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짧은 산 위의 하루가 저물어 간다.
하얗던 순백의 세상이 황금빛으로 물들고, 얼어붙은 설원은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아름답고.
또한 신비하다.
하지만 나의 신경은 온통 다른 곳으로 향해 있었다.
‘제기랄…….’
왜 하필 이쪽이지?
사방이 다 뚫렸는데 왜 그쪽으로 향했냐고!
떠오르는 불길한 예감을 지우며 달리는 두 다리에 더욱 힘을 실었다.
이 지랄 같은 상황이 시작된 건 지금으로부터 30분전.
아르르르.
생각 없이 내딛던 나의 발걸음은 꼬맹이의 경고로 멈춰야 했다.
안겨 있던 녀석이 갑자기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고, 결국 나는 바닥에 녀석을 내려놓았다.
케에엥! 켕 케엥!
바닥에 내려온 어린 워 울프는 한참을 킁킁대며 소리를 질러 댔다.
놈들의 흔적이었다.
다른 곳으로 향했던 놈들의 발자국은 방향을 바꿔 이곳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 흔적은.
“안 돼…….”
내가 향하고 있는 추락 지점으로 선명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생각할 틈도 없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달리고 있었다.
얼마나 된 흔적일까.
흔적을 읽을 줄 모르니 할 수 있는 건 무조건 달리는 것뿐이었다.
뭐가됐건 더 빠르게.
그렇게 달리던 나는 마주한 놈들을 보며 헛숨을 들이켰다.
“미쳤네…….”
첫 소감은 이 세 글자였다.
달리 무슨 말이 필요할까.
직립보행 3m의 위용은 나의 상상을 훌쩍 뛰어 넘었다.
더군다나 놈들의 숫자는 모두 합해 여섯.
회색 털로 뒤덮인 저놈들은 워 울프의 사체를 질질 끌며 반투족을 향해 걷고 있었다.
‘어쩐지 요란하다 했네.’
둥지에서 본 전투의 흔적은 엄청난 괴력을 짐작케 했다.
그저 막연하게 생각했건만 이런 놈들이니 가능했던 살벌한 흔적이었다.
서늘해진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솔직히 말해 긴장했다.
높이 솟은 머리를 보며 움찔했고, 체격을 확인한 다음은 마른침을 삼켰다.
‘설원 오우거.’
있을지도 모른다는 부족장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런 황당한 위압감이라니.
소문의 괴 생명체는 현실이 되어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오우거가 어떤 놈이었나.
등장만으로 영지가 발칵 뒤집히는 골치 아픈 몬스터의 대명사다.
기사가 상대한다면 7성은 돼야 하고, 그 이하라면 팀을 이뤄 목숨을 걸어야 한다.
약점이라고 하면 마법.
마법에 취약한 탓에 숨통을 끊는 건 늘 마법사의 역할이었다.
그게 오우거라는 놈이다.
한데 이 녀석은 이름 앞에 두 글자가 더 붙었다.
상위종일 확률이 엄청나게 높아진 것이다.
그런 놈들과 1:6이라…….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해 봐도 나의 승리가 그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망설일 시간이 없다.
죽이지 못한다면 방향이라고 바꿔야 할 터.
“너는 여기 숨어 있어.”
아기 워 울프를 숨겨 두고 놈들을 향해 달려갔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나의 첫 번째 목표는 맨 뒤에 있는 놈이었다.
회색 털로 뒤덮인 놈의 덩치는 가까이 갈수록 더욱 거대해졌다.
오른손에는 커다란 곤봉이, 왼손을 휘감은 밧줄 아래로는 주렁주렁 매달린 워 울프가 보였다.
불쾌했다.
워 울프 새끼 탓인지는 몰라도, 끌려가는 사체를 보는 기분은 한마디로 더러웠다.
“쯧…….”
거리를 좁히던 나는 주먹만 한 돌을 들어 놈의 뒤통수를 조준했다.
녀석과의 거리는 대략 10m.
인기척을 느낀 놈의 머리가 뒤를 향해 돌기 시작했다.
나의 팔은 크게 휘둘러졌고.
빠아악―
날아든 돌덩이는 놈의 얼굴을 직격했다.
싸움은 그것으로 시작됐다.
얼굴을 감싸 쥔 놈을 향해 전력으로 달려들었다.
크워어어어억―
아직 눈을 뜨지 못한 놈은 괴성을 지르며 밧줄을 휘둘렀다.
기이한 이 광경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줄 끝에 매달린 워 울프의 사체들은 철퇴가 되어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미친 새끼.’
엽기적인 놈의 행태에 분노의 기운이 치솟았다.
원심력을 못 이긴 사체가 찢어지기 시작했고, 나는 낮고 빠르게 놈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목표는 훤히 드러난 놈의 무릎.
근거리를 장악한 나는 녀석의 슬개골에 묵직한 해머를 때려 박았다.
콰지직―
3m에 이르는 거체가 힘없이 꺾이며 주저앉았다.
털로 뒤덮인 머리가 쏟아지듯 내려왔고, 뽑아 올린 나의 해머는 창끝처럼 날아 놈의 얼굴에 들이박혔다.
“…….”
그런 느낌이 있다.
너무 정확하게 맞아 쩍― 하고 달라붙는 느낌.
콰아앙!
터져 버린 놈의 머리는 뇌수를 흩뿌리며 허공을 날았다.
후위의 싸움을 발견한 다른 개체가 나를 향해 달려왔다.
통나무 같은 곤봉이 머리 위를 스쳐 가고, 나는 해머를 뒤집어 놈의 발등에 피켈을 내리찍었다.
그워어어어어어!
기함을 지르던 설원 오우거는 곤봉을 치켜들며 나의 머리를 노렸다.
눈먼 공격이다.
거칠게 해머를 뽑아 곤봉의 타점을 가볍게 피해 냈다.
동시에 나의 해머는 곤봉을 움켜쥔 놈의 손목을 도끼질하듯 내리쳤다.
콰직―
어지간한 성인의 몸통만 한 녀석의 손목이 기이하게 비틀렸다.
같은 자리에 다시 한번.
들어 올린 놈의 손목은 움켜쥔 곤봉과 함께 시계추처럼 덜렁거렸다.
전투 중에 한눈을 팔면 쓰나.
채찍처럼 휘둘러진 나의 해머는 의아해하는 놈의 얼굴을 무참히 짓뭉갰다.
― 토벌 등급을 어떤 기준으로 나누는지 아세요?
언젠가 베르는 나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었다.
토벌 의뢰서에 있는 수주 자격을 말하는 것인데, 당시의 나는 명쾌하게 대답하지 못했다.
― 토벌하기 위한 최소한의 자격 아닌가요?
― 비슷하긴 해요. 하지만 정확한 내용은 이겁니다. 치명적인 대미지를 줄 수 있는 평균적인 수준을 말하는 거죠. 오우거를 예로 들면 이래요. 기사는 7성급이 돼야 단독으로 오우거를 죽일 수 있고, 마법사는 5서클만 돼도 죽일 수 있죠. 물론 누군가 오우거의 시선을 잡아줘야 하겠지만요. 하하하.
오우거에 대한 나의 지식은 이 대화를 통해 축적되었다.
비록 상위 변종이라 아주 똑같진 않겠지만.
콰지직!
내가 휘두르는 해머의 대미지는 확실하게 치명적이었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간단하다.
“이제 세 번째.”
놈들에게 있어 나의 존재는 사냥감이 아닌 포식자라는 것.
내려찍는 곤봉을 피해 녀석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쩌억―
다리 사이를 지나치며 놈의 정강이를 두들겼다.
거대한 놈의 종아리가 반대로 휘어졌고, 그대로 뒤를 돌아 같은 자리를 두들겼다.
꺾여 버린 정강이가 반으로 접혔다.
거대한 몸통이 무너진다.
바닥을 집는 놈의 팔꿈치를 향해 잿빛 해머를 때려 넣는다.
부서진 팔꿈치가 힘없이 내려앉고, 가죽을 찢고나온 뼈가 흉물스레 모습을 드러냈다.
시커먼 그림자가 뒷머리로 다가왔다.
공격을 포기한 나는 날아오는 곤봉을 피해 눈밭을 굴렀다.
콰직―
내려친 몽둥이가 넘어진 동족의 머릴 터뜨렸다.
크워어어어억―
동족을 죽인 네 번째 놈은 기함을 지르며 곤봉을 치켜들었다.
그러니까 전투 중에 이상한 짓을 하면 쓰나.
땅을 차고 뛰어오른 나는 포효하는 놈의 주둥이에 해머를 때려 박았다.
콰드득―
벌어진 턱뼈가 박살이 나고, 가볍게 착지한 나는 다리 사이를 지나 놈의 등 뒤를 잡았다.
또다시 날아드는 잿빛 해머의 궤적.
경추에 피켈이 꽂힌 네 번째 놈은 경련을 일으키며 바닥에 처박혔다.
누누이 말하지만…….
싸울 때 뻘짓하면 저런 꼴이 되는 거다.
흥분에 가득 찬 나의 눈이 다음 목표를 찾아 번뜩였다.
이제 두 놈 남았다.
가까이에 있는 다섯 번째 놈은 주춤거리며 다가오길 망설였다.
이제야 나의 존재를 이해했나 본데…….
“늦었어.”
한 번 더 말하지만 전투 중에 딴생각하면 뒈지는 거야.
바로 네놈처럼.
표정을 바꾼 나는 멈칫거리는 놈을 향해 빛살처럼 쇄도했다.
반응하지 못한다.
대응할 타이밍을 놓친 거대한 덩치는 무작정 곤봉을 들어 내리칠 자세를 취했다.
‘쯧쯧, 방어를 했어야지…….’
훤히 드러나는 놈의 얼굴을 보며 움켜쥔 해머에 힘을 실었다.
하나 그때야 깨달았다.
함정에 빠진 건 나였다는 것을.
어느새 다가온 여섯 번째 놈은 무방비 상태인 나의 측면으로 거대한 곤봉을 휘둘렀다.
“젠장!”
피하긴 이미 늦어 버린 상황.
나는 충격 내성을 기대하며 해머로 몸을 가렸다.
하지만 그 순간.
가가가각―
벼락같이 날아든 커다란 대검이 곤봉을 쥔 팔뚝을 베어 냈다.
덕분에 놈의 공격은 빗나갔고.
부아아악― 쾅!
휭, 하니 드러난 놈의 얼굴에 잿빛 해머가 들이쳤다.
안면을 직격당한 설원 오우거는 무릎을 꿇으며 얼굴을 감싸 쥐었다.
놈의 저항은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런 놈의 뒷목으로 핼버드가 내리꽂혔고, 연이은 쌍도끼가 녀석의 정수리를 짓이겼다.
반투족이었다.
어디선가 나타난 삼인조는 마지막 남은 오우거를 향해 저돌적으로 달려들었다.
끝이었다.
헐떡거리며 이어 가던 놈의 질긴 생명은 내리친 해머와 함께 짧은 경련으로 끝을 고했다.
“나를 용서해다오!”
달려온 부족장은 차가운 바닥에 머리를 묻고 고함치듯 용서를 구했다.
대관절 무엇을 용서해 달라는 건지…….
도움을 청하려 시선을 돌렸으나 마주한 별마저 눈물을 감추고 있었다.
“아, 음…….”
생각해 보니 감정이 격할 만도 하다. 상황이 특별했으니까.
아마도 녀석들은 내가 잘못된 줄 알고 크게 걱정했던 것 같다.
“뭘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어.”
고개 숙인 부족장을 잡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나 때문이다! 내가 이곳을 오자고 해서 그대가 봉변을 당한 것이다!”
“뭐래, 땅이 꺼진 게 왜 네 잘못이야.”
자책하는 부족장을 달래며 나는 녀석의 어깨를 가볍게 다독였다.
“아니다! 타인의 힘으로 내 자릴 찾으려 한 것부터가 잘못이다! 나를 욕해라!”
하지만 부족장은 완강했다.
그 뒤에 서 있는 별도 마찬가지.
마치 대역죄인 같은 표정을 지으며 비통하게 자책을 이어 가고 있었다.
“내가 타인이었어? 나는 너희를 동료라고 생각했는데.”
“그, 그건…….”
“나를 동료라고 생각했다면 더 이상 미안해하지 마. 너희를 탓한 적 없었으니까.”
“크흑…….”
고개를 숙인 부족장을 달래며 다른 질문으로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내가 여기 있는 걸 어떻게 알았어?”
“내 눈 덕분이지.”
그에 술은 어깨를 으쓱이며 거만하게 웃기 시작했다.
뭐… 인정한다.
녀석의 시력이야 인간의 경지를 뛰어넘었으니까.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대강의 상황을 정리했다.
한데 뭔가 하나 빼먹은 게 있는 것 같다.
중요한 게 있었는데…….
“저 강아지는 어디서 나타난 거냐?”
갸웃거리는 술의 말에 그제야 나는 잊고 있던 걸 떠올렸다.
바위 틈에 숨겨 두고 왔던 작은 녀석.
“소개할게. 마지막 워 울프 꼬맹이다.”
달려온 꼬맹이는 나의 손을 핥으며 요란하게 몸을 비벼 댔다.
“이 녀석이 워 울프 새끼라는 건가?”
“어. 나머지 워 울프는 저놈들한테 다 죽었어.”
나의 말을 알아들은 걸까.
애교를 멈춘 새끼 워 울프는 어미의 시체를 찾아 낑낑거리며 돌아다녔다.
그러다 한곳에 멈춰 섰고.
케에엥― 케엥― 키에엥―
새끼 워 울프는 짓이겨진 사체 앞에서 구슬프게 울기 시작했다.
“흠… 사정은 딱하게 됐는데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왜? 또 무슨 일이 있어? 어차피 오늘은 늦어서 하산하긴 힘들잖아. 워 울프 둥지에서 쉬고 내일 내려가자고.”
서두르는 부족장에게 나는 적당한 이유를 대며 휴식을 제안했다.
하지만 부족장의 대답은 완강했다.
아니, 다급했다고 해야 하나.
“또 다른 무리가 이리로 향하고 있다.”
부족장은 나에게 새로운 설원 오우거의 등장을 알려 왔다.
“아, 그래?”
긴장을 풀지 않는 부족장을 보며 나는 여유 있는 얼굴로 대답했다.
“무리의 숫자는 적은데 체격이 더욱 크다.”
“잘됐네.”
“그래 잘됐… 아니, 지금 뭐라고 한 건가? 내가 잘못 들은 것 같은데.”
“잘됐다고. 너흰 여기서 잠깐 쉬고 있어.”
안 그래도 궁금했던 참이니까.
[기본 수련 3종이 4단계를 돌파하며 둔기 마스터리 레벨이 5로 상승합니다.]
[신체 능력이 15% 증가합니다.]
[누적 신체 능력 합계 : 25%]
또 얼마나 대단한 몸이 됐는지 확인하기 딱 좋은 놈들이었다.
내 목숨 99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