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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숨 99개-75화 (75/203)

75화

“저 앞에 절벽 보이죠? 저기를 올라가야 마력의 샘 입구가 나옵니다.”

목적지에 다다른 나는 밝은 표정으로 상황을 설명했다.

이제 다 왔다.

높아 보이는 것 같지만,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붙잡을 것도 많고, 발 디딜 공간도 많다.

하지만 한 사람만은 복잡한 얼굴로 엄지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로제였다.

“아가씨, 괜찮을 거예요.”

“그럴 리가 없잖아. 지난번엔 내려가더니 이번엔 올라가야 한다고. 어떻게 괜찮겠어.”

“하지만 이반 님 등에 매달릴 수 있는 걸요?”

“아… 그건 매우 탐나는 조건이긴 한데.”

“원한다면 더욱 세게 끌어안을 수도 있죠.”

“오호…….”

“생각해 봐요. 촉촉하게 젖은 이반 님의 목덜미에 얼굴을 맞대는.”

“꺄아아아! 그건 너무 자극적이잖아!”

얼굴을 붉히던 로제는 어느새 나의 뒤에 서 있었다.

도로시는 술의 뒤에서 준비를 마쳤고, 부족장과 별이 선두에 나섰다.

“강가로 이동했다가 수직으로 올라가면 돼. 무슨 말인지 알겠지?”

“이해했다. 먼저 출발하겠다.”

등반 루트를 확인한 부족장은 덩굴을 잡아당겨 적갈색 암벽에 몸을 실었다.

그대로 쭉쭉 올라가더니, 알려 준 대로 강가를 향해 방향을 전환했다.

그 다음은 별.

또 그다음은 술과 도로시.

마지막 남은 나의 등엔 부끄럽다던 로제가 다소곳이 매달려 있었다.

“올라갈게요. 꽉 잡으세요.”

“원하신다면…….”

뭔가 이상한 대답이었지만, 그냥 출발했다.

기억 속의 빅터처럼 나는 거칠 것 없이 암벽을 타고 올랐다.

마치 평지를 기어가듯.

로제를 업은 나는 중력을 거스르며 자유롭게 올라갔다.

‘가벼워.’

예전의 모습이 겹쳐지며 뿌듯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물론 당시엔 구속구를 착용했지만,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결론은 엄청나게 성장했다는 것.

속도를 올린 나는 어느새 술을 지나 별의 뒤를 바짝 쫓고 있었다.

그리고 따라잡았다.

날듯이 가벼웠던 나의 몸은 별마저 지나치는 데 성공했고.

“허억!”

급기야 부족장마저 제치고 가장 먼저 동굴 입구에 도착했다.

* * *

동굴에 들어선 우리는 마력 등에 의지한 채 적갈색 통로를 걷고 있었다.

고요했다.

나름의 준비가 무색할 만큼 생명체의 흔적은 느껴지지 않았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순조롭다고 해야 하나.

갈림길마다 왼쪽으로 향하면 되니 문제가 될 만한 건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목적지에 도착한 우리는.

“진짜 아무것도 없네.”

텅 빈 공간을 바라보며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일단 샅샅이 살펴보자고.”

흩어진 우리는 단서가 될 만한 것들을 찾아 작은 공동을 누볐다.

빅터의 말대로 딱히 특이한 점은 없었고.

“여기 돌무더기 말인데… 이거 좀 어색한 것 같지 않은가?”

벽면을 바라보던 별이 한 가지 의문을 제시했다.

사실 억지스런 추측이긴 했지만, 별은 돌무더기로 다가가 설명을 시작했다.

“이 부분을 봐라. 다른 돌에 비해 몇몇 돌은 표면 상태가 지저분하다.”

“그게 왜?”

“땅에 묻혀 있던 돌이 위로 올라온 게 아니겠나. 왠지 한 번 헤집었다가 다시 쌓아 놓은 느낌이 든다.”

말을 듣고 나서 보니 확실히 그래 보였다.

깨끗하고 반질거리는 돌 사이로 흙 묻은 돌들이 듬성듬성 끼어 있었다.

“흠… 파내 보자.”

그 말을 신호로 돌무더기는 순식간에 해체되었다.

그리고 드러난 것은 작은 구멍.

아니 홈이라고 해야 하나?

뭔가 놓여 있다 드러낸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혹시 누가 들고 간 건가? 스승님이 그랬잖아. 마력이 약해져 있었다고.”

“그런 것 같다. 이 자국은 분명히 뭔가를 뽑아낸 자국이다.”

애초에 내 것이 아니었건만, 어쩐지 도둑맞은 기분이 들었다.

“아, 자꾸 꼬이네.”

나의 일은 술술 풀려 가는데 로제의 일은 계속 제자리였다.

어차피 결과가 불투명한 일이긴 했지만.

“다른 통로도 한번 가 보자.”

오는 길에 지나쳤던 반대편 길로 목표를 수정했다.

“그렇게까지 안 하셔도…….”

“여기까지 왔는데 할 수 있는 건 다 해 봐야죠.”

오히려 미안해하는 로제를 챙겨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그렇게 마주한 첫 번째 갈림길.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은 우리는 계속 걸어 또 다른 갈림길에 도착했다.

이제부터가 본격적인 탐험이 아니겠나.

가던 걸음을 멈춘 우리는 진행할 방향을 두고 의견을 나누기 시작했다.

“난 왼쪽! 나의 촉이 왼쪽을 가리키고 있다.”

“그럼 나는 오른쪽.”

“나도 오른쪽.”

일단 사람들의 의견은 2:2로 나눠졌다.

술과 도로시는 왼쪽을.

부족장과 별은 오른쪽을 선택했다.

그리고 나의 선택은.

“이쪽으로 가자.”

술이 결정한 왼쪽이었다.

“후후… 개꼬리의 명성을 알아보는군.”

그건 아니었다.

손바닥에 침을 뱉어 튀긴 것뿐이니까.

그렇게 다시 시작한 수색.

여전히 길은 평탄했고, 우리는 특이점 없이 다음 분기점을 마주하게 되었다.

“오른쪽이 뭔가 수상하군.”

설왕설래하던 우리는 이번엔 별의 탐지봉을 믿기로 했다.

명색이 풍수사의 딸이 아니던가.

우리는 탐지봉을 든 별을 앞세워 더욱 깊은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쪽이 확실해? 아무런 느낌도 없는데?”

“뭐, 뭐라는 건가. 반투족의 비기를 의심치 말라!”

라고 말하지만 별 역시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뭐, 네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 거겠지. 아니면 다시 돌아 나오면 되고. 부담 갖지 마, 별.”

“크흐흠… 사특한 소리하지 말고 뒤로 물러나라. 정신 집중에 방해된다.”

마력 등 불빛 탓일까.

별은 발개진 얼굴을 한 채 퉁명스레 앞으로 걸어 나갔다.

통로는 여전히 한산했다.

내가 마력에 둔한 탓도 있겠지만, 그런 걸 감안해도 이곳은 너무 조용했다.

다시 마주한 갈림길.

이번엔 세 갈래로 나눠진 통로가 우리를 맞이했다.

“…….”

탐지봉을 앞세우던 별은 돌연 멈춰 섰고, 중앙으로 다가가 눈을 빛냈다.

“여기로 가자.”

“거기가 수상해?”

“맞다. 여기만 아무런 반응이 없다.”

이번엔 반대의 상황.

아무 느낌 없다던 중앙 통로가 별의 최종 선택이었다.

“너무 깨끗해서 오히려 이상한 건가.”

“그렇다고 할 수 있지.”

결심을 굳힌 듯, 별은 좁은 통로를 향해 걸음을 내딛었다.

역발상이라는 거다.

셋 중에 하나가 남다르면 그것이 정답일 수 있으니까.

앞선 별을 따라 쭉 뻗은 통로를 걸어 들어갔다.

그런 별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이 벽… 뭔가 낯익은 것 같군.”

막다른 길에 도착한 우리는 익숙한 암석 앞에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로제 님, 제가 드린 결계석 좀 줘 보실래요?”

“네.”

이윽고 로제에게서 받아 든 결계석을 들고 암석면에 맞춰보았다.

선명하게 보이는 빗살 무늬.

결계석 특유의 무늬가 완벽하게 어우러지며 같은 종류라는 걸 드러내고 있었다.

“맞는 것 같지?”

“완벽하군.”

통로를 가로막은 암석의 종류는 이로서 확인됐다.

문제는 이 너머였다.

암석 너머로 길이 있다면 누군가 막은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돌아 나가야 할 테니까.

확인되지 않는 건너편 상황에 우리의 탐색은 정체되고 있었다.

모두가 생각에 잠긴 그때.

“잠깐만요.”

파이어 스틱을 손에 쥔 로제가 결계석 앞으로 다가왔다.

장치를 조작해 불을 피우곤 암석의 모서리를 향해 불꽃을 들이밀었다.

“후후… 그럼 그렇지.”

로제의 손에 들린 작은 불꽃은 사납게 팔랑거리며 틈새로 빨려 들어갔다.

“암석 뒤에 통로가 있습니다.”

돌아선 로제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결과를 말했다.

“정말요?”

“네, 확실해요.”

그렇다면 무얼 망설이겠나.

“이쪽으로 나오세요.”

손짓으로 로제를 부른 나는 해머를 돌려 뾰족한 피켈을 앞세웠다.

그대로 들어 올려 암석을 조준했고.

쩌어어어어억!

흉악한 소리와 함께 깊숙이 들이박혔다.

해머에 찍힌 결계석은 유리창처럼 금이 갔다.

바닥은 작은 돌가루로 가득했고, 나는 해머를 돌려 잡아 넓은 면을 앞으로 했다.

이제 남은 건 박살 날 때까지 두들기는 것뿐.

쾅! 쾅! 쾅! 쾅! 쾅!

통로를 틀어막던 거대한 결계석은 산산이 부서져 형체를 잃어버렸다.

“흠… 볼 때마다 매번 놀랍군. 그대는 점점 완벽한 전사의 모습이 돼 가고 있다.”

감탄을 전한 별은 무너진 잔해를 지나쳐 숨겨진 영역에 발을 내딛었다.

* * *

브라함 제국과 사라센 제국.

18년간 이어진 양국의 대치는 공식적으론 전시 상태였다.

하지만 실질적인 전쟁이 벌어진 적은 없었다.

보잘것없는 신경전이나 간간이 오가고 있을 뿐, 현재 양국의 관계는 휴전도 종전도 아닌 기이한 평화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번 주에만 국지전이 4회 있었습니다. 결과요? 물론 네 번 다 참패였습니다. 전투 보고서를 보니 기가 차더군요.”

하나 유리잔 같은 평화에 조금씩 금이 가고 있었다.

마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듯.

“그 외에 국경을 침범한 강탈 사건이 8회였고 공격당한 초소만 여섯 군데입니다. 이쯤 되면 전면전으로 가자는 거 아닙니까?”

사라센은 그간의 행보완 다르게 강력한 도발을 동시다발적으로 시도했다.

“흐음…….”

야전사령관인 스벤 자우어는 얼굴을 찌푸리며 남자의 말을 경청했다.

열변을 토하는 남자의 이름은 루드겐 마이어.

한때 빅터의 수하였으나, 가택 연금이 된 상관을 버리고 일신의 출세를 선택한 남자였다.

하여 몸담은 곳이 이곳 카렌 영지였다.

출셋길 막힌 빅터보단 스벤 자우어의 앞날이 훨씬 밝아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선택은 이상하게 꼬여 갔다.

가택 연금이 풀린 빅터는 다시 군벌에 합류했고, 승승장구를 거듭하더니 8성에 이르렀다.

어디 그뿐이던가.

검성 카라얀 무스타파와 전쟁을 치르더니 그의 목을 댕강 잘라 냈다.

아… 이건 정정해야겠다.

카라얀을 쓰러뜨린 건 빅터였지만, 목을 자른 건 루드겐이었다.

그 엄청난 업적에 어떻게든 발을 걸치고 싶었던바.

선 채로 숨이 끊어진 카라얀의 목을 자신의 손으로 잘라 냈다.

사실을 알게 된 빅터의 진노에 한동안 숨어 다녔다는 건 새로울 것도 없는 사실.

질긴 목숨을 이어 가며 출세에 출세를 거듭해 왔다.

한데 지금!

브라함의 핵심 방어선인 카렌 영지가 야금야금 물어뜯기고 있었다.

황제에게 소식이 들어가는 것도 시간문제.

이대로 방치했다간 정말 큰일이 날 것 같은 심상치 않은 전조였다.

“이 보고서를 그대로 믿으란 말인가? 자네라면 곧이곧대로 믿겠나?”

야전사령관 스벤은 짜증스런 얼굴로 보고서를 흔들어 댔다.

그도 그럴 것이.

고작 열 명도 안 되는 적에게 아군 삼십여 명이 몰살을 당했다.

그것도 네 번의 국지전 모두가.

유일하게 살아남은 병사가 전하길, 적의 병력은 모두가 6성급이라고 했다.

심지어 공격당한 초소도 그랬고, 약탈에 휘말린 마을도 그랬다.

사라센이 뭔 지랄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오러 사용자들이 늘어나 전선의 균형이 심각하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침입한 적 모두가 6성급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 정도라면 최소 천인장급은 돼야 마주할 수 있는 실력자들이었다.

그런 놈들이 남아도는 것도 아니고, 여기저기서 활개 친다는 것이 도무지 납득되지 않았다.

한데 어쩌겠나.

“보고서는 모두 사실입니다.”

루드겐이 하는 말은 공식적으로 확인된 정확한 정보였다.

저 말이 사실이라면 백약이 무효한 상황.

중상급 기사 병력으로 6성 전후의 병력을 어찌 감당하겠나.

“제기랄.”

스벤의 입에서 짙은 푸념이 흘러나왔다.

다된 밥에 코를 빠뜨려도 유분수지.

하필 이런 중요한 시기에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싶었다.

― 아시다시피 저는 코어를 다쳐서 예전처럼 활동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스벤 공을 중용하셔서 혹시 모를 전란에 대비하시지요.

황제의 청을 거절한 빅터는 이렇게 말하고 돌아갔다.

여전히 황제는 움직이지 않고 있지만, 어쨌건 지금이 최적기다.

비어 있는 총사령관을 차지할 수 있는 최적의 시기란 얘기였다.

“소문 돌지 않게 어떻게든 막아. 이런 거 잘하잖아. 주둥이 닫아 버릴 놈들은 좀 알아서 닫아 주고, 조용히 상황 파악해서 대책을 마련하라고.”

스벤은 손을 휘적거리며 은폐를 지시했다.

내 목숨 99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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