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목숨 99개-80화 (80/203)

80화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본거지를 정리한 건 좋은데 갈 길이 보이지 않았다.

계곡이라 생각했던 지형은 그저 움푹 들어간 것에 불과했고, 보이는 모든 것들은 까마득한 빙벽뿐이었다.

저 미끄러운 빙벽을 기어오를 수도 없고…….

“아까 내려오는 걸 봤다며. 어디서 내려왔다는 건데?”

빙벽을 올려다보던 술은 그대로 손을 뻗어 꼭대기를 가리켰다.

전하고자 하는 말이 뭔지는 알겠으나.

“추락했다는 건 아니지?”

술이 가리킨 방향에선 내려올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어딜 보는 건가? 빙벽 꼭대기에 승강 장치가 있지 않은가.”

돌아온 녀석의 핀잔에 나는 고갤 들어 다시 빙벽을 올려다봤다.

‘뭐가 있다는 거야.’

다시 본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보이는 건 여전히 하얀 빙벽뿐.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에 나의 얼굴은 슬그머니 찌푸려졌다.

이내 찾는 걸 포기하려던 순간.

“아, 저거?!”

빙벽에 매달려 있는 넓적한 틀을 발견했다.

커다란 우리라고 해야 하나.

철창처럼 생긴 사각형의 틀은 빙벽 끝에 매달린 채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저걸 타고 올라간다고?”

내키지 않는 마음을 달래며 빙벽으로 향했다.

맨 앞에 술, 다음 나와 별.

마지막으로 부족장.

거침없이 직진하는 술을 따라 우리는 쌓인 눈을 밟으며 걸음을 옮겼다.

“이걸 사용하면 된다.”

선두를 걷던 술이 커다란 장치 앞에 멈춰 섰다.

“뭘 알고 만지는 거야?”

“척 보면 답이 나오지 않는가. 올렸다 내렸다 말곤 아무 기능도 없는 장치다. 알고 말고 할 것도 없다.”

녀석은 우쭐한 표정으로 장치의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철컹―

둔중한 쇳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끄리리리리리릭.

그리고 요란한 소리와 함께 커다란 톱니바퀴가 돌기 시작했다.

“오호?”

올려다본 꼭대기에선 커다란 사각 틀이 내려오고 있었다.

적당히 느린 속도로, 작은 얼음 조각들을 흩뿌리며 지상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저런 걸 어떻게 만들었지.”

지켜보는 내내 작은 감탄을 내뱉었다.

빙벽의 꼭대기와 지상을 연결하는 장치라니.

놀라움을 선사한 승강 장치는 순조롭게 작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딘가 이상했다.

어울리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문명의 흔적이 없는 이곳에 너무 적나라한 문명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서리 오크가 이걸?’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고작해야 ‘크롸라락’뿐인 놈들이 이걸 어찌 만들었겠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인간의 문명이 다녀간 흔적이었다.

“흠…….”

감탄하며 바라보던 장치는 의문 덩어리로 변해갔다.

그런 속마음이 드러난 걸까.

“과거 서리 여왕을 추종하던 부족들이 고원을 오갔다고 하더군. 그러니 저 기관 역시 그들이 만들었을 것이다.”

함께 지켜보던 부족장은 팔짱을 낀 채 옛이야기를 전했다.

그럼 그렇지.

생뚱맞은 장치의 존재가 이제야 납득되었다.

따라서 장치에 대한 신뢰감도 상승했으니.

“고원으로 가 보자고.”

끼이이익―

덜그럭거리던 철창은 절벽 꼭대기를 향해 천천히 올라갔다.

마침내 도착한 고원의 정상.

“아후…….”

서리고원을 맞이한 나의 첫 소감은 춥다는 생각이었다.

거동이 불편한 정도는 아니었지만, 확실히 이곳의 냉기는 더욱 강력했다.

“이거 없었으면 고생했겠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우리는 도로시가 만든 육포를 씹으며 고원 중앙으로 향했다.

사실 뭔가 대단한 게 있을 줄 알았다.

서리 여왕이니 워 울프니… 설레발은 잔뜩 쳐 놨으니까.

본거지 하나를 통째로 박살 내고 왔으니, 최종 목적지에선 엄청난 것들이 줄줄이 튀어나올 줄 알았다.

하지만 현실은 하얀 백색 지옥이었다.

가도 가도 끝없는.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는…….

“너무 조용한 거 아니야?

눈밭을 헤쳐 나가던 나는 의도치 않던 평화에 작은 불만을 내비쳤다.

실패의 향기가 짙게 피어올랐기 때문이다.

몬스터의 낌새가 전혀 없으니 워 울프의 존재마저 의심스러웠다.

“설원 오우거라고 했나? 엄청 큰놈이 있을지도 모른다면서. 나 그거 되게 기대했는데.”

“미안하다. 우리도 소문으로 알고 있을 뿐, 직접 본 적은 없으니 확신할 순 없다.”

툴툴거리는 나의 말에 부족장은 기죽은 얼굴로 대답했다.

“미안할 건 없고.”

보채며 따진다고 한들 녀석들 탓은 아니었다.

이곳에 올라오는 건 녀석들도 처음이니까.

하지만 이곳은…….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할 만큼 심하게 조용했다.

어느 정도로 조용했냐면.

“얼음 요정의 심장이었나? 그것도 서리고원에서 구하는 거라며.”

서리고원의 상징조차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서리고원 하면 얼음 요정!

연금 재료인 얼음 요정의 심장은 이곳 서리고원이 원산지였다.

한데 요정은커녕 눈 토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슬슬 불안해질 수밖에.

살을 에는 칼바람을 맞으며 시선이 닿는 모든 곳을 살폈다.

그렇게 헤매길 수십여 분.

불어오는 눈발 사이로 희끄무레한 형체가 지나갔다.

“발견!”

대상의 정체는 중요하지 않았다.

일단 뭔가 나타났다는 게 중요한 거니까.

생명체가 사라진 장소를 향해 앞뒤 안 재고 무작정 달려갔다.

마치 도랑을 파내듯, 발끝에 걸리는 눈밭을 해치며 맹렬한 속도로 거리를 좁혔다.

“이 자식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잡힐 것 같던 녀석은 생각보다 날렵했고, 눈길에 파묻힌 나의 발은 이래저래 불편하기만 했다.

그러나 녀석은 가벼웠다.

심지어 폴짝 뛰어올라 허공으로 몸을 날리더니.

“허…….”

투명한 날개를 펼쳐 유유히 눈앞에서 멀어져 갔다.

놈이었다.

녀석이 바로 소문의 얼음 요정이었다.

“젠장.”

달리는 것도 불편한데 날아가는 놈을 어떻게 잡을 수 있겠나.

걸음을 멈춘 나는 혀를 차며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 순간.

쩌저적―

딛고 있던 땅이 무너지며 나의 몸은 새하얀 얼음 구덩이에 속절없이 빨려 들어갔다.

* * *

“이바아아안!”

사라지는 이반을 보며 별은 저도 모르게 고함을 질렀다.

이름을 부른 것 자체가 처음인데, 하필이면 그 순간이 이런 빌어먹을 상황이었다.

“비켜라, 별!”

뒤를 따라오던 부족장이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거대한 창끝을 아래로 한 채, 무너진 구덩이를 향해 강력한 일격을 내리꽂았다.

콰가가가가각!

부서진 얼음 조각이 폭죽처럼 터져 나갔다.

그것도 모자라 다시 한번.

여전히 뚫리지 않아 또다시 한 번.

하지만 상황은 변하지 않았고, 이반을 집어삼킨 얼음 구덩이는 입구를 틀어막은 채 농성에 들어갔다.

“제기랄!”

하얗게 질린 별은 대검을 휘둘러 얼어붙은 땅을 파헤쳤다.

어디까지 빨려 들어간 건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제법 파내려 갔다고 생각했지만, 입구는 뚫리지 않았다.

무너진 흔적 따윈 애초에 없었다는 듯, 매몰된 구덩이는 더욱 단단하게 얽혀 들어갔다.

“안 뚫린다! 다른 방법이 없는 건가?!”

“말할 시간에 그냥 파라! 뚫릴 때까지 파란 말이다!”

버거워하는 술의 말을 일축하며 별은 더욱 강하게 대검을 내리쳤다.

아무리 깊다 한들 결국 드러날 순간은 있을 터.

“흐아아아아압!”

모피 망토마저 벗어던진 별은 백색 지옥을 향해 대검을 치켜들었다.

* * *

“끄어어어억……!”

코끝을 파고드는 신선한 공기에 가쁜 숨을 몰아쉬며 널브러졌다.

이곳이 어딘지는 상관없다.

눈과 얼음을 벗어난 것만 해도 일단 큰 고비는 넘겼으니까.

서서히 돌아오는 호흡을 느끼며 아무 생각 없이 눈을 감았다.

“하…….”

무슨 날벼락인지 모르겠지만 우선은 살아 있음에 감사했다.

아직 94개가 남았다지만, 그렇다고 죽음이 가벼운 건 아니다.

죽음이란 늘 피하고 싶은 법.

여분의 목숨이 있다고 한들 괴롭고 힘든 건 늘 마찬가지였다.

“…….”

눈을 뜬 나는 주위를 살피며 혼란스러운 상황을 정리했다.

당연한 소리겠지만, 우선 여기는 땅속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협소한 동굴 속이다.

갑자기 발밑이 무너지며 빨려 들었고, 벌어진 틈을 헤집다 보니 이곳으로 나오게 됐다.

운이 좋았다.

나를 감싸고 있던 눈과 얼음이 생각보다 두껍지 않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이른 시간에 빠져나올 수 있었는데…….

이제 문제는 어떻게 올라가느냐로 바뀌었다.

내려온 길로는 어림없고.

유일한 희망은 이 동굴이 지상으로 이어지길 바랄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것도 아니라면 죽어서 되돌아오는 것뿐.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길게 뻗은 동굴을 바라보았다.

일단 어둡진 않았다.

그렇다고 밝은 것도 아니지만, 적어도 앞에 무엇이 있는지 정도는 확인이 가능했다.

시야가 확보된 이유는 이끼 때문이었다.

스스로 빛을 내는 이 녀석은 손이 닿을 때마다 더욱 밝은 빛을 뿜어냈다.

덕분에 시야는 나쁘지 않았다.

협소한 공간 탓에 기어가야 한다는 게 좀 불편했지만.

그래도 이게 어딘가!

움직일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하며 두 팔과 다리를 바쁘게 움직였다.

그리고 간절히 바랐다.

‘제발 갈림길만 나오지 마라.’

끝까지 외길만 나오라고.

이 와중에 갈림길이 나오면… 그때는 정말 몇 배는 어려워질 것이다.

그러니 다른 건 필요 없었다.

더 밝았으면 좋겠고, 동굴의 크기도 더 컸으면 좋겠지만.

‘무조건 직진!’

지금 당장 바라는 것은 오직 이것 하나뿐이었다.

간절한 나의 바람은 순조롭게 이어졌다.

여전히 길은 하나였고, 동굴의 크기도 조금은 커진 것 같았다.

얼마나 기어간 걸까.

익숙지 않은 동작들은 나의 체력을 빠르게 소진시키고 있었다.

그냥 서서 달리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협소함이 주는 압박감은 정신을 괴롭혔고, 그것은 육체의 피로를 더욱 가중시켰다.

하지만 버터야 한다.

여기서 한번 퍼지면 회복하기 힘들지도 모른다.

희망적인 생각을 하며 무거워지는 팔과 다리에 힘을 실었다.

하지만 그런 거 있잖은가.

뭔가 말하고 나면 바로 일이 꼬여 버리는 거.

‘그나마 외길인 게 천만다행이지.’

계속되던 긍정의 힘 작전은 입방정이 되어 내 앞에 나타났다.

“하… 염병.”

그토록 피하고 싶던 갈림길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외면하고 싶은 선택의 시간.

잘못된 선택 하나가 모든 걸 뒤바꾼다.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허비될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출구와 점점 더 멀어진다면?

그조차도 늦게 알게 된다면?

상상만 했을 뿐인데 벌써부터 심장이 옭죄어 왔다.

“…….”

쉽지 않았다.

이 한 번에 천국과 지옥을 오갈 테니까.

선택은 점점 더 어려워져 나는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입술만 물어뜯었다.

그때였다.

“음?”

결정을 내리지 못하던 나의 귓가에 요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의 방향은 오른쪽.

종류를 말하자면 낑낑거리는 어린 동물의 울음소리였다.

선택의 기로에 선 나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오른쪽을 선택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동물의 은신처가 있다는 건, 출구로 가는 길 또한 있다는 것이니까.

나는 소리의 방향을 따라 계속해서 전진했다.

하지만 산 넘어 산이라고.

한 가지 걱정을 넘기자 또 다른 걱정이 시작됐다.

이 와중에 덩치 큰 맹수라도 만난다면…….

이 좁은 데서 어떻게 싸우지?

심지어 상체도 들지 못하는데.

근심은 또 다른 근심을 만들며 계속해서 크기를 키워 갔다.

하나 이제 와 멈출 수도 없는 일.

‘어떻게든 되겠지.’

무적의 답을 내뱉은 나는 소리의 정체를 찾아 팔다리를 움직였다.

그리고 나는.

‘찾았다.’

베일에 싸인 소리의 주인과 드디어 얼굴을 마주했다.

끼잉, 낑낑…….

솜털이 채 가시지 않은 어린 녀석.

어린 티를 벗어나지 못한 소리의 주인은 뒷걸음질을 치며 나에게서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이곳은 막다른 길.

당황한 녀석은 들어갈 리 없는 모서리에 작은 몸을 디밀기 시작했다.

끼에엥―

동그란 눈이 불안하게 흔들리며 튀어나온 주둥이가 울어 댔다.

거기에 힘없이 꺾인 삼각형 모양의 귀까지.

“강아지?”

겁먹은 어린 친구의 정체는 원정의 목표였던 워 울프의 새끼였다.

내 목숨 99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