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전임 부족장과 후임 부족장이 무기를 마주했다.
지금은 둘 다 추방자의 신세가 된 아이러니한 상황.
― 우리가 그대를 따르는 이유가 이것이다. 강한 사람을 좇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성장하기 때문이지.
서리고원에서 했던 별의 말처럼 나를 죽이고 가라의 실력은 성장했다.
그러니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의 결실을.
그리고 그의 노력을.
“타―앗!”
선공은 후임 부족장으로 시작되었다.
서슬파란 장검을 내리그으며 우직하게 정면을 노려왔다.
아마도 이게 반투족의 스타일인 것 같다.
삼인조의 처음도 이랬으니까.
그들의 공격은 늘 정직했고, 순진하게 정면 돌파를 고집했다.
‘그래서 많이 당했지.’
연습 대련 때마다 녀석들은 나에게 매번 호되게 당했었다.
나는 힘만 센 근육 돼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빅터에게 전수받은 검술이 있었고, 임기 응변이라는 훌륭한 생존법을 배웠다.
그리고 그런 나의 경험은.
팟―촹!
함께했던 녀석들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크으윽…….”
장검을 든 녀석의 움직임은 철저하게 봉쇄됐다.
전임 부족장의 핼버드는 변칙적인 궤적을 그리며 파고 들었고, 예상치 못한 시간과 공간을 노리며 상대의 허점을 집요하게 노렸다.
애초에 상대가 되지 않는 결투였다.
핼버드를 들고 있는 이 남자는 더 이상 부족장 시절의 그가 아니었다.
강자와 함께하며 능력 이상의 싸움을 해 왔던 남자.
그런 그의 핼버드는.
“내가 졌다.”
후임 부족장의 목을 정확히 노리고 있었다.
결투가 시작된 지 고작 3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승자는 나를 죽이고 가라.”
족장의 선언으로 두 부족장간의 결투는 막을 내렸다.
“강해졌구나…….”
패배한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나 셋 셀 동안 눈 깔아는 정당한 결투에 패했으므로 전통에 따라 부족을 떠난다.”
말을 마친 남자는 무심히 일어나 뒤돌아 걸었다.
하나 그 순간.
“멍청한 놈.”
남자는 등 뒤로 오는 목소리에 가던 걸음을 멈추었다.
“벌써 잊은 건가. 싸움에 졌다고 죄다 쫓아내면 부족은 누가 지킨단 말인가.”
“…….”
“쯧, 한심하구나. 술도 너보단 기억력이 좋을 것이다.”
“아니 그 말은… 읍!”
발끈하는 술을 붙잡아 입을 다물게 했다.
지금은 웃고 떠들 때가 아니니까.
나를 죽이고 가라는 고개를 돌려 족장을 향해 큰소리로 말했다.
“저는 깨달았습니다. 패배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것을… 족장님의 현명한 판단을 기다리겠습니다.”
족장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천천히 걸어 나온 그는 두 손을 높이 들어 하늘로 향했다.
“위대한 반투족의 족장 울부짖는 창은 조상님들의 혼령과 메투스의 이름으로 나를 죽이고 가라를 부족장에 임명한다.”
그렇게 녀석은 자신의 자리를 되찾았다.
언젠가 로제가 했던 말처럼.
더 이상 녀석은 부족장이란 호칭에 마음 쓰지 않아도 된다.
이젠 그의 것이 되었으니까.
남은 건 패배한 남자의 처우뿐.
“또한 결투에서 패배한 셋 셀 동안 눈 깔아는 부족의 영광을 위해 헌신할 것을 명한다.”
족장은 전례를 깨고 남아 있을 것을 선언했다.
* * *
축제와 같았던 지난 밤.
화해와 축하로 시작된 연회는 새벽이 오도록 계속되었다.
떠들고, 마시고.
수많은 호기심과 선망이 야음을 등에 지고 후끈하게 달아올랐다.
본능이랄까.
최소한의 선을 긋고 그 안에서 마음껏 즐겼다.
눈치 보지 않고, 망설이지 않았다.
전투를 업으로 삼는 그들은 내일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살아간다.
때로는 너무 충실해서 문제지만…….
― 후후… 난 혼자 살고 있다.
밤새 100번도 넘게 들은 것 같다.
비슷한 말로는 남편과 아이가 어쩌고 했는데.
다 부질없는 얘기였다.
― 오늘 하룻밤과 목숨을 바꿀 생각인가.
내 곁에는 별이 있었으니까.
유난히 곁을 지키는 녀석 덕분에 소란은 짧고 강하게 반복되기만 했다.
그렇게 시간은 지나 아침은 다시 찾아왔다.
간만에 푹신한 침구를 사용한 나는 가벼워진 몸을 일으켜 부족장의 집을 걸어 나왔다.
“이제 출발할 생각인가.”
“그래야지.”
일정을 묻는 부족장의 말에 나는 가볍게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러고는 제자리로 돌아간 녀석에게 가벼운 소감을 물었다.
“다시 돌아간 기분이 어때.”
“모르겠다. 한동안 떠나 있었으니 살펴봐야 할 게 많겠지.”
“흠, 그렇겠구나. 어쨌건 잘됐다. 원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어서.”
“그대의 덕분이다.”
부족장은 무뚝뚝한 얼굴로 간지러운 얘길 떠들었다.
“한번 씩 놀러 올게.”
“나도 나가면 들리겠다.”
그렇게 우리는 다음 만남을 약속하며 이별을 준비했다.
동료 이전에 반투족의 전사니까.
부족장과 별, 그리고 술.
나와 삼인조는 각자의 자리를 지키며 다가올 미래를 열심히 준비하기로 했다.
그리고 또 한 녀석.
아침부터 활기찬 워 울프 꼬맹이가 꼬리를 흔들며 얼굴을 문지르고 있었다.
“이 녀석은 어쩔 샘인가.”
“글쎄, 데려가자니 내가 이동이 많을 것 같아서 걱정이네.”
사람을 따르지 않은 거야 어쩔 수 없다지만, 문제는 음식을 안 먹으니 큰일이다.
그러니 늘 곁에 두고 챙겨야 하는데… 고정적으로 머무는 곳이 없으니 그 또한 신경 쓰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나마 술이 챙겨 주면 먹긴 하니까.”
하여 술이 당분간 꼬맹이를 맡아 주기로 했다.
실상은 식사 당번일 테지만.
“이 녀석 이름이 뭔가?”
생각해 보니 꼬마의 이름을 정해 주지 않았다.
뭐가 좋을까 싶어 고민하던 찰나.
“펜리르가 어떻겠나?”
생고기를 먹이던 술은 대수롭지 않게 이름을 떠올렸다.
“그건 너무 거창한 것 같은데.”
그에 부족장은 턱 끝을 매만지며 자신의 생각을 얘기했다.
하기야 낯간지러운 면이 있긴 하다.
워 울프가 특별한 건 사실이지만, 신화 속 마수와 비교하는 건 무리가 있는 거니까.
“아무렴 어떤가. 멋지게 잘 자라 주면 그만이지.”
하지만 술은 이미 결심을 굳힌 듯했다.
나름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펜리르!”
무엇보다 본인이 저리 좋아하니 그걸로 됐지 싶다.
꼬리를 흔들며 빙글빙글 도는 것이.
깽! 깽!
이 소리에 특별한 의미가 있다는 걸 녀석도 눈치챈 모양이다.
그러니 이걸로 이름은 결정.
“밥 잘 먹고 얌전하게 있어. 나중에 데리러 올게.”
끼이잉…….
깽깽거리는 펜리르를 뒤로 하고 나는 리베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 * *
불어오는 바람에 기분 좋은 설렘이 느껴졌다.
왠지 모를 뿌듯함이랄까.
하나씩 해결되어 가는 주위의 일들이 모두 나의 일인 것처럼 기분이 좋다.
하늘은 높고, 떠가는 구름은 풍성했다.
길가에 솟은 나무는 곧게 자라 하늘을 가리고, 이름 모를 꽃들은 흐드러지게 피어 눈을 즐겁게 했다.
그런데 왜!
왜 나는 헛것이 보이는 걸까.
“……”
눈을 비비고 다시 본다.
그래도 똑같아서 한 번 더.
몇 번을 다시 봐도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훤칠한 키에 뚜렷한 이목구비.
그리고 저 커다란 대검까지.
“나는 좁은 세상이 싫어졌다.”
가로수에 기대 있던 별은 대검을 들쳐 메고 앞장서 걸어갔다.
“네가 왜 거기서 나와?!”
“두발 달린 짐승이 어딜 가든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내가 갈 길은 내가 알아서 간다.”
“부족장에겐 말하고 나온 거야?”
“어제 미리 얘기했다.”
나무 아래 있던 별은 이렇게 다시 나와 함께했다.
솔직히 허전하던 터라 반갑긴 했지만.
“이렇게 막 나와도 돼?”
“안 될 건 또 뭐가 있단 말인가.”
걱정하는 나의 말에 별은 무심한 얼굴로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렇다면야 뭐.
“산자락 마을에 두고 온 말도 찾으러 가야 하는 것 아닌가?”
“그렇지. 로제 양이 챙겨 준 건데 그렇게 놔두면 안 되지.”
“언제 찾으러 갈 생각인가.”
“일단 리베에서 볼일 좀 보고.”
그렇게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며 우리는 너른 평원을 가로질렀다.
* * *
리베에 도착한 나는 제일 먼저 페드로의 가게로 향했다.
물론 급한 용무는 아니었지만, 어차피 지나는 길이니 자연스레 이곳을 먼저 찾게 되었다.
“어후… 희귀한 걸 들고 오셨네요. 이걸 다 직접 구하신 건가요?”
“응.”
“설원 오우거의 피라니… 저도 말로만 들었지 실물을 보는 건 처음이네요.”
늘어선 물병을 본 페드로는 혀를 내두르며 신기해했다.
그만큼 귀한 물건이다.
일반적인 귀함과는 의미가 조금 다르겠지만, 토벌 자체가 흔한 일이 아니니 나름 귀하신 몸이긴 하다.
“한데 이걸로 뭘 하시려고요?”
“힘을 솟아나게 하는 약? 아무튼 피를 정제하면 시약으로 만들 수 있다던데. 넌 모르는 내용이냐?”
“흠… 그거는 시약점에서 확인하셔야 할 건데.”
설명을 들은 페드로는 다람쥐 같은 눈을 굴리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대로 책장을 향해 달려가더니, 한참을 뒤적거린 끝에 낡은 책을 꺼내 들었다.
“이걸 말하는 것 같네요.”
페드로가 펼친 페이지엔 복잡한 술식이 정신없이 나열돼 있었다.
죄다 알 수 없는 기호와 문자들이라 읽는 건 일단 포기.
페드로의 설명을 기대하며 나는 조용히 책에서 시선을 거뒀다.
“거력의 비약이라는 건데요, 이게 워낙 오래된 내용인데다가 실제로 사용된 경우가 거의 없어서…….”
“아, 그러면 못 만드는 거야?”
“그런 건 아니구요. 안정성이 보장되지 않았다고 해야 하나.”
이후 페드로가 읽어 준 주의 사항은 부족장의 말과 비슷했다.
마나에 취약해서 마법사나 오러 유저는 사용할 수 없다든가, 부작용으로 인한 고통까지.
‘반투족은 뭘 그리 많이 알고 있지?’
생각해 보면 은근히 많은 걸 알고 있었다.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지식 같은 건가.
“이걸 만들려면 시약점에 가셔야 해요.”
“아, 맞네. 너는 연금 전문이었지.”
“원래 시약 공부를 먼저 했는데, 아버지가 이쪽에 계시다 보니 자연스레 이렇게 되더라고요.”
“아, 그래? 그럼 네가 해 줘. 아는 사람이 해 주는 게 나야 좋지.
그에 페드로는 머리를 긁으며 생각에 잠겼다.
한동안 물병을 바라보더니.
“정제는 며칠 안으로 해 드릴 수 있어요. 그런데 시약으로 만들려면 재료 때문에 시간이 좀 더 필요할 것 같아요.”
페드로는 제작이 가능하다며 단서를 달았다.
“구하기 힘든 재료야? 알려 주면 내가 구해 볼게.”
“아, 그런 건 아니에요. 적당히 유통되던 재료였는데 요즘 통 물량이 보이질 않아서요. 일단 제가 알아보고 다시 연락드릴게요. 오우거 피는 저에게 주세요.”
재료를 모두 맡긴 나는 작별 인사를 하고 안전 가옥으로 향했다.
약간의 수고가 필요할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거력의 비약이라…….’
어쩐지 견딜 것 같은 느낌이 든단 말이지.
무표정한 별을 보며 떠오른 생각을 머릿속에 구겨 넣었다.
나중에 마셔 보면 알 테니까.
“뭘 그렇게 보는 건가.”
“어, 아니야. 그냥.”
대충 둘러댄 나는 안전 가옥을 향해 느긋하게 걸어갔다.
* * *
“오, 여기서 다시 보니 감회가 새롭군요. 이 집에서 보는 건 꽤 오래간만이죠?”
안전 가옥에 도착한 나는 베르의 환대를 받으며 휑한 거실로 들어섰다.
여전히 집안은 썰렁했고, 수다스런 베르의 목소리만이 빈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스승님은요?”
“스승님께선 출타 중이십니다.”
빅터의 행방을 묻는 나의 말에 베르는 코끝을 훔치며 대답했다.
“어딜 가셨는데요. 멀리 가셨나요?”
“멀리 가셨죠.”
“네? 언제 가셨는데요?”
이어진 빅터의 부재 소식에 아쉬움이 밀물처럼 차올랐다.
아직 듣지 못한 얘기가 남아 있었는데.
고작 한 꺼풀 남아 있는 비밀은 이렇게 또다시 멀어지고 있었다.
“나가신 건 어제였어요.”
“그런데요?”
“오늘은 다시 대수림에 계시네요.”
“왜요?!”
뜬금없는 대수림 얘기에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거길 갔단 얘길까.
“어제 에스카와 함께 나가셨었어요. 하지만 돌아올 땐 에스카만 돌아왔죠.”
“에스카 님도 이유를 모르나요?”
“구시가지에서 어떤 표시를 발견하셨다고 합니다. 그 뒤로 헤어졌는데… 그게 마지막이 돼 버렸네요.”
돌아선 베르는 책상으로 다가가 반으로 접힌 종이를 들고나왔다.
“조금 전에 올라온 표시입니다.”
베르가 보여 준 건 내 것과 똑같은 지도였다.
서로의 위치를 주고받을 수 있던 그것.
빅터가 있는 곳은 대수림 서북쪽으로, 사라센으로 통하는 입구가 있는 외진 곳이었다.
“여길 왜 가신 거지.”
도대체 저기에서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덕분에 마지막 남은 비밀까진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아버지와 영웅들이 특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일단 스승님은 그레이시를 찾으신 것 같습니다.”
마지막 비밀을 간직한 빅터는 또 다른 비밀을 찾아 대수림을 걷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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