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와… 정말 끝도 없이 몰려오네요. 이걸 언제까지 상대해야 하죠?”
“뒤에 있는 나무에서 꽃이 활짝 필 때까지다.”
“하…….”
“후…….”
너무도 단순한 빅터의 대답에 에스카와 베르는 장탄식을 내뱉었다.
이곳에 도착한 지도 벌써 이틀.
저 뜬금없는 목표에 따라 주구장창 마수들과 싸움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심지어 낮밤도 없었다.
물 한 모금 마실 짬도 큰맘 먹고 준비해야 겨우 만들 수 있었다.
그렇게 버티기 시작한 게 이틀째다.
한데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주위에 가득한 건 지겹도록 몰려드는 마수들뿐.
꽃을 피워야 한다는 나무는 여전히 반응이 없었고, 심지어 방법 자체가 너무 막연했다.
― 마수를 잡다 보면 꽃이 필 게다.
저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시작할 때는 몰랐다.
기약 없다는 말이 얼마나 끔찍한 건지도.
“저 꽃이 피긴 피는 건가요?”
“핀다. 그레이시가 왔으면 간단했겠지만, 그 외 다른 사람이라면 이 방법뿐이다.”
그 방법이라는 것이 마수를 때려잡는 것이었다.
말 그대로 잡다 보면 꽃을 피운다는 건데.
“이렇게 마기를 줄여 나가다 보면 짓눌린 성력이 되살아나지. 그렇게 성력이 강해지면 나무가 꽃을 피우게 되는 것이다.”
목표와 방법은 간단한데, 한계가 명확하지 않다는 게 문제였다.
도대체 얼마나 해치워야 성력이 살아난다는 걸까.
목표치를 알 수 없으니 막연히 살육만 반복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게 다 어디서 나오는 거죠? 이렇게 많은 개체가 몰려 있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평소 말이 없던 에스카마저 넌더리를 내며 푸념을 내뱉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지옥.
이곳은 인세(人世)에 펼쳐진 마경의 한가운데였다.
“혹시 여기가 봉인된 마계의 입구인가요?”
“그건 아니다.”
“그런데 왜 저렇게 마수가 많은 거죠? 게다가 이 마기는 너무 짙어요.”
“인력(引力) 때문이지.”
에스카의 질문에 답하며 빅터는 수평으로 검을 그었다.
짙푸른 검기가 칼날처럼 쏘아졌고, 간격에 들어온 마수의 몸뚱이가 감자 썰리듯 잘려 나갔다.
인력이라…….
빅터의 말을 곱씹으며 에스카는 미간을 찌푸렸다.
대관절 무엇이 있기에 이토록 많은 마수를 잡아당기는 것일까.
심란한 와중에도 에스카의 곡도는 잔상을 남기며 마수의 생명을 거둬들였다.
“빛이 어둠을 만들고, 어둠이 빛을 부르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곳에 흐르는 성력이 마기를 끌어들여 마경이 만들어지는 것이지.”
뭔가 심오해 보이지만 요점은 간단했다.
상극인 성질이 서로를 잠식하기 위해 몰려든다는 내용이었다.
“평소에는 마기가 우세해 성력의 존재가 희미하지. 하지만 외부의 힘이 작용해 균형을 깨뜨리면 성력의 힘이 서서히 드러난다.”
빅터의 말은 사실이었다.
워낙 느리게 변해서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
시커멓게 죽어 있던 나무는 조금씩 색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바꿔 말하자면, 꽃을 피울 때가 다가오고 있다는 얘기다.
“하루 정도만 더 버티면 얼추 정리되겠구나. 시간은 금방 지나갈 테니 정신 바짝 차리거라.”
“하루 더요?!”
후위에 있던 베르는 썩어 가는 표정으로 전장을 바라봤다.
이 황당한 꼴을 하루나 더 봐야 한다니.
전위에 서 있는 두 사람과 달리 베르는 다른 측면에서 괴로웠다.
정신계 마법사인 그로서는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공격형 마법이 없었으니까.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의미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그래서 현 상황이 더욱 부담스러웠다.
왠지 쓸모없고 얹혀 가는 느낌이 들어, 매 순간이 가시방석 같았다.
할 수 있는 거라곤 지쳐 가는 정신에 기운을 불어넣어 주는 것뿐.
“멘탈 체인지!”
베르는 두 사람에게 쌓여 가는 부정적인 감정을 흡수해 긍정적인 기운으로 되돌려 주었다.
본인이야 하찮은 일이라며 미안해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전투를 수행하는 기본 중에 기본… 올곧은 정신력은 육체의 한계를 향상시킨다.
특히나 이러한 장기전에선 더욱 그러할 터.
계속되는 공방은 인간의 정신을 좀먹는다.
빅터와 에스카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들의 무의식에도 어두운 마음이 잔재했고, 조금씩 크기를 키우며 의식을 침범했다.
지긋지긋하다.
끔찍하고 징그럽다.
끝이 보이지 않아 답답하다.
이 방법이 맞는 것일까?
시시각각 조여 오는 압박 속에서, 이들의 의식은 무거운 어둠에 잠식되어 가고 있었다.
“자자∼ 기운 내자고요! 언젠간 끝나겠죠!”
이 지난한 싸움을 이틀이나 이어 나갈 수 있던 것은, 침식되는 두 사람의 정신을 베르의 정신과 치환시켰기 때문이다.
문제는 자신의 정신을 살필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
쌓여 가는 부정적인 기운에 베르의 피로감은 더욱 높아지고 있었다.
“무리하지 마, 베르.”
곁눈질로 살피던 에스카가 걱정스레 말을 건넸다.
“괜찮아. 많이 쌓이기 전에 조금씩 흡수하는 게 덜 부담돼. 모았다가 처리하면 그게 더 힘들다고.”
“스승님도 계시잖아. 휴식이 필요하면 그냥 쉬어. 언제 끝날지 모르니까.”
손사래 치는 베르에게 에스카는 잔소리하듯 대답했다.
하루만 더하면 될 것 같다지만, 그 또한 예상일 뿐.
결과가 확정된 전장이라는 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한 시간 전과 후가 극명하게 달라지는 것이 전장… 지금 주고받는 잔소리가 계속될지는 에스카 스스로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슈아악―
날렵한 곡도를 휘둘러 측면을 파고드는 놈들의 머리를 잘라 냈다.
다음은 정면.
그다음은 다시 측면.
이토록 촘촘한 마수의 포위망을 그레이시는 어떻게 뚫고 지나갔을까.
더욱 이해가 안 가는 건 그 남자의 클래스가 치료사라는 것이었다.
‘말이 안 되잖아.’
공격 마법은커녕 전장의 후방에 들어앉아 하루 종일 환자만 살피는 게 치료사의 역할이었다.
그게 당연한 거였다.
일반 마법과 치유 마법은 사용 방법과 시전 속도가 아예 다르기 때문이다.
느리고 불편하다.
이반을 치료한 그레이시가 특이했던 것이지, 보통 치료사들의 치료 속도는 느리다고 보는 게 맞았다.
그런 그들이 전장을 누빈다…….
에스카의 상식으론 이해되지 않았다.
심지어 이곳의 몬스터는 마수들이다.
일반 몬스터와 달리 마기를 품었다는 얘기다.
난이도야 말할 것도 없이 높았고, 7성을 목전에 둔 에스카조차 슬슬 버거워지려던 참이었다.
한데 그 남자는 무슨 재주를 부려 여기를 통과했을까.
지속되는 의문에 그냥 빅터에게 물어보았다.
하지만 돌아온 빅터의 대답은 황당하고 괴상한 농담 같은 말이었다.
“그레이시는 그 어떤 몬스터에게도 공격받지 않는다.”
“그럼 그 사람이 와서 목적을 이룰 때까지 기다렸어도 되지 않았을까요? 굳이 이렇게 싸우면서 기다릴 이유가…….”
맞잖은가.
멀리서 지켜보다가 따라붙어도 될 일 아닌가 싶었다.
공격을 안 당한다는데 이런 수고가 무슨 필요가 있는 걸까.
“지금 하는 건 고작 출입구를 여는 것뿐이다. 녀석이 안으로 먼저 들어가면 어디로 돌아 나갈지 바깥에서는 알 수가 없다.
그런 에스카에게 빅터는 절망적인 얘기로 대답했다.
고생의 대가가 고작 출입구라니.
이 관문을 헤치고 나가면 또 다른 뭔가가 있을 거라는 얘기였다.
각오해야 할 거라던 빅터의 말이 허언은 아니었나 보다.
제기랄…….
갑자기 짜증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미쳤다.
그냥 이곳에 있는 모든 존재가 미쳐 돌아가고 있었다.
굳이 이곳으로 사람을 끌고 온 스승이란 사람도.
내 뒤에 숨어 어슬렁거리는 저 녀석도.
그리고 언제 나타날지 모를 빌어먹을 그레이시라는 놈까지.
모두가 마음에 안 든다.
울컥 치미는 분노에 눈앞이 흐릿해지고 감정의 골은 더욱 깊어져 갔다.
이게 아닌데, 하면서도 제어할 수 없었다.
스스로도 이해 못 할 이 폭력적인 감각은 희생양을 찾아 사악한 칼날을 휘두르고 있었다.
이제 곧 폭발해 버릴 터.
주체하지 못할 충동이 에스카의 의식을 빠르게 잠식해 들어갔다.
다 때려치워!
기회를 포착한 무거운 어둠은 폭풍처럼 에스카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툭―
점멸하듯 멀어져 가던 의식의 마지막 순간.
“멘탈 체인지.”
귓가로 전해지는 부드러운 음성이 에스카의 머리를 훑고 지나갔다.
반전이었다.
어둡게 물들어 가던 세상의 빛이 잦아들며, 붉게 변한 에스카의 눈이 본래의 색을 되찾았다.
“베르!”
힘없이 쓰러지는 베르를 안고 에스카는 절규하듯 소리쳤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이틀간 굳건했던 이들의 방어선은 이 순간을 기점으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물러서라.”
앞으로 나선 빅터의 검이 크게 호를 그었다.
진짜 빅터의 모습은 이제부터.
페이스를 조절하던 빅터의 검은 절제라는 항목을 지워 버렸다.
콰가가가가각―
너른 대지가 폭발하듯 뒤집혔다.
검기에 휘말린 육편들이 사방으로 비산했고, 봉인을 푼 빅터의 검은 또다시 대지를 집어삼켰다.
콰르르르르르―
절경이었다.
폭죽처럼 난무하는 피와 살의 축제가 곧게 뻗은 빅터의 검을 타고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죄송합니다.”
방어선으로 돌아온 에스카가 굳은 얼굴로 빅터에게 말했다.
“왼쪽이다.”
빅터의 답은 그뿐이었다.
전 방위에 걸친 빅터의 공격이 재앙처럼 전장을 뒤덮기 시작했다.
그에 질세라.
한축을 담당한 에스카의 곡도 역시 걸리는 모든 것을 도륙하고 있었다.
하나 놈들의 공세는 줄어들지 않았다.
열을 베면 백이 오고.
백을 베면 천이 왔다.
인간이 만들 수 있는 절대적인 결계.
빅터는 믿을 수 없는 무위를 뿜어내며 전장을 지배했다.
하나 몸이 하나인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상대적으로 약한 에스카의 자리가 서서히 밀리기 시작했다.
그녀로서는 최선을 다했으나, 위태로운 순간들은 기어코 찾아왔다.
역부족이라는 말이 떠오르던 상황.
“잘 버텨 주었다. 이제 저 녀석에게 떠넘기자꾸나.”
빅터는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먼 곳을 바라보았다.
에스카의 시선이 스승의 눈을 좇아 사선을 그었다.
두 사람의 눈길이 한곳에 머물렀고.
“훗…….”
대각선으로 다가오는 맹렬한 기세에 에스카의 얼굴엔 미소가 번졌다.
커다란 길을 만들며 다가오는 남자의 이름은 이반.
오래간만에 마주한 그의 해머는 기억이 무색할 만큼 더욱 강력하게 진화해 있었다.
그야말로 궁극의 폭력.
빅터의 검이 절기였다면, 이반의 해머는 포악함 그 자체라고 말 할 수 있었다.
한줌의 오러도 없이, 그는 가로막는 모든 것을 터트리며 폭풍처럼 다가오고 있었다.
멀기만 했던 거리가 반으로 줄어들었고, 이제는 더욱 줄어들어 표정마저 생생하게 드러났다.
‘아… 내가 잘못 본 건가?’
에스카는 이반의 얼굴을 보며 혼란에 빠져들었다.
‘웃고 있었어.’
그것도 아주 즐거운 표정으로.
이반은 주위의 모든 걸 때려 부수고, 터트리고, 허공으로 날려 버렸다.
그렇게 다가온 거리가 이제 50걸음 남짓.
이제는 그가 내지르는 소리마저 가까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크하하하하?
피 칠갑을 한 이반의 입에선 광소에 가까운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죽어!
꺼져!
뒈져!
원초적인 감정으로 똘똘 뭉친 이반의 해머는 춤을 추듯 전장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제 남은 거리는 20보.
또다시 줄어들어 10보.
더 이상 거리를 재는 게 의미 없어져 버린 그 순간.
부아아악―
머리 위로 올라간 잿빛 해머가 수직으로 내리그어졌다.
콰지직―
뼛조각 으스러지는 소리가 생생하게 지나갔고.
“다녀왔습니다.”
이반은 눈부시게 웃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내 목숨 99개