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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숨 99개-74화 (74/203)

74화

“폐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신탁의 기사들을 처리하신다니요?”

빅터는 흥분한 표정으로 황제를 향해 소리쳤다.

감히 있을 수 없는 발칙한 행동이었으나, 지금 빅터에게 중요한 건 황제를 향한 예법 따위가 아니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네. 그대도 알고 있지 않은가. 그들은 존재해서는 안 되는 자들이네.”

“이제 와서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저들을 부르신 건 폐하십니다!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선왕을 설득하신 건 바로 폐하가 아닙니까?!”

한데 이제 와서 모두 지워 버리겠다니.

이게 마족의 손에서 인류를 구한 영웅들에게 할 짓인가?

추앙받아 마땅할 영웅들에게 이래도 되냔 말이다!

“그 모두가 나라를 위함이었네. 그러니 서둘러서 계획을 세우도록 하게.”

“받들 수 없습니다!”

지엄한 황제의 명이었건만 빅터는 눈을 부릅뜨며 항명했다.

차라리 자결을 하라했으면 시원하게 칼을 뽑았을 것을…….

눈앞에 있는 이 새파란 황제는 당대의 영웅을 역모에 이용하고, 그것도 모자라 사라센 정벌을 위한 전쟁의 도구로 사용했다.

그런데 뭐?

존재해서는 안 되는 자들이라고?

“폐하께서 자초하신 일입니다. 그러니 스스로 책임지십시오.”

빅터는 죽음을 각오하며 황제에게 간언했다.

“무어라? 그게 지금 짐에게 할 소린가. 내 그대를 귀히 여기는 것은 맞지만 더 이상은 용서치 않을 것이다.”

황제와 빅터 사이에 커다란 벽이 놓이는 순간이었다.

서자로 태어나 왕위를 쟁취하고 대국 사라센과 싸워 황제의 자리에 오른 남자.

하나 이 위대한 서사는 패악으로 물든 잔혹의 역사였다.

신이 허락한 맹약을 어겼고.

야망을 위해 혈육을 살해했으며.

끝내는 타인의 희생으로 자신의 치부를 덮으려는 더러운 인간의 욕망이었다.

“명을 받들라.”

“받들 수 없습니다.”

“받들라 했다.”

…하지만 빅터는 답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신하 이전에 한 사람으로서.

목숨을 나눈 전우로서.

빅터는…….

인의를 저버리는 황제의 명을 더 이상 받아드릴 수 없었다.

“소신 빅터, 폐하께 충성하고 브라함을 지키는 데 평생을 바칠 것을 맹세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처음으로 폐하의 명을 거절하겠습니다.”

* * *

빅터를 바라보던 베르는 시선을 돌려 나와 눈을 마주했다.

그러고는.

자신이 전할 수 있는 진실들을 차근차근 풀어 나갔다.

“황제가 왜 배신을 계획했는지 저는 모릅니다. 하지만 스승님 스스로 관직을 버리셨다는 건 저희 모두가 알고 있죠. 그에 황제는 노여워했고, 결국 가택 연금을 당하시게 됐습니다.”

베르의 입을 통해 나온 얘기들은 빅터의 개입을 부인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루드겐 마이어 단독으로 저지른 일이라는 건가요?”

“네. 후배님의 어머니가 쫓기고 계셨을 당시… 스승님은 아케른 성에서 한 발짝도 나올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단호하게 이어진 베르의 얘기에 나는 짙은 한숨을 내뱉었다.

안도의 한숨이랄까.

내가 그토록 원했던 대답은 이런 내용이 담긴 얘기였다.

“후배님이 말한 루드겐 마이어는 스승님의 오른팔이 아닙니다. 상관의 자리를 꿰찬 옛 부하죠. 지금은 스승님의 정적이 되어 여러모로 얽히고 있는 상황입니다.”

쌓여 가는 의심 속에서 가장 힘들었던 건 어찌될지 모를 빅터와의 관계였다.

그와 등을 지게 된다니.

마음 편히 잠들었던 밤은 단 하루도 존재하지 않았었다.

“진과 그의 아내 소식이 들렸을 땐… 무려 한 달이 넘도록 식음을 전패하며 깊이 슬퍼하셨다고 합니다. 아케른의 가신들에겐 너무 유명한 얘기라 뭐라고 설명해 드리기도 그렇군요.”

더 이상 무슨 얘기가 필요할까.

이 설명이 거짓이라 해도 나는 이 얘기를 끝까지 믿고 싶었다.

“후배님, 사람들이 이런 상황을 뭐라고 부르는지 아십니까?”

“…….”

“운명이라고 합니다. 또는 기적이라고 말하기도 하죠.”

베르는 어깨를 으쓱이며 빅터를 가리켰다.

빅터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고, 주름진 눈가를 움직여 나의 시선을 마주했다.

허물어지는 28년의 시간.

“네, 엄마를 닮아서 다행이구나.”

빅터는 잔잔한 음성에 세월을 담아 잊혀진 나의 시간을 보듬었다.

* * *

운명이란 무엇일까.

나에게 물어본다면 이렇게 답하고 싶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일.

또는 그렇게 돼 버리는 일이라고.

풍차로 향하던 나의 걸음이 조금만 더 늦었다면.

그래서 싸우지 않고 도망갔다면.

세비앙 대장간에 있던 나는 그저 힘센 대장장이로 평범히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내가 가진 특별함도 모른 채.

꺅꺅거리는 꼬맹이들의 영웅으로…….

하지만 운명은 그 시간에 나를 풍차로 보냈고, 거기서 한 남자를 만나게 했다.

― 더 나은 적성자를 발견하여 능력이 이전됩니다.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거다.

화전민 마을에서 로제를 만난 것도, 빅터가 황실로 다시 떠나게 된 것도.

이 모든 일련의 사건들은 지금 이 순간을 위한 과정일 뿐이었다.

“납득할 수 없는 너의 강함을 볼 때마다 늘 진을 떠올렸다. 너무 똑같아서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지. 한데 그의 아들이라니…….”

빅터는 고개를 저으며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레이시가 제대로 보았구나. 진에게 있던 특별함이 너에게 이어진 것이 분명하다.”

계속되는 빅터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을 전했다.

그도 그럴 것이.

화상을 치료를 해 주던 그 남자는 다른 기운을 운운하며 나의 부모를 물어봤었다.

비정상적인 나의 신체 능력은 그 기운으로 시작된 것이 분명할 터.

그것을 알아본 그의 능력도 놀라웠지만, 내가 찾던 그레이시가 그 치료사였다는 게 더욱 놀라웠다.

게다가 빅터 역시 그를 찾고 있었다니.

운명이라는 말 외에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는 상황이었다.

“저의 시아버님… 아니, 이반 님의 아버님께선 얼마나 강하셨나요?”

“글쎄요. 저 같은 촌부는 일합 거리도 못될 겁니다.”

궁금해하는 로제에게 빅터는 잔잔히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너의 아비와 영웅들이 특별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여기서 할 만한 얘기가 아니니 바깥에 나가거든 마저 얘기해 주마.”

나의 어깨를 두드린 빅터는 재단 한편에 위치한 벽으로 다가갔다.

적당히 울퉁불퉁한 평범한 벽.

특징 없는 벽 앞에 선 빅터는 검을 뽑아든 채 말없이 서 있었다.

“뭘 하시려는 거지?”

지켜보던 베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흠…….’

나 역시 알 수 없었다.

이렇게 보기만 해서는 빅터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었다.

하나 궁금한 것도 잠시.

스걱―

빅터의 검이 움직이며 마주 선 벽면에 깊은 흔적이 새겨졌다.

[그의 아이와 함께 있다. 리베에서 기다리마, 빅키.]

검 끝이 만든 흔적은 글자였다.

빅터의 성격이 묻어나는 담백한 내용이랄까.

“빅키가 뭐예요?”

“글쎄요. 저도 처음 보는 단어라서.”

빅키라는 글자를 두고 나와 베르는 문답을 주고받았다.

슬쩍 고개를 돌려 에스카를 보았으나 그녀 또한 고개를 저을 뿐.

소득 없던 대화가 지나가고, 빅터는 벽을 등지며 낮게 말했다.

“녀석이 부르던 나의 이름이다.”

빅키가 자신의 애칭이었다고.

“아…….”

“엥…….”

그에 베르와 나는 각자의 방식으로 같은 의미를 표현했다.

빅키라니.

내가 알고 있던 ‘키’에 대한 환상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이름 뒤에 ‘키’가 붙으면 뭔가 귀염귀염한 느낌이 아니었나?

저 무뚝뚝한 영감에게 ‘빅키’라는 애칭은 물과 기름처럼 겉돌고 있었다.

저런 애칭을 만든 그레이시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사적인 자리에서만 허락한 호칭이다. 녀석 말고는 아는 사람이 없으니 이걸 보면 연락이 오겠지.”

그렇게 설명을 마친 빅터는 걸음을 돌려 성력의 재단을 나서기 시작했다.

“그냥 가는 겁니까?”

“그래. 언제 올 줄 알고 기다린단 말이냐. 흔적을 남겼으니 이제 돌아가서 기다리면 된다.”

그렇게 우리는 빅터의 뒤를 따라 재단 출구로 향했다.

이동은 길지 않았다.

좁은 통로는 금세 끝이 났고, 네 갈래로 나눠진 공동은 우리에게 새로운 선택을 강요했다.

“왼쪽부터 카잔, 브라함, 대수림 중심, 사라센 방향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리베로 갈 예정인데 너는 어쩔 샘이냐.”

갑작스런 빅터의 말에 나는 대답 대신 질문을 꺼냈다.

대수림을 찾은 본래의 목적.

“저희는 에르텔을 찾는 중이라 아직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네요. 혹시 알고 계신 게 있나요?”

생김새조차 알 수 없는 에르텔의 행방이 그것이었다.

“에르텔? 그건 존재 자체가 소문뿐인데 네가 그걸 어찌 찾는 게냐.”

이어진 빅터의 대답은 기대를 벗어난 얘기였다.

정리하지면 없다는 말이었는데.

소문이라며 시작된 그의 얘기는 시간을 거슬러 30년 전으로 올라갔다.

“최고의 마법사들이 시작의 마을에 모였던 건 맞다. 하지만 에르텔이라는 건 없었지.”

빅터의 반응은 부정이었다.

인마대전이 끝난 이후에 떠돈 얘기라며 존재 자체에 의문을 품었다.

하지만 잠시 후.

“그러고 보니 한 가지 집히는 부분이 있긴 하구나.”

무언가 떠오른 듯, 빅터는 미간을 찌푸리며 기억을 더듬었다.

“고등급 마법을 시전할 때면 늘 어딘가로 이동하곤 했었다.”

“거기가 어디였나요?”

느낌이 온 나는 재촉하듯 반문했다.

마법의 등급이 높다는 건 요구하는 마력량이 높다는 것.

“너도 가 봐서 알게다. 절벽 위에 있던 동굴. 그곳을 우린 마력의 샘이라고 불렀었다.”

빅터는 일전에 머물렀던 강가의 절벽을 떠올렸다.

마력의 샘이라니.

이름부터 심상치 않은 그곳은 진한 추억이 남아 있는 장소였다.

암벽 타기로 근력을 키우던 곳이자.

‘카이 형제.’

나의 목이 날아갔던 장소이기도 했다.

그러니 어찌 잊을 수 있겠나.

“그 동굴이 수상하다는 거죠?”

“에르텔은 모르겠다만 유달리 마력이 강하던 장소였다.”

그 정도 단서라면 가 봐야 할 이유는 충분할 터.

“저희는 그곳에 들렸다가 리베로 갈게요.”

나는 로제와 반투족을 보며 가까이 오라 손짓했다.

“한데… 너와 함께 갔을 때는 마력이 크게 줄어있었다. 이유는 모르겠다만… 예전과 달라져서 의아했던 기억이 있구나.”

역시 쉬운 길은 없는 건가.

이 또한 장담할 수 없는 불확실한 얘기였다.

“흠… 일단 가 봐야 알겠군요.”

이어진 나의 대답에 빅터는 턱 끝을 매만지며 말을 보탰다.

“동굴에 들어가게 되면 갈림길을 만나게 될 게다. 그때마다 왼쪽으로 가면 되니 길 찾기는 어렵지 않을 게다.”

그 외에 자잘한 설명을 들은 나는 일행들과 함께 출발할 준비를 마쳤다.

“스승님, 저는 마력의 샘에 들렸다가 리베로 가겠습니다. 나중에 뵙도록 하죠.”

“오냐, 돌아오거들랑 시원하게 칼부림이나 해 보자꾸나.”

“그거 좋죠. 예전의 제가 아니니 긴장하셔야 할 겁니다.”

드러난 과거의 인연 때문일까.

괴팍한 빅터의 말투는 구수하고 정겹게만 느껴졌다.

“다녀오겠습니다.”

끄덕이는 빅터의 모습을 뒤로 하고, 나는 브라함으로 향하는 통로에 발걸음을 내딛었다.

* * *

“야, 정신 안 차려? 확 처맞아야 똑바로 하지?”

안 그래도 추악한 노이의 얼굴은 험한 인상과 함께 더욱 추하게 일그러졌다.

이 치솟는 화를 어디에 풀어야 할까.

아버지의 명령이라 어쩔 수 없이 따르고 있지만, 문제는 사라센에서 온 저 카리프라는 녀석이었다.

“부탁한 내용과 다르지 않나. 나는 분명히 10갤런을 요청했는데 이건 8갤런이잖나.”

“아… 이게 왜 이렇게 된 거지……?”

계속되는 카리프의 지적에 노이는 얼굴을 붉히며 혀를 찼다.

아버지만 아니었어도.

…라며 어금니를 깨물어 보지만, 그래봤자 허세일 뿐.

비벼 볼 상대가 아니란 건 진즉부터 알고 있었다.

“후… 야, 이 새끼들아! 10이랑 8도 구분 못해? 어! 눈깔은 장식이냐? 폼이야?!”

덕분에 엄한 일꾼과 호위대에게 불똥이 튀고 있었으니.

‘개새끼 지가 여덟 개 발주시켰으면서 왜 우리한테 지랄이야.’

변명조차 못 하는 이들은 똥 씹은 얼굴로 고개를 조아렸다.

억울해도 어쩌겠나.

여기서 한마디 잘 못 꺼내면 시범 케이스로 작살나는 거다.

한두 번 당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적당히 알랑대며 이 순간이 지나가기만 참고 기다릴 뿐이었다.

“당장 10개 채워라. 그리고 이 일대는 내 식솔들이 관리할 테니, 너의 식구들은 목책 주위 감시에 집중해라.”

한마디로 말해 멀리 떨어져서 경비병 역할이나 잘하란 얘기였다.

치욕스럽고 분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노이의 목숨은 카리프의 손에 달렸으니까.

― 카슈타르의 데릴사위가 되는 것보다 몇 배는 중요한 일이다. 말 안 들으면 죽여도 좋다고 했으니 알아서 처신 잘해라.

아버지인 마론 후작은 카리프 앞에서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넘겨 버렸다.

그냥 하는 말이려니 했는데 상황은 심각했다.

노이는 목책 부근의 농가에 새집을 꾸며야 했고, 카리프의 개가 되어 심부름과 경비 역할을 해야 했다.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없었다.

게다가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르겠으나 카리프는 하루가 다르게 강해지고 있었다.

신기할 만큼…….

알 수 없는 특유의 분위기는 시간이 갈수록 더욱 깊고 어두워졌다.

이제 와서는 차마 눈을 마주하기가 버거울 정도.

빅터의 제자와 싸운 이후로 그 농도는 눈에 띠게 짙어져 갔다.

“아… 말 나온 김에 하나 더 하도록 하지.”

“또 뭐가 잘못된 게 있나요?”

“아니, 잘못될까 봐 미리 말하는 거다.”

카리프는 서늘한 안광을 뿜어내며 노이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노려보고는.

“마인 작업. 바깥에서 완성시키지 말고 이곳으로 데려와라.”

떨떠름한 노이를 향해 새로운 임무를 전달했다.

내 목숨 99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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