가면 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게 얼마나 멍청한 생각인지 알게 되는 덴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뭔 사람들이 이렇게 많아졌지?”
변한 것은 목책만이 아니었다.
군데군데 보이는 순찰 조는 물론이요. 동굴 입구엔 아예 작정하고 지키는 병사가 수두룩했다.
심지어 저 사병들은 노이의 호위병이 아니었다.
갑옷은 제각각이지만, 풍기는 분위기는 더욱 거칠었다.
어딘가에서 새로 유입된 인원이 분명한데.
“잠깐만…….”
갑옷이 제각각이라고?
이거 어디서 들었던 말이 아닌가.
제각각이라는 말.
버섯 농장의 목격자 피터는 용의자의 특징을 저런식으로 표현했었다.
생긴 건 비슷한데 갑옷은 다 제각각이었다고.
“마차는?”
이 상황에 마차까지 발견하면 의심은 더욱 짙어질 터.
“입구 왼쪽 편 숲을 봐라.”
별이 일러 준 방향에는 지붕이 씌워진 짐마차가 낮은 관목림 사이에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확실히 여기서 무슨 일이 있긴 하네.”
수상한 냄새가 진동을 하는데 뚜껑을 열어 볼 상황이 아니었다.
나에겐 권한이 없기 때문이다.
목책을 넘어온 순간 이미 무단 침입자가 된 상황이었다.
모습을 들키면 그 뒤야 말해 뭐 하겠나.
쫓겨나는 건 당연하고 불미스런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르겠다.
외국인이란 신분이 모든 걸 용서해 주는 면죄부는 아니니까.
결론은 잠입이라는 건데 현실적으론 불가능해 보였다.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접촉을 피해 접근하는 것뿐.
문제는 사람들의 시선을 분산시키는 것이었다.
입구에만 여덟 명에 내부는 또 얼마나 있을지 모르는 상황이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그때.
“누가 나오는 건가.”
동굴 입구를 통해 두 남자가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빼빼 마른 남자는 누구인지 모르겠고, 옆에 있는 남자는 확실하게 알겠다.
저 얼굴을 잊을 리가 없지.
다시 만나기만 학수고대하던 놈인데.
“카리프…….”
모습을 드러낸 카리프는 말 위에 올라탔다.
짧은 대화가 지나갔고.
카리프는 두 명의 병사와 함께 어딘가로 말을 달렸다.
“쯧…….”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본다더니.
애매한 시점에 마주친 카리프는 또 이렇게 나의 복수를 피해 갔다.
운 좋은 자식.
다음 기회를 기약하며 눈앞의 상황에 집중했다.
하여 우린 계획을 세웠고.
“일단 저 사병들을 유인해야겠군.”
별은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계획을 떠올렸다.
“그렇지. 저놈들을 다 죽일 수도 없으니까. 요란하지 않게 제압하려면 인원을 줄여야 해.”
“좋아. 그럼 내가 유혹해 보지.”
“응? 뭘 한다고?”
“내가 말하지 않았나. 세속인들은 날 보면 환장한다고.”
인원을 줄이자는 나의 말에 별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미인계를 주장했다.
“미인계라…….”
사실 별의 외모는 절대 평범하지 않다.
그 씩씩한 말투가 이상해서 그렇지, 외모만 놓고 보자면 여왕벌에 가까운 녀석이다.
다만 전통 복장일 때 그 위력이 폭발하는 것인데.
“내게 맡겨라.”
녀석은 주먹을 불끈 쥐며 씩씩하게 대답했다.
* * *
“거기 정지. 뭐야? 당신 여기 어떻게 들어왔어?”
훤칠한 키에 굴곡진 몸매.
이국적인 낯선 여인의 등장에 병사는 눈을 가늘게 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살, 살려주게…세요!”
“…….”
살려주게세요?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에 멈칫한 것도 잠시.
머리를 풀어헤친 여인은 이상한 부탁을 하며 다짜고짜 주저앉았다.
그 모습이 어찌나 어색한지 고개가 갸웃거렸지만.
“저, 저쪽에 강도가 있…요!”
땅을 짚으며 쓰러진 여인의 말에 병사는 먼 곳을 바라보며 미간을 좁혔다.
물론 보이는 것은 없었다.
본디 좋은 눈을 가진 것도 아니었으니까.
얼떨결에 여인이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봤을 뿐, 되돌린 시선이 향한 곳은 옆으로 쓰러진 여인의 자태였다.
범상치 않았다.
날고 긴다는 무희들도 이 앞에선 한 수 접어줄 것 같다.
게다가 뜯겨진 셔츠의 앞섶은 거짓말 같은 모습으로 병사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크흐흠, 강도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병사는 점잔을 빼며 여인에게 반문했다.
마치 큰 선심이라도 쓰는 듯이.
시선은 다른 곳에 둔 채 여인의 답을 기다렸다.
“저 위쪽 목책 근처에 가면 강도들이 모여 있다.”
“…있다?”
“큭, 모여 있다요!”
“…….”
뭔가 어색한 여인의 말투에 병사는 대화를 멈췄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이중인격인가?
‘모여 있다’라고 할 때는 세상 씩씩하더니, ‘모여 있다요!’ 할 때는 콧소리 작살이다.
보통이라면 이상하다며 의심을 했겠지만.
“무슨 일이야?”
뒤늦게 다가온 병사들로 인해 녀석의 의심은 흩어져 버렸다.
“강도들이 이 여자를 쫓아왔다는데.”
“…….”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없었다.
이놈들도 남자라 이거다.
자초지종 따위 귓등으로 날리며 병사들은 쓰러진 여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해서 도와달라고 하더군.”
“뭐?! 어떤 겁 없는 놈들이 목책을 넘어와. 어디야? 빨리 가 보자고!”
“아니, 그게 무작정…….”
“야 이 친구야, 만약 그놈들이 돌아다니다가 윗사람들 눈에 띠면? 못 찾겠으면 초소 녀석들에게라도 알려 줘야 할 것 아닌가.”
본심을 가늠할 수 없는 이들의 말에 의심하던 병사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외부인 침입은 심각한 문제니까.
여자 때문이 아니더라도 확인은 필요한 상황이었다.
다만, 이 여자를 어쩔 것인가가 문제인데…….
“내가 안내할게요. 어디로 갔는지 봤어요.”
쓰러진 여인은 뜯어진 셔츠를 여미며 천천히 일어섰다.
“따라와라…요.”
이상한 말투의 여인은 앞장서 걷기 시작했고.
“크흠흠.”
다른 병사들은 힐끔거리며 여인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홀로 남은 병사.
의심 많던 이 병사는 이곳에 남아 입구를 지키기로 했다.
지키기로 했지만.
“커헉!”
외마디 비명과 함께 힘없이 고꾸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 자리엔.
“좀 쉬고 있으라고.”
유령처럼 모습을 드러낸 남자가 해머를 흔들며 동굴로 사라졌다.
내 목숨 99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