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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숨 99개-87화 (87/203)

87화

“하면 그놈들도 바로 끌려갔다는 것이냐?”

“정확하게는 속아서 스스로 간 거죠. 일이 잘못됐다는 건 흑마탑에 도착하고 나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그레이시는 침통한 얼굴로 이후의 상황을 설명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열여섯 살.

공격 수단이 없는 그로서는 할 수 있는 저항이 없었다.

진이 홀로 싸울 때도.

끝내 죽음을 맞이할 때도.

치유라는 그의 능력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었다.

할 수 있는 거라곤 무력한 자신을 탓하는 것뿐, 이렇다 할 저항도 못한 채 휩쓸리듯 흑마탑으로 향했다.

“저녁 식사를 마친 직후 하나둘씩 쓰러지기 시작했습니다.”

“쓰러졌다?”

“네, 독약이 들어 있던 거죠. 저는 치유를 사용해 회복한 뒤 기회를 살피며 죽은 척하고 있었습니다.”

쓸모없다던 그레이시의 능력은 위기의 순간 스스로의 목숨을 구해 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난 그레이시는 이어질 사건의 증인이 되었다.

“흐음… 다른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죽은 것이구나.”

“아니요. 카론과 루즈는 누군가가 와서 해독제를 먹여 주었습니다.”

빅터의 예상을 뒤집으며 사건은 또 다른 방향으로 변해 버렸다.

갑자기 등장한 제3자의 개입.

“잠행복을 입은 사람들이 나타나 두 사람을 데리고 나갔습니다. 미리 조치를 해 둔 건지 조용하더군요. 뒤를 몰래 따라가서 도망칠 수 있었습니다.”

급변한 상황 설명에 빅터의 미간이 깊게 패였다.

죽이려는 자는 알겠는데 살리려는 자는 누구인 걸까. 빅터의 생각은 비극이 시작되기 전으로 되돌아갔다.

애초에 황제는 신탁의 기사 모두를 제거하려 했다.

하여 선택한 방법이 진과 다른 영웅을 갈라놓는 것이었다.

내막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누가 누구에게 어떤 것을 제안했는지, 그 대가가 무엇이었는지.

아무것도 몰랐던 진은 그렇게 동료의 배신을 마주하게 된다.

결국 황제의 계획은 성공했고, 가장 큰 걸림돌인 진과 그의 편에 선 브레인을 제거했다.

남은 것은 배신에 참여한 다섯 명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레이시. 황제는 그들 모두를 흑마탑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독살을 시도했다.

여기까지는 이해가 되는데.

‘잠행복이라…….’

황제를 배신한 그들은 또 누구였단 말인가.

그레이시의 말이 사실이라면 카론과 루즈의 생사도 장담할 수 없게 되었다.

비록 다른 영웅들과 함께 처형당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그들의 시신은 공개되지 않았고, 그 이유는 흑마법에 의한 사체 소실로 발표되었다.

실로 미심쩍은 내용이라 할 수 있지만, 그들이 죽지 않았다면 아귀가 맞아떨어진다.

“카론과 루즈는 흑마법사였으니까요. 그래서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을 겁니다.”

“흠… 나 역시도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구나.”

생각해 보니 빅터 자신도 그렇게 속아 넘어갔다.

죽음 이후 사체가 남지 않는다는 흑마법의 속설이었는데.

흑마법의 시전 조건 자체가 워낙 남다르기에 저런 속설들은 기정 사실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남은 생명의 얼마를 바친다던가, 혹은 사망 이후의 영혼이나 사체 같은 것들…….

워낙 베일에 싸인 집단이니만큼 사실 여부를 밝히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심지어 그날엔 목격자도 없었으니까.

유일한 목격자인 그레이시는 흑마탑 2㎞ 바깥에서 얼굴이 뭉개진 시체로 발견됐다.

이 또한 그레이시로 추정되는 사람일 뿐.

완벽하게 신원이 드러난 사체는 다섯 구였고, 그레이시를 포함한 3인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 상태였다.

그 다음은 없었다.

8인의 사인은 반역죄로 인한 처형이었고, 해당 사건과 관련된 이들은 극소수만 제외한 채 소리 없이 모습을 감췄다.

“카론과 루즈가 아직 살아 있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글쎄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흑마탑은 많은 것이 감춰져 있으니까요.”

안 될 이유도 없어 보였다.

죽은 줄 알았던 그레이시도 이렇게 살아 있으니까.

“한데 너의 사체는 어떻게 된 것이냐? 누군가를 대신 죽인 게야?”

“아니요. 도적 때에게 당한 상인들을 발견했을 뿐입니다.”

“그랬구나.”

빅터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레이시를 바라보았다.

벌레 하나 못 죽이던 녀석이 사람을 해쳤을 리 없을 터.

사체의 얼굴을 뭉갠 것만으로도 그레이시에겐 끔찍한 경험으로 남았을 것이다.

세월이 흐른 지금이야 어떻게 변했을지 모르지만.

“하면 이쪽에서 보자고 한 이유는 무엇이더냐.”

빅터는 듬직해진 그레이시를 보며 감춰진 속사정을 물었다.

“이상한 놈을 발견했습니다.”

“계속해 봐라.”

“비상식적인 능력을 가진 놈이었죠. 도저히 납득되지 않는 기이한 녀석이었습니다.”

굳은 표정의 그레이시를 보며 빅터는 카이 형제를 떠올렸다.

오러를 지워 버리던 레이와 신체를 변화시키던 로우.

그 특이한 사술이 신경 쓰여 흑마탑 주변을 이 잡듯 들쑤시고 다녔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신탁을 받은 8인은 사라졌고, 그런 특별함은 더 이상 나타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말 그대로 모두가 사라졌으니까.

영웅의 등장에 일조했던 모든 이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모습을 감추었다.

하지만 카이 형제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이해할 수 없는 특별한 능력들.

결국 빅터는 흑마탑을 중심으로 놈들에 대한 정보를 꾸준히 모으기 시작했다.

수상한 놈들은 이후로도 계속해서 나타났다.

신원을 알 수 없는 그놈들은 브라함 흑마탑을 오가며 빅터의 추격을 따돌렸다.

하나 한 놈은 세비앙의 풍차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고, 카이 형제는 이반과 빅터의 손에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빅터의 정보망에 걸린 네 명의 신원 미상자 중 세 명은 그렇게 사라졌다.

남은 사람은 이제 단 한 명.

작고 어린 소녀란 단서 외에는 드러난 정보가 없는 상태였다.

― 흔적이 없어졌습니다.

가뜩이나 정보가 부족했던 이 소녀는 이반을 만난 시기를 기점으로 행방이 묘연해졌다.

증발했다고 해야 할까.

의심스러웠던 흑마탑조차 활동을 멈춰 버렸으니 빅터의 조사는 답보 상태에 머물게 되었다.

“네가 말한 녀석을 본 장소가 이곳이란 말이더냐?”

하지만 그레이시가 하고 있는 말은 빅터가 모르는 신원 미상자가 더욱 많을 수 있다는 얘기였다.

“아니요. 처음 본 곳은 다른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곳을 통해 사라센을 드나들고 있더군요.”

“흐음…….”

빅터의 머리가 더욱 복잡해졌다.

브라함이라고 했으면 편했을 것을… 사라센이라고 하니 생각의 범위가 너무 거대해지고 있었다.

거기에 생사가 불투명한 카론과 루즈까지.

“그 두 놈이 연관됐다고 생각하는 게냐?”

“그쪽에 대해 가장 깊은 지식이 있으니까요. 특히 카론은 집착에 가까울 만큼 우리 능력의 근원을 파헤치려 했었습니다.”

빅터의 생각이 한쪽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죽은 줄 알았으나 살아 있는 두 명의 흑마법사와 수상한 능력자들.

“홀로 불러낸 것은 이 때문이었구나.”

“네. 저 역시 이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니까요.”

빅터는 머리를 스치는 불길한 예감에 마른 입술을 곱씹었다.

이 모든 건 과거의 재현을 위한 서막에 불과할 뿐.

“카론, 루즈… 무슨 짓을 하려는 게냐…….”

빅터는 주름진 눈을 가늘게 떠 사라센으로 향하는 길을 바라보았다.

* * *

“일단 이걸 들고 가 보세요.”

“아무데나 서 있으면 돼요?”

“네, 편한 데 서 계세요.”

베르의 요구에 맞춰 나는 거실 한편에 대충 자리 잡고 앉았다.

베르가 넘겨준 작은 노트 한 권과 잘 손질된 양피지 한 장을 들고서 말이다.

그런 나의 맞은편엔 베르와 별이 나란히 앉아 무언가를 끄적거리고 있었다.

“잘 보세요!”

베르는 끄적거린 노트를 찢어 불을 붙였다.

종이는 한순간에 사라졌고.

딸랑―

익숙한 종소리와 함께 흘려 쓴 손 글씨가 양피지 위로 떠올랐다.

“뭐라고 적혀 있던가요?”

“나와 별 보러 갈래.”

“그럼 후배님도 뭐라고 써 보세요.”

베르의 말에 따라 나 역시 노트에 글을 적었다.

[좋아.]

“큭… 집안이 너무 더운 것 아닌가.”

딸랑 소리와 함께 별은 자리를 박차고 테라스로 향했다.

“시원한데?”

별을 바라보던 베르는 낮게 중얼거리며 나를 향해 다가왔다.

그러고는 새로 발명한 마법 도구에 대해 자랑을 시작했다.

“보셨죠? 이렇게 글을 쓰면 상대의 양피지에 내용이 전달됩니다.”

“신기하네요. 그런데 꼭 불태워야 하는 건가요?”

“필수죠.”

“소리는 꼭 딸랑거려야 하는 거구요.”

“맞아요.”

“마법 지도랑 똑같네요.”

“그렇… 아니죠. 응용이라고 해 주세요.”

베르는 손가락을 저으며 같다는 말을 부정했다.

그 대신 여분의 노트와 양피지를 나에게 선물했다.

“연락을 주고받을 사람에게 노트와 양피지를 주시고 서로의 양피지에 등록을 하시면 됩니다.”

“어떻게요?”

“타액이나 피를 양피지에 살짝 묻히면 되는 거죠.”

“타액이면 침을 말하는 건가요?”

“소변도 상관없지만 그건 좀 이상하니까요.”

“아…….”

의미 없는 감탄을 뒤로 하고 베르는 설명을 이어 갔다.

“등록된 사람의 명단은 양피지 옆에서 선택할 수 있어요. 떠오른 이름을 스윽… 문지르면 그 사람에게 전달됩니다.”

“호오… 대단하네요. 이런 건 어떻게 만드는 거죠?”

“그냥 연금술과 마법학을 살짝 섞은 거죠. 다양한 연금술식과 마법을 알아야 한다는 전제가 따르지만 저야 뭐…….”

줄여서 잘났다는 말이지만 인정한다.

물어보면 모르는 게 없고, 신기방기한 물건들도 자주 만들어 낸다.

처음 봤을 땐 미친놈인가 싶었는데 알고 보니 천재였다.

아, 이건 칭찬이 아닌가?

하여간 베르는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지적 능력을 자랑했다.

공부에 취미가 없는 나로서는 솔직히 신기하고 부러운 부분이었다.

어쨌거나.

“저도 후배님처럼 키 크고, 잘생기고, 멋지고, 싸움도 잘하고, 막 웅장하고 그랬으면 좋겠네요.”

베르는 세상에서 내가 제일 부럽단다.

그러니까 내가 조금 더 잘난 거다. 후후후…….

하나 도토리 키 재기 같은 잘난 척은 갑작스런 노크 소리에 잠시 미뤄야 했다.

“안녕하세요, 형님!”

문이 열리자마자 등장한 사람은 다름 아닌 페드로였다.

“어쩐 일이야. 집을 다 찾아오고. 무슨 급한 일이라도 생긴 거야?”

“음, 나름 급하다면 급한 일이죠. 잘못하다간 재료를 다 날리게 생겼으니까요.”

찾아온 페드로는 그리 반갑지 않은 소식을 전하러 왔다.

보아하니 거력의 비약 문제인 것 같은데.

“일전에 유통이 끊긴 재료가 하나 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어, 그랬지.”

“그게… 아예 구할 수가 없는 상황인가 봐요.”

“왜? 또 조합장 그 인간이 끼어든 거야?!”

“아뇨. 그건 아닌데 채취하는 곳에 문제가 생겨서 아예 수급이 중단된 것 같아요.”

페드로의 얘기는 당분간 비약을 만들 수 없다는 말이었다.

“어쩔 수 없지, 뭐. 나중에 재료가 유통되면 만들어 줘.”

“네. 저도 그러고 싶은데… 설원 오우거의 혈액 자체가 오래 보관이 안 되더라고요.”

“아, 그래? 얼마나 가능한데.”

“한 달 정도요. 그 이상 시간이 지나면 산화돼서 못 쓴다고 하네요.”

이런 걸 가지고 산 넘어 산이라고 하는 건가.

나름 기대하고 있던 물건이었는데 갑자기 시한부 재료가 되어 마음만 급하게 돼 버렸다.

“채집지엔 무슨 문제가 생겼다는 건데? 이유는 모르는 거야?”

“그게… 일하는 인부들이 전부 광인이 됐다고 하네요.

문제에 대한 페드로의 대답은 미쳐 가는 사람들의 얘기였다.

내 목숨 99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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