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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숨 99개-86화 (86/203)

86화

“일단 구시가지를 중심으로 매일 흔적을 살폈어요.”

저녁나절에 돌아온 에스카는 기억을 더듬어 어제의 상황을 얘기했다.

“그러다 어제 발견한 거네요?”

“네.”

짧게 대답한 에스카는 빈 종이에 무언 갈 적기 시작했다.

[빅키 17―1―6!]

“이게 뭐죠?”

“좌표에요. 이걸 보고 저와 헤어지셨는데 대수림으로 가실 거라곤 상상도 못했네요. 국가 표기가 없어서 저는 리베라고 생각했거든요.”

설명을 멈춘 에스카는 백지를 펼쳐 직선을 그어 나갔다.

“자, 이렇게 가로세로로 8개의 선을 그으면 64개의 사각형이 나오죠. 각각의 사각형을 또 64개의 사각형으로 나누고, 그걸 또 64개로 나누는 겁니다.”

역시 나는 공부 체질은 아닌가 보다.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오니까.

빼곡하게 그려진 사각형은 보는 것만으로도 어지러웠다.

“이걸 대수림 지도라고 생각하고 일단 가장 큰 17번째 사각형 지역으로 갈게요. 그리고 그것보다 작은 64개의 지역 중 1번째, 그걸 다시 64개로 나눈 가장 작은 지역의 6번째로 가면! 이게 그 메모가 말하는 위치인 거죠.”

“아… 이해했어요.”

“스승님과 저희 가신들만 사용하는 방법인데, 대강의 위치를 지정해 줄 때 이용하곤 했죠. 말은 쉽지만 실제로 적용하면 범위가 엄청 넓어져요.”

이어진 에스카의 설명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대신했다.

지도와 실제 땅덩이는 완전히 다른 규모니까.

“대충 눈치껏 잘라먹는 거라 오차 범위도 심하고요. 그래도 이 지역! 하면서 동그라미 치는 것보단 훨씬 편하긴 해요. 그 동그라미가 어마어마하거든요.”

“그렇겠네요.”

얼마 전 서리고원을 떠올리며 적잖이 공감했다.

여기로 가면 돼!

이것과.

여기로 가서 이쪽으로 가면 돼!

이건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그런데 가장 마지막에 있는 느낌표는 뭘까요?”

나는 좌표 끝에 있는 느낌표에 주목했다.

다른 건 다 해석됐고, 저것 하나만 의미가 불투명했다.

“저 표시 때문에 혼자 가신 게 아닐까요? 그게 아니라면 굳이 혼자 가실 이유가 없거든요.”

베르의 말마따나 애초에 함께 찾아 나선 사람이었다.

이미 뭐 하던 사람인지 다 공개된 상태였으니 새삼스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한데 왜 그곳에서 만나신 걸까요? 은밀히 만나려면 리베 인근에도 얼마든지 장소는 있었을 텐데요.”

하나 중요한 건 혼자도 아니고, 어디에 있는가도 아니었다.

왜 거기로 불러냈는가.

요점은 그곳으로 오라고 한 이유에 있는 것이었다.

빅터가 반응한 걸로 봤을 때 그레이시라는 건 확실하니까.

거실에 모여 앉은 우리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며 상황을 유추했다.

나름 열심히 머리를 굴리며 생각을 해 봤지만.

“모르겠다.”

두 사람이 왜 그곳을 향했는지, 이쪽에서는 도무지 알 방법이 없었다.

“뭔가 보여 주려 한 걸까요?”

그것도 아니라면 더 이상 떠오르는 것도 없다.

나의 한계는 여기까지.

무언가 보여 줄 게 있던 그레이시가 빅터에게 현장 접선을 요청한 것이다.

아니면 어쩔 수 없고.

“갈 거면 얘기라도 하고 가지.”

속사정을 모르는 우리는 하릴없이 머리만 긁적일 뿐이었다.

* * *

“어라? 여기가 언제부터 이렇게 막혔지?”

“그러게 말일세. 지난달에 왔을 때는 이렇지 않았는데…….”

마차를 끌던 두 남자는 앞을 가로막은 목책에 고삐를 당겨야 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멀쩡한 길을 막아 놨으니 꼼짝없이 돌아가야 할 판이었다.

어쩔 도리가 없지 않겠나.

할 수 있는 건 그저 목책을 따라 이동하는 것뿐이었다.

하나 당황스런 상황은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

“여기서부터 출입 금지요. 그러니 다른 길로 돌아가쇼.”

출입구가 있는 곳에 도착했으나 무장한 경비병이 가로막았다.

여기가 무슨 국경도 아니고.

평범한 영지의 땅인데 왜 못 지나가게 하는 걸까.

“이봐요. 돌아갈 땐 돌아가더라도 이유라도 알고 갑시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거요?”

울컥한 마부 사내는 모자를 벗어던지며 따졌다.

“우리도 좋아서 이러는 거 아니요. 위에서 하라니까 어쩔 수 없이 이러고 있는 거지.”

하지만 돌아오는 건 툴툴거리는 경비병의 넋두리뿐.

마부는 하소연을 흘려들으며 경비병의 차림새를 유심히 관찰했다.

어디서 봤더라?

갑옷 위로 걸친 타바드의 문양은 꽤 유명한 가문의 이름을 떠올리게 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한 이 나라의 실세.

“혹시 페이소스 후작가에서 나오신 분들이요?”

마부 사내는 혹시나 싶은 마음에 생각나는 이름을 내뱉었다.

“오∼ 그걸 어떻게 아셨소? 우리는 페이소스가의 차남인 노이 님의 호위대요.”

돌아온 경비병의 말은 사내의 예상에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한데 아들의 호위대라고?

“후작가의 가신들이 왜 이런 곳에 있는 거요? 왕도에 계셔야 하는 것 아니요?”

“왜는 왜겠소. 이 땅이 그 아들의 땅이니까 그렇지. 우리도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소. 갑자기 경비대라니…….”

경비병은 얼굴을 구기며 하소연을 이어 갔다.

“한데 어디로 가는 길이쇼?”

“저 건너편에 있는 귀신버섯 농장에 갑니다. 나름 유명한 농장인데 아실라나?”

“아, 거기…….”

마부의 대답을 들은 경비병은 말끝을 흐리며 표정을 바꿨다.

“그 농장 사람이요?”

“그렇소. 영지 이곳저곳에 버섯을 팔고 돌아가는 중이요. 돌아가면 버섯이 또 자라 있을 테니 쉴 틈도 없겠구려.”

“후…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출신지를 확인한 경비병은 닫힌 입구를 열어 마부에게 손짓했다.

“귀신버섯 농장이라니까 특별히 봐주는 거요. 들어오쇼.”

“어이쿠, 이렇게 감사할 데가 있나.”

그에 마부는 크게 너스레를 떨며 고삐를 잡아챘다.

천천히 움직이는 짐마차.

목책을 넘어선 마차는 속도를 줄여 자리에 멈춰 섰다.

“열어 줘서 감사합니다. 수고들 하세요.”

마부는 얼굴을 내밀어 인사를 전했다.

하나 경비병의 표정은 싸늘했고.

“다 죽여.”

검을 뽑아 든 경비대원들이 마차를 향해 달려들었다.

* * *

녹음이 짙게 물든 고요한 숲길.

우두커니 서 있는 노년의 남자는 흔들리는 백발 사이로 중년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

과연 알아볼 수 있을까.

노년의 남자를 신경 쓰이게 한 건 다름 아닌 이것이었다.

무려 28년이 지났으니까.

기억이라는 건 생각보다 덧없고 외곡되기 쉬운 존재였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기억 속 그때와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저 세월의 흔적이 묻어 있을 뿐.

시간을 지워 낸 그의 얼굴은 자신이 알고 있던 16세의 소년이었다.

“그레이시…….”

백발의 노인은 힘겹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요즘 들어 왜 이리 눈물이 많아진 것인지…….

되살아난 과거의 추억들은 무뎌진 노년의 가슴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그대로구나.”

“…아저씨는 심각하시군요. 아니, 이젠 영감님인가.”

그레이시라고 불린 남자는 피식 웃으며 다가왔다.

“오래간만입니다, 빅키.”

“그래… 오래간만이구나.”

28년만의 재회는 이렇듯 건조했다.

벅찬 감동도 없었고.

환희에 찬 기쁨도 없었다.

그저 서로의 속사정을 헤아리며 천천히 다가갈 뿐.

두 사람은 차분한 표정으로 묻어 둔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죽은 줄 알았었다.”

“운이 좋았지요.”

“왜 연락하지 않았던 게냐.”

“글쎄요… 당시 상황이 그랬다고 해 두죠. 누구도 믿을 수 없는 그런 시절이었으니까.”

잠적한 이유를 묻는 빅터의 말에 그레이시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지금도 다르지 않았다.

그래야만 했다.

시체가 발견되지 않은 신탁의 기사 그레이시는 정체를 드러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빅터와 황제의 사이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레이시에게 있어 세력가들은 무조건 피해야 하는 존재였던 것이다.

“지금은 마음이 바뀐 것이냐.”

“그 메시지를 보고 그냥 지나칠 순 없으니까요.”

그레이시는 성력의 재단을 떠올리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 사람의 아이라니.

설령 이것이 함정일지라도 빅터의 부름에 응답할 수밖에 없었다.

존재를 아는 사람은 아이작과 자신뿐이었으니까.

진의 피를 이어받은 그 아이는… 그레이시의 의지로 세상과 단절된 아이었다.

존재를 알고 있으나 만나지 않았던 아이.

심지어 보호자였던 아이작과의 인연도 강제로 끊어지게 종용했었다.

그저 아무것도 모른 채 조용히 살아가기를…….

그 아이가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부모와 관련된 모든 것에서 멀어지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묻어 두었는데.

“아이의 얘기는 사실인가요?”

“사실이다.”

묻어 두었던 그 아이는 결국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말았다.

“그렇군요… 녀석은 어떻던가요. 잘 자란 것 같습니까?”

“제 아비 못지않게 아주 잘 자랐다. 얼굴도 엄마를 닮아서 여자 꽤나 홀리고 다니는 중이지.”

“훗… 다행이군요.”

엄마를 닮았다는 빅터의 말에 그레이시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미리암 같은 미인이 왜 진을 사랑했는지 당시엔 그것이 최대의 화두였지만.

정작 그레이시 스스로도 진의 열렬한 추종자였다.

멋진 남자.

진짜 남자.

16세 소년이었던 그의 우상은 세계 최강의 멍청이 진을 말하는 것이었다.

사랑과 의리에 모든 걸 다 바친 열혈 멍청이…….

그런 그의 혈육 소식이 반가운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원했던 결과는 이런 게 아니었다.

황제가 사라지지 않는 이상 잠재된 위험은 계속될 테니까.

그나마 빅터의 품이라는 것이 유일한 위안일 뿐.

잘 자랐다는 빅터의 말에 그레이시는 조용히 자신의 얘기를 꺼내 놓았다.

모두를 등지고 숨어 버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그리고 그날의 사건들을.

“진을 죽인 게 누군 줄 아십니까?”

“그건 황제의 직속부대가…….”

“아니요. 그들은 뒷정리만 했습니다. 감히 진을 상대할 깜냥도 아니니까요.”

“하면?”

반문하는 빅터의 말에 그레이시는 잠시 숨을 골랐다.

치미는 감정을 추스르는 듯.

한참을 망설이던 그는 심호흡과 함께 다시 말을 이어 갔다.

“그날 진은 다섯 명과 싸웠습니다.”

“싸우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고작 다섯 명으로 어찌 진을 상대한다고.”

“가능한 사람들이 있지요. 같은 신탁의 기사 놈들.”

이어진 그레이시의 말에 빅터는 하늘이 도는 기분을 느꼈다.

같은 신탁의 기사가 진을?

세상을 구했던 8인의 영웅들이 서로를 죽였다고?

가택 연금 중이었던 빅터는 사건의 경위를 전해 듣기만 했다.

신탁의 기사가 반역을 꽤 한다고.

하여 수장이었던 진은 국법에 따라 참살, 체포에 불응한 다른 이들은 도주 끝에 붙잡혀 모두 처형됐다고 전해 들었다.

― 그게 무슨 가당치도 않은 소리란 말이냐!

반역이라는 말 때문이 아니었다.

어차피 신탁의 기사에 대한 황제의 입장은 정해져 있었고, 제거를 목표로 한 이상 죄목은 핑계일 뿐이었다.

하지만 처형된 8인의 사망 과정은 도저히 납득되지 않았다.

누가 누구를 처형한단 말인가.

그들이 마음먹었다면 진즉에 뒤집혔을 세상이었다.

고작 황제의 직속부대 따위로 그들을 제압했다?

말이 되지 않았다.

가택 연금의 순간에도 빅터는 영웅들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었다.

반드시 황제의 배신을 잠재우고 이 땅에 정의를 구현할 것이라 기대했다.

그랬기에 순순히 가택 연금에 응했고, 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한데 처형을 당했다니.

말 같지도 않은 황당한 소식에 빅터는 믿을 수 없다며 기함을 토해 냈다.

하지만 미리암의 사망 소식을 접하며 빅터는 현실을 받아들였다.

― 진의 아내가 인질로 잡혀 있었구나…….

당연히 진은 모든 걸 내려놓고 항복했을 것이다.

그의 강한 무위는 아내와 동료를 지키기 위함이었으니까.

그는 늘 그렇게 말하며 술잔을 기울이곤 했었다.

하지만 나머지 7인은?

전투 능력이 전무한 그레이시를 제외하곤 쉽게 상대할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런 그들을 추적 끝에 사살했다고?

심지어 죽은 사람은 있는데 죽였다는 사람들이 없었다.

관련된 사람들 모두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루드겐 마이어 같은 몇몇 사람을 제외하곤 모두가 죽거나 실종되었다.

그리고 황제는 그런 그들을 역사에서 지워 버렸다.

한데 같은 신탁의 기사가…….

그들의 리더였던 진을 죽였다니.

“카론, 루즈, 하멜, 세브첸키, 미나이… 이렇게 다섯 명이 진을 공격했죠. 그리고 브레인이 놈들과 싸우다 사망했습니다.”

“진은? 그 다섯 명이 다 덤볐다 해도 쉽진 않았을 터인데?”

“처음엔 맞서 싸웠습니다. 그리고 전세는 당연히 뒤집혔고요. 하지만 스스로 칼을 내려놓더군요.”

“…미리암 때문이었구나.”

“네. 인질로 잡혀 있다는 얘기에 진은 싸움을 포기했습니다.”

포기했다는 마지막 말에 빅터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내 목숨 99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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