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요점은 이거다.
원래 나는 시스템이라는 걸 가지고 있었다.
그것도 파괴자라는 험악한 녀석을.
이유는 모르겠으나 존재했고, 그것은 고장 난 상태로 방치돼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낯선 남자에게서 회귀라는 시스템을 흡수했다.
덕분에 나에겐 기이한 능력이 생겼고, 이 모든 건 그 남자의 능력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나에게 넘어온 남자의 능력은 회귀뿐이었으니, 숙련도와 같은 것들은 잠재돼 있던 나의 능력이었다.
쉽게 말해.
포식자란 놈이 살기 위해 회귀라는 놈을 집어삼켰단 얘기다.
덕분에 손상된 능력이 개화했으나 완전하지 못했다.
회귀를 흡수한 포식자는 절반의 기능을 잃은 채 활동을 시작했다.
운명이었다.
긴 시간을 지나온 나와 포식자는 마침내 이곳에서 변곡점을 맞이했다.
반쪽이었던 나의 능력은 마력을 내뿜는 비석을 만지면서 완벽하게 복구됐다.
레버넌트라는 이름으로.
“흠…….”
일단 만족스럽다.
뭐가 됐건 완성됐다는 거니까.
제한적이었던 예전과 달리 지금은 자유자제로 문자를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이건 정말 너무 유용했다.
다만 궁금한 것은 손상됐다던 포식자였다.
왜?
무엇 때문에?
나는 포식자란 놈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다섯 살 때 그 사건이?’
아이작을 만났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었다.
갑자기 내가 쓰러졌다고…….
의식을 잃은 채로 마나를 흡수하더니 폭주한 마나가 홀을 코어로 각성시켰다고 했다.
그리고 펑…….
나의 코어는 그렇게 박살 났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거다.
뭘 하다 쓰러졌는가.
― 눈앞에 뭐가 보인다면서 갑자기 쓰러지더구나.
랑방에서 만난 아이작은 분명히 그렇게 말했었다.
눈앞에 뭐가 보인다니?
지금 내가 보는 것들이잖나.
그 말을 근거로 유추해 보면 상황은 이렇게 정리된다.
다섯 살에 포식자란 놈이 깨어나면서 뭔가 문제가 생겼다.
그것으로 인해 코어가 망가졌고, 포식자는 손상된 채로 잠들었다.
자연스럽다.
이렇게 보면 우연에 우연이 겹친 우발적인 사고처럼 보인다.
한데 나는 왜 고의적으로 느껴질까.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나는 포식자란 놈이 일부러 부셨다고 생각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예전에 만났던 치료사가 이런 말을 했었다.
코어가 박살 나서 다행이라고.
페드로를 따라가서 만났던 그 치료사는 차라리 일찍 박살 난 게 다행이라고 말했었다.
뭔가 아귀가 착착 들어맞지 않나?
이 모든 건 포식자란 녀석이 만들어 놓은 거대한 계획처럼 느껴졌다.
뭐… 좀 과장된 느낌이 있긴 하지만, 그편이 폼도 나고 운명적인 그런 게 줄줄 흐르니까.
그냥 나는 그렇게 믿기로 했다.
“이게 에르텔이라구요?”
“네, 맞아요.”
비석을 보며 묻는 로제의 말에 나는 거듭해서 같은 대답을 내놓았다.
이렇게 대놓고 마력을 뿌리는데 에르텔이 아니면 뭐겠는가.
심지어 나는 저 비석을 건드리고 바로 기절해 시스템이 완성됐다.
“드디어…….”
로제의 큰 눈이 그렁거리며 도톰한 입술이 움찔거렸다.
당장에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은 상황.
“그런데 어떻게 들고 가죠……?”
앞에 있는 이 에르텔은 들고 갈 방법이 없는 듯했다.
“못 들고 가죠.”
“네? 그러면…….”
“저기 작은 것들도 많잖아요.”
나는 오른팔을 뻗어 공동의 한구석을 가리켰다.
“히익!”
그에 로제는 입을 틀어막으며 눈동자를 키웠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로제의 눈에 보이는 건 11구의 백골인 탓이었다.
추측컨대 이상한 공간에서 들었던 음성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 신의 뜻에 따라 우리는 이곳에 남으리라.
비장한 느낌마저 감돌았던 그 목소리의 주인은 저기 모여 있는 백골 중 하나일 것이다.
신들이 맺은 맹약이 뭐길래 저런 죽음을 맞이했는지 모르지만.
“따라오세요.”
누워 있는 백골들 사이에 수박만 한 선홍색 원석이 놓여 있었다.
멀리 떨어져 있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색상부터가 같았으니까.
백골들 사이에 놓인 두 개의 원석은 특유의 빛을 뿜어내며 나의 시선을 잡아끌고 있었다.
“지금 해골들한테 가는 건가요?”
“네. 에르텔은 저쪽에도 있으니까요.”
주춤거리던 로제는 도로시의 손을 잡고 나의 뒤를 따라 걸었다.
“여기 있는 이 원석도 에르텔입니다.”
도착한 나는 백골들 사이에서 에르텔을 꺼내 들었다.
바람 빠진 공처럼 생긴 선홍빛 원석.
“로제 님이 했던 얘기가 맞았네요.”
가벼운 미소를 전한 나는 로제의 손에 에르텔을 건네주었다.
“이제 돌아갈까요?”
“네!”
구슬 같은 로제의 파란 눈이 깊이 휘어지며 반짝거렸다.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 좋아지는 눈부신 미소.
“아가씨 축하드려요!”
로제와 도로시는 서로를 마주 보며 해맑게 웃고 있었다.
하지만 나의 시선은 그녀가 아닌 뒤편에 있던 비석으로 향했다.
“…….”
해야 할 일을 다 했다는 걸까.
선홍색으로 빛나던 거대한 에르텔은 스스로 마력을 지우며 검은 돌로 변해 가고 있었다.
* * *
지금 기분을 표현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홀가분하다.
그리고 뿌듯하다.
이 두 가지 감정이 복합되어 만들어지는 것이 성취감인가 보다.
여기까지 오는 시간이 긴 만큼 돌아오는 만족도 역시 크고 진했다.
물질적인 보상은 없었지만.
[클레스 : 레버넌트.]
나는 완성된 시스템을 손에 넣었고.
“이걸 보면 아버님이 뭐라고 하실까요?!”
로제는 소문만 무성하던 에르텔을 구할 수 있었다.
어디 그것뿐이겠나.
아이작을 만나게 된 나는 생모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역사상 최강의 남자에게 이어졌다.
비록 살아 계시지는 않았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난 버려진 게 아니었으니까.
우중충한 고아 이반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돌아가면 어쩌실 생각인가요? 다른 계획이 있으세요?”
다음 행보를 물어오는 로제의 말에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우선은 리베로 가야겠지.
빅터를 만나 나중에 해 주겠다던 얘기도 들어야 하고, 오래간만에 대련도 해 봐야 한다.
하지만.
이제 나에겐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루드겐 마이어.’
어머니를 죽게 만든 놈과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간 놈들을 찾아내는 것.
그것이야 말로 내가 해야 할 궁극의 목표가 될 것이다.
대륙 최강이야, 뭐…….
‘당연한 거지.’
말해 뭐 하겠나.
그런 목표는 그냥 기본으로 깔고 가는 거다.
“아무래도 저는 리베로 가야 할 것 같아요.”
“역시… 그렇게 되겠죠?”
“네. 스승님께 꼭 들어야 할 얘기도 있고, 반드시 찾아야 할 놈들도 있어서.”
그에 로제는 먼 곳을 바라보며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시든 응원할게요. 어쩌다 지나가게 되시면 꼭 들려 주시고요.”
“네, 그렇게 할게요.”
잔잔한 로제의 말에 나 역시 조용히 대답했다.
“가끔씩 제 생각도 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햇살 좋은 그런 날이나 기분 좋은 바람이 부는 그런 날에요.”
“…….”
“멀리 있어도 저는 느낄 수 있을 테니까요.”
그녀의 말에 동조하듯, 실크 같은 로제의 금발이 바람결에 흩날렸다.
가슴 언저리가 간지러웠다.
뭐라고 딱 집어 말하기 어려운 그런 느낌이랄까.
“그렇게 해 주실 거죠?”
고개를 돌린 로제는 나의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르르 흘러내리는 고운 머리칼.
가닥가닥 흩어지는 앞머리 사이로 예쁘게 휘어 올라간 속눈썹이 느리게 움직였다.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머릿속에 맴돌던 이 생각이 무엇인지…….
차마 꺼내지 못한 한마디는.
“네, 그렇게 할게요.”
아름답다는 말이었다.
아마 끝까지 내뱉진 못하겠지만.
“도와주셔서 고마워요.”
“저도 고마워요.”
이 순간 로제의 모습은 투박한 나의 가슴에 선명히 각인되었다.
* * *
누벨에 도착한 우리는 용병 조합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화염도마뱀 우파루파 토벌.
화염 결정 개당 1골드 매입.
6성급 이상 수주 가능하다는 이 의뢰는 23개의 화염 결정을 전달하며 화려한 막을 내렸다.
뭐… 자랑은 아니지만 난리였다.
그 외에도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많은 전리품이 매입 창구를 가득 채웠으니.
“허어억! 아니 이걸 어떻게?!”
가끔씩 이런 괴성이 울릴라치면 조합은 삽시간에 끓어올라 광란의 도가니에 빠져들었다.
“그대의 이름을 알려 주시오!”
“나의 이름은 웅장한 놈! 위대한 반투족의 전사에게 불가능은 없다!”
“와아아아아!”
“반투! 반투! 반투! 반투!”
웅장한 반투족 전사의 전설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 * *
두툼한 금화를 손에 쥔 우리는 발걸음도 가볍게 카슈타르로 향했다.
개선장군이 따로 있나.
목적을 달성한 로제는 제논 백작을 마주할 생각에 벌써부터 잔뜩 흥분한 상태였다.
심지어 초과 달성이다.
본래 그녀의 목적대로라면 하나의 에르텔을 구해 왕실에 헌납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들고 가는 건 두 개.
왕실에 헌납은 물론이요, 카슈타르에서도 직접 사용할 수 있다.
국익뿐만 아니라 영지 발전에도 크게 기여하게 되었으니, 그녀의 소원도 이제 마지막을 앞두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마지막은 눈앞으로 다가왔다.
“백작님께서 입장하십니다.”
접견실 천장타고 집사장의 목소리가 단단하게 울려 퍼졌다.
들을 때마다 느끼지만, 외모와 목소리는 정말 닮지 않았다.
하여간 그는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다했고.
“수고들 많았소!”
우리는 살짝 고무된 백작을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백작뿐만이 아니었다.
늦게 도착한 반크스도 예외는 없었으니.
“오… 그야말로 기물이로구나.”
선홍색 에르텔을 들고는 뿜어져 나오는 마력에 탄성을 내질렀다.
“구해 온 에르텔의 절반은 왕실에 헌납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남은 에르텔은…….”
모두의 이목이 로제에게 쏠리며 접견실은 침묵에 젖어들었다.
대답은 이어지지 않았다.
이 순간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로제는 한껏 뜸을 들이며 상황을 만끽하고 있었다.
‘음…….’
솔직히 왜 저러나 싶었다.
하나는 왕국에 보내고, 다른 하나는 카슈타르가 가지고 있으면 되는 문제니까.
“이반 님이 가져가실 겁니다.”
하지만 로제의 입에서 나온 얘기는 엉뚱한 사람의 이름이었다.
“저요?”
예정에 없던 로제의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의아함을 드러냈다.
“저는 필요 없는데…….”
“그러면 기념품이라고 생각하세요.”
하여 마지막 에르텔은 나의 손에 쥐어졌다.
“어차피 이반 님이 아니었으면 못 구했을 것들에요. 저는 원하는 바를 이루었으니 이건 이반 님이 가져가세요.”
드디어 끝났다.
상부상조하기로 한 로제와의 약속은 제논 백작과 반크스가 보는 앞에서 완벽하게 이루어졌다.
“훌륭하구나. 내 약속했듯, 너의 결혼은 없던 일로 돌리겠다. 폐하께 주청하여 너의 가문 승계를 확답받아 오마.”
“감사합니다, 아버님.”
모두가 바라던 결말이었다.
쓰레기 같은 데릴사위 대신 영민한 로제가 가문의 상속자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제논 백작은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한 듯 했다.
여전히 데릴사위에 대한 욕심이 남아 있었으니.
“그대가 원한다면 나는 두 사람의 결혼을 승낙할 생각이 있다네. 아니, 내 쪽에서 부탁하고 싶군.”
백작은 뻐끔거리는 나를 보며 특유의 안광을 빛냈다.
이걸 대답해야 하는 건가.
로제는 얼굴을 가리며 부끄러워하고 있고, 반크스는 껄껄거리며 박수를 치고 있었다.
끝이 아니었다.
“그대의 헌신과 노력에 대해 나와 카슈타르는 약속하지. 그대가 행하는 모든 일들을 지지하며 아낌없는 지원을 약속하겠네.”
제논 백작은 나의 편이 될 것임을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옳으신 생각이십니다. 로제의 외삼촌인 저는 가주님의 생각을 전폭적으로 지지합니다.”
지켜보던 반크스마저 작정한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좋다.
이렇게 인정받게 돼서 뿌듯하고 기분 좋다.
다 좋은데.
“말씀은 매우 감사합니다만 저는 귀족이 아닙니다.”
따라서 로제와 결혼을 한다는 건 법도에 맞지 않는 얘기였다.
억지로 결혼을 한다고 한들 내가 귀족이 되는 건 아니니까.
오히려 로제의 격이 떨어지는 이상한 결과만 생기게 될 뿐이다.
“본디 귀족의 결혼이란 가문의 직위도 맞아야 하는 법이지. 자네 말이 맞네.”
반크스는 착 가라앉은 말투로 나의 말에 대답했다.
하지만 이 사람도 믿을 수 없다.
빅터와 비슷하다고 해야 하나.
꿋꿋하게 자기 길을 가는 건 이미 예전에 알아봤다.
“그래서 자네는 로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가?”
“아… 그게, 그런 건 아닙니다만.”
“그럼 됐네.”
“네?”
“신분이 문제라면 맞추면 될 터. 에르텔 헌납에 대한 공을 인정하여 폐하께 작위 하사를 주청드리겠네.”
이번에도 반크스는 자신의 길을 가기 시작했다.
내 목숨 99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