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귀족이라고?
내가?
갑작스런 반크스의 말에 할 수 있는 생각은 고작 이 정도였다.
아니.
그 외에 다른 생각은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저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기각.”
“아니, 그게 아니라…….”
“기이각.”
반크스의 귀는 완벽하게 닫혀 있었고.
“갑작스럽다. 분에 넘친다. 제가 감히 등등! 이런 변명과 핑계는 모두 기각하겠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말들을 사정없이 잘라먹었다.
“…….”
“그냥 받아드리고 즐기게. 공을 세웠으니 보상을 받는 것이니까.”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이 모든 보상이 다 좋지만.
“왜? 결혼이 마음에 걸려서 그러나?”
결혼이 전제된 보상이니 망설여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로제가 싫어서?
천만에.
살면서 마주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 로제였고, 그녀의 말과 행동은 나를 웃음 짓게 만들었다.
싫어할 이유라니.
억지로 만들려 해도 찾아낼 수 없을 것이다.
그저 해야 할 일이 남았을 뿐.
“저에겐 아직 이루지 못한 목표가 있습니다.”
정착을 꿈꾸기엔 아직 이른 시기라는 게 문제였다.
“목표라… 그래, 원대한 목표는 남자를 더욱 크게 성장시키지.”
내 생각에 동의한 듯 반크스는 나직이 말했다.
그가 생각하는 원대함이 어디까지인지 몰라도.
“꿈을 잃은 남자처럼 보기 흉한 건 없지. 달려가게. 그래서 꼭 이루도록 하게. 다만, 한 가지…….”
“…….”
“자네가 만드는 세상에 저 아이의 자리가 있었으면 좋겠네.”
그렇게 반크스는 마지막을 나에게 넘겼다.
접견실의 모든 시선이 한곳으로 향했다.
숨소리 하나 없는 침묵이 공간을 짓눌렀고, 나는 고개를 돌려 로제를 바라보았다.
내가 뭐라고 그녀를 선택하겠나.
나에게 있어 로제는 그런 하찮은 존재가 아니었다.
“로제 님의 자리는 이미 만들어져 있습니다.”
파트너였으니까.
로제와 나는 서로의 목표를 함께한 훌륭한 동료였다.
“그렇군.”
“네.”
“그럼 둘이 벌써?”
“삼초온!”
반크스와 나의 대화는 로제의 외침으로 막을 내렸다.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겠지만.
“저는 언제나 로제 님의 힘이 되어드릴 겁니다.”
“저도요. 카슈타르는 늘 이반 님의 행보를 지지하겠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훌륭한 파트너였다.
“이렇게 좋은 날에 찻잔이나 홀짝대다니! 연회를 여시지요, 가주님!”
그렇게 술판은 성대히 벌어졌고.
“얼굴에 금칠을 하셨나… 왜케 잘생긴고야… 이런 건 불법이라구요…….”
취기 가득한 로제는 배시시 웃으며 잠들었다.
다음 날 아침.
아침 식사를 마친 나와 반투족은 내성 입구를 향해 느린 걸음을 옮겼다.
이제 다시 리베로 돌아갈 차례.
도착한 내성 입구엔 채비를 마친 경비병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말을 타고 가시면 됩니다.”
그들이 건넨 건 아리안의 상징인 백마였다.
완벽한 형태라 칭송받는 이 녀석들은 속도와 지구력을 겸비한 최고의 이동 수단이었다.
“그건 아니지. 최고의 탈것은 서리고원의 워 울프다.”
물론 이렇게 다른 의견도 존재한다.
“자로로 전사의 탈것이란 하나에만 치중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럼?”
“싸워야지.”
“워 울프처럼?”
“이를 말인가! 워 울프야 말로 탈것 중에 탈것. 이동 수단의 정점이다!”
부족장의 워 울프 찬양은 오늘 따라 유독 심했다.
광기마저 보이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간 피를 토하며 항변할 기세였다.
“모피 망토 챙겼지?”
“가장 두꺼운 놈으로 챙겼다!”
여장을 묻는 나의 말에 부족장은 두 눈을 번뜩이며 큰소리로 대답했다.
“거참, 귀청 떨어지겠네.”
사실 녀석이 이러는 대는 그럴 만한 이유가 따로 있었다.
그것은 바로 목적지.
“여기서 서리고원까지 얼마나 걸리지? 반나절 정도 걸리나?”
우리의 다음 목적지가 리베가 아닌 서리고원이기 때문이다.
― 여기까지 온 김에 다시 한번 도전해 보고 싶다.
어제 저녁 술자리였다.
적당히 술이 오른 부족장은 진지하게 재도전 의사를 밝혔다.
왠지 예감이 좋다며.
이번엔 반드시 성공할 거라고 술자리 내내 열변을 토했다.
― 그럼 가자.
묻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당연한 얘기니까.
반투족과 나는 모든 전장을 함께 지나왔다.
이유?
그런 거 없었다.
내가 그곳에 있다는 이유로, 녀석들은 한마디 불평도 없이 나와 목숨을 함께했다.
한데 서리고원이 뭐라고…….
워 울프가 있는지 없는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필요한 이유는 단 하나.
― 우리를 도와다오.
내가 움직여야 할 이유는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준비는 다되셨나요?”
등 뒤로 들려오는 여인의 목소리에 우리의 대화는 일단락됐다.
로제였다.
도로시와 함께 나온 로제는 잔잔한 미소로 인사를 대신했다.
“이거 받으세요. 도로시가 준비한 간편식인데, 특별한 효능이 있다고 하니 꼭 챙겨 드세요.”
그에 도로시는 커다란 바구니를 나에게 내밀었다.
내용물은 보이지 않았고, 적당히 소분된 음식 주머니가 인원수에 맞춰 담겨 있었다.
“우파루파의 알로 만든 반건조 간식이에요.”
“화염도마뱀이요?”
“네. 이것을 섭취하면 냉기를 이겨 내는 데 도움을 준다고 하네요. 혹시나 싶어서 만들어 왔습니다.”
도로시가 건네준 것은 대수림에서 챙겨 온 화염도마뱀의 알이었다.
별거 없다는 듯 넘겨주고 물러섰지만.
‘이건 좀 특이했지.’
채집 당시의 괴상한 모습을 생각하면 충분히 납득이 됐다.
“고마워요, 도로시. 큰 도움이 될 것 같네요.”
“별말씀을요. 저도 그렇게 됐으면 좋겠습니다.”
가벼운 인사를 주고받은 나는 각자의 가방에 소분된 주머니를 나눠 담았다.
이것으로 모든 준비는 끝났다.
이제 남은 건 새로운 여정을 향한 출발신호뿐.
“조심히 다녀오세요.”
로제의 인사를 끝으로 나와 반투족은 서리계곡을 향해 말을 달렸다.
* * *
똑똑―
가벼운 노크 소리 뒤로 감색 로브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로이드 님, 추격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계집의 소식인가?”
“그렇습니다.”
“전하라.”
짧게 대답한 금발 장년인은 의자에 몸을 묻은 채 이어질 소식을 기다렸다.
“한동안 소식이 끊겼는데 사라센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사라센?”
“네. 아무래도 추적이 쉽지 않은 사라센으로 몸을 숨긴 것 같습니다.”
“흐음…….”
긴 침음을 뱉은 로이드는 흘러내린 짧은 금발을 단정히 정돈했다.
집착에 가까운 모습.
머리와 옷매무새에 대한 로이드의 관심은 심하다 싶을 만큼 집요했다.
그 정도 표현으로 설명이 가능할까.
한 치의 흐트러짐도 용납하지 않는 로이드의 단정함은 어떤 상황에서도 최우선 순위를 지키고 있었다.
그런 로이드를 보며 사내는 가끔씩 이런 생각을 했다.
‘저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려 보고 싶다.’
주름 하나 없는 저 옷깃도 자글자글하게 말이다.
하지만 망상일 뿐이라는 건 본인 스스로가 더욱 잘 알고 있었다.
목숨은 하나뿐이니까.
“사마르 님에게 연락을 해야 할까요?”
감색 로브의 사내는 속내를 감춘 채 로이드의 대답을 기다렸다.
“놔둬라.”
그의 대답은 불허였다.
긴 흑발을 떠올린 로이드는 눈썹을 끌어올리며 표정을 구겼다.
다른 건 몰라도 이 계집은 절대로 안 된다.
사라센의 흑마탑으로 들어가는 순간.
‘마지막 카드가 사라진다.’
회귀 능력을 빼앗긴 지금 시점에 유일한 대안은 오로지 이 계집뿐이었다.
사마르가 무슨 지랄을 하던 상관없지만.
계집을 빼앗긴 뒤 계획이 망가지면, 그때는 두 번 다시 되돌릴 방법이 없다.
“하면 어떻게…….”
감색 로브의 사내는 말끝을 흐리며 눈치를 살폈다.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살로메를 보내라.”
시키는 것만 하는 게 가장 현명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감색 로브의 사내는 입을 보탤 수밖에 없었다.
“살로메만 보내면 되겠습니까? 국경을 넘나드는 거야 쉽겠지만, 무력이 너무 약해서 걱정입니다.”
신분 위조 말고는 딱히 써먹을 곳 없는 여자였기 때문이다.
“잡으려는 계집은 무력이 강해서 못 잡았다더냐?”
결국 본전도 못 찾았다.
로이드의 말마따나 도망친 계집은 무력이 아예 없었다.
“생각이 짧았습니다.”
고개 숙인 감색 로브의 사내는 눈치를 보며 다음 얘기로 넘어갔다.
“카렌에서도 연락이 왔습니다.”
“카렌은 무슨 일로.”
“정보원의 말에 따르면 최근 들어 사라센과 잦은 충돌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야 흔한 일이 아닌가.”
“네. 충돌이야 대수롭지 않은 일입니다만, 문제는 공격해 온 사라센 놈들이 전부 6성급이었다고 합니다.”
“6성급?”
“네. 보고는 그렇게 올라왔습니다.”
사내의 말을 끝으로 대화는 잠시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그 보고가 뜻하는 게 무엇인지 두 사람 모두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정적은 참을성이 부족한 사내로 인해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사마르 님은 무슨 생각으로 강화 인간을 만드는 걸까요? 게다가 저렇게 공개를 하다니… 제 식견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됩니다.”
“글쎄다. 전쟁이라도 일으킬 심산인가 보지.”
빤히 보이는 사마르의 행보에 로이드는 냉소를 머금으며 의자에 몸을 묻었다.
* * *
“아, 벌써부터 두고 온 말이 그리워지네.”
산자락을 오르던 나는 익숙해진 편안함을 찾으며 터벅터벅 걸음을 놀렸다.
타고 온 말들은 인근 마을에 맡겨 둔 상황.
서리고원까지 가는 길은 두 다리에 의지해야 하는 험난한 여정이었다.
“워 울프라면 문제없이 타고 올라갔을 것이다.”
“그래, 내려올 땐 그놈들 잡아타고 편하게 내려오자. 아예 새끼들까지 줄줄이 잡아 오자고.”
부족장의 워 울프 예찬은 여전히 계속됐다.
이쯤 되니 상당히 궁금해졌다.
성체의 크기가 얼마나 되는지, 도시에서도 끌고 다닐 수 있는지 말이다.
“크기는 말과 비슷하다. 체고는 낮지만 길이와 체형은 훨씬 단단하다.”
“넌 본 적 없다며?”
“아… 그렇다고 들었지만 이건 확실한 정보다.”
그냥 그렇다고 치자.
말만 하면 어떻고, 또 그보다 작으면 어떤가.
“그렇게 크면 고기도 엄청 많이 먹겠다, 그치? 식대 감당하는 것도 쉽지 않겠네.”
나는 시답잖은 말을 떠들며 가파른 산길을 올랐다.
“꼭 고기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워 울프는 채소와 과일도 잘 먹는다고 한다.”
“엥? 뭔 늑대가 풀을 먹어.”
개풀 뜯는 소리가 여기서 유래된 말이었나?
좌우지간 포획만 하면 키우는 건 어렵지 않다는 말이었다.
“너희는 왜 계속 실패한 거야? 말한 것처럼 그냥 춥고 길목에 나오는 몬스터들이 강해서 그랬어?”
문제는 가는 길이 험난하다는 것이었다.
사실 체력적으론 문제없었다.
나야 말할 것도 없고, 반투족 역시 인간의 한계는 진즉에 뛰어넘은 부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원정이 힘들었던 건.
“일단 추운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지금이야 잘 못 느끼겠지만, 위로 올라가면 숨쉬기도 힘들어진다.”
“흠… 그렇구나.”
일단 추위나 더위의 공통점은 움직임을 둔하게 만드는 것이다.
둘 다 괴롭긴 마찬가지지만, 추위의 경우 그 정도는 더욱 심해진다.
그 상황에서 몬스터를 만난다면?
“고원 중단까진 어떻게든 버텼다. 하지만 상단에 가까워지면서부터는… 더 이상 우리는 버틸 수 없었다.”
결국 포기하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애초에 불공평한 환경이니까.
몬스터의 수준이 높아지면 활동 조건은 더욱 나빠진다.
하지만 이번엔 다를 터.
“이거나 한번 시험해 볼까?”
나는 가방을 열어 도로시가 준 간식을 꺼내 들었다.
기대하는 건 오직 하나.
냉기를 이기는 데 도움을 준다는 소문과 그 흉측했던 알을 믿어 보는 것이었다.
내 목숨 99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